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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메타포, 그리고 언어의 윤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 극심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재난의 여파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감지된다. 취약 계층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깊고, 경제적 여파로 인한 불안도 커져만 간다. 바이러스의 감염보다 빠른 것은 공포의 확산이다.
시민들의 상황은 한마디로 ‘재난의 일상화’라고 할 만하다. 마음이 불안해지면 평소에 보지 않던 뉴스를 찾고, 듣지 않던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별것 아닌 경고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어떻게든 공포를 완화하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그렇기에 위기 상황에서 나오는 말들은 더욱 강한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효과를 지닐 수밖에 없다. 말들의 풍경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고, 영감과 응원의 원천이 되며,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재난 상황에서 말글의 무게를 더욱 깊이 성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전쟁 중’인가
“감염병과의 전쟁” “바이러스와의 전면전” “최전선의 의료진” “지역 봉쇄” “전시상황” “시한폭탄”… 최근 언론에서 접한 비유 표현이다. 이들은 현재의 상황을 전쟁으로 그린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진 않았지만 ‘전면전’ ‘최전선’ ‘봉쇄’ ‘전시’ ‘시한폭탄’ 등은 현재의 상황이 전쟁과 닮았음을 함의한다. 이는 스포츠에서의 전쟁 은유와 유사하다. “격파” “대첩” “용병술” “명장” “전략 전술” 등의 단어는 스포츠 관련 보도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이는 스포츠 경기를 일종의 전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지금의 사태를 전쟁으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한국 사회에서 전쟁 메타포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일례로 정치권에서 사용되는 “내부 총질”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이 말은 특정 정당이나 정파 내부의 분열과 갈등 상황에서 다수 의견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세력을 이르기 위해 사용된다. 누군가는 ‘총질을 총질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느냐’고 묻겠지만, 상대의 행위를 ‘총질’에 빗대는 게 어떤 의미와 효과를 지니는지 생각해 보면 섬뜩한 의미가 드러난다. 우선 “내부 총질”이 있다면, 여러 세력들이 서로 총을 쏴대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총격전에서는 으레 중상자와 사상자가 발생한다. 아울러 “내부 총질”이 문제라면 “외부 총질”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내부로부터의 격렬한 비판은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고, 조직의 구성원들을 적군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총질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벌어져야만 한다.
한 외국인과 우리 사회의 전쟁 비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전쟁 용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면서, 수업에 책을 안 가져온 학생에게 “전쟁터에 총을 놓고 왔다”고 하거나, 금전적 여유를 “총알”에 비유하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태도가 좋지 않거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군기가) 빠져 있다”는 말을 쓰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느 사회에나 전쟁과 관련된 메타포가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는 서로 다른 언어와 역사를 기반으로 나름의 메타포를 만들어 낸다. 수업을 전쟁터에, 교과서를 총에 비유하는 일은 영미권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대만의 연구자에게 비슷한 표현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아는 한 없다고 답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책을 안 가져오느니) 차라리 머리를 놓고 오지”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수많은 침략을 경험하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수십 년 군사문화가 배어든 한국 사회에 다양한 군대 관련 표현이 존재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 사유 없이 무의식적으로 군대 메타포를 사용하는 악순환을 끊지 못한다면 학생들은 계속 ‘총’을 가지고 ‘전투’에 참가하는 ‘군인’일 수밖에 없다.
은유는 말의 장식 아닌 사고의 패턴
서양에서 비유어(figurative language), 그중에서도 은유(metaphor)에 관한 논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시학》에서 명사의 종류를 대략 여덟 가지로 나누고 그중 하나로 은유를 들었다. 어원상 ‘넘어서’(beyond/over)라는 뜻의 ‘meta-’와 ‘가져오다, 갖게 되다’라는 뜻을 가진 ‘pherein’이 결합한 라틴어 metaphora는 ‘옮겨간다, 전이된다, 넘어간다’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메타포는 한 대상의 이름이 다른 대상의 이름으로 넘어가는 것, 즉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124쪽)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오랜 세월 서구 사회가 메타포를 이해하는 데 기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1980년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그들의 저작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견해에 반론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메타포는 단지 하나의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붙여 사용하는 수사적 기법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이며 사고 패턴(thinking patterns)이라는 것이다. 약간의 학술 용어를 동원하자면 메타포는 수사적 장치(rhetorical device)가 아니라, 인지 메커니즘(cognitive mechanism)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 표현들을 보자.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다.”
“세월이 날아간다.”
“Summer is just around the corner.”(여름이 길모퉁이를 막 돌았다: 곧 여름이다)
세 문장의 주어로 나온 ‘크리스마스’ ‘세월’ ‘Summer’는 모두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들이다. 하지만 시간은 물리적으로 경험하기 힘든 개념이다. 시간은 분명 존재하지만 만질 수 있는 코나 날아가는 새, 저만치 보이는 길모퉁이와는 다른 영역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코앞’ ‘날아간다’ ‘길모퉁이 돌아서 바로’라는 표현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을 표현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위의 세 표현 모두 시간 개념을 공간과 관련된 개념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영역을 구체화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메타포의 역할이며, 이는 단지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공간(코, the corner)이나 운동(날아간다)과 같은 구체적이며 물리적인 개념으로 비유하는 ‘사고 패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추상과 구체를 엮어 사고를 풍부하게 만들고 확장하는 능력은 인간의 인지적 역량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능력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어떤 메타포는 특정한 세계를 함의한다
어떤 메타포는 특정한 세계를 함의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인생은 그냥 엑스트라일 뿐이야”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자신과 단역 배우를 연결하여 표현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만약 한 사람이 엑스트라라면 누군가는 주연이고 또 누군가는 조연일 것이다. 어떤 이는 악역을, 다른 이는 선한 역할을 맡는다. 누군가는 집중 조명(highlight)을 받고, 누군가는 컴컴한 구석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감독이나 각본이 궁금해질 수도 있다. 즉 누군가 ‘엑스트라’가 되는 순간, 세계는 한 편의 영화나 연극이 되는 것이며, 개개인은 그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내 인생은 엑스트라’라는 말은 ‘세계는 영화(혹은 연극)’라는 사고의 틀을 가정할 때 성립할 수 있는 메타포다.
‘메타포가 세계를 상정한다’는 관점을 사회문제에 연결해 보자.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을 때 종종 사용되는 은유 중에 ‘인질 메타포’가 있다. 예를 들어 “시민을 인질로 삼는다”는 헤드라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출퇴근 시민이 인질이 되고 공항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공항 이용객들이 인질이 된다. 대학 시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경우라면 학생이 인질이 된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파업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실행됨에도 불구하고 ‘인질’이라는 메타포를 쓸 때 범죄와 관련된 사고의 틀(frame)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인질이라는 은유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인질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질극을 구성하는 일련의 요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인질이 있으려면 최소한 세 요소가 필요하다. 바로 인질범과 인질, 인질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이 경우 인질범은 인질을 대가로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한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인질’이라는 은유를 도입할 때 노동자들은 ‘인질범’이 되고, 파업에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는 사람은 ‘인질’이 되며,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인질범이 요구하는 ‘몸값’이 된다는 것이다. 영특하게도 ‘인질’ 메타포를 쓰는 언론은 스스로를 인질극의 빠른 종결을 기원하는 ‘선량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인질을 풀어줄 테니 자신들에게 몸값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노조는 노동법이 허용하는 수단을 통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한다. 인질극에서 인질범은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이며 강자이지만, 대개의 노동조합은 사실상 약자에 가깝다. 오히려 사측이 강자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파업은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최후로 선택하는 수단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적법한 노동권 행사이며 당연히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인질범과 파업 노동자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질 메타포’ 뒤에는 일체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그들의 행위를 극도로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는 생각의 틀이 들어 있다. 인질 프레임이 비틀고 있는 권력관계를 간파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뚫렸다”는 메타포의 아슬아슬함
지난 메르스 사태와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메타포 중에 ‘◯◯가(도) 뚫렸다’가 있다. 메타포에 관심을 가진 시민으로서, “뚫렸다”는 은유는 참으로 아슬아슬해 보인다. 어딘가가 “뚫렸다”면, 거길 지키는 사람이나 시스템이 있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 사람은 거길 ‘뚫었으며’, 뚫린 구멍은 점점 커질 위험이 있다. 바이러스에 ‘뚫린’ 지역사회는 그로 인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렇게 ‘뚫고 들어온’ 사람을 경계하고 비난하며 단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로 바이러스의 숙주로 기능한 이들은 방역망을, 지역을, 안전이라는 울타리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인가? 이 메타포는 ‘뚫은’ 주체를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으로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로 인해 감염자가 가해자, 지역 주민은 피해자라는 구도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뚫다/뚫리다’로 표현되는 공격과 방어 혹은 침투와 보안의 메타포가 우리의 생각을 어디로 이끄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재난 상황에서 말글의 윤리
감염이 되는 순간 사람(person)은 보균자이자 매개체(carrier)가 된다. 적어도 공공영역에서 해당 감염자의 정보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호스트(숙주)의 실제적/잠재적 위험에 대한 통계’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감염병 유행 사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비극이다. 사람들에게 번호가 매겨지고, 접촉자(contact)의 수가 공개되고, 동선이 소상히 까발려진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와 방역당국은 인격체(character)가 아니라 감염과 관련된 요인(factor)으로서 개인을 다루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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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량이 두 영역에 걸쳐 있다고 본다. 첫 번째는 감염병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한 역학적 역량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도 개개인을 인격적으로, 온전한 인간으로 대하는 차원이다. 전자가 ‘기술’로서의 역량이라면, 후자는 ‘돌봄’으로서의 역량이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어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다.
지금 우리는 어느 순간 확진자가 되어 ‘추적당하고 격리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놓여 있다. 이에 대한 공포는 바이러스보다 넓게 퍼져 있다. 이 상황에서 사회가 나를 감염원이자 정보 쪼가리로 처리하며 낙인찍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 당연히 사회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병에 걸리는 것이 인격을 송두리째 침해당하는 경험이 되기 때문에 사회가 나를 격리하기 전에 나 자신을 사회로부터 자체 격리하는 사례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환자들과 접촉자들, 특정 지역을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가족으로, 동료 시민으로, 우리들의 또 다른 고향으로,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공간으로 대해야 한다. 감염이 인격과 관계, 지역사회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이러스가 마음과 관계와 인격을 무력화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과학 기술의 지혜를 모아 시스템을 보완함과 동시에 사려 깊은 언행으로 서로를 보살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감염예방 수칙을 지키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한다. 보건 및 역학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막연한 공포를 확산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신의 말글을 돌아보아야 한다. 장애인 시설을 ‘시한폭탄’이라 부르고, 특정 집단의 사람을 ‘색출’해서 ‘박멸’해야 한다고 외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동료 시민들을 철저히 타자화하는 동시에 혐오와 공포의 세계를 팽창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어서 이 재난이 진정되고, 맑고 밝은 표정으로 거리에 활기가 돌기를 바란다. 서로의 손을 꼭 잡아줄 수 있고 동료가 잠재적 위협이 되지 않는 일상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잊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를 통해 서로에게 굳건한 신뢰와 따스한 응원이 될 수 있는 삶을 위한 말글을 배울 수 있기를 빈다.
김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