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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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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국내 극장가를 주름잡고 있다. 개봉한 지 6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한 데 이어 2주 연속으로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이 두꺼운 미야자키 감독이 10년 만에 선보인 작품으로 막강한 화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반해 한국 영화들은 주목도나 화제성 면에서 고전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외국 영화들에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내준 데 이어 또다시 약세가 이어지는 모양새다. 연말 특수를 앞두고 ‘한국 영화 없는 한국 극장가’가 현실로 다가왔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새로운 영화의 길이 열리고 있다. 심지어 “오히려 다양성엔 호재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미야자키 하야오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개봉 2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WHAT: 외국 영화의 극장가 공습
11월 극장가에 외국 영화 강세는 뚜렷하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개봉 2주 차 주말인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3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7일 기준 누적 관객 수 151만 명을 넘겼다. 매출액 점유율로만 따지면 주말 사흘 동안 38.1%를 기록했다. 초현실적인 소재와 심오한 주제 의식 때문에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데도 초반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한국 영화들은 잠잠하다. 지난 1일 개봉한 정지영 감독의 ‘소년들’은 7일 기준 누적 관객 수 26만 명을 기록했다. 1999년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설경구와 유준상 등 굵직한 캐스팅이 돋보인다. 제작비 약 100억원이 투입됐고, 극장 손익분기점은 170만 명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날 개봉한 코믹 액션 ‘용감한 시민’(손익분기점 160만 명)은 25만 명, 코미디언 송은이가 제작하고 장항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스릴러 ‘오픈 더 도어’(손익분기점 20만 명)는 1만7000명을 동원했다. 현재 추세대로면 극장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길 가능성은 높지 않다.
1999년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영화화한 '소년들'에는 제작비 100억원이 들었다. 사진 CJ ENM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관객을 빨아들일 마블 스튜디오의 신작까지 대기 중이다. 8일 개봉한 ‘더 마블스’는 예매율 38.1%를 기록하며 박스오피스 순위 변동을 예고했다. 배우 박서준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예고편이 공개될 때마다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난 5월 국내에서 42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볼륨 3’에 이어 마블의 강세가 이어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워너브러더스는 전 세계에서 14억 달러 넘는 수익을 내며 자체 흥행 최고 기록을 세운 ‘바비’를 지난 1일부터 아이맥스로 재상영하고 있다. ‘바벤하이머’(※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를 합친 단어로,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두 영화를 엮은 밈이 영미권에서 유행했다) 현상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히트한 ‘바비’가 한국에서 유독 저조한 성적을 거둔 끝에 극장에서 내려간 지 한 달 만의 재개봉이다. 흥행보다는 팬 서비스에 초점을 맞춘 결정이다. 동시엔 그만한 경쟁작이 없어 가능한 이벤트다.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2019년작 ‘조커’도 ‘바비’와 같은 날 재개봉했다.
외국 영화들에 흥행을 완전히 내준 올해 초 극장가 풍경이 연말에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올해 상반기 월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5편의 작품 중 4편이 외국 영화였다. ‘아바타: 물의 길’(1월), ‘더 퍼스트 슬램덩크’(2월), ‘스즈메의 문단속’(3~4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볼륨 3’(5월) 등이 극장가를 점령했다. 한국 영화 중에선 ‘범죄도시 3’(6월)만이 유일하게 자존심을 지켰다.
김경진 기자
📂WHEN: 사라진 성수기
한국 영화계를 향한 걱정 섞인 전망이 이어지는 건 극장 관련 지표가 점점 악화하고 있어서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9월 영화관 전체 매출액은 653억원으로 코로나19 유행 전인 2017~2019년 동월 매출액 평균인 1233억원의 52.9%에 그쳤다. 관객 수로 따지면 같은 기간 대비 45.1%로 반 토막에도 미치지 못했다. 추석 연휴가 포함된 전통적 성수기에도 회복세를 보이지 못한 것이다.
극장에서의 저조한 성적이 이어지면서 개봉 시기를 잡지 못하고 표류하는 영화도 늘고 있다. 지난해 7월 개봉한 최동훈 감독의 SF영화 ‘외계+인 1부’는 극장 손익분기점 700만 명에 못 미치는 153만 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흥행에 참패했다. 이미 제작이 끝난 2부의 개봉이 계속 미뤄지다가 내년 1월로 날짜가 정해졌다. 당초 연말 특수를 노리고 12월에 개봉할 거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혹시 모를 경쟁을 피하고 비교적 안전한 시기를 골랐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극장 관객 수가 전반적으로 줄면서 영화업계에 통용되던 성수기와 비수기 구분도 무의미해졌다. 한 영화배급사 관계자는 “코로나19 유행 전후로 찍어두고 개봉 못 한 ‘창고 영화’가 아직도 많이 쌓여 있는데 극장 매출은 회복될 기미가 안 보인다”며 “영화가 개봉했을 때 가장 잘될 시기가 아니라 손실이 가장 적을 시기를 고르다 보니 계산이 더 복잡해졌다”고 말했다.
지난 9월 영화관 전체 매출액은 653억원으로 2017~2019년 동월 매출액 평균의 52.9%에 그쳤다. 사진 뉴스1
📂HOW: 새로운 돌파구 ‘가성비 영화’
관객들의 영화 소비 패턴이 바뀌면서 기존의 흥행 공식이 무의미해졌다. 스릴러, 멜로 등 흥행에 한계가 있다고 여겨지던 장르물들이 극장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뒀다. 몽유병과 빙의를 소재로 한 스릴러 ‘잠’은 50억원이라는 다소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신인 감독의 데뷔작인 데다 소재까지 생소해 흥행은 어려울 거라는 관측이었다. 하지만 관객 146만 명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인 80만 명을 넘겼다.
추석 연휴 대작들에 이어 개봉한 코믹 멜로 ‘30일’도 꾸준히 관객을 불러모으며 개봉 21일 만에 손익분기점 달성에 성공했다. 연인의 기억상실이라는 뻔할 수도 있는 설정을 활용했는데도 재밌다는 입소문을 타고 지난 6일 누적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올해 관객 수 200만 명을 넘긴 4편의 한국 영화(범죄도시 3, 밀수, 콘크리트 유토피아, 30일) 중 가장 적은 제작비 80억원을 썼다.
영화 '30일'은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네 번째로 누적 관객 수 200만 명을 돌파했다. 사진 마인드마크
소규모 영화들의 예상치 못한 성공 사례가 늘면서 업계에는 적은 제작비와 탄탄한 구성을 갖춘 ‘가성비’ 좋은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멜로는 원래 한국에서 잘 만드는 장르 중 하나였는데 큰 흥행이 어렵다는 이유로 한동안 제작이 뜸해졌었다”며 “가볍게 영화를 즐기러 오는 관객에게 확실한 재미를 줄 수 있는 가성비 작품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듯 이달 개봉하는 영화 중에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보다 아기자기한 장르 영화가 눈길을 끈다. 최지우, 이유미, 샤이니 민호 등이 출연하는 스릴러 ‘뉴 노멀’(8일 개봉)은 일상이 된 공포를 주제로 여러 에피소드를 엮은 옴니버스 영화다. ‘기담’ ‘곤지암’ 등 독특한 공포영화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정범식 감독 신작이다. 이동욱과 임수정이 호흡을 맞춘 멜로 ‘싱글 인 서울’(오는 29일 개봉) 인기 인플루언서와 출판사 편집장의 연애를 그린다.
연말 특수를 노린 작품들과의 경쟁을 피해 일찌감치 개봉하는 영화도 있다. 제작비 230억원이 투입된 황정민·정우성 주연 ‘서울의 봄’이 오는 22일 개봉한다. 영화 중에선 12·12 사태를 처음으로 다룬 작품으로, 극장 손익분기점인 450만 명을 넘기기 위해 흥행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뉴 노멀'은 일상이 된 공포를 주제로 하는 옴니버스 영화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결론
경기 불황이 이어지면서 영화업계에 대한 투자가 얼어붙었다. 제작비 긴축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업계 일각에선 한정된 예산으로 최선의 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지금이야말로 제작자들의 진검 승부를 볼 수 있을 때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난해 극장 비수기인 11월에 개봉한 ‘올빼미’는 누적 관객 수 332만 명을 기록하며 깜짝 흥행에 성공했다. 제작비 90억원을 들여 340억원 넘는 매출을 냈다. 궁중 미스터리라는 참신한 소재와 유해진·류준열 등 배우들의 호연이 빛을 발한 결과다. 올해도 작품성으로 흥행을 견인하는 비수기의 영리한 승자가 나올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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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