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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의 빛 (1) 최한나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장 12절 말씀 아멘!!
세상은 오늘도 어둠 속에서 몸부림칩니다. 혼란스러운 뉴스, 끝없는 갈등, 그리고 가슴을 짓누르는 상처와 절망. 어둠은 단지 햇빛이 없는 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와 두려움,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상징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번쯤 어둠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리 애써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오고, 차가운 고립감이 우리를 휘감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작은 빛 하나가 켜지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방 안 구석에서 떨고 있던 아이에게 촛불 하나는 세상을 새롭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어둠 속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창조의 빛,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은 그저 우리의 삶을 밝히는 지혜로운 스승이 아니라, 창조의 빛 자체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신 그 순간, 혼돈은 물러가고 질서가 세워졌습니다. (창세기 1:3) 그 빛은 생명의 시작이었고,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지 세상을 밝히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그 빛은 죄와 사망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비추어진 빛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 어둠을 뚫고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빛은 우리가 더 이상 어둠 속에 갇히지 않도록,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어둠을 사랑하는 인간에게 예수님은 빛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이 이 빛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9-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라.” 우리는 종종 어둠 속에 머무르기를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가립니다. 빛은 진리를 드러내기에, 우리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빛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한 빛입니다. 어둠 속에서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내시고, 그 부족함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의 빛은 우리가 숨어 있던 어둠의 방을 열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들은 빛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빛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나 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중심을 예수님께 두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어둠 속에서 등불 하나는 방향을 보여주고, 길을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빛은 우리가 혼란 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이끄는 길잡이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은 두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을 품게 합니다.
또한 빛의 통로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 빛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 빛을 나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빛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어둠 속에 방황하는 이웃들에게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빛이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고, 용서를 선택하며, 사랑으로 그들을 품을 때, 그것은 어둠 속에 작은 촛불을 켜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를 담아낸 삶을 살 때, 세상은 그 빛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은 이 세상의 어둠을 이깁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빛은 이 세상의 어떤 어둠도 삼킬 수 없는 강력한 생명의 빛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그 빛을 받아, 세상 속에서 반사하는 거울과 같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빛을 비추며 살아갑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빛의 통로가 되어, 어둠 속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길을 보여주는 등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비추신 빛이 이제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을 밝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빛을 따르고 나눌 때, 우리의 어두운 세상은 생명과 소망의 빛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삶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형제에게 미련하다고 하는 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하다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장 21-22절 말씀 아멘!!
세상은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대화, 각종 미디어의 목소리,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말들까지, 말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말 속에 얼마나 많은 독이 숨어 있는지 우리는 자주 깨닫지 못합니다. 특히 분노 속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칼과도 같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칼로 찌른 상처보다 깊고 오래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살인이라는 주제를 넘어서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옛 율법에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적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살인의 뿌리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마음 속 분노와 증오라는 뿌리 깊은 죄악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경계를 훨씬 더 깊고 넓게 확대하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마음조차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분노가 말로 표현될 때 그 책임은 더욱 무거워진다고 경고하십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단어들, “라가”와 “미련하다”는 단순한 욕설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라가”는 상대방을 멸시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표현이며, “미련하다”는 상대의 존재를 모욕하며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적 공격이 아니라, 상대방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귀한 존재로 보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반영합니다. 다시 말해, 말 속에 담긴 증오와 교만은 이미 영적 살인을 행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행동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형제를 향한 분노와 멸시는 단지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죄의 씨앗이 됩니다. 이 씨앗이 자라면 결국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에게 화를 내는 순간조차 심판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말과 행동 이전에 마음의 상태를 철저히 살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종종 감정에 휘둘려 말로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가볍게 던진 말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곤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작은 불씨가 큰 산불을 일으키듯, 우리의 말은 관계를 파괴하고,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경고에 그치지 않으십니다. 형제를 향한 분노와 미움을 버리고, 화해와 용서를 통해 진정한 관계 회복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서 형제와의 문제가 떠오를 때 먼저 그와 화해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과 관계가 정결해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화해는 단지 인간적인 감정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행위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첫째, 나는 내 마음 속에 형제를 향한 분노를 품고 있지 않은가? 둘째,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 않은가? 셋째, 나는 화해와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변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분노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도 있고, 실수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연약함을 덮으시며, 용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말은 더 이상 독이 아니라 치유와 생명을 전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3. 세상의 빛 (2)
세상은 종종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조차 그 안에 숨겨진 고통과 혼란을 가릴 수 없고, 우리의 마음은 그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어 헤맵니다. 어둠은 단지 빛의 부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혼란의 그림자이며, 죄의 은폐처이며, 우리가 숨고 싶어 하는 우리의 연약함과 두려움의 가면입니다. 그런데 그 어둠 속으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들어 옵니다. 그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음성과 같고, 혼돈 가운데 질서를 가져오는 새벽의 빛과 같습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얼마나 담대한 선언입니까? 이는 단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의 역할을 넘어서, 온 우주의 근원이심을 밝히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창조하신 것이 바로 빛이었습니다. 이 빛은 단순히 태양빛이나 달빛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혼돈과 공허 속에서 질서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빛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빛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까지 비추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빛은 해가 지면 사라지지만, 예수님의 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둠이 아무리 깊고 강해도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빛은 단지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며, 생명을 불어넣는 빛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빛을 거부하려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니라.” 사람들은 빛 앞에 설 때 자신의 죄악과 연약함이 드러날까 두려워합니다. 어둠 속에 머무르려는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숨기고자 합니다. 마치 깊은 밤, 누구도 보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자신의 죄를 은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은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 빛은 우리의 발걸음을 비추는 등불과 같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의 빛은 단지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지켜 주시는 사랑의 빛입니다. 빛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곧 빛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명을 부여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라면,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빛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은 항상 다른 이를 위해 비춥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비추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빛으로 사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추면, 그것은 불편함을 야기합니다. 세상은 빛을 환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조롱을 당하고, 때로는 거절을 당하며, 때로는 고통과 희생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빛은 결코 어둠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빛은 세상의 모든 어둠보다 강하며, 우리가 그 빛 안에 거할 때, 그 어떤 두려움도 우리를 삼킬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세상 속에서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말과 행동, 우리의 삶의 태도와 사랑의 행위가 어둠 속에서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 내미는 작은 친절의 손길, 때로는 미움 대신 용서를 선택하는 우리의 결단이 어두운 세상에 희망의 빛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 빛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 삶을 통해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반사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삶이 작은 빛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걸음이,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사랑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예수님의 빛을 전하는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 양의 문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7-9절 말씀 아멘!!
우리 인간은 매일 문을 열고 닫습니다. 어떤 문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또 다른 문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문을 열면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며, 인류를 위한 유일한 생명의 통로가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문학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이 말씀 속에는 구원의 길과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왜 양의 문이신지, 그리고 그 문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시며 자신을 생명의 문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양의 문은 단순히 양이 드나드는 통로를 넘어서 목자의 보호와 인도를 상징하는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목자는 밤이 되면 자신의 몸으로 문을 대신하며 양들을 보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양의 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구약의 구원 역사를 직접적으로 연결합니다. 출애굽기의 유월절 사건에서, 어린 양의 피로 문설주를 발라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은 예수님이 구원의 문으로 오실 것을 예표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그 문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이 “문”이 되셨다는 것은 구원의 보편성과 배타성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그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참된 구원의 길입니다. 이 진리는 요한복음 14:6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과 깊이 연결됩니다. 세상에는 많은 대안적 길이 있지만, 그 끝은 멸망이며,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또한 문 밖과 문 안, 그리고 안전과 풍성함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시며, 거짓 목자와 세상의 잘못된 길들을 경고하셨습니다. 세상의 문들은 매혹적이고, 때로는 쉬운 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끝은 혼란과 파멸입니다. 절도와 강도는 양을 해치고, 멸망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이 되셔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참된 안전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 들어간 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며, 나온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문을 통해 드나드는 삶은 단지 구원의 시작에서 멈추지 않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통과한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꼴”은 단지 육적인 양식을 넘어서 영적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 꼴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됩니다. 시편 23편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말씀처럼,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부족함 없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을 통과하는 결단과 삶의 방향입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반드시 결단해야 합니다. 문은 열려 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 생명의 길로 들어서라는 권고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거짓된 문들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문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문은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선택과 방향의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을 통과한 사람은 세상 속에서도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문은 구원의 경계일 뿐만 아니라, 선교적 사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문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시고, 다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이는 마태복음 28:19-20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지상명령과 맞닿아 있습니다. 양의 문을 통과한 자는 자신이 받은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여러분, 양의 문이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수많은 문들은 일시적인 즐거움을 약속하지만, 그 끝은 허무와 멸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문, 안전의 문, 풍성한 꼴을 주시는 문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 문을 통과하시겠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참된 구원의 길을 선택하고, 그 문을 통해 들어가 풍성한 삶을 누리십시오. 또한 그 문을 세상에 알리며, 잃어버린 양들에게 생명의 문을 소개하는 삶을 살아가기시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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