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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트로트(Trot)와 日本 엔카(演歌)
https://www.youtube.com/watch?v=GFLDcnCsZO4
美空ひばり-港町十三番地1957
石本美由起 作詞 上原げんと 作曲
多岐川 舞子(たきがわ まいこ、1969年11月24日- )は、京都府出身の演歌歌手。
本名・丸山静美。血液型O型。身長167cm。
音楽レーベルは日本コロムビア。2017年2月まで三井エージェンシーに所属した。
1985年 京都府立園部高等学校在学中の16歳の時に、NHK『勝ち抜き歌謡天国』奈良大会でチャンピオンになる。その時、市川昭介の目に留まり、 同年、市川に師事。京都と東京を往復しながらレッスンに励む。
多岐川舞子 女の階級
日活映畵「女の階級」主題歌
『女の階級』(おんなのかいきゅう)は、吉屋信子原作による1936年(昭和11年)公開の日活映画であり、楠木繁夫の歌った同名の主題歌とシングルのタイトルである。
https://www.youtube.com/watch?v=F2vXFoLoEzg
왜색가요와 엔카(演歌)의 유래
[대중음악의 뿌리(선성원 저)]
트로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전에 미국에서 발생한 춤 폭스트롵(Fox trot)에서 기인한다. 이 폭스트로트가 1920년대에 콜롬비아, 빅터, 폴리돌 등 레코드사들이 일본에 진출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우리에게 유입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는 우리 가요와 가수들이 일본 레코드사에서 취입을 하면서 일본어로 번안되거나 일본가요가 우리말로 번안되어 한국과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에 유행하기도 했다. 이것이 오늘날 트로트 가요와 왜색시비의 발단이다.
우리가 말하는 왜색가요라고 하는 것은 음악이론상으로 일본만이 가지고 있는 일본속악의 음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음계 중에는 미나까부시와 미야꼬부시의 두 음계로 구성되어 있는 노래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유행가의 대종을 이루는 엔카는 이 두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한국과 일본의 음계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한국, 일본, 중국은 한문 문화권 나라로 5음계를 공유하고 있는데 이것을 유라시아 음계라고 한다. 서양의 평균율 음계를 토대로 분석해 볼 때 라, 도, 레, 라는 테트라코드(Tetrachord : 4도음정선법)와 미, 솔, 라는 테트라코드가 겹친 음계이므로 서양적인 화성을 자연스럽게 용해시킬 수 있다.
한, 중, 일 3국에서 보편적으로 한국이 많이 써오던 음계는 라, 도, 레, 미, 솔(계면조)인 라(La)선법이고 중국적인 음계는 솔, 라, 도, 레, 미 즉 솔(Sol)선법이다. 그리고 일본적인 음계는 레, 미, 솔, 라, 시인 레(Re)선법이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일본의 속요음계의 일종인 음선율이다. 서양음악적으로 분석하면 단음계적인 구성으로 미, 파, 라, 시, 도, 미가 있다. 이 음계가 한국 가요에 큰 영향을 준 음계로서 가장 일본적인 정서를 나타내는 음계이다. 현재도 재래적인 가요 구성 음계는 이런 5음계로 가락이 엮어지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엔카의 유래를 알아보자.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현대화로 전환했다. 그러면서 한편 1883년부터는 더욱 군국주의를 다졌다. 일본 천황의 군인칙어, 그리고 언론을 탄압하는 신문조례법, 징병령개정 등의 발표로 이에 반발하는 청년, 지식층인 장사들의 정치풍자, 그리고 비판적인 시국 풍자극이 성행했다. 자유민권사상을 고취 시키는 조오시, 시바이 일봉의 신파극이 인기를 끌었다. 대중 앞에서 시국을 비판하는 연설을 금지시키자 해학적이고 사회풍자적인 노랫말에다가 일본의 전통 민요나 민속적인 가락에 부르는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거리의 악사를 자유 엔카시(自由演歌師)라고 불렀다. 이 자유엔카시들은 재래적인 속요에다 노랫말만 바꿔 인쇄해서 그들 특유의 악기 샤미셍을 반주해 노래하면서 가사집을 1전씩에 팔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개창운동 같은 것이었는데 의식가요, 저항가요, 같은 것이 잘 팔렸다. 얼마 후 서양악기가 도입되면서 샤미셍 대신 바이올린과 아코디온 같은 악기가 반주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 속요가락이 자연스럽게 서양음악(평균율)과 융합되어 갔다.
이런 풍조가 만연되자 일제는 서양음악을 도입하면서 재빨리 창가교육을 국책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당시 슬로건으로 “새로운 서양문명을 배우자. 근면하자. 공부하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자” 등 일종의 사회정화 운동을 급진적으로 펴나갔다. 이윽고 1881년 ‘창가독본’이 발행될 즈음, 그들은 올겐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창가선생 양성소가 발전해서 일본 최초의 관립음악학교로 발전, 현재 일본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립예술대학 음악대학이 된 것이다.
1910년대 일본 학생들이 중심인 특유의 풍자적인 노래 쇼세이부시가 유행하면서 엔카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대학가에서는 엔카조의 노래가 자생적으로 불리는 일종의 캠퍼스송이 되었다. 한편 1819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창가는 군가조로 바뀌었으며 1904년 노일전쟁이 터지면서 엔카풍의 군가가 많이 등장하게 된다. 1928년 군부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지금까지 반체제 또는 사회 풍자적인 엔카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간을 패배의식화 시키는 사랑, 이별, 눈물, 미련, 대중, 원망, 무기력 등의 가사로 변질되어 갔다.
바로 이 시기가 한국에서는 레코드 문화가 꽃피던 시대로서 일제 식민지 하에 있던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일본 엔카에 물들어 갔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가요의 엔카 유래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일제는 영, 미의 곡을 금지시키는 한편, 엔카 역시 전시체제에 맞지 않는다고 금지시켰다.
1945년 8월, 조국광복의 기쁨도 잠시뿐, 38선의 비극은 우리 국민을 자연히 비탄에 빠져들게 하였고 넋두리 같은 재래식 가요가 대중의 심신을 달래주던 세월 속에서 다시 엔카의 부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이곡은 왜색가요로 금지됐다가 1987년에 해금됐다) 이 후 1962년 민방시대가 열리면서 흘러간 옛가요 프로그램과 다양해지는 여러 형태의 가요방송의 비중을 차지하면서 연가풍의 노래가 활기를 띄게 되었고 새로운 연가풍의 노래가 우리 가요의 주류를 이루어 갔다.
여기에 1965년 한, 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일제하에서 살아왔던 기성세대들에게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우리 가수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일본 엔카풍의 노래 창법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했고, 일부 작곡가중에는 일본방송이 잘 잡히는(당시는 통신 위성이 없었음) 포항이나 삼천포 등지에 내려가 여관방에 죽치고 일본 방송을 청취하면서 곡의 소재를 모아 발표하는 웃지 못 할 시절도 있었는데 아마도 이게 일본 노래 표절의 발단인 듯싶다.
이후부터 우리나라의 유, 무명의 가수들이 일본을 드나들면서 레코드 취입을 했다. 그 가운데서도 이성애 만큼 성공을 거둔 가수는 없을게다. 그녀는 원래 팝송가수로서 특히 카펜터스의 노래를 즐겨 불렀는데 작곡가 박춘석에 의해 철저히 엔카 가수로 재무장한 후 1976년 일본으로 건너가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리메이크시켜 해방 이후 32년 만에 한국 가수가 일본에 가서 성공을 하지 못한다는 징크스를 깨뜨리며 그녀는 1년 반 동안에 무려 8장의 앨범을 낼 정도로 활약이 컸으며 일본의 평론가들은 “엔카의 원류를 한국의 이성애에서 찾았다”며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82년에는 조용필이 동경문화방송(JOQR) 개국 30주년 기념행사 ‘아시아 뮤직 포럼’에 초청되어 아시아의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단연 돋보이는 가수로 클로즈업 되었고 ‘팩스 뮤지카’의 공연 무대를 통해 아시아의 정상을 과시하며 당시 나카소네 수상이 그가 묶고 있던 호텔을 직접 찾아오는 등 국위선양을 했는데 록 가수인 그가 일본에서 이토록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허공’, ‘미워 미워 미워’ 등 엔카 풍의 트롯 때문이다.
그렇다고 트롯 가수가 일본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건 아니다. 이미자, 문주란, 김수희, 나훈아 등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근자에는 계은숙과 김연자가 활동 중인데 계은숙은 10대가수 청백전에 출연할 정도이고 김연자 역시 착실히 인기를 구축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국내에서는 전혀 무명이던 이박사(본명:이응석)가 트롯 메들리로 목하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개화기 이후 우리 노래 속에는 일본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아 왔다. 이는 정치적, 문화적인 사회배경이 그러했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자각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을 최근에는 엔카가 아닌 일본의 팝의 답습으로 옷만 갈아입었을 뿐 신세대들이 즐기는 가요에서도 표절시비가 그치지 않고 있어 오늘날에도 엔카로부터 시작한 왜색음악의 흔적이 살아남아 있음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韓國의 트로트(Trot)
트로트는 1914년 미국의 연예인 Harry Fox가 네발 짐승의 빠른 걸음을 보고 만든 4/4박자 댄스곡인 Foxtrot가 기원이며 1920년대에 일본과 조선으로 들어와 제각기 전통음악과 결부되어 엔카와 트로트로 변환, 정착되었다.
트로트는 우여곡절을 겪어오다가 60년대에 대전환기를 맞이하면서 우리노래로 자리 잡으며 이때 트로트의 원조가 일본이냐 한국이냐의 시비가 제기되었으나 거의 동시에 토착화되었기 때문에 원조시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국에서는 개성 출신 작곡가 전수린 [全壽麟, 1907~1984]이 1926년 ' 《조용한 장안》' 작곡에 이어 1928년 《황성옛터》 《알뜰한 당신》 《나는 열일곱살이에요》 등 주요작품을 남겼다.
일본은 조선에서 古賀 政男(고가 마사오)가 일본으로 돌아가 1931년 발표한 "술은 눈물이나 한숨인가(酒は淚か溜息か)"를 효시로 하여 이른바 "코가 멜로디"라고 불리우는 형식이 자리잡으면서 그를 '엔카의 아버지'라 불렀다.
*일본에서 1888년부터 엔카라고 불리던 일본 전통음악엔 3박자라는 개념이 없어서 지금의 엔카 형태, 멜로디와는 다르다.
일본은 1931년 "酒は淚か溜息か"를 발표한 코가 마사오(古賀 政男) 를 '엔카의 아버지'라 부르는데
조선에서 전수린과 친교했던 고가 마사오가 일본으로 돌아가 1931년 최초로 발표한 엔카곡은 한때 일본에서 조선노래인 '고요한 장안(1926년)' 의 표절이라고 난리가 나기도 했듯이 이른바 "코가 멜로디" 형식은 한국의 전통 민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게 사실이다.
트로트와 엔카의 원조를 굳이 따지자면,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이 1926년에 작곡되었고 역시 전수린 곡인 '황성옛터'는 1928년 곡이며, 엔카의 효시라는 코가마사의 '酒は淚か溜息か 사케와나미다카타메이키카(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는 1931년에 작곡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할 일이다.
한편 일본엔카를 대표하는 원로 가수이자 일본엔카협회 이사장, 다카기 이치로는 제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엔카의 원조는 한국임을 밝힌 바 있다.
다카기이치로: "일본 엔카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 피가 섞여 있고 엔카 멜로디 원조는 한국입니다. ... 일본 엔카의 원점이 되고 있는 고가 마사오씨는 일본 후쿠오카 출신이지만 한국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일본에 건너와 그가 탄생시킨 엔카의 멜로디는 한국의 것이었죠. 그러니까 엔카의 원조는 한국입니다."
코가 마사오(일본어: 古賀 政男, こが まさお, 1904년 11월 18일 ~ 1978년 7월 25일)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이다.
후쿠오카현 오가와시(福岡? 大川市)에서 태어나 7살 때 아버지가 숨진 뒤 1911년(大正元年 8月) 母, 姉, 弟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와 仁川에서 거주하는 큰형 福太에게 의탁, 이무렵 사촌으로부터 大正琴을 받다. 同時에 仁川 公立尋常高等小學校로 전학하였다. 1917년 京城 善隣商業學校에入學. 大阪에서 거주하는 넷째형 久次?으로부터 만돌린을 선물받고 音樂家로서의 뜻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922년 졸업 후 오사카의 상점에 잠시 근무한 뒤 1923년 도쿄 메이지 대학에 입학, 대학 졸업 후인 1931년에 일본 컬럼비아 전속으로 활동했다.
古賀政男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와 11년 간의 기나긴 청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내면서 음악가로서의 소질과 재능을 키워 나갔다.
그러므로 한국 전통의 민요나 대중가요등이 그의 음악적 형성에 큰 밑바탕이 되었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며 이는 古賀政男 스스로도 후일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음악은 한국에서부터 나왔다고 자랑 스럽게 공언할 정도였다. 그의 음악에 한국의 정서나 가락이 상당부분 반영되어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한국 트로트와 일본 엔카의 원조시비
트로트(Trot)와 엔카(演歌)
昭和の巨星スペシャル
作曲家・古賀政男
한국의 트로트(trot 속칭 '뽕짝')이 일본의 ‘요나누키(四七拔き)’ 단음계로 만들어진 엔카(演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인가? 아니면, 일본의 엔카가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트로트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한 것인가?*1) 소위 트로트와 엔카의 원조 시비는 아직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해묵은 논란거리다. 엔카(演歌)의 대부, 코가 마사오(古賀政男)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여덟 살 되던 해에 한국(조선)에 건너와 선린상고(善隣商業高等學校)를 다녔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였다. 오늘날 일본 엔카가 소위 말하는 ‘코가멜로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그는 일본 대중가요에 있어서 '살아있는 전설이자 신화'이다. 그런데 코가 마사오(古賀政男)가 1931년에 최초의 엔카로 발표한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酒は淚か溜息か)'가 전수린(全壽麟, 1907~1984)이 1926년에 작곡한 '조용한 장안'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당시 일본 박문관(博文館)에서 출판한 잡지 '신청년(新靑年)'에서 코가 마사오의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酒は淚か溜息か)'가 조선인 작곡가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을 표절했다고 시비가 일어났다. 사실, 코가 마사오와 전수린은 절친한 사이이며, 두 사람은 조선과 일본에서 자주 만났다. 그리고 문제의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酒は淚か溜息か)'는 전수린의 '조용한 장안'을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전수린은 왜 1926년에 작곡한 '조용한 장안'을 음반으로 제작해서 발표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당시의 음반제작은 오늘날로 말하면 하이테크분야였다. 다시 말해서 음반제작은 일본에 가지 않으면 조선에서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에는 전수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작곡가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1926-1936년 사이에 데뷔한 유명한 작곡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7년에 홍난파와 함께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창설하고 '찔레꽃' '직녀성' 등의 대작을 만든 김교성이 1932년 일본 빅터레코드에 전속되었다. 국민가수 김정구의 친형으로서 배우, 가수, 작곡가를 겸한 천재 작곡가 김용환이 1932년에 폴리돌에 전속되었고, 일본 무사시노음악학교(武藏野音樂學校)를 졸업한 조선의 서양음악 선구자이자 피아니스트로서 '홍도야 울지 마라' '처녀총각' 등을 만든 '김준영'이 이 시기에 데뷔했다. 휘문고보(徽文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한 바이올린니스트 문호월은 '노들강변' 이난영의 '봄맞이' 남인수의 '천리타향'을 작곡했고, 일본음악학교(日本音樂學校)를 졸업한 손목인은 고복수의 '타향살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등 대작을 작곡했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신라의 달밤' 등 수 많은 명곡을 작곡한 한국 최고의 작곡가 박시춘도 이 시기에 데뷔하였다. 일본 동경음악학교를 졸업, 북한에 억류되어 평양음대 총장을 역임하고 북한의 가극 '피바다'를 작곡한 이면상도 역시 이 시기에 빅터레코드에 전속, 데뷔했다.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는 이재호는 일본의 고등음악학교를 졸업, 20세에 오케이레코드에 전속되어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 명작을 작곡하였다. 홍난파도 이시기에 데뷔했는데, 안옥경의 '여인의 호소' 이규남의 '유랑의 나그네' 등을 발표했지만, 가곡분야에서 더 두각을 나타내어 '성불사의 밤' '봉선화' 등의 주옥 같은 명곡을 남겼다. 아무튼 일본 엔카의 대부 코가 마사오는 조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조선인 작곡가와 교류하고 또 조선의 정취를 자연스럽게 익혔을 것이고, 또 전수린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 작곡가들은 일본을 통해서 서양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빅터레코드와 같은 일본 음반회사를 통해서 데뷔하여 활동하였다. 이상으로 보듯 한국의 트로트와 일본의 엔카는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나서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화가 급속히 확산되는 오늘날, 엔카와 트로트의 해묵은 원조 시비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대중음악은 국경을 초월해서 불러서 즐겁고 들어서 좋으면 된다. *1) 일본의 대중가요, 엔카(演歌)가 초기에 '요나누키(四七拔き)' 단음계를 기본으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요나누키'라는 말은 '4와 7이 빠진'이라는 뜻의 일본어, 즉 서양 7음계의 '파'와 '시'가 빠진 단음계를 말한다. '요나누키(四七拔き)' 단음계는 일본밖에 없는 음계가 아니고, 음양오행(陰陽五行: 木火土金水)의 원리에 따른 것으로 중국, 한국, 일본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었다. 즉, '요나누키(四七拔き)'의 '도∙레∙미∙솔∙라'는 한국의 전통음계의 '중(仲)・임(林)・남(南)・황(黃)・태(太) 또는 '무(無)・황(黃)・태(太)・중(仲)・임(林)'에 해당한다. 한국 전통음악의 기본음계는 황종(黃鐘:C)・대려(大呂:C#)・태주(太簇:D)・협종(夾鐘:D#)・고선(姑洗:E)・중려(仲呂:F)・유빈( 賓:F#)・임종(林鐘:G)・이칙(夷則:G#)・남려(南呂:A)・무역(無射:A#)・응종(應鐘:B)의 12율(律)이다. 서양에서는 스코틀랜드가 전통적으로 일본의 '요나누키(四七拔き)' 또는 한국의 ' 중(仲)・(林)・남(南)・황(黃)・태(太) '와 같은 단음계를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민요(선율)가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정서에 잘 맞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졸업식 때에 많이 부르는 '석별(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을 들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00년대를 전후해서는 애국가를 이 곡조로 부를 정도로 우리 정서에 잘 맞다. |
東京都 渋谷区 上原 Uehara, Shibuya City, Tokyo ,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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