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부친께서는 1920년생 이십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 나셨죠.
대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로선 몇안되는 사람들이 다닌
일본 와세다 법대를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졸업은 못하고
학도병으로 차출되어 만주일대에서
일본군으로 중국군과 전투를 하다
동료1명과 부대를 탈출
중국군에 투항하여
해방 될때까지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해방 되던해 고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제가 어렸을적
우리 아부지는 저의 형제자매를 둘러 앉혀놓고
중국에서의 무용담을 틈날때 마다 들려 주셨습니다.
눈오는 겨울 일본군영을 탈출할때
생과사가 오가는상황을 넌픽션으로 들을때면
우리도 영화한편을 보듯 빠져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부지께선
그당시에 대학 나오신분 같지않게
사는삶은 폭폭 했습니다.
이런저런 사업도 해보셨지만
잘되질 않았고
자식은 여섯이나 되어
건사 하는데에도 많은돈이 들었을겁니다.
당시 교육비도 만만 찮았습니다.
육남매가 풀로 학교를다닐때
대학 2명 고1명 중2명 초1명 이었으니
어머님은 아침마다 차비 주느라고
북새통 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부지는 화투를 좋아했습니다.
흔히들 노름 한다고 하지요..
제가 어릴적에도
윗어른들이
노름하는 아부지에게
뒤에서 숙떡거리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했습니다.
제가 결혼을 막 했을 당시도 어디가서 하시는지
노름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어느날은
한이틀을 나가시지도 않고
집엘 머무십니다.
아마도 노름밑천이 떨어져
나가지를 못한것 같았어요..
내가 돈이 없어 못드렸습니다.
막 큰아이를 낳고
저도 살기가 팍팍 했더랬습니다.
속으로만 "미안해요 아부지..
곧 넉넉하게 노름밑천 드릴께요.."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아부지 께서는
내가 돈을 잘벌기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1986년에 돌아가셨는데
제가 90년도 부터서
돈을 잘번것 같아요.
그때 까지만 살아계셨더라도
매일 매일 주머니에 남부럽지 않게 돈을 드렸을겁니다.
노름판에 가셔서도 주머니가 두둑하니 얼마나 신이 낫겠어요..
그걸 못해서 저는 효도를 하지 못한 느낌입니다.
다시 살아오신다면
아들의 뒷돈으로 노름판을 평정하게 해 드렸을겁니다.
아쉽게도 그걸 한번 못해 드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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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으리님의 어버지 댓글보고
저도 아버지 생각 났어 적어 봤어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부농
빈농
삶에 차이가 다르겠지요
아버지께 안부전화 드려야겠어요~~
울 아버진 빈농~~
힘든 삶을 사셨지요
@지젤 당시의 우리 부모님들 대부분은
빈농 이셨을거예요.
시대배경이 그럴수 밖에 없었잖아요..
와 일본 와세다 법대를 다니셨다니
그당시 엄청난 인텔리셨네요..
돌아가시고 나면 뭐든 후회로 남지요
결혼하셔서 열심히 사는 모습 보여드린것만으로도
효도 하신겁니다
당시로선 인텔리가 맞았겠지요..
그러나 삶은 인텔리가 아니었어요 ..
울아버지두 노름?ㅡ집문서 들고 나가시는 걸 엄마가ㅡ붙잡고 ᆢ 그 후론 공장하시느라 안했지요ᆢ
명절 때는 가족끼리ᆢ아빠돈 따는게 재미ㅡ
새삼 생각납니다ㅡ에고ᆢ보고프다요
미사님 노름돈 못드린게 불효도 불효네요 ㅎ
예전엔 집안가장들이 노름하는분들이 많았어요.
노름뒷돈 못드린게 제일큰 불효입지요..ㅎ
울아부지는1919년생
95세 돌아가심.
친구같은 아부지였는데 .
먹먹합니다.
아부지께서 그맘 아실겁니다.
아부지랑 관계가 참 좋았는것 같네요.
아들과 아부지의관계는 그런정도는 아니었습니다.ㅎ
오랜만에 반가웠습니다
반가웠어요^^
그시대에 대학다니신 부모님 거의 없으시지요
대단하셨네요~
그렇긴 한데...
부귀영화는 못 누리셨네요.
울모친은 초롱님 여고 왕선배 시던가?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