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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동초등학교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유랑아제
안동 전설꺼리 8편<세가지>
용의 머리모양으로 파인 우물이 맑은 물을 담고 있다. 옛 날 이 마을에 한 마음착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일가 친척이 없이 외롭게 사는 가난한 살림이 었지만 홀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며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청년은 스물이 넘는 가을 추수기에 겨울 쌀섬을 모아 장가를 들었다. 결혼후에도 매양 가난을 면치 못했지만 끝내 꿈을 잃지 않고 늘 근면하고 정직하게 살았다.
드디어 옥동자를 얻게 되었는데 아이를 낳 던 날 밤 산모의 꿈에 갓난아기를 안고 얼르고 있는데 인자하게 생긴 하얀 수염의 산신령이 나타 나더니 "그놈 잘 생겼구나, 허지만 명이 짧겠는걸....,
내가 다스리는 이 산밑에 수천년 묵은 뱀이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뱀은 어린 남자아기 하나만 먹으면 승천할수 있으니 네 아아 는 어차피 명이 짧으니 제물로 바치면 너희는 큰 부자가 될 것이고 석달후면 다시 옥동자를 얻으 리라"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부인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남편과 의논하였다. 모두 처음에는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차츰 산신령이 우리에게 복을 주려고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 자고 결론이 났다. 어느날 밤 아직 첫돌도 안지난 어린아기를 갖다놓았다. 밤이 이슥해지자 소낙비가 내리퍼붓고 천둥이 요란히 울리면서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용이 승천하자 갑자기 그 집 앞으로 때아닌 물이 밀어닥쳐 냇물을 이루더니 어디에서인지 볏가마니가 숱하게 물결에 밀려 왔다. 이리하여 그들은 부자가 되었고 산신령의 말대로 석달후에는 태기가 있더니 건강하고 아 름다운 옥동자를 또 얻게 되었다.
그후 냇물은 점차 줄어들더니 냇물의 근원이 됨직한 곳에 한 우물을 이루고 다시 본래의 땅으로 되었다. 이 우물은 용이 승천한 자리에 생긴 것으로 용의 머리모양을 닮아 생겼으며 와룡 중가구동에는 지금도 이 물을 먹으면 건강한 첫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돌고 있다.
우장군과 말무덤,
인근 고을에서 영산으로 널리 알려진 학가산, 서편 보문산의 험준한 산줄기를 타고, 서남쪽으로 약 8km 가면 안동군 풍산명 신양동 [창마을]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50여년 전 이조 인조시대에 우홍구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청빈을 생활의 신조로 삼는 가난한 선비라 마을 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생활해 오던 중 나이 50에 셋째 아들 영진을 분만하였다.
영진은 태어나자 마자 걸어다녔다고 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영리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신동으로 4살 때 벌써 큰 아이 들이 책 읽는 것을 옆에서 듣고 그대로 따라 외웠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일은 7살 때 벌써 동 리 씨름판에서 당할 사람이 없었으니 날 때부터 장사의 기골을 타고 났던 모양이다.
때는 연산 군의 폭정,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으로 나라가 매우 어지러울 때라 영진은 장차 훌륭한 장사로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남모르게 무술을 수련하였다. 한편 영진의 부모 우홍구 내외는 아들의 비범한 재간을 보고 장차 커서 나라를 어지럽게하여 집안에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늘 무술 수업을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을에서 8km나 되는 학가산을 단숨에 뛰어갔다와서 아침을 먹었으며 밤이면 마을앞 느티나무를 몇번씩 뛰어 넘고 냇가에 가서 그 건너 편으로 돌 던지기 연습을 하였다. 지금 영진이 태어난 마을앞 냇가에 약 200m 거리를 두고 수레 바퀴 만한 바위 2개가 있으니 이 바위는 우 장군이 돌던지기 연습을 하던 바위라 전해지며 이 바위를 우 장군이 공깃돌과 같이 가지고 놀았다 하여 우 장군의 공깃돌이라고도 부른다.
영진이 나이 19세 되던 해 힘이나 무술의 재간이 비범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때마침 나라는 인조 임금이 청나라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영진은 자기의 뜻을 이룰수 없음과 부모의 자기에 대한 장래의 두려움을 보다 못해 나라 망함을 탄식한 나머지 원대한 포부를 이루지 못한채 19세 의 꽃다운 나이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런데 천리인지 조화인지 예천군 보문면 작곡동 속칭 읍실 소에서 젊은 장수 우영진을 태우고 천하를 호령하는 용마가 솟아나 우영진이 거주하는 창마을을 향해 오던중 지금 예천군 보문면 속칭 오치마을 앞에와서 자기 주인인 영진의 자결 비보를 듣고 용마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세 번을 울부짖다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우장군과 용마는 하늘이 내리신 것인데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이 용마의 시체를 오치 마을 뒷산에 장사 지내니 지금도 이 무덤터를 우장군 말무덤이라 부르고 있다한다.
의성김씨 운천 종가의 삼보
임하면 천전동이 나서는데 이 마을은 의성 김씨의 일문의 집단 부락이다. 이 의성김씨의 운천 종가에는 대대로 전하는 세가지 소중한 보물이 있다.
그 첫째가 신라 경순왕의 옥저, 둘째가 연하침, 셋째가 매화연이다. 옥저는 신라 경순왕이 청색으로 된 한쌍의 옥저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 황색의 것은 지금 경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청생의 옥저는 넷째 아드님 석(의성김씨 시고공)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수백년전에 경주의 황색 옥저가 네동강으로 갈려졌다는 얘기를 듣고 김씨 종택에 있는 청색 옥저를 꺼내 보았더니 놀랍게도 똑같이 네동강으로 부러져 있었다 한다.
참 신기하고도 괴이한 일이었다. 약 백년전에 영해부사 김희주 공이 옥저의 궤두껑안에 천년 유물이 네동강이 난 것은 한스러우나 자손들은 길이 잘 보존하라고 적어 두었다.
연하침은 운천 선생의 셋째 아드님 경제공의 자제이신 경와공이 금강산에 유람을 갔을 때 일이다. 어느 구름한점 없이 맑은날 만폭동 청룡담을 찾아 갔다. 청룡담 못위에서 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길래 하도 이상하여 하인을 시켜 못속을 수색케 했더니 나무부리 같기도 하고 돌덩이 같기도 한 이상한 물건을 건져왔다.
그것은 보통 나무보다 훨씬 무거웠다. 나무뿌리가 물속에서 천년을 묵으면 침향이라는 만병통치의 한약 약제가 되고 또 다시 더 오랜 세월을 거치면 침석이 된다고 하는데 혹시나 이 침석이 아닐까 한다. 한 백여년전에 한 종손이 자기 눈으로 직접 안개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기위하여 지금 백운정 정자 아래 냇물속에 담가두었다가 급한 물살에 이것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찾아도 결국 찾지 못해 아주 잃었다고 단념하였었다. 그 이듬해 여름에 어떤 등짐장수가 이 마을을 지나면서 자기는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는데 일전 어느 강변을 지나가다 보니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인데 물위에서 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더라고 마을사람들에게 신기한 듯 이야기를 했다.
종손은 그 곳으로 달려가 수색하여 겨우 연하침을 찾았다고 한다. 잃은지 1년만에 다시 찾은 셈이었다. 끝 으로 매화연은 이조 선조때 승지 김백암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신종황제로부터 기념 품으로 하사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의성 김씨댁으로 넘어 오게 된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김백암의 외손되는 김경와 공이 어릴 때 외가에 놀러갔다가 그 벼루가 탐이 났다. 그래서 외조부에게 달라고 졸랐다. 김백암이 이르기를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입신양명해서 그 대가로 얻은 것인데 너는 아직 이룬 것 없이 그냥 얻으려 하느냐 친손이나 외손이나간에 먼저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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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와공은 그로부터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14세에 초시 에 급제 했다. 과거 급제의 소식을 듣고 그는 집에도 들리지 않고 바로 외조부 댁에 찾아가서 벼루를 얻었던 것이다. 이 벼루는 중국 황하 유역의 단애석으로 세로 34cm 가로 22cm의 장방형 에 매화, 대, 구름, 해, 산, 사슴등이 교묘하고 아름답게 새겨져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케 하는 훌륭한 보물인 것이다.
유랑아제-펴뮤니 비비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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