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입', '믿는 것'-'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와 '호몰로게이타이'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어지는 '의', 즉, '칭의'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 특히, 시인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원까지도 의미한다.
[롬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어떤 종족이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면에 있어서는 '차별'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고(1:16;2:9, 10),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그러나 이는 구원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특권을 받은 것을 나타낼 뿐이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바울은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외 모든 이방 민족에게 차별이 없는 분명한 이유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로 묘사하고 있는데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이 되어야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
. 더구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하게 하신다.' 이는 주님의 부요함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은혜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헬라어로 '플루톤'인데 능동적인 개념으로 '자비하다'와 '은혜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능력은 무한하여 그가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선한 뜻은 결코 약화되거나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에서 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으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욜 2:32에 예언되어 있었다.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다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다.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와'를 '주'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실제로 70인역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칭의를 받아 구원 받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롬 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바울은 이제 복음을 확장하여 범세계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믿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양자간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주는 신뢰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를 부르는 일이 믿음의 첫걸음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찌 부르리요'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에피칼레손타이'로 '에피칼레손타이'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의 뜻을 가진 '에피칼레오'의 3인칭 복수 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가정법으로 쓰여졌다. 이는 '그들을 부를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바울은 두번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포스''어떻게'를 사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함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복음 전수 방법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는 하였지만 신약성경이 문자와 글로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복음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로 전달되어야 했다.
이같은 일은 성경의 전 시대에 걸쳐 일반적으로 계속 행해져 내려왔다. 왜냐하면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신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세번째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나 전도자의 직책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증언함으로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파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케륏손토스'로 '케륏소'('전파하다', '가르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여기서 '전파자'라는 말 앞에 관사가 없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직책에 있는 사도들이나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모든 자'를 의미한다. 헬라어 '케륏소'는 '전파하다',
'알리다'의 뜻인데 이것은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공개하여 알리는 전령의 행위로서 전령은 왕이 명령한 이외의 말을 가감할 수 없었으며 단지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하는 역할만 하였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역시 이 말이 깊은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메시야에 대한 전파나 종말론적인 언급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 단어를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의 견지에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