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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서
손 창 섭
날이 어두워서야 달수(達壽)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기네 집이 아니다. 규홍(査鴻)이가 임시로 들어 있는 집이었다. 그것이 누구의 집이건 간에, 달수(達壽)가 찾아 들어갈 곳이라고는 그 집밖에 없는 것이었다. 공동묘지같이 쓸쓸한 문밖 거리에는 행인도 없었다. 상여 뒤를 따르는 상제처럼 달수(達壽)는 지금 절망을 앞세우고 풀이 죽어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나 이렇게 친구네 집 신세를 져야 하는가? 그는 돌아오는 길에서 날마다 하는 생각을 되풀이 해보는 것이다. 달수(達壽)는 매일 아침 조반을 치르기가 무섭게 쫓겨나듯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취직자리는 아무데도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진종일 꽁꽁 얼어서 거리 바닥을 헤매노라면, 달수(達壽)는 몸보다도 먼저 마음부터 견딜 수 없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거리에 어둠이 오면, 시각(視覺)을 통해서 보다 더 짙은 어둠이 그의 마음을 덮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디라 갈 곳이 없는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규홍(奎鴻)이네 집 쪽을 향하고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둡고 무겁기만 한 귀로에서 ‘최선을 다한 나의 노력은 오늘도 수포로 돌아갔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는 결론이나처럼 선명하게 의식 되는 것 이었다. 수포(水泡)라는 통속적 한자어는, 어둠 속에 무수히 떴다 사라지는 물거품을 그에게 겨푸 보여주는 것이었다. 일편 그러한 그의 헛수고는 비단 오늘에 한한 일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기준으로 출생 이전의 무한한 공간에서부터 이랬고, 앞으로는 또 죽은 뒤에까지도 영원히 이렇게 불행할 것만 같았다. 대문 없는 대문 안에 들어서며, 어쩔 수 없이 인제 나는 파멸인가 보다, 라고 신음 소리같이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방 안에는 어느 날 저녁이나 꼭 같은 광경이 달수(達壽)를 더 한층 피로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 겨울 들어 불이라고는 지펴본 적 없는 방 한가운데, 다리 하나 없는 준석(俊錫)은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것이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한 장밖에 없는 이불 속에 엎드린 채 일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 춥기도 하려니와 일어나 앉아 그에게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것이었다. 준석 (俊錫)이가 누워 있는 발치 쪽으로 취사도구가 놓여 있는 구석에는 돌부처와 같이 창애(昌愛)가 앉아 있는 것이다. 거기에 놓여 있는 석유풍로와 나란히, 창애(昌愛)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방 안에 들어설 때마다 달수(達壽)에게는 이러한 풍경이 따분해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절해고도에서 혼자 헤매다가 기진해 쓰러지는 것 같은 심정으로, 달수(達壽)는 아무데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준석(俊錫)은 자라처럼 목을 빼서 달수(達壽)를 보고, 그냥 말없이 도로 목을 움츠려버리는 때도 있지만, 무어라고 한두 마디 얘기를 걸어주는 일도 있었다. 그런 경우 그 몇 마디가 엉뚱한 도화선이 되어 그들 사이에는 맹랑한 논쟁이 벌어지기가 예사였다. 오늘 저녁도 방금 들어와 앉는 달수(達壽)를 향해,
“어이 무턱, 오늘두 점심 저녁 다 굶었지?”
하고 준석(俊錫)은 노상 알은체를 했다. 남보다 턱이 짧아 있는 둥 만 둥하다고 해서 그는 늘 달수(達壽)를 무턱이라고 불렀다.
“오늘두 취직을 못 해서…….”
이것이 달수(達壽)의 대답인 것이다. 자기가 취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달수(達壽)에게는 누구 앞에서나 죄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달수(達壽)의 뚱딴지 같은 대답에 준석(俊錫)은 실없이 화가 동하는 것이었다. 밥을 굶었느냐고 묻는데 취직을 못 했다는 건 무슨 얼빠진 수작이냐는 것이다. 그야 뻔한 일이 아니냐, 네까짓 게 일 년을 두구 싸다녀 본들, 누가 똥 싸놓구 간 자리 하나 얻어걸릴 턱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달수(達壽)는 이 말이 좀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한 군데서는 이삼 일 뒤에 한 번 들러보라구 그랬는데, 하고 항변해보는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준석(俊錫)은 대뜸 이마에 핏줄을 세우더니, 이 자식이 미쳤어? 하고 벌떡 일어나 앉는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이 민충아, 그래 그 말을 곧이 믿구 있어? 곧장 이삼 일 뒤에는 취직이 될 줄 알어? 어디 배 째기 내기라두 할까? 이 멍텅구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 거야, 그렇게 만만히 취직이 될 줄 알어? 하고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이런 때 달수(達壽)의 얼굴은 그지없이 난처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울음과 웃음이 반반씩 섞인 운명적인 표정인 것이다. 그러한 달수(達壽)는, 그래도, 너는 괜히 자꾸 나보구 화만 내, 하고는 애원하듯 준석(俊錫)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자 준석(俊錫)은, 이 자식아, 누가 괜히야, 누가 괜히 화를 내는 거야, 그래 이걸 화 안 내구 견딜 수 있어? 네 그 바보 같은 음성만 들어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걸 어떻게 참는단 말이냐, 하고는 별스레 씨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너 같은 건 군대에 나가서 톡톡히 기합을 좀 받고 와야만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날마나 벌벌 떨면서 공연히 취직을 구해 싸다니지 말구 어서 군문에 자원입대하라는 것이다. 군대에 나가기가 싫으면 기피자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달수(達壽)는 기피자에 틀림 없다는 것 이다. 기를 쓰고 학교에 다니려는 것은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군대에 나가기 싫어서 학교에 간단 말이냐?”
“그렇지 뭐야. 팔자에 없는 대학을 뭣 하러 다니는 거야?”
“공부하러 다니지 뭣 하러 다녀.”
“공부?”
준석(俊錫)은 그만 어이가 없다는 듯이 미친 사람처럼 웃어버린다. 그리고는 금시 또 약이 바싹 치솟는 표정으로 대드는 것이었다. 세상에 공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나. 누구나 다 대학교를 나오고 싶은 생각이야 간절하지만, 형세가 미치질 못하니 별수 없이 단념하는 게 아니냐? 군속¹으로 일선²을 편력하다가 한쪽 다리를 호개〔中共軍〕에게 먹힌 자기만 하더라도, 결단코 공부하기가 싫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네가 대학에 갈 터수냐? 사지가 멀쩡한 놈이 남 위에 얹혀지내면서 대학은 다 뭐냐, 여러 말 말고 어서 군대에 자원해 나가라고 야단인 것이다.
“그래두 난 꼭 대학을 마쳐야겠는결. 그리구 나서 군대에 나가두 되잖어.”
“이 자식아, 그렇게두 말귀를 못 알아들어. 어엿이 공부할 처지가 돼서 대학엘 댕긴대문 좋단 말이다. 그렇지만 네가 어디 대학에 댕길 팔자냐 말이야.”
“고학을 해서라두 되레 가난한 사람이 공부해야 되잖어.”
“이 자식이 원, 이게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대갈통야.”
준 (俊錫)은 속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다. 정강이에서 잘라져 없어진 왼쪽 다리를 달수(達壽) 앞으로 바짝 내밀고 다가앉으며 잡아먹을 듯이 서두르는 것이다.
“이 메주대갈아. 남 다 못 가는 대학을 왜 너만 유독 댕기겠다구 앙탈이냐 말이야.”
“나 말구두 고학생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래.”
“이 자식아 네가 고학생이야? 거지지 무슨 고학생 이야. 그래 거지가 대학엘 가? 거지가.”
“그래두 난 정말 대학을 마치구 싶은 걸 어떡하노. 그래야 성공하잖어.”
“이런 맹초 봐. ……성공? 아니 성공이라구?”
준석 (俊錫)은 숨이 다 컥컥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하도 기가 차서 말을 할 수 없다는 듯이, 목석이나 다름없는 창애(昌愛) 쪽으로 고개를 돌려 동의를 청 해보는 것 이었다.
“창애(昌愛)야 이 자식, 이게 아주 빙충이지? 형편없는 천치 아냐.”
물론 창애(昌愛)는 아무런 대답도 없는 것이다. 옆에서 벌어진 이 기괴한 논쟁에도 창애(昌愛)는 전연 무관심한 태도였다. 준석(俊錫)은 그만 피로해지고 말았다.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서 온 피로인 것이다. 이런 멍텅구리하구는 더 떠들어봐야 소용없어, 괜히 내 입만 아퍼, 그렇게 중얼거리고 준석(俊錫)은 때에 전 이불 속으로 도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달수(達壽)는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그 얄궂은 표정으로, 이불 속에서 머리만 내민 준석(俊錫)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보며, 왜 내 속을 이렇게두 몰라줄까, 하고 언제나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달수(達壽)와 준석(俊錫)은 거의 저녁마다 이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토론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영원히 일치점에 도달할 수 없는 괴이한 논전은, 부질없이 두 사람에게 피로를 가져다줄 뿐이었다.
이 집의 주인 격인 규홍(奎鴻)이가 돌아오는 것은 밤 아홉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그는 저녁마다 불란서어 강습에 나가는 것이니. 문학을 하는 데는 불란서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돌아와서는 늦도록 손가락을 호호 불어가면 남폿불 밑에서 시를 쓰는 것이다. 최근 한 달 동안이나 걸려서 그가 만들어놓은 시는 「혈서(血書)」 라는 것이었다.
혈서(血書) 쓰듯
혈서(血書)라도 쓰듯
순간(舜間)을 살고 싶다.
(1련 생략)
모가지를
이 모가지 를
뎅겅 잘라
내용(內容) 없는
혈서(血書)를 쓸까!
이게 규홍(奎鴻)에게는 여간 대단한 작품이 아닌 모양이었다. 날마다 한두 구절씩, 혹은 한두 자씩 고쳐서는 다른 종이에 새로 베껴 책상 뒤 벽에 붙여놓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수십 편의 시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거의 매달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규홍(奎鴻)의 시가 한 번도 발표된 일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꾸준히 남의 시를 외우고 또 자기의 시를 썼다. 그것만이 그에게는 최고의 생활인 모양이었다. 규홍(奎鴻)은 충청남도 고향에서 면장을 지내는 꽤 부유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법대를 나와 가지고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 그의 부친은 아들을 서울로 유학(遊學)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의사와는 반대로 규홍(奎鴻)은 국문과에 적을 두고 문학 공부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규홍(奎鴻)이가 법률 공부를 하고 있는 줄로만 믿고 있는 그의 부친은 매달 또박또박 하숙비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여유 있는 금액이 아니었지만, 준석(俊錫)을 위시해서, 창애(昌愛)나 달수(達壽)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는 것 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규홍(奎鴻)의 식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달수(達壽)에게는 그처럼 으르대는 준석(俊錫)도 규홍(奎鴻)의 앞에서는 한수 꺾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준석(俊錫)에게는 도대체 규흥(奎鴻)이가 문학을 한다는 것부터가 비위에 거슬렸다. 정치, 군사, 실업, 자연과학 같은 부문 외에는 모두 여자들이나 할 일이지, 대장부가 관여할 사업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준석 (俊錫)이었다. 그러한 그는 규홍(奎鴻) 이가 밤을 새우다시피 해가면서 시를 외우고 쓰고 하는 것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더욱이 책상 뒤에 붙어있는 규홍(奎鴻)의 시란 겉 읽으면 당장 밸이 뒤틀려서 견딜 수없는 것이었다.
“어이 무턱, 저게 뭐야, 저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야.”
규홍(奎鴻)이가 없을 때, 춘석(俊錫)은 벽에 붙어 있는 시를 손가락질하며 조소를 퍼붓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모가지를 뎅겅 잘라 혈서를 쓴다는 대목이, 무슨 모욕이나 당한 것처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모가지를 잘라서 혈서를 써? 모가지를 잘라서 말야, 이 모가지를 잘라서 말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내 원 별자식 다 보겠어. 규홍(奎鴻)이 같은 건 일선에 나가서 콩알 맛을 좀 봐야 돼.감정 콩알이 가슴패기를 뚫구 나가두 모가지를 잘라서 혈서를 써? 대관절 그게 시야, 그게.”
“현대시란 대개 그런 거야. 신문이나 잡지에두 그 비슷한 시가 왜 자주 나지 않어.”
달수(達壽)의 변명에 준석 (俊錫)은 더 화가 치받치는 모양이었다.
“신문이나 잡지문 젤야. 어이 무턱. 그래 세상에서 신문 잡지가 젤이란 말야. 신문에만 나문 그게 장한 겐가.”
“그렇지만 교과서에두 시가 있는데 그래. 문교부에서 만든 국정 교과서에두 시가 실려 있어.”
“그건 여자가 지은 시겠지. 아무렴 정부에서 남자의 시를 다 인정하구 실린단 말야?”
“아냐, 남자 이름이던데. 남자가 지은 시두 교과서에 얼마든지 있어.”
“이 자식아, 그래 이름만 보구 남잔지 여잔지 어떻게 알어? 남자 이름 같은 여자두 얼마든지 있는 거야.”
“그래두 그 가운데는 남자가 쓴 시두 있다니까 그래.”
“이런 바보 같은 거 봐. 아무렴 정부에서, 남자 대장부가 밥 처먹구 앉아서 미친 소리 같은 시나 쓰라구 장려한단 말야.”
“그렇지만 교과서엔 정말 남자가 지은 시두 있는 걸 어떡해.”
“있으문 당장 가져와 봐라. 남자의 시가 실려 있는 교과설 어디 가져와 보란 말야.”
준석(俊錫)은 마치 싸움하듯 주먹을 다 불근거리며 대드는 것이다. 그러한 준석(俊錫)도 규홍(奎鴻)에게 대해서만은 제 성미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누구를 찾아가 보아도, 다리 하나없는 자기를 규홍(奎鴻)이만큼 너그럽고 무법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밤낮 방에서만 뒹굴며 아무리 오래 얻어먹고 지내도 규홍(奎鴻)은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이 없었다. 방학이 되어 귀향한 뒤에도 잔류 부대를 위해서. 굶지 않을 정도의 자금을 어떻게 해서든 변통해서 부쳐 보내는 규홍(奎鴻)이었다. 셋이 똑같이 규홍(奎鴻)의 하숙비를 뜯어 먹고 지내는 처지이기는 하나, 창애(昌愛)만은 그래도 떳떳한 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집에서 식모의 소임을 맡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창애(昌愛)는 간질병 환자다. 밥을 짓다가 말고, 혹은 밥을 먹다가 말고, 갑자기 얼굴이 레ㅓ지며, 입술을 푸들푸들 떨다가는 눈을 뒤솟구고⁴ 나가 뒹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입으로 거품을 뿜어가며 사지를 허비적거리는 것이다. 본시가 이 집은 규홍(奎鴻)이 부친의 친구네 집 이었다. 6·25 전―—그러니까 중학 시대부터 규홍(奎鴻)이가 다년간 하숙하고 있던 집이다. 사변통에 내처 고향과 부산에 가 있다가, 환도하는 학교를 따라 올라오는 길로, 규홍(奎鴻)은 역시 이 집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대문짝은 물론, 안방 건넌방의 문짝이며 마룻장까지도 죄다 없어진 채로 있었다. 안방에만 문 대신 거적이 드리워 있었다. 그런 속에서 주인 대신 십육칠 세의 낯선 소녀가 나타났다. 그 소녀가 바로 창애(昌愛)였던 것이다. 창애(昌愛)에게는 육순이 넘은 노부가 있다. 그들 부녀는 1·4 후퇴 당시부터, 주인 없는 이 집을 노상 자기 집처럼 지키고 있었던 것 이다. 박(朴)노인이라 불리는 창애(昌愛)의 부친은 필사(筆士)였다. 모서리 떨어진 조그만 가죽 트렁크에다 모필과 먹 따위를 넣어가지고 팔러 다니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붓이 그리 팔리지 않는다고 하며, 근자에는 주로 지방 행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정도로 박(朴)노인은 딸을 보러 돌아오는 것이다. 그때마다 번번이 그는 맨손이었다. 그 자신도 매양 규홍(奎鴻)이나 딸 보기가 안 되었던지, 으레 똑같은 변명을 하는 것이다. 시골이란 현금이 귀하기 때문에 거개가 외상 거래라는 것이었다. 간혹 현금을 받는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식대에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한 행보만 더 하고 올라올 때는,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외상값을 거둬가지고 오겠노라는 것이다. 그때에는 딸이 신세를 지고 있는 규홍(奎鴻)에게 충분히 인사를 차릴 뿐 아니라 준석(俊錫)이와 달수(達壽)에게도 ‘미야게’⁵를 사다주겠노라고 장담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염소수염 같은 노랑 수염을 한 손으로 싹 배틀어 훑고나서 ,
“이 근처에 잘 통하는 술가게가 없을까?”
누구에게 없이 그렇게 묻고는 젊은이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것이었다. 술이 먹고 싶은데 자기 수중에 돈이 없다는 뜻이다. 육십이 넘어서도 머리에 흰 터럭 한 올 없이 얼굴에 주름만 깊어가는 꾀죄죄한 이 노인은, 단 하루도 술 없이는 못 견디는 것이었다. 일생을 가장 안락하게 보내려면 이 괴로운 세상을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인데, 세상사를 잊는 방법으로는 술에 취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술잔을 들 때마다 되뇌는 이 노인의 철학이었다. 주기가 돌기 시작하면 박(朴)노인은 창애(昌愛)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허 내가 왜 이런 걸 슬하에 두었던고. 단신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기다릴 뿐인 여생이 이토록 한스럽지는 않을 것을.”
하고 눈물이 글썽해지는 것이었다. 제 말과는 반대로 술만 취하면 세상사를 잊기는커녕 더 서러워만 지는 모양이었다. 창애(昌愛)와 달수(達壽)하고 셋이만 있을 때면, 준석(俊錫)은 곧잘 창애(昌愛)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허 내가 왜 이런 걸 슬하에 두었던고……’ 하고, 박(朴)노인의 어투를 한껏 영탄조로 흉내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도 창애(昌愛)는 불쾌한 빛도, 다른 어떤 표정도 보이는 일 없이 언제나 마찬가지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다. 돌부처 이상으로 무표정한 소녀였다. 표정뿐 아니라 언어와 거동도 그랬다. 누가 묻는 말에나, 그것도 두 번에 한 번 정도 마지못해 대답할 뿐, 그밖에 스스로 의사 표시를 하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또한 몸도 움직이기를 싫어했다. 끼니때에 밥
을 끓이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외에는 돌멩이처럼 늘 똑같은 자세로 방 한구석에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 달수(達壽)와 준석 (俊錫)이 아무리 큰 소리로 싸우듯 떠들어대도 못 들은 체 거들떠보는 일조차 없었다. 그러한 창애(昌愛)에게서 달수(達壽)는 공포를 느끼는 일이 있는 것이었다. 어쩌다 창애(昌愛)와 단둘이 마주 앉아 있게 되는 경우, 마치 유령이나 귀신을 대한 것 같은 엉뚱한 착각을 달수(達壽)는 일으키는 것이었다. 손을 내밀어도 만져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꼭 그러리라고 생각하며 그는 가만히 한 손을 내밀어본다. 이상히 손끝이 떨리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숨을 죽이고 떨리는 손을 창애(昌愛)의 얼굴로 가져간다. 잡히지 않으려니 하고 창애(昌愛)의 코를 쥐어본다. 그러나 뜻밖에도 잡힌다. 달수(達壽)는 그만 질겁해서 팔을 움츠린다. 그래도 어쩌자고 창애(昌愛)는 동일한 자세를 헝클지않고 앉아 있는 것이다. 달수(達壽)는 전신에 식은땀이 죽 내번지는 것이었다. 도리어 달수(達壽)에게는, 창애(昌愛)가 거품을 물고 지랄을 버릊을⁶ 때에 훨씬 더 인간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창애(昌愛)를 그래도 그 부친은 꽤 대견히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박(朴)노인이 지방 행상 도중에 가끔 규홍(奎鴻)에게 보내오는 기이한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서당에서 천자를 떼고, 신식 학교(보통학교) 사학년을 졸업 했노라는 박(朴)노인의 서한은 이런 것이었다.
안규홍(安奎鴻) 청년 선생 보오라.
기간(其間) 청년 삼인과 처녀 일인 무고무탈하난지 알고저 원(願)이노라. 노생(老生)은 청년 삼인과 처녀 일인이 주야로 넘네 해주신 덕분에 별고 무하게 행상이 번창하노라. 전번 귀가시난 특히 미주(美酒)⁷랄 후히 대접 받자와, 감개무량이노라. 한 가지 부탁은 전언(前言)에도 간곡히 당부하았거니와, 미거한 노생의 독녀랄 청년 선생이 배필로 삼아주기랄 원하노라. 경미한 간질병이 있기는 하나, 미거한 대로 인품은 볼 만한 데가 있으니, 청년 선생과는 천생연분인가 하노라. 남한 각지랄 행상하며 보매, 처녀가 많기는 수없이 많으되, 창애아(昌愛兒)만 한 처녀도 드물더라. 간질병도 혼인 후 잘, 치료하면 즉시 완쾌될 것으로 믿노라. (이하 약)
이러한 편지가 온 날 저녁에는, 청년 삼인 중 이인은, 처녀 일인을 앞에 놓고 결혼에 관한 토론을 하는 것이었다. 이 편지대로 규홍(奎鴻)이가 창애(昌愛)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준석(俊錫)이었다.
“무조건 나는 찬성이다. 규홍(筌鴻)이는 절대적 창애(昌愛)와 결혼해야 된다. 규홍(査鴻)이가 아니문 저런 지랄쟁이와 혼인할 사람이 없다. 절대적이다. 건 절대적이다.”
이러한 준석(俊錫)의 절대적 주장 앞에, 그래도 달수(達壽)는 정면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해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끝판에 가서는 준석(俊錫)의 위압적인 기세에 늘려 결국 굴하고야 마는 달수(達壽)였지만, 시초에는 꽤 자신 있게 자기의 의견을 내세워보는 것이었다.
“건 그렇게만 생각해선 안 될 거야. 멀쩡한 사람이 누가 지랄쟁이를 데리구 살아. 나 같으문 절대 결혼 안 할 테야.”
“이 맹랑한 자식 봐. 누가 너더러 결혼하라는 거야. 너 같은 건 지랄 이하구 혼인할 자격두 없어. 너 같은 건 문제두 안 돼. 규홍(奎鴻)이 얘기야. 지금 규홍(奎鴻)이 얘기를 하구 있는 거 아니야.”
“그렇기 어디 내가 창애(昌愛)하구 결혼한대. 만일 나 같으문 지랄쟁이하구는 살지 않겠다는 거지. 나두 그러니까 규홍(奎鴻)이두 그럴 거란 말야.”
“이런 천하에 바보 같은 자식. 야 무턱. 그래 너하구 규홍(奎鴻)이하구 같어? 우선 생긴 게 너하구 같어? 맘 쓰는 게 너하구 같어? 목소리가 같어? 이런 천치 같은 자식. 너하구 규홍(奎鴻)이 하군 딴 사람야. 겉두 속두 생판 다른 거야. 그러니까 규홍(査鴻)인 창애(昌愛)하구 결혼할 수 있단 말야. 절대적 결혼해야 된단 말야.”
“그렇지만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하지 뭐. 아무렴 지랄쟁이하구 살구 싶은 사람이 어딨어.”
“원, 이런 답답한 자식 봐. 야 이 자식아. 이 메주대가리 무턱아. 그래 규홍(奎鴻)이하구 너하구 생각이 같단 말야? 형제지간이나 부자지간에두 생각이 다른 법 인데 규홍(奎鴻) 이하구 너하구 생각이 같단 말야. 이거 봐. 도대체 시 쓰는 남자하구, 병역 기피자하구 생각이 같단 말야. 내가 하는 소린 말야, 내가 하구 싶은 말은 말야, 결국 모가지를 뎅겅 잘라서 혈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말야, 지랄쟁이하구 결혼할 수 있다는 거야. 절대적 결혼해야 된다는 거야. 알아들었어?”
이렇게 무의미한 논쟁은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이다. 당자인 규홍(奎鴻)이나 창애(昌愛)야 어떻게 생각하든, 준석(俊錫)이와 달수(達壽)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들 두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각과 주장만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규홍(奎鴻)이나 창애(昌愛)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준석(俊錫)이와 달수(達壽)가 그 운명 적 인 논전을 되풀이하든 말든,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든 간에 규홍(奎鴻)에게는 모가지를 뎅겅 잘라 혈서를 쓰는 시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 그렇게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속에서도, 규홍(奎鴻)은 그만큼이나 여러 차레 신문과 잡지에 투고를 해도 발표되지 아니하는 그 시를, 어떻게 고치면 될까 하고 책상에 엎드려 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었다. 장애(昌愛)는 또한 창애(昌愛) 대로 준석(俊錫)이와 달수(達壽)가, 아무리 자기를 가리켜 지랄쟁이니 결혼이니 하고 들까불어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허탈한 태도로 석상(石像)처럼 한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규홍(奎鴻) 이와 창애(昌愛)를 앞에 놓고, 준석(俊錫)과 달수(達壽)의 그 보람 없는 토론은, 같은 식으로 얼마를 더 계속하다가, 마침내는 공식이나처럼 준석(俊錫)의 위압적인 주장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 짓이다.
“이 자식 아. 너는 그래 어디까지나 나한테 반항할 생각이냐. 죽어도 너는 내 말에 찬성 하지 못하겠단 말이냐?”
준석(俊錫)은 여차하면 후려갈길 것 같은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내가 언제 너한테 반항한대.”
“그럼 찬성 한단 말이지?”
“찬성이야 뭐. 억지루 찬성하는 것두 찬성인가.”
“이 자식아. 복잡하게 여러 소리 말구 간단히 한마디루 대답하구 말어. 나한테 끝끝내 대항할 테냐, 그렇지 않으문 찬성할 테냐?”
“글쎄 반항하는 게 아니래두 자꾸 그래……”
“그럼 찬성 한단 말이지?”
“찬성하구두 싶지만, 강제루 하는 찬성은 정말 찬성이 아니래두 그냥 그러네.”
“이 자식이 나를 놀리는 거야 뭐야. 말루 해결이 안 나문 결국 주먹으루 결판을 짓는 것밖에 도리가 없어. 최후 수단은 그것뿐야.”
준석(俊錫)은 달수(達壽)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주먹을 내밀어 보이는 것이다. 그쯤 될 말이면 울음 반 웃음 반 섞인 달수(達壽)의 표정은 그대로 더 심각해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전부가 파멸이라고 생각하며 절망적인 한숨을 토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시 그의 영혼의 무거운 신음 소리로 변하여, 입 밖으로 새어나오고 마는 것이다.
“왜 이렇게두 내 속을 몰라줄까!”
한 주일이 지나도, 두 주일이 지나도 달수(達壽)의 취직 행각은 역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십이월이건만, 그는 겨울 내의도 없이, 맨살에다 염색한 미군 작업복 상하를 걸쳤을 뿐이다. 까칠해진 그의 얼굴은 언제나 먼지투성이다. 그리고 멍든 것처럼 퍼렇게 된 입술은 의식해서 꾹 다물지 않으면 덜덜덜 떨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날마다 닥치는 대로――회사고 음식점이고 서점이고 시계방이고 그러한 구별 없이 십 여 군데 내지는 이십여 군데나 찾아들어 가보는 것이었다. 물론 요즘 와서는 손톱만 한 희망도 거는 일 없이, 그냥 그렇게 찾아다니며 중얼거리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나는 법과 대학생인데, 고학생입니다. 학비와 식비만 당해준다면, 무슨 일 이든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고, 거기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두루 쳐다보는 것이었다. 달수(達壽)는 취직하기 위해서 그 이상의 어떡한 수단도 방법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한 취직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몇 달을 두고 진력해도 어째서 자기만 취직이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가 모를 일이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우선 그 자신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부터가 달수(達壽)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번은 거리에서 바로 자기 앞을 걸어가던 사람이 미군 트럭에 깔려 즉사했다. 그때 달수(達壽) 자신도 하마터면 트럭 앞대가리에 이마뻬기를 들이받을 뻔했다. 그날 이후, 달수(達壽)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데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대량 살육이 자행되었던 6·25 때가 아니라 그러한 불안은 실로 그날부터였다. 따라서 자기는 왜 죽지 않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까가 문제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은 납덩어리처럼 무겁게 잠시도 쉬지 않고 그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그러한 달수(達壽)에게는 준석 (俊錫)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가지나 허리통이 뚝 끊어져 나가지 않고, 어째서 공교롭게도 한쪽 다리만이 저렇게 잘라졌을까 하고 달수(達壽)는 늘 신기해했을 뿐 아니라, 한 번은 그런 생각을 입 밖에까지 냈다가 준석(俊錫)의 격분을 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아니라도 준석(俊錫)은 도대체가 실없이 화를 잘 냈다. 세상만사가 그에게는 하나도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개중에도 달수(達壽)의 언동은 더했다. 준석 (俊錫)은 달수(達壽)를 향해서만은 화를 내지 않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한 자신을 저도 알고 있는 모양이라, 오랫동안 군대밥을 먹어왔기 때문에 자기는 고분고분 말을 못 하노라고 스스로 변명하듯 하기도 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준석(俊錫)은 가짜 상이군인인 것이다. 군속으로 전방에만 나가 있던 그는 한쪽 다리가 절단되어가지고 후방으로 돌아와서부터 어엿이 상이군인 행세를 하려 드는 것이었다. 그가 걸핏하면 달수(達壽)보고도 군대에 나가라거니, 기피자라거니 하는 것에는 그러한 심리적 연유가 있는 것이다. 어떤 날 저녁 준석(俊錫)은 취직을 구하러 가서 어떻게 말을 꺼내느냐고 달수(達壽)에게 물었다. 솔직하게 실제대로 일러주었더니, 준석 (俊錫)은 단박 얼굴을 붉혀가지고, 이 자식아, 어서 죽어라, 죽어,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어서 군대에 나가서 공산군의 총알받이나 되라고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이런 자식이 이십여 년이나 세상에서 살아왔다는 게 아주 기적이라고 하고는, 마치 음식에 관격⁸이라도 된 때처럼, 아이구 답답하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난타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달수(達壽)는 이십삼 년 동안을 이만큼 살아온 것이다. 악성 전염병이 그렇게 무섭게 창궐한
해에도 그는 병사하지 않았고,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애매히 또 무참히 쓰러져간 육이오도 그는 무사히 넘겼고, 해마다 발표되는,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의 엄청난 숫자 속에도 그는 끼지 않았고, 그렇다고 준석(俊錫)이처럼 한쪽 다리를 절단되는 일조차 없이, 지구상에 있는 이십여 억 인류의 그 누구와나 꼭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우연히 살아 있는 인간’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냐. 달수(達壽)는 군대에 나가기 전에 대학교 법과를 마치고 싶었고, 그 뒤에는 고시에 합격하여 판사나 검사가 되었다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려는 뚜렷한 희망조차 품고 있는 것이었다. 준석(俊錫)이가 아무리 그를 조소하고, 죽으라고 공격 한 대도, 어떠한 인간이나 매일 반으로 장래라는 무한대한 미지수에 대하여 약속 없는 기대를 품어볼 수 있는 자격을 그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제도 오늘도 추위에 떨면서 취직을 위해 서울거리를 헤매고 있는 것 이 아니냐. 그렇지만 달수(達壽)는 역시 이 저녁에도 ‘최선을 다한 나의 노력은 오늘도 수포로 돌아갔다’는 자신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물거품이 수없이 떴다가는 꺼지고 떴다가는 꺼지고 하는 탁류 속에 자신이 휩쓸려 내려가는 것 같은 착각을 안은 채, 어둠에 쫓겨 돌아오는 것이다. 방 안에는 언제나 다름없이, 준석(俊錫)이 때에 전 이불 속에서 목만 내밀고 있었고, 창애(昌愛)는 목석같이 한구석에 멍청히 앉아 있는 것이다. 손이 곱아서 숟가락을 제대로 잡을 수 없으리만큼 찬 날씨인데도, 창애(昌愛)는 추위마저 느끼지 못하는 듯이 가만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은 유달리 혹독한 추위다. 올 겨울에 들어 최고의 추위인 것이다. 불란서어 강습에서 돌아온 규홍(奎
鴻)이까지도, 오늘만은 시를 주무를 엄두조차 못 내고, 일찌감치 자자고 서두를 지경이었다. 창애(昌愛)가 옆방으로 자러 간 뒤, 셋은 불을 끄고 언제나처럼 입은 채로 한 이불 속에 기어 들어갔다. 그러나 잠은 고사하고 몸이 자꾸만 더 조여드는 것이었다. 규홍(奎鴻)의 양쪽 옆에 누워 있는 준석(俊錫)과 달수(達壽)는 등과 엉덩이가 시려서 저저끔⁹ 이불을 끌어당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운데 누워 있는 규홍(奎鴻)이 역시 어깻죽지가 얼어들어 와서 그대로 잠이 들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불을 켜고 도로 일어나 앉고야 말았다. 어떻게 하면 눈을 붙이고 밤을 새우나 하는 궁리 끝에, 저쪽 방에서 창애(昌愛)가 혼자 덮고 자는 이불을 가져다가, 넷이서 두 이불에 나누어 자자는 의견이 나왔다. 한 이불에 둘씩 갈라 자자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결국 누가 창애(昌愛)와 한 이불 속에서 자느냐 하는 난문제에 그들은 부닥쳤다. 창애(昌愛)에게 병적으로 공포를 느껴오는 달수(達壽)만은 애초부터 별문제였다. 결국 규홍(奎鴻)이 아니면 준석(俊錫)이가 창애(昌愛)와 같이 자야 할 형편이었다. 규홍(奎鴻)은 늘 하는 버릇대로 히죽히죽 웃으면서 어떻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누가 창에(昌愛)와 같이 자든 간에 그것은 난처한 문제
였던 것이다. 그러자 준석 (俊錫)이가 불쑥 자기가 창애(昌愛)하고 자겠노라고 자청해 나선 것이다. 그는 당연한 주장인 것처럼 자기 말고는 창애(昌愛)와 잘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달수(達壽)와 규홍(奎鴻)은 그러한 준석(俊錫)을 잠시 동안 덤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달수(達壽)는 마침내 그 의견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당황히 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럴 게 아니라구 난 생각해. 그건 아무래두 규홍(奎鴻)이가 창애(昌愛)하구 자는 것이 좋을 거야.”
“이 자식 봐. 규홍(奎鴻) 이가 언제 창애(昌愛)하구 잔다구 그랬어? 규홍(奎鴻)이두 그렇구 무턱 너두 그렇구 모두 창애(昌愛)하구 자기를 꺼려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나밖에 없잖어. 누군 지랄쟁하구 자기가 좋을 줄 알어.”
“언제 규홍(奎鴻)이가 싫다구 그랬나.”
“이런 빙충이 자식 봐. 같이 자겠다는 말을 안 하니까 싫다는 거나 마찬가지지 뭐야.”
“말 안 하문 싫대는 건가.”
“그럼 뭐야. 이 바보야. 잠자쿠 있으문 싫다는 거지 뭐란 말야.”
"그렇지만 넌 여태껏 규홍(奎鴻)이더러 창애(昌愛)하구 결혼하라구 하잖았어? 그러구서는 네가 창애(昌愛)하구 자문 어떻게 되는 거야.”
“이건 또 무슨 트집야.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규홍(奎鴻)이는 언제든 창애(昌愛)하구 결혼하문 되잖어. 언제든 결혼하란 말야. 내가 창애(昌愛)하구 같이 잔다구 해서 규홍(奎鴻)이가 창애(昌愛)하구 결혼 못 하란 법이 어딨어?”
“난 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 난 암만 생각해두 그래선 안 될 것만 같은데…….”
“똑똑히 좀 말해 봐, 이 자식아. 뭐가 안 될 것 같단 말야, 뭐가.”
“내 생각으룬 말야, 네가 창애(昌愛)하구 자는 건, 건 좀 안 될 것 같단 말야.”
“어이 무턱. 그래 넌 언제든 나한테 대항만 할 테냐. 반대만 하겠느냐 말이야. 단 한 번이라두 내 의견에 찬성해본 일이 있어?”
“거야 찬성할 일이문 찬성해. 내가 어디 찬성 안 한대.”
“그럼 왜 반대만 하는 거야. 오늘두 어째서 기를 쓰구 반대만 하러 드느냐 말야.”
“그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암만해두 그래선 안 되겠으니까 그저 안 된다는 게지.”
“안 되나 되나 당장 봐. 너 같은 자식이 반대한다구 내가 겁낼 줄 아니.”
그러고는 누가 미처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준석(俊錫)은 외다리로 성큼 일어서더니 창애(昌愛)가 기거하는 저쪽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어떻게 되는 판인지 모르겠다.”
고 중얼거리는 달수(達壽)의 머릿속에, 벌써 오래전부터 준석(俊錫)은 창애(昌愛)에게 손을 대온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이 부쩍 떠오르는 것이었다.
겨울 방학이 되어 규홍(奎鴻)이가 내일이면 귀향한다는 날 저녁에, 자기 딸하고 부디 결혼을 해달라는 박(朴)노인의 편지가 또 왔다. 그날 밤에 그들은, 규홍(奎鴻)이가 창애(昌愛)와 결혼을 해야 되느냐, 안 해야 되느냐 하는 맹랑한 문제에 관해서 또다시 열심히 토론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이라고 하지만 창애(昌愛)는 여전히 한구석에 물건처럼 놓여 있었고, 무명시인 규홍(査鴻)은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회포를 시로 엮느라고 책상에 달라붙어 여념이 없는 것이니, 결국은 판에 박은 듯이 준석(俊錫)과 달수(達壽)의 그 운명적인 대립인 것이다. 오늘밤에 준석(俊錫)이가 강경히 내세우는 이유로는, 육십이 넘은 박(朴)노인에게서 전후 세 차례나 결혼을 청하는 간곡한 편지가 오지 않았느냐, 늙은 어른이 머리를 숙이다시피 세 번씩이나 보내온 간청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 서울을 떠나기 전에 박노인이 만족할 만한 확답을 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준석(俊錫)이가 그렇게 끝까지 버티더라도 오늘 밤만은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달수(達壽)는 노상 여느 때 없이 흥분을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얼마 전부터 창애(昌愛)의 몸에서 놀라운 이상(異狀)을 발견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건 안 된다구 난 생각해. 규홍(奎鴻)이는 암만해두 장애(昌愛)하구 혼인할 수는 없는 거야.”
“어째서 안 된단 말야, 이 민충아. 어째서 규홍(奎鴻)이가 창애(昌愛)하구 결혼할 수 없다는 거야. 난 절대적 규홍(奎鴻)이니까 창애(昌愛)하구 결혼해야 된다구 생각한다.”
“그렇지반 암만해두 그건,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인 걸 어떡하노…….”
“이런 어쩌리 같은 자식 보게. 왜 안 된단 말야. 어째서 안 된다는 거야. 원 이렇게 답답한 자식이 어딨어.”
달수(達壽)는 잠깐 무엇을 망설이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최후의 기력을 짜내듯이, 한 손으로 창애(昌愛)의 배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신(神)에게라도 항의하듯 필사적인 어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저 배를 봐. 창애(昌愛)의 배가 저렇게 불렀는데…… 저 배를 좀 봐.”
간신히 그러고 나서는 어린애처럼 입을 비죽거리다가 마침내 달수(達壽)는 눈물을 솨르르 흘리는 것이었다. 그는 연신 두 주먹으로 눈을 문질러가며 흑흑 느껴 우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신, 자기는 왜 그다지 섧게 울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제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에 닥뜨리게 되면, 결국 으아 하고 울어버리는 길밖에 없었듯이, 달수(達壽)는 지금 그와 흡사히 절박한 감정에서 울고야 마는 것이었다. 무엇인지 알 수없는 그 무엇에 대해서 항거하려야 항거할 수 없는 무의미한 항거는, 마침내 그에게 있어서 울음으로밖에 터져 나올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달수(達壽)의 울음소리를 듣고, 규홍(査鴻)은 그래도 고개를 돌려 히죽히죽 웃으며 바라보았다. 창애(昌愛)는 그대로 바위 같다. 물론 문제는 준석(俊錫)이다. 그 얼굴에 살기를 담고, 당장 잡아먹을 듯이 달수(達壽)를 노려보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준(俊錫)의 시선에 부닥친 달수(達壽)는 대뜸 울음을 그치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자기는 인제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번개처럼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이 무턱. 너는 나하구 무슨 원수를 졌니? 대천지원수냐?”
준석(俊錫)은 뚜 한참이나 독기 오른 눈초리로 달수(達壽)를 쏘아보고 나서,
“이 자식아. 창애(昌愛)의 배가 불렀건 꺼졌건, 그게 나하구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창애(昌愛)의 배는, 어디까지나 창애(昌愛)의 배지, 내 배는 아니다. 창애(昌愛) 배가 부른 게 어째서 내 죄란 말야.”
하고, 악을 쓰듯이 들이대는 것이었다.
“나두 잘 몰라……·나는 왜 그런, 그런 쓸데없는 말을 했을까.”
달수(達壽)는 울음과 웃음이 반반씩 섞인 그 비극적인 표정으로 영문 모를 소리를 간신히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이 육실할 자식아. 너는 국적¹⁰이다. 병역 기피자니까 너는 국적이나 같다. 이 자식 어디 견뎌 봐라. 내 당장 경찰서에 고발하구 만다. 너 같은 건, 너 같은 악질은 문제없이 사형이야 사형. 내 당장 가서 고발하구 올 테다.”
준석(俊錫)은 일어서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제야 규홍(奎鴻) 이가 따라 일어서며 준석(俊錫)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냐 못 참어. 절대적 못 참어. 이건 내 개인 문제가 아냐. 국가적 문제야. 이런 가짜 대학생을, 이런 기피잘 그냥 둬.”
준석(俊錫)은 소매를 뿌리치고 한사코 나가려고 버둥거렸다. 그런 걸 규홍(奎鴻)이가 겨우 붙들어 앉혔다. 할 수 없이 주저앉기는 했으나 준석(俊錫)은 그래도 성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이 무턱. 넌 국적이야. 넌 기피자란 말이다. 그래 군대에 나갈 테냐, 안 나갈 테냐? 낼이라두 당장 입대할 테냐, 안 할 테냐?”
“그렇지만 난 정말 국적은 아닌데…… 난 정말 어떡허문 좋을꼬!”
달수(達壽)의 눈은 완전히 절망에 떨고 있었다.
“국적이 아니야? 기피자가 그래 국적이 아니야? 그럼 당장 군대에 지원할 테냐? 국적이 안 될래문 당장 군대에 들어가란 말야.”
“사실은 난 기피자두 아닌데. 난 고학생인데…….”
“이 자식아. 네가 무슨 고학생이야. 생판 룸펜이지, 기피자지 뭐야. 어이 무턱. 네가 참말루 국적이 안 될래문, 당장 이 자리에서 혈서를 써라. 자원입대라구 혈서를 쓰란 말야. 쓰지?”
취사도구를 놓아둔 한켠 구석에서 준석(俊錫)은 재빨리 도마 위에 얹혀 있는 식칼을 도마째 달수(達壽) 앞에 가져다놓는 것이었다. 달수(達壽)는 흠칫 놀라며 약간 뒤로 물러앉았다. 준석 (俊錫)은 연거푸 달수(達壽)더러 손가락을 내놓으라고 재촉하며, 규홍(奎鴻)에게로 손을 내밀어 종이를 청하는 것이었다. 규홍(奎鴻)은 여태도 히죽거리며 바라보다가 지나친 농담일랑 삼가라고 하고,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되레 감춰버렸다. 농담이라니, 이게 농담인 줄 알어. 어디 농담인가 진담인가 보기만 하라고 하며, 준석(俊錫)은 문창호지를 북 찢어서 달수(達壽) 앞에 펴놓는 것이었다.
“자, 무턱. 어서 손가락을 내놔. 이 자식 못 내놀 테야? 싫단 말야? 그러문 이걸루 네 모가지를 뎅겅 잘라서 혈서를 쓸 테다.”
달수(達壽)의 얼굴에서 차차로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으며, 할 수 없다는 듯이 검지를 가만히 내밀었다. 그 손가락 끝이 바르르 떨렸다. 규홍(奎鴻)이가 놀라서 준석 (俊錫)의 팔을 붙잡으려 하는 순간, 어느새 도마 위에서는 탁 소리와 함께, 몇 방울의 피가 뻗쳤다. 이어 절단된 손가락에서는 선혈이 철철 흘러내려 도마와 방바닥을 적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 써라. 얼른 혈서를 써!”
준석(俊錫)의 음성도 홍분에 떨렸다. 달수(達壽)의 얼굴은 이미 시체의 살색처럼 더욱 창백해지더니, 입술을 약간 떨다가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기절한 것이다. 규홍(奎鴻)이가 쫓아와 부둥켜안고 달수(達壽), 달수(達壽)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준석(俊錫)은 불뚝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며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어디 가느냐고 규홍(奎鴻)이가 묻는 말에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 자신, 자기는 어디를 가기 위해 뛰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준석(俊錫)은 그냥 그 자리에서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디로든 발을 옮겨놓아야 했다. 그는 걸음을 뗐다. 밖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가졌다. 하늘의 별이 문제가 아니었다. 준석(俊錫)은 한쪽 다리 대신 사용하는 지팡이로 언 땅을 울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이 었다.
-끝-
2016년 5월 13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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