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핑계만 댈 것인가. 국가는 제대로 된 인식과 대책으로 여성폭력 근절에 책임을 다하라.
- 거제 데이트폭력 사망사건에 부쳐
지난 10일 경남 거제시에서 전 남자친구로부터 데이트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이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피해 여성은 가해자로부터 수시로 스토킹, 통제, 폭행 등의 피해를 입었으며, 경찰에 접수된 데이트폭력 관련 신고만 약 12건에 달했으나 1건을 제외하고는 전부 현장 종결되거나 발생 보고만 되었다고 한다. 지난 3월, 경기 화성에서도 한 여성이 데이트폭력을 견디다가 관계 중단을 하려 했다는 사유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비슷한 사례가 연이어 보도되면서 많은 시민의 공분을 사고 있지만, 수사기관은 여전히 관련 법안의 ‘공백’을 핑계 삼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거제에서 발생한 데이트폭력 사망사건에서 수차례의 신고에도 제대로 된 처리나 보호조치도 없었던 것과 관련하여 경찰은 ‘데이트폭력 관련 법의 부재’,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를 이유로 들었다고 한다. 정말 그러한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성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의 일상과 개인정보를 잘 알고 있어 피해자가 보복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폭력 피해를 드러내어 해결하기 어렵다.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가해자로부터 합의종용, 협박 등 추가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아 처벌의사를 밝히기 어렵다. 본 사건의 피해자 역시 연락처 변경, 거주지 이동 등 가해자와의 분리를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좌절되었다.
여성폭력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해결하려는 의지만 있었다면 취할 수 있는 조치도 분명 있었다. 현행법상 데이트폭력은 폭행 외에도 상해, 주거침입, 스토킹 등으로 처벌될 수 있고, 국가는 피해자의 보호를 위해 신변경호, 스마트워치 지급, 가해자 경고, 보호시설 연계, 임시숙소 제공 등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하게 되어 있다. 수사기관은 현행범인 가해자를 체포하여 피해자와 분리 후 수사할 수 있다. 피해자의 의사만을 ‘존중’하느라 피해자를 위험에 방치한 것에는 그 어떤 변명도 허용될 수 없다.
여성폭력 피해자가 끝내 죽음에 이른 사건이 잇따르고 있지만, 정부나 정당은 아무런 입장도,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제3당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21대 국회에 계류된 데이트폭력 관련 법안을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냈으나 구체적인 입법 방향은 제시되지 않았다. 21대 국회에서는 가정폭력처벌법의 구조를 따른 별개의 ‘데이트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안’이나, 가정폭력, 스토킹처벌법 등 관련 법에 데이트폭력을 끼워 넣는 형태의 개정안이 발의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입법은 기존 법·제도의 한계를 되풀이할 우려가 크다. ‘반의사 불벌죄’ 조항과 같은 예시에서 드러나듯 범죄자를 처벌해야 할 국가적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주요 문제다. 피·가해자 관계, 여성폭력의 특성 등을 고려한 정의 규정 및 처벌 규정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산재한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니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만으로는 ‘여성의 안전’도 ‘피해자 보호’도 실현할 수 없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매년 발표하는 분노의 게이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최소 19시간에 1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으로부터 죽거나 죽을 위험에 처했다. 참담한 현실 앞에서 국가는 더 이상 ‘피해자의 의사’와 ‘제도의 부재’를 핑계로 여성들의 고통과 죽음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수사기관은 폭력 피해를 신고하면 당연히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상식이 실현될 수 있도록 피해자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하라. 국가는 친밀한 관계 내 여성폭력의 원인과 실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관련 법‧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와 개선에 앞장서라.
2024년 4월 24일
한국여성의전화
* 관련기사 : https://www.news1.kr/articles/5387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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