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야말로 수행자에게 있어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수행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길을 알려 준다. 불교의 기본 교설인 연기법에 따르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연 따라 일어난다.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한 인연 관계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된다. 그렇기에 연기는 곧 무아다. 인연 따라 생겨난 것들은 비실체적이기에, 어떤 하나의 가치나 표현을 가지고 그것을 규정지을 수는 없다. 길다거나 짧다, 옳다거나 그르다, 아름답거나 추하다는 등의 모든 상대적인 극단은 사실 인연 따라 잠시 그렇게 불려지는 것에 불과하다.
연필은 긴가 짧은가? 그것은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인연이 옆에 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봇대 옆에서 연필은 짧은 것이지만, 성냥개비 옆에서는 긴 것이 된다. 인연 따라 길거나 짧다고 느끼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된 모든 것들은 무아이고 중도적으로 이해된다.
연기된다는 것은 나 홀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뜻이다. 내가 있기 위해서는 나와 연관된 일체 모든 존재가 크고 작은 인연으로 도울 때 가능한 것이다. 이 연결성은 이 우주법계 전체가 모두 함께 동참하여 꽃을 피우고, 내가 이 자리에 있도록 도운 것으로써, 중중무진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사실 나를 있게 한 것은 이 우주 전체다. 결국 나는 이 우주와 다르지 않다. 이 우주법계를 바다라고 한다면, 나와 너, 모든 크고 작은 존재는 단지 그 일부인 파도일 뿐이다. 그렇기에 너와 나는 서로 다르지 않고, 나와 우주는 서로 다르지 않다.
너에게 베푸는 것은 곧 나에게 베푸는 것이며, 너를 도울 때 내가 도움 받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무주상보시이며, 자비다. ‘내가 너를 돕는다’는 상을 낼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동체적인 생각, 불이(不二)적인 사유의 바탕에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연기와 무아, 자비와 중도는 서로 다르지 않은 가르침이다.
세상을 중도적을 보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수행이다. 과도하게 어떤 한 가지 가치에 사로잡혀 있다거나, 특정한 목표에 집착해 있다거나, 한 사람을 유난히 애착하거나 미워한다거나, 특정한 정치적 성향에 과도하게 집착한다거나, 내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이고 다른 종교는 다 틀린 것이라고 여긴다거나, 심지어 수행을 통해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한다고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 조차 중도에서 어긋난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중도적인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에 대해 특별히 과도하게 좋아하거나, 과도하게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떤 생각이나 판단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절대적으로 옳다고 추종하거나, 과도하게 잘못이라고 폄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중도적으로 대한다. 중도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좋거나 나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치우치지 않은 시선을 말한다.
이처럼 중도는 어느 한쪽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거나, 다른 한 쪽을 틀렸다고 보는 극단적 편견을 버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선입견과 차별심 없이 바라보는 삶의 실천이다. 차별과 분별없이 다만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매 순간 깨어있음으로써 나의 행위가 중도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생각이 중도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말이 중도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견해가 극단에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등에 대해 깨어서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수행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