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 | 손수진
낭도 외
허술해서 좋다는 너의 곁에서는
마음껏 흐트러져도 좋겠다 싶은 날
여수 낭도에 들었다
사막여우의 털빛을 닮은 노을은
붉은 등댓불과 흰 등댓불 사이를 물들이고
바다에서 죽어
미처 떠나지 못한 혼을 가위로 오려놓은 듯
손톱달 하나가 서쪽 하늘에 걸려있고
유일한 포장마차의 따스한 불빛은 배고픈 사람을 불러들여
고흥 영남면에서 시집와 배 네 척을 거느린 선주였던 때가 있었다고
레시피 없이도 술렁술렁 버무린 서대회, 무침에
백 년 전통이라는 젖샘 막걸리로 주인도 객도 취해가는 겨울밤
바닷물도 턱을 고이고 오래도록 찰방거리며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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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떨어지지 말아라
내변산 마실길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산도 그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고 늘어진 팔월
산 매미는 목이 터지라 울고
울울창창 푸른데 홀로 붉은 나뭇잎 하나
물이 든 것인가 병이 든 것인가
세상의 물이 너를 병들게 한 것인가
맘껏 푸르러야 할 나이에 붉은 입술로
어두운 거리에 흔들리며 서 있다
머잖아 너도 떨어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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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진
2005년 《시와사람》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붉은여우』, 『방울뱀이 운다』, 『너는 꽃으로 피어라 나는 잎으로 피리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