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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先生 ]
본래 일찍부터 도를 깨달은 자, 덕업(德業)이 있는 자, 성현의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쳐주며 의혹을 풀어주는 자, 국왕이 자문할 수 있을 만큼 학식을 가진 자 등을 칭하는 용어이다
이는 도의 측면에서 성인(聖人)·현인(賢人)·우인(愚人)의 스승과, 위(位)의 처지에서 천자(天子)·제후(諸侯)·경(卿)·사(士)·서인(庶人)의 스승으로 구분된다. 그 뒤 국가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교육의 기능이 강화되자, 선생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나아가서 자기보다 학식이 많은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아는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한 관부(官府)에 앞서 재임했던 사람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최근에는 속화(俗化)된 대인칭(對人稱)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생이라는 용어는 대체로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용어를 사서(史書)와 현재에서 찾는다면, 사(師)·부(傅)·사부(師傅)·박사(博士)·사유(師儒)·사표(師表)·훈장(訓長)과 스승·교육자(敎育者)·교사(敎師)·교원(敎員)·교수(敎授) 등이 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이라 하고, 그로부터 배움을 받은 자는 그를 높여 스승이라 하였다. 전근대 사회에서 선생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사·박사·사부·사유·사장·훈장 등은 교육 대상자의 신분·지위와 관련된 것이었다.
즉, 국왕의 스승은 사·사부 등으로 표현했으나, 고려시대에는 불교적인 차원에서 왕사(王師)라 하기도 하였다. 국가에서 설치한 교육 기관에 소속되어 교육 활동을 전개하던 교수관(敎授官)도 박사·사장·사유·훈장 등으로 일컬어졌다.
이 가운데 박사는 삼국·고려시대부터, 사장·사유는 조선시대의 중앙 교육 기관인 성균관·사부학당(四部學堂)에서, 훈장은 조선 후기 지방에 설치된 서당(書堂)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한편, 교원·교사·교수·교육자 등의 용어는 현대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초·중·고등학교의 선생은 교사, 전문대학·대학교의 선생은 교수로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교육 활동의 장(場)에 따른 것이며, 오늘날 교육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범칭으로는 교육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보다 먼저 나서 그 도(道)를 듣기를 진실로 나보다 먼저라면, 내 이를 스승으로 좇을 것이다. 나보다 뒤에 나서 그 도를 듣기를 나보다 앞이라면, 내 이를 스승으로 좇을 것이다. 나는 도를 스승으로 하는 것이다.”(韓愈의 師說에서)
선생의 의미는 대단히 다양하다. 그러나 크게 보아 전근대 사회의 선생이란 덕과 학식을 갖춘 한 시대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의 존칭이자, 또 한편으로는 국가의 교육 기관의 교수관을 높여 부르는 용어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양면성을 고려하여 시대적 변천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1) 고대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사실을 전하는 각종 기록에서 선생으로 불린 인물로는 강수 선생(强首先生)과 백결 선생(百結先生)이 있다.
강수는 중원소경(中原小京) 출신으로서, 일찍부터 유학(儒學)을 익혀 실천하였다. 태종무열왕에게 보내온 당의 국서를 명쾌히 해석하여 왕이 ‘강수 선생’이라고 함으로써, 이후 신라의 문병(文柄 : 학문상의 권력)을 관장하여 외교 문서를 작성했고, 통일에 기여한 공도 컸다.
백결 선생은 출신이 한미하고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거문고를 즐기며 세상사를 초연히 관조하며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백결 선생’으로 칭했던 것이다.
이로써 보면, 신라시대의 선생이란 뛰어난 학식을 갖추어 국왕의 자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나, 고결한 인품을 갖춘 재야의 인물을 높여 이르는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구체적으로 선생으로 명기되거나 지칭되지는 않았으나 국왕의 자문 구실을 수행하며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도 선생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예컨대 유교나 불교와 같은 외래 사상이 수용되기 전, 우리의 고유한 사상으로서 무교 신앙(巫敎信仰)이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기능했을 때는 사무(師巫)라는 존재가 있었다.
사무는 미지의 세계를 예지하는 점복적(占卜的) 기능을 지녔고, 천변지이(天變地異)나 중요한 국사의 자문을 담당했으며, 국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숭앙을 받았다.
이후 불교가 전래되어 토착화하면서 고승들이 사무의 기능을 계승하여 국사(國師)로 책봉되어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의 효소왕 때 혜통(惠通)이 국사로 책봉된 이후 현재 확인되는 국사의 수는 9명에 이른다. 이들은 경덕왕 때에 국사로 책봉된 영여사(迎如師)가 덕행이 높았다고 하는 데서 짐작되듯이, 모두가 덕행을 갖춘 한 시대의 사표가 될 만한 존재들이었다.
한편, 삼국시대 이래 국가의 교육 기관이 설립되면서 여기에 속하여 교육 활동을 담당한 교수관들도 선생으로 지칭하였다. 이는 같은 시대의 기록은 아니지만, 고려 성종 5년(986) 지방의 12목에 경학박사 등의 교수관을 파견하기 위한 하교(下敎)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주나라는 이교(二膠 : 주대의 大學, 곧 東膠와 西膠)를 세워 선생을 택하여 토론하고, 국자(國子 : 公卿大夫의 子弟)에 명하여 배우고 익히게 하니, 군신부자가 모두 애교(愛敎)의 풍(風)을 알고, 예악시서(禮樂詩書)가 족히 경륜(經綸)의 업(業)을 일으킬 수 있었다.”라고 한 사실과, 조선시대의 이이(李珥)가 ≪학교모범 學校模範≫에서 선생을 섬기는 도를 높여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선생은 곧 사장이다.”라고 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국가가 설립한 유교 교육 기관의 교수관을 선생이라 불렀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국가적인 유교 교육 기관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설립된 태학(太學)이었다. 태학의 교수관으로는 태학박사(太學博士, 혹은 國子博士)·태학사(太學士) 등이 있었고, 모두 소형(小兄)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를 임명하였다.
백제에서도 유교 교육 기관이 있었다고 짐작되나, 명칭이나 설립 시기 등이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교수관 명칭이 보일 뿐이다.
신라에서는 651년(진덕여왕 5)부터 국학을 설치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후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의 장(長)으로 경을 두면서, 국학이 교육 기관으로서의 정식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국학에는 경·소경(少卿)·박사·조교(助敎)·대사·사(史) 등의 관직이 있었는데, 대사와 사를 제외한 모두를 교수관으로 봐도 무방할듯하다. 이와 같은 국가적 교육 기관에서 유학 교육을 담당한 교수관 역시 선생이었다.
(2) 고려
호족연합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출발한 고려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기 위해, 먼저 무인 기질이 강한 지방의 호족들을 포섭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 중 하나로서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 불교를 국교로 정하여 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고승(高僧)을 왕사·국사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통하여 정신적인 기반을 확립하려 하였다.
또 한편, 경주 출신의 육두품계열(六頭品系列) 유학자들을 포섭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학식 있는 관리들을 육성하려 하였다. 이러한 두 계통에서 나타난 선생과 제자의 관계를 살펴 보기로 하자.
① 불교 교단의 선생과 제자관계 : 국왕 이하 민중에 이르기까지 고려사회 전반에 걸쳐 교화력을 크게 가졌던 불교 교단에서의 선생과 제자, 그리고 왕사·국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즉위하기 전부터 승려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태조 왕건(王建)은 유명한 고승들을 자기의 측근으로 모셔왔다. 그리하여 그들의 명성과 교화력을 이용하여 개경을 정치적 중심지이자 사상적 중심지로 구축하려고 하였다.
또, 그들을 통하여 왕권 강화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정권의 안정을 기도하고자 했다. 그리고 민중들의 소박하고 다양한 신앙을 불교로 귀일시켜 호국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불교 정책은 이후 역대 왕들에게 계승되어 불교는 고려 말기까지 호국 종교로서 존속하였고, 왕사·국사제도가 채택되어 정신적인 지주가 설정되었다. 한편, 불교 교단의 효과적인 통제와 운영을 위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승정(僧政)을 관리하는 주무관서로서 예부와 승록사(僧錄司)도 설립되었다.
불교에서의 선생과 제자관계는 상징적인 면과 실질적인 면으로 나누어진다. 상징적인 관계는 주로 재가 신자(在家信者)와 관련되어 국사·왕사의 임명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실질적인 관계는 불교 교단에서 승려와 승려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승려는 결혼을 할 수 없어 자체 재생산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불교 교단내에서의 사제 관계는 재가 신자의 출가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출가는 불교 교단에서 사제 관계가 이루어지는 계기였고, 재가 신자와 승려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불교가 국교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출가는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불교 교단에서의 사제 관계도 종파의 유지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출가하여 행자(行子) 또는 동승(童僧)으로 사원의 집단 생활과 수학(修學) 등 신앙의 기초 과정을 익혀 익숙해진 뒤, 출가사(出家師) 밑에서 삭발하면 사미(沙彌) 또는 사미니(沙彌尼)로 불리었다.
이후 강원(講院)과 선원(禪院)에서의 수학과 신앙 생활을 거쳐 계법사(戒法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比丘) 또는 비구니(比丘尼)가 되면 득도승(得度僧)으로 인정을 받았다. 구족계는 승려로서 완전한 자격을 갖춘 자로 공인해주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계법사는 승려로서의 법정 보증인과 같았으므로 출가사보다는 사제 관계가 더 강하였다. 구족계를 주는 곳을 계단(戒壇)이라고 하였고, 그것은 국가 관리하에 놓인 관단(官壇)에서만 이루어졌다. 이는 승려의 자격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승려의 자질을 높이며 통제하려고 한 국가의 정책으로 말미암은 결과였다.
수계를 받은 승려는 다른 사원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수양과 식견을 교유하고 심인(心印)을 받는 득도사(得度師)를 얻게 된다.
이후 몇 년 동안 수학하고,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예비 시험인 성선선(成禪選) 또는 총림(叢林)를 거쳐 승과(僧科)의 대선(大選)에 응시하게 된다. 승과의 실시는 유능한 전도자(傳道者)를 구한다는 의미가 컸다. 그래서 대선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수행상 깊은 지식이 필요할 정도로 고도의 수준이 요구되었다.
이와 같이, 승려의 생애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출가·수계(受戒)·승과·승계(僧階)·승정(僧政)을 국가가 통제했다. 그리고 주지는 해당 종파의 추천을 받아 일반 관료와 같이 서경(署經)을 거쳐서 임명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지는 중요한 계기는 득도 과정이었다.
교종에서는 경론을 연구하여 터득한 지식을 강조하고, 득도를 내세우지 않는 경향이었다. 반면, 선종에서는 비문(碑文)이나 전기(傳記)에조차 강조될 정도로 득도 과정을 중요시하였다. 이에 선승(禪僧)의 득도사는 법맥(法脈)을 형성하면서 사제상승(師弟相承)하여 후세에까지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직접 제자는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 또는 친승교훈자(親承敎訓者), 고승이 주관하는 불사(佛事)를 도와서 가계(加階)된 승려는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 또는 사양법화자(師揚法化者)·보익군무자(補益軍務者), 다른 고승의 제자였으나 감화를 받아 제자로 된 승려는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 시봉(侍奉)한 승려는 봉시병문자(奉侍甁門者), 그리고 재가 신자 등으로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는 사제 관계가 매우 엄격하며, 고승은 교육이라는 실제적인 기능에 있어서 권위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처럼 불교 교단안에서 사제 관계를 엄격히 구분하여 기록한 것은 불교가 종교로서 종파를 중심으로 형성,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계를 통제하려는 국가의 정책이 이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파악한 결과였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안에서 사제 관계는 매우 엄격하고 체계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② 국사·왕사의 의미와 기능 : 국사·왕사가 제도로서 성립된 것은 고려 초기였다. 신라말 불교계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면서, 새로운 종교로서 선종이 호족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분립 현상을 나타내었다.
호족들을 통합하여 고려를 세운 왕건은 신라시대부터 존재하던 국사에다 왕사를 함께 두어서, 자신의 불교에 대한 보호를 과시하고 이를 제도화하였다.
국사·왕사는 모든 시기에 걸쳐서 각 1인씩 책봉되었다. 이 중에는 생존시에 책봉된 경우도 있고, 사후에 추봉된 경우도 있다. 국사는 일반 백성을 포함하는 국가적인 선생이라는 의미이고, 왕사는 왕의 선생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국사는 중생의 부모로, 왕사는 국왕의 스승으로 비유되었다. 국사를 왕사보다 우위에 둔 것은 민중이 국왕보다 우선한다는 뜻에서였다.
이는 모든 민중이 불교 신자였던 고려가 민의를 받들어 왕도정치를 편다는 전통적인 동양의 정치사상을 불교와 결합시킨 것이었다. 또한 국사·왕사의 책봉을 통하여 국왕 자신을 교권 밑에 두어, 교권과 통치권자의 갈등을 피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였다.
국사나 왕사가 이처럼 민심 수습을 위한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책봉 의식은 매우 엄숙하게 행해졌다. 왕이 상부(相府)의 자문에 따라 국사·왕사를 선정했고, 책봉된 이들은 초승계적(超僧階的)인 위치에 두어졌다. 책봉될 국사·왕사가 선정되면 5품 이상의 관인(官人)처럼 낭사(郎舍)의 서경을 거쳐야만 했다.
이어서 고승이 주지하는 사원에 조서(詔書)를 가진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책봉 수락을 청하는 서신지례(書紳之禮)를 행하였다. 이 때, 왕의 간곡한 뜻을 찬앙지정(鑽仰之情)이라 하고, 고승이 세 차례 사양하는 예를 삼반지례(三反之禮)라 하였다.
국사·왕사에 책봉된 고승이 지나가는 주군(州郡)에서는 성인을 맞이하는 의식을 구경하는 인파로 길이 메워졌다 한다. 이것은 교화가 보편화된 민중과의 일체감이 고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승이 개경에 도착하면 국왕은 스스로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이처럼 국사·왕사는 왕이 엄격하게 제자의 예를 행할 정도로 권위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고려 전기에는 아직 승정과 관련된 실질적인 기능은 가지지 못하였다. 민중과 국왕의 부모나 스승이라는 관념에서 교화를 위한 상징적인 존재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국사나 왕사에 책봉되더라도 자신이 주지로 있던 사원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죽은 뒤에 추봉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국사·왕사의 임명은 불교에 대한 국가 정책이 자연히 반영되었고, 국사·왕사의 책봉을 통하여 당시 불교계의 교세에 대한 판도를 이해할 수도 있었다.
전기에 상징적인 기능을 지닌 국사·왕사가 고려 후기에는 승통(僧統)으로 개칭되고, 성격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충선왕 이후에는 서경을 거쳐 승정이 이루어지던 전기의 제도가 변질되어 몽고와 결탁한 왕실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뒤이어 국사·왕사에게 승정이 위임되어 세속과의 이해 관계가 커지면서, 종파간의 이해를 둘러싼 충돌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이 점차 가속화되면서 불교계의 세력도 약화되어 갔다.
이에 따라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불교의 구실도 점차 권위를 상실했고, 국사·왕사의 상징적인 기능도 약화되었다. 따라서, 성리학적 교양을 지닌 신진사대부들의 공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마침내 조선이 건국되어 숭유억불 정책이 수립되면서 국사·왕사도 폐지되고 말았다.
③ 교육 기관 및 유학자층에서의 선생 : 중앙 정치 제도의 정비에 따라 풍화(風化)의 근본인 교육 기관도 정비되었다. 성종대의 국자감의 설치에 이어 인종대에 경사육학제(京師六學制)가 마련되었다.
여기의 교수관으로는 국자좨주(國子祭酒)·국자사업(國子司業)·국자박사(國子博士)·사문조교(四門助敎) 등이 두어졌다. 관학의 발전과 함께 사학(私學)도 발전하였다. 최충(崔冲)의 문헌공도(文獻公徒)를 비롯하여 12사학이 존재했고, 여기에도 학관(學官)이 있었다.
이들 각급 교육 기관의 교수관들은 교육이 왕화(王化)의 근본이라 하여 학덕을 겸비한 노성(老成)한 인물 중에서 선발되었다. 이들은 사(師) 곧 스승이나 선생이라고 불렸다. 이는 앞의 성종 5년의 흥학조서(興學詔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유교 교육 기관의 선생을 선발한다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학의 경우 학문적 능력은 있으나 입사(入仕)하지 못한 인물을 교관으로 뽑았다. 그런데 교수관을 무엇이라고 지칭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선배의 경우는 선유(先儒)라 했고, 개인적인 호의에 따라 서간이나 묘지명에서 선생이라는 칭호를 쓰는 사례도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국사·왕사로 선발된 고승들이 국왕의 스승으로 불리며 우대된 것처럼, 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유학자도 왕의 스승인 사부로 임명되었다. 대표적으로 현종대의 최항(崔沆), 예종대의 곽여(郭輿), 충숙왕대의 안규(安珪)·왕삼석(王三錫)·윤신걸(尹莘傑), 충숙왕대의 민사평(閔思平) 등을 들 수 있다.
사부를 선생으로 불렀음은 곽여의 경우 “중사(中使)를 시켜 불러서 금중(禁中)의 순복전(純福殿)에 살게 하고 선생이라 불렀으며, 항상 좌우에 시종하게 하였다.”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사부로서 국왕에게 선생이라고 불린 인물들은 대개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왕권이 실추된 원나라 지배하에서는 왕삼석과 같이 폐행출신(嬖幸出身)도 없지는 않았다.
또한 과거를 통하여 고시관인 좌주(座主)와 급제자인 문생(門生) 사이에도 사제 관계가 성립하여 부자·형제의 유대를 가지면서 학벌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돈독한 사이는 정치적 진출까지 좌우하여 상서방(尙書榜)·처사방(處士榜)이라는 유행어까지 낳게 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부터는 선생이라는 칭호가 더욱 많이 사용되었다. 당시의 문집과 묘지명에 나오는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 관부에서 앞서 재임했던 인물, 산림에 은거하여 관작이 없으면서 학덕을 겸비한 처사, 교유사이이나 학문적으로 성취한 인물, 학문과 지조가 있는 선비, 좌주 및 학문적 전수 관계에 있는 스승 등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 선생의 칭호는 부르는 사람의 기호에 많이 좌우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3) 조선
고려말 신흥사대부에 의하여 수용되기 시작한 성리학은 조선의 개창 이후 국시의 하나로 되면서 보급, 정착되어갔다. 각급 교육 기관을 통한 성리학의 교육도 활발해졌다. 그리고 성리학에 대한 인식이 깊이 이루어지면서 이를 직접 실천하는 인물들도 배출되었다.
이에 따라 풍부한 성리학적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물들을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다. 또 성리학의 전수 과정에서 형성된 강인한 학통을 바탕으로, 그 제자 문인들이 스승을 선생으로 존칭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선생은 한 관부에 앞서 재임했던 인물들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성리학적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에 대한 존칭이었다.
또 이들이 각급 교육 기관을 통하여 성리학을 교육했으므로, 각급 교육 기관의 교수관을 제자 문인들이 높여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선생은 각종 교육 활동의 장을 통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① 국왕·세자의 교육과 선생 :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은 최고의 지배자인 국왕부터 성리학에 조예를 지닌 존재일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국왕에게 성리학적 소양과 실천 의지를 심어주기 위하여 경연(經筵)이라는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
경연을 담당한 관원들은 대체로 학덕을 겸비한 그 시대의 사표로서의 선생이 많았다. 그들은 국왕의 스승으로 자처하여 군주의 도덕적 의무와 바른 처신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일반 정사에 관한 조언도 많이 하였다.
선생은 사명감도 투철하여 군주를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의도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오랜 기간 왕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국왕 또한 선생의 의견을 경청하고, 선생의 비판을 가납(嘉納)하였다.
이러한 소임으로 인하여 경연관을 겸하는 홍문관직은 청환(淸宦 : 학식이나 문벌이 높은 사람들이 차지하던 앞날이 촉망되는 벼슬)으로 인식되었다. 또 자연스럽게 국왕과 자주 접촉하면서 정치적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등 정치적 기능이 증대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사제 관계 이전에 군신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육의 성과를 명확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세자 역시 차기 왕위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군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교육이 중시되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시강원(侍講院)의 교수관은 기유숙덕(耆儒宿德 : 덕망이 높은 연로한 선비)이나 행실이 단정한 인물, 곧 선생 중에서 선발하였다.
이들은 세자와 기거를 같이 하다시피 하여 학문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까지도 지도하였다. 따라서, 군신 관계에 앞서 사제 관계가 먼저 이루어졌던 셈이다.
교수 방법은 강의와 배송(背誦)이 주가 되었고, 종신토록 잊지 않고 실천하도록 다독을 시키기도 하였다. 다음 날 배울 부분은 미리 알려주어 예습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복습도 중시하여 새로운 내용의 강의에 앞서 의문점을 함께 토론하고 완전히 이해시켰다.
이와 같이 중대한 임무를 지닌 세자 교육이었기에 교육이 중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교수관은 복상(服喪)·의식·제례 및 공회(公會)에 불참해도 되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이로써 보면, 학덕을 겸비한 선생은 국왕 및 세자의 교육에서는 성리학적 이념을 주지시키고 그 실천 의지를 함양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왕조 자체도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선생을 존중하고 우대하였다.
② 관학 교육과 선생 : 성균관·사부학당·향교의 교수관은 조선 초기의 관학 체제 정비에 힘입어 학문의 진흥 및 관리 양성에 주력하였다. 관학 소속의 교수관은 학내 생활의 사습(士習)에 불미한 사태가 발생하면 적절한 조처와 징계를 가하여 건전한 학풍 조성에 힘썼다.
그러나 이들 교수관도 역시 관료이었기에 자주 교체되었다. 뿐만아니라 이를 춥고 배고픈 관직, 즉 한직(寒職)으로 여겨 부임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래서 유능한 교수관을 확보하기란 극히 어려웠다. 지방의 향교는 더욱 그러했으며, 조정에서도 유능한 교수관의 선임과 확보에 부심하였다.
교수관의 경우 특별한 자격 기준은 없었다. 경명행수(經明行修 : 經學에 밝고 행실이 선함)의 명사(名士)나 정학중망(精學重望 :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는 중망이 있는 사람)의 유신(儒臣)을 발탁하여 자급(資級)을 막론하고 교수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에 대한 우대책으로는 우수한 교수관에게 미곡(米穀)이나 음식물을 하사하거나, 녹봉 또는 품계를 올려주기도 하였다. 관학의 유생들도 우수한 선생을 사유(師儒)로 추대하거나 유임을 청하기도 하였다. 또 지방으로 돌아간 선생의 소환·복직을 청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하여 학생들의 존사정신(尊師精神)을 읽을 수 있다.
향교의 교수관은 유생의 훈도 이외에 향촌의 도덕적 향풍을 수립하는 일에도 노력하였다. 예컨대, 향약(鄕約)을 솔선수범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나 향사례(鄕射禮)와 같은 의식을 통하여 향풍순화(鄕風醇化)에도 진력했던 것이다.
관학의 교수관들은 직접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했으므로, 성균관의 유생들이나 향교의 교생들로부터 선생으로 불렸다. 또한 교수관 자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명행수지사(經明行修之士)를 요구했으므로 학덕을 겸비한 선생이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③ 사학 교육과 선생 : 왕도정치 및 향촌 자치를 이상으로 표방하고 중앙 정계로 진출한 사림파는 군주의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경학(經學)의 능력에 힘입어 경연 등에 많이 진출하였다. 그러나 훈구파와의 갈등으로 빚어진 사화를 거치면서 많은 사림파가 타격을 입고 향촌으로 낙향하였다.
이들은 향촌에 은거하면서 서재(書齋)나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교육의 장으로 삼으면서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서원 건립이 확산되면서 성균관·향교 등의 관학은 쇠퇴일로를 걸었고, 교육의 주도권은 서원에게 넘어갔다.
당시의 서원 교육은 도덕적 인격 교육이었고 가치 발견의 교육이었다. 곧, 선생은 학생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인격체이어야 하였다. 따라서, 서원의 선생은 그 지방에서 학덕을 겸비한 인물로 선발하였다. 이들은 선현을 봉사하며 향촌 자제 교육에 주력하였다.
또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고 인격적인 감화를 교육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향하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본받기에 힘썼다. 이같은 선생의 전인적인 감화의 힘은 올바른 사론(士論)의 함양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서원으로 하여금 향약을 통한 사회 교화의 구심점이 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에 대한 존경과 예절은 매우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예를 들면, 선생이 부르면 곧 응답하고, 앉아 있으면 즉시 일어났다. 음식이 입안에 있을 때에는 땅에 뱉고 대답하고, 먼 곳에 있으면 그 앞에 가까이 나아가며, 선생이 말씀하시는 동안에는 이런저런 말들을 하지 않았다.
선생을 모시고 다닐 때에는 너무 멀지 않게 뒤따르면서, 혹 길에서 사람을 만나더라도 한번 읍(揖 : 맞잡은 두 손을 얼굴 앞으로 들어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는 인사 예절)하고 곧 헤어져 선생을 제쳐놓고 대화를 하지 않는 것 등이었다.
④ 산림(山林)의 등장과 선생 : 조선은 16세기말 이후 이학 지상주의시대(理學至上主義時代)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성리학으로 무장한 학덕을 겸비한 인물이 선생으로서 중시되고 대우를 받으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부응하여 등장한 것이 산림이었다.
산림은 때로는 정계에 진출하여 자신의 포부를 펴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개는 향촌에 은둔하여 서재나 서원 등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향약의 실시 등을 통하여 향촌 교화에도 힘썼다. 이들 중에는 학덕이 뛰어난 인물이 많았으므로 국가의 징소(徵召)를 받아 군주나 세자의 교육을 맡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특히, 국가는 산림만을 위한 산림직을 신설한 적도 있었다. 교육 기관인 성균관의 좨주·사업(司業)이라든지, 세자시강원의 찬선(贊善)·진선(進善)·자의(諮議) 등이 그것이다. 산림만이 보임될 수 있고 적임자가 없을 때에는 비워두는 산림직의 신설만 보더라도 조선 후기의 산림에 대한 예우가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상규(常規)에 벗어난 예우를 많이 받았다. 찬선은 세자와 마주칠 때 서로 읍례(揖禮)하는 우대를 받았다. 서연(書筵)에 나갈 때에는 모든 관료들의 제일 앞자리에 앉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징소 과정에서도 파격적인 대우가 많았다. 상경이나 하향할 때 식물을 하사함은 물론, 머무를 집을 수선해주는가 하면 가교(駕橋)를 내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는 산림이 유림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사표가 되었기에 국가적 차원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당시의 과거는 제술에 치중하고 경학을 소홀히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문과 급제자라 하더라도 경연·서연 등에서 경전을 강론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경학에 밝은 산림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산림 또한 경연·서연에 관심이 커서 지치(至治) 내지는 군주의 도리에 대하여 많은 진언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꺼리게 되는 경향이 강해졌고, 따라서 중앙에서의 산림의 실질적인 역할도 차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유림의 사표요 종장(宗匠)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의미는 계속 남아 국가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⑤ 실학자 등장 이후의 선생관 : 조선 후기에 사림을 정신적으로 영도하는 기로숙덕의 인물들이 산림으로 추앙받고, 또 그들이 한 시대의 사표로서 선생으로 존칭되면서 선생은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한 학덕을 겸비한 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말폐가 드러나고 양반 지배층들이 산림을 하나의 축으로 지속적인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전개하자, 이같은 선생의 의미에 대하여 회의가 일어났다.
즉, 유림의 지도자를 상징하던 산림의 의미가 점차 변질되고, 관계에 진출하지 못한 인물들이 자칭타칭으로 산림을 사칭하면서 그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듯이, 선생도 이와 비슷한 권위의 하락 현상을 나타냈다.
이는 조선 후기 봉건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실학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선생으로 칭해지는 가식적인 성리학자에 대한 비판·조소와 더불어, 성리학적 소양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인물을 오히려 선생으로 존칭하는 새로운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실학자인 박지원(朴趾源)의 한문소설에서 하나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박지원은 <호질 虎叱>을 통하여 북곽 선생(北郭先生)이라는 표리부동하고 허위에 가득찬 성리학자를 고발하였다.
<예덕선생전 穢德先生傳>에서는 비록 무식하고 천한 직업을 가지기는 했을 망정 하는 일에 만족하고 나름대로 덕을 갖춘 엄행수(嚴行首)를 예덕 선생으로 높여 불렀다.
실학자들의 선생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심각하게 노정된 사회적 모순을 간과한 채 권세욕에 눈이 어두워 정쟁을 일삼던 성리학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할 진정한 사표로서의 선생의 출현을 갈망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정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선생에 대한 새로운 존숭 관념도 일어나, 이익(李瀷)은 군사부(君師父) 일치를 들어 ≪의례 儀禮≫에 빠져 있는 사복(師服)의 설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왕조 말기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해이해진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유교적 정통 사상의 재정립과 함께 선생에 대한 관념도 복고적이 되었다.
즉, 성리학적 윤리 도덕의 실천에 앞장서고 학문적 기반이 확고한 인물만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또, 제국주의의 침략이 시작되자 이에 대항하면서 전통적인 질서의 유지에 앞장섰던 인물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4) 일제강점 이후
① 선생 호칭의 남용과 비속화 : 조선 말기 개화기는 한국 교육의 근대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된 시기였다. 비록 그 시기는 짧았지만, 전통과 개혁, 보수와 진보라는 갈등, 그리고 이민족에 의한 간섭과 도전을 받는 속에서 전통적인 유교적 봉건 교육이 근대 교육으로 개편된 획기적인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선생의 역할도 종래와는 다른 측면으로 변화하였다. 즉,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인 교육 정책과 종래의 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한 한학 교육 등에 반대하고, 근대적 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을 계발하고 국기(國基)를 굳히고자 한 것이었다.
1895년(고종 32) 고종은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에서 “독서나 습자(習字)로 옛 사람의 찌꺼기를 줍기에 몰두하여 시세의 대국(大局)에 눈이 어두운 자는 비록 그 문장이 고금을 능가할지라도 서생에 지나지 못하리라.”라고 밝혔다.
정부에서는 여기에 힘입어 근대적 학교 설립을 위한 학교관 제와 규칙을 공포하였다. 한편, 기독교계 선교사들은 사립 학교를 많이 설립하여 서양식 교육 제도를 처음 소개하였다. 서양인 교사들은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소개, 전수하여 일제 식민지화에 대항하는 항일구국운동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민족주의자들이 설립한 사립 학교이다. 그들은 민족계몽·민족교육·항일사상고취를 위하여 민족 학교를 전국 방방곡곡에 세웠다. 뿐만 아니라, 직접 자신이 세운 학교의 교사로서 학생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교육 활동을 통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 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과외 활동을 통해서는 애국 사상을 함양했고, 교육 실천을 통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학교는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애국자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 私立學校令>을 제정하여 사학을 탄압하고, 우리 민족의 우민화(愚民化)·친일화교육에 주력하였다.
한편, 근대적 교육이 보편화되어가면서 교사의 양적 증가가 요청되었다. 이리하여 초등학교의 교사 양성 학교로서 1895년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었다. 전문적인 교사의 양성이 전근대 사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한 단면이기도 하였다.
한성사범학교에서는 정신단련·덕조마려(德操磨勵 : 끊임 없이 굳은 절개를 갈고 닦음)·애국 및 질서를 지키며 건강한 신체를 지닌 교사를 길러내어, 근대 학교에 맞는 새로운 교사상을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일제하에서 교사의 성격은 교육을 통하여 식민지화를 촉진하는 존재로 굴절되었다. 물론, 이곳을 통하여 배출된 한국인 교사들만은 개인적으로는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교육에 임하고 있었다.
이처럼 근대적 교육의 일반 민중에게로의 광범위한 침투·확산과 함께 선생이라는 칭호도 보편화되어서, 각급 근대적 교육 기관의 교사들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학덕과 인격을 겸비한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서의 선생이 남용되는 추세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시기 역시 일제의 통치에 대항하여 국권 회복을 위하여 활동을 한 인물들이 선생이라 불리면서 추앙을 받았다. 교육 활동에 투신한 인물은 물론, 민족의 사표로서 학덕을 갖춘 인물들이 선생이라 불려졌다.
이와 같이, 선생이라는 용어에 두가지의 의미가 내포된 분위기의 연장 속에서 광복 이후에도 선생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왔다. 그러다가 그 뒤 점차 범위가 좁아지면서 선생은 곧 교사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세기말 개화기에 근대 학교가 나타나면서 ‘가르치는 사람’을 교사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교사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을 특정적으로 지칭한 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윗사람을 부르는 말과 혼용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여, 선생이라는 용어가 모든 교사에게 붙여지는 높임말이자, 지식이나 인격면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일반 사회에서도 사교적인 용어로 쓰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가리키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변질되어 이 용어의 본의인 존중의 뜻이 희박해지게 되었다.
② 교원으로서의 선생 :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놓던 전통 사회에서 물질적 가치를 편향적으로 추구하는 현대 산업 사회로 시대가 바뀜에 따라, 선생도 존경받는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기능을 지닌 직업인으로 변질되었다.
따라서,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교원으로서의 선생은 직업인으로서의 전문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문성이란 그가 가르치는 분야에서 요청하는 수준의 지식을 전수하여, 피교육자가 사회에 별 지장 없이 적응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는 지적인 면에서는 제도적으로 정해져 있는 교과 내용을 성실히 전달하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사회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융통성과 창의력을 지닌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기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생 자신이 먼저 창의력과 미래지향적 안목과 전망적 자세를 지니고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규격화·획일화를 요구하는 오늘날의 사회가 이같은 노력을 쉽사리 용납하지 않더라도 선생은 거기에서 멈출 수 없다.
냉대와 거부를 극복하면서 새 사회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길러낸 소수의 선생들에 의해 인류문화와 사회가 발전되어왔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지식이든 그것을 전수하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과 방법이 필요하다. 교육이란 근본적으로 피교육자를 설득하여 교육자인 선생이 설정한 요구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술·방법이 새로운 지식을 전수하는 수단으로 적합하지 못하다면,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 이러한 개혁 또한 선생들의 강인한 의지와 그 의지의 결집에 의하여 교육현장에서, 그리고 제도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의 선생이 지니는 전문인으로서의 존재 의의가 있다.
오늘날의 사회는 불안과 초조, 소외와 고독, 실의와 좌절, 불만과 반항 등 온갖 정서적 불안정을 젊은이들에게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 또한 선생이 선도적 위치에 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과제이다. 그런데 정신적 병리의 치유는 전문적인 지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온전한 사람, 즉 ‘전인(全人)’을 만들겠다는 교육관과 교육애·교육의욕 등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선생은 남보다 먼저 몸소 실천하는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 선구자·구도자의 자세를 결코 마다할 수 없다. 이것이 곧 전통 사회의 선생들이 지녔던 성격의 일면을 오늘날의 교원이 계승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한국인의 선생관은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 변천되어왔다. 전통 사회의 선생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학문의 전수 과정에서 형성되는 제도적인 측면과 덕망·학식을 갖추어 한 시대의 사표가 될만한 인물을 존칭하는 사회문화적인 측면 등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역사상 수많은 인물들이 이에 해당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선생의 참모습은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문헌상에서 발견되는 최초의 인물은 백결 선생과 강수 선생이다. 그런데 이들과 같은 이미지를 지닌 인물을 전통 사회에서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민중 교화의 표본으로 위정자들에 의하여 높이 받들어졌고, 학문과 덕행을 닦는 후세인들에 의하여 사표로서 오래도록 추앙되고 칭송되었다.
선생의 상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미화되어, 더러는 신격화되는 경지에 이른 예도 있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인물들이 ‘선생’이라 불릴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그리고 후대의 어떤 인물에 의하여 선생으로 불려지느냐의 여부에 따라 그 역사적 좌표와 비중이 달라지고는 하였다.
이들은 고결한 인품과 청빈을 생활 신조로 삼았다. 그래서 늘 맑고 깨끗하기는 하나 실속없는 직책에 얽매이기를 스스로 즐겨, 같은 시대의 지배층에 비하여 궁핍한 생활을 견디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사표요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몰각해야 했다. 그러기에 내면적으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뇌와 갈등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선생상에 비하여 오늘날의 선생상은 크게 달라졌다. 산업 사회가 가져다준 규격화·획일화·기계화·배금주의 등 내적 가치관의 갈등·교란과, 문화제국주의의 전통적 윤리 및 가치관의 침식이라는 외적 도전은, 전통적 가치관을 지닌 선생으로서는 각박하고 경직된 현실사회에 대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또, 직업의 의미와 가치를 경제적 보수의 다과에 따라 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선생도 ‘생활인’이자, 지식의 대가를 받는 ‘직업인’임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선생은 존경받는 인격자로서가 아니라, 최소한 비난만은 받지 않는 건전한 ‘직장인’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는 일정한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 갈등과 형평, 설득과 이해 등 상대적 가치의 조화에 의하여 유지,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일깨워주는 일은 어차피 선생이 짊어져야 할 사명인 것이다. 더욱이, 사회 일각에서 만연하고 있는 ‘비인간화’의 풍조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역할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이러한 일깨움이나 치유는 교묘한 제도적 장치나 고도의 지식에 의하여 성취될 수 없다. 격조 높은 덕성과 품위 있는 인격을 가진 자의 감화력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선생은 여전히 전통 사회의 선생상의 일면을 계승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이 점에 있다. 결국, 오늘날의 올바른 선생상은 전통적 선생상의 바탕 위에서 현대적·서구적 선생상을 접목시켜야 할 것이다
영어 : teacher, 스페인어 : usted. 독일어 : Lehrer
일본어(일어) : 先生, 중국어 : 先生.
프랑스어(불어) : Monsieur. 영어 - 티처스 Teachers
네덜란드어 : leraar(docent보다 흔한 표현)
중국어(간체) - 쨔오쓸 教师. 네덜란드어 - 도쎈튼 docenten
라틴어 - 아리꿤 Aliquam, 덴마크어 - 레아 lær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