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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亂中日記) 계사년 일기
2. 계사년 일기(1593년 2월 1일 ~ 9월 14일)
무제(無題)
비비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못 이루고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가슴
살을 에이는 양 쓰린 이 마음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노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제갈 양 중원 회복 어찌 했던고
재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몇 해를 원수막이 해놓은 일들
이제 와 돌아보매 임만 속였네
2월
• 1일(丙戌) 종일 비가 내렸다. 발포 만호 황정록, 여도 권관 김인영, 순천 부사 권준이 와서 모였다. 발포 진무 최이가 두번이나 군법을 어겼기 때문에 처형했다.
• 2일(丁亥) 늦게야 갬. 녹도 가장, 사도 첨사 김완, 흥양 현감 배 흥립 등의 배가 들어오고 낙안 군수 신호도 왔다.
3일(戊子) 맑음. 여러 장수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보성 군수만이 미처 못 왔다. 동쪽 상방에 나가 앉아서 순천 군수, 낙안 군수, 광양 군수와 한참동안 의논했다. 이날 경상도에서 온 공문에 보면,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김호을과 나장 김수남 등, 명부에 적혀 있는 해군 80여 명이 도망갔다고 한다. 그런데 뇌물을 많이 받고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므로 군관 이봉수. 정사립 등을 비밀히 보내서 70여명을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누고 김호을과 김수남 등은 그날로 처형했다. 오후 8시경부터 비바람이 크게 불어, 여러 배들을 구호하기 어려웠다.
• 5일(庚寅) 경칩이어서 둑제(纛祭)를 지냈다. 비가 퍼붓듯이 내리다가 늦게야 비로소 갰다. 아침식사 후에 가운데 대청에 나가니, 보성 군수가 밤새워 육로로 달려왔다. 뜰에 잡아다 놓고 기일을 어긴 죄를 문초하니 순찰사, 도사 등이 명나라 군사를 접대할 사무를 맡아 가지고 강진, 해남 등지로 온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도 공무인지라, 다만 대장과 도훈도, 아전들에게만 죄를 물었다. 이날 밤에 서울서 온 벗 이언형을 전별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 6일(辛卯) 아침에 흐리다가 늦게 맑음. 날이 밝자 배를 풀고 닻을 달았으나 오정 때는 역풍이 불어, 저물어서야 사량에 이르러 잤다.
• 7일(壬辰) 맑음. 새벽에 떠나 바로 견내량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 원균이 먼저 와 있기에 함께 이야기했다.
• 8일(癸巳) 맑음. 아침에 영남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전라 우수사의 기약 어긴 과실을 몹시 탓하여 지금 먼저 떠나겠다고 한다. 나는 애써 이를 말리고 오늘 중으로는 도착할 것이라고 했더니, 오정 때 과연 돛을 달고 온다. 바라다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기뻐 날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도착하고 보니 거느린 배가 40척에 지나지 않는다. 당일 오후 4시쯤 출발하여 초경 무렵에 온천도에 도착하여 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 10일(乙未) 아침에 흐렸다가 늦게 갬. 오전 6시경에 배로 떠나 바로 웅천 웅포에 이르니, 왜선들이 여전히 줄지어 정박하고 있다. 두 번이나 유인해 보았으나, 그들은 우리를 겁내는 터라 잠깐 나왔다가는 금시에 돌아가서 종시 잡아 섬멸할 수가 없으니 통분한 일이다. 밤 2경에 영등 뒤 소진포로 돌아와 배를 대고 밤을 지냈다.
• 12일(丁酉) 아침에 흐리다가 늦게 맑았다. 삼도군사가 새벽에 일제히 떠나 바로 웅천 웅포에 다다라서 어제처럼 적의 무리들을 드나들면서 유인했으나 적은 끝내 바다에 나오지 않는다. 두 번이나 뒤를 쫓았으나 잡아 섬멸하지 못했으니 어찌하랴? 통분한 일이다. 이날 저녁에 도사가 우후에게 글을 보냈다. 명나라 장수에게 줄 군용품을 배정한 것이라 한다. 초저녁에 다시 칠천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리기 시작하여 밤새 그치지 않는다.
• 14일(기해) 맑음. 증조부의 제삿날이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왔다. 아침 식사 후에 삼도의 군사가 약속하고 있는데, 영남 수사는 병으로 오지 못하고 전라 좌, 우도 여러 장수들과만 약속했다. 이때 우후가 술에 취해서 망령된 말을 했다. 그 못난 꼴을 어찌 다 말하랴? 어란 만호 정담수와 남도포 만호 강응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같이 큰 적을 치려고 약속하는 때에 술을 몹시 마셔 이 꼴이 되니 그 사람됨을 더욱 말할 수 없다.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가덕 첨사 전응린이 와서 만났다.
• 15일(更子) 아침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내렸다. 날씨도 따뜻하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과녁을 만들고 활을 쏘았다. 순천 부사와 광양 현감이 사량 만호 이여념, 소비포 권관 이영남, 영등호 만호(萬戶:고려·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의 관직) 우치적 등과 함께 왔다. 이날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에서 또 해군을 보내니 미리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또 순찰사영 영리의 고목에는, "2월 초하루에 서울에 들어갔는데 왜적은 모두 섬멸되었다."고 했다. 저물녘에 원평증이 와서 만났다.
• 16일(辛丑) 맑음. 늦은 아침에 큰바람이 불었다. 들으니 영의정 정철(鄭澈 1536∼1593)이 사은사가 되어 북경에 간다고 한다. 노비 단자를 정원명에게 보내면서 가져다가 사신 일행에게 전하라고 일러 보냈다. 오후에 우수사가 보러 와서 함께 밥을 먹고 갔다. 순천, 방답도 역시 보러 왔었다. 밤 1경쯤 신환과 김대복이 와서, 임금이 내린 글통과 부체찰사의 공문을 전한다. 그 편에 "명나라 군사들이 바로 개성을 치고, 이달 초 6일에는 반드시 서울에 있는 적을 함락시킬 것이다."는 소식을 들었다.
• 17일(壬寅) 흐렸으나 비는 내리지 않고 종일 동풍이 불었다. 이영남, 허정은, 정담수, 강응표 등이 보러 왔었다. 오후에 우수사를 가서 보고 또 새로 온 진도 군수 성언길도 보았다. 우수사와 함께 영남 수사의 배에 가서, 선전관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저물어 돌아왔다. 도중에서 선전관(宣傳官:조선 시대에, 선전관청에 속한 무관 벼슬)이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재촉하여 진으로 돌아오다가 선전관의 표신을 만나, 배로 맞아들여 상의 분부를 받았다. 그 글은, "급히 적이 돌아가는 길로 가서 도망가는 적들을 섬멸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즉시 받았다는 글을 써 주고 나니, 밤은 이미 4경이나 되어 있었다.
• 18일(癸卯) 맑음. 이른 아침에 행군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행세는 전과 같다. 사도 첨사를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 만호, 녹도 가장, 좌우 별도장, 좌우 돌격장, 광양 2호선, 흥양 대장, 방답 2호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복병하게 하고, 모든 배들로 하여금 적을 유인하게 하니 적선 10여척이 뒤를 따라 나왔다. 경상도 복병선 5척이 날쌔게 나와서 적을 쫓는데, 딴 복병선이 뚫고 들어가 포위하고 쏘니, 왜적은 죽은 자의 그 수를 알 수 없고, 목을 벤 것이 1급(級:목을 벤 적의 머릿수를 세는 말)이다. 여기에서 적의 행세가 크게 꺾이어 끝내 쫓아오지 못한다. 날이 저물기 전에 여러 배들을 거느리고 원포로 가서 물을 길어 가지고 어둠을 타서 영등 뒷바다로 돌아왔다. 사화랑 진에서 밤을 지냈다.
• 19일(甲辰) 맑음. 서풍이 세게 불어 배를 띄울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사화랑에 진을 쳤다. 남해 현령에게 붓과 먹을 보냈더니 와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고여우와 이효가도 와서 인사했다.
• 20일(乙巳) 맑음. 새벽에 배가 떠날 때는 동풍이 잠시 불더니, 적과 교전할 때에는 갑자기 큰바람이 불어 배가 서로 부딪쳐 깨져, 거의 배를 제지할 수가 없다. 즉시 명령하여 호각을 불고 초요기를 세워 싸움을 중지시켰기 때문에 다행히 배들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양 1척, 방답 1척, 순천 1척, 본영의 1척이 충돌되어 깨졌다. 날이 저물기 전에 소진포에 이르러 물을 긷고 밤을 지냈다. 이날 사슴 떼가 동서로 달려갔는데, 순천 부사가 한 마리를 잡아 보내왔다.
• 22일(丁未)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동풍이 크게 불었다. 그러나 적을 무찌르는 일이 급하기 때문에 곧 떠나서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 멎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좀 자는 것 같으므로 배를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삼혜와 의능 두 승장과 의병 성 응지를 제포로 보내어 곧 상륙하는 체 했다. 또 우도 여러 장수의 배들 중에서 시원치 않은 배들을 골라 동쪽 가로 보내어 역시 장차 상륙할 것처럼 속였다. 이것을 본 적들은 당황하여 갈팡질팡한다. 이에 전선을 합쳐서 일시에 무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분산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하게 되었다. 그런데 발포의 2호선과
가리포의 2호선이 명령 없이 제 맘대로 돌입하다가 얕은 곳에 걸려 적에게 습격 당했으니, 그 통분함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조금 있자니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제할 수 없이 되었더니,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냈다. 이 때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서도 못 본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통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에게 책망도 했지만,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돛을 달고 소진포로 돌아와 잤다. 아산에서 뇌와 분의 편지가 웅천 진중으로
왔고 어머님의 편지도 역시 왔다.
• 23일(戊申)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만났고, 아침 식사 후에는 원수사가 왔다. 순천, 광양, 가덕, 방답도 역시 왔고, 이른 아침에 소비포, 영등, 와량등도 와서 만났다. 원 수사는 그 음험함을 이를 길이 없다. 최 천보가 양화진으로부터 와서 명나라 군사의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또 조도어사의 편지와 공문을 전하고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
• 24일(己酉) 맑음. 새벽에 아산과 온양에 보낼 편지와 집에 보낼 편지를 써 보냈다. 아침에 떠나서 영등 앞바다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퍼부어 바로 갈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배를 돌려 칠천량으로 돌아갔다. 비가 멎자 우수사 이영공, 순천, 가리포, 성진도와 함께 꽃놀이를 하면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배 만드는 기구를 들여보내는 일로 패자와 흥양에 가는 공문을 써 보냈다. 양곡 90되로 자염을 바꾸어 보냈다.
• 28일(癸丑) 맑고 바람도 없음. 새벽에 떠나서 가덕에 이르니 웅천의 왜적이 움츠리고 있어 나와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 우리 배는 바로 김해 강 아래쪽 독사리목으로 향했다. 우부장이 변고가 있다고 알리므로 모든 배들이 돛을 펴고 바로 나가서 조그만 섬을 포위하고 보니 경상 수사의 군관과 가닥 첨사의 사후선 등 모두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여 그 모양이 몹시 수상하다. 이에 그들을 결박하여 원 수사에게 보냈더니 수사는 크게 노여워했다. 그의 본의는 군관을 보내서 고기잡이들의 머리를 베어오려 했기 때문이다. 초저녁에 아들 염이 왔다. 이날 사화랑에서 잤다.
• 29일(甲寅) 흐림. 바람이 몹시 불자 염려되어 배를 칠천량으로 옮겼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도 만나러 왔다.
• 30일(을묘) 종일 비가 내렸다. 봉창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3월
• 2일(丁巳) 종일 비가 내렸다. 창 밑에 쭈그리고 앉았노라니 여러 가지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회포가 어지럽다. 이응화를 불러서 한참 이야기하고, 이내 순천의 배로 보내서 원의 병세를 살피도록 했다. 이영남과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서 원 영공의 옳지 못한 행동을 들으니 깊이 탄식스러울 뿐이다. 이영남이 왜놈들이 쓰는 작은 칼을 놓고 갔다. 이영남에게 들으니, 강진 사람 둘이 살아 왔는데, 고성으로 붙들려가서 문초를 받고 갔다고 한다.
0
• 3일(戊午) 아침에 비가 내렸다. 오늘은 삼짇날, 답청하는 날인데 흉악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 있다. 더구나 명나라 군사들이 서울에 입성했는지의 여부조차 모르고 있으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 4일(己未) 처음 맑음. 우수사 이 영공이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원 영공도 왔다. 순천 원은 병이 중하다고 한다. 들으니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함경도로 들어간 왜적이 설한령을 넘어섰다는 말을 듣고 개성까지 왔다가 도로 평안도로 돌아갔다고 한다. 민망함을 이길 수 없다.
• 6일(辛酉) 맑음. 새벽에 떠나서 웅천에 이르니, 적의 무리들은 육지로 달아나서 산허리에 진을 치고 있다. 우리 관군들이 철환과 편전을 비 퍼붓듯이 어지러이 쏘자 죽은 자가 몹시 많았다. 사천의 여인 한 명이 포로로 잡힌 것을 빼앗아 왔다. 이날 칠천량에서 잤다.
• 8일(癸亥) 맑음. 한산도로 돌아와 아침을 먹은 후에 광양, 낙안, 방답이 왔다. 방답과 광양은 술과 안주를 많이 준비해 가지고 왔다. 우수사도 역시 왔다. 어란 만호도 또한 쇠고기 음식 몇 가지를 보냈다. 저녁에 비가 많이 내렸다.
• 10일(乙丑) 맑음. 식사 후에 배를 띄워 사량으로 갔다. 낙안 사람이 행재소로부터 와서 전하는 말이, 명나라 군사들이 일찍이 송도까지 왔는데 연일 비가 와서 길이 질기 때문에 행군하기가 어려워 날이 개기를 기다려 서울로 입성하기로 약속했다 한다. 이 말을 듣고 그 기쁨을 이길 길 없다. 첨사 이홍명이 와서 인사했다.
• 12일(丁卯) 맑음. 아침에 각 고을 문서를 처결해 보냈다. 본영 병방 이응춘도 문서를 정리해 가지고 갔다. 염과 나대용, 덕민, 김인문도 모두 영으로 돌아갔다. 식사 후에 우수사의 사처에서 바둑을 두었다. 광양 현감이 술을 차려 가지고 왔다. 밤늦게 비가 내렸다.
• 13일(戊辰) 비가 세차게 오다가 늦은 아침에야 갰다. 우수사 이억기와 첨사 이홍명이 바둑을 두었다.
• 14일(己巳) 맑음. 여러 배들을 출동시켜서 배 만들 재목을 실어 왔다.
• 15일(庚午) 맑음. 우수사가 왔다. 우수사 편의 장수들과 우리 편 장수들이 관덕정에서 활을 쏘는데, 우리 편 장수들이 많이 이겼다. 그래서 우수사가 떡과 술을 장만해 왔다.
• 17일(壬申) 맑음.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신경황이 와서 전하기를, 안세걸이 본영에 왔다고 했다. 그들은 곧 돌아갔다.
• 18일(癸酉) 큰바람이 종일토록 불어서 사람들이 출입조차 하지 못했다. 소비포(所非浦)이영남과 아침밥을 함께 먹었다. 우수사와 장기를 두어 이겼다. 남해 현령 기효근도 왔다. 저녁때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왔다. 밤중에 비가 내렸다.
• 19일(甲戌) 종일 비가 내렸다. 우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 20일(乙亥) 맑음. 우수사와 이야기했다. 오후에 선전관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온다는 소식이 왔다.
5월
• 1일(甲寅)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 2일(을묘) 맑음. 선전관 이춘영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라는 것이다. 이날 보성 군수 김득광, 발포 만호 황정록 두 장수가 와서 모이고, 그 밖의 여러 장수들은 정한 기일을 미뤘기 때문에 모이지 않았다.
• 3일(丙辰) 맑음.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해군을 인솔하고 왔는데 해군들이 많이 뒤떨어져서 유감이다. 선전관 이춘영이 돌아가고 이순일이 왔다.
• 4일(丁巳) 맑음. 오늘이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니 평생 유감이다. 우수사, 군관들과 함께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도 모여서 약속했다.
• 5일(戊午) 맑음. 선전관 이순일이 영남에서 돌아왔기에 아침밥을 대접했다. 명나라에서 내게 은청 금자 광록 대부(銀靑金紫光祿大夫)의 벼슬을 주었다고 하는데 필시 잘못 전해진 말일 것이다. 저물게 우수사 순천, 광양, 낙안도 영공과 같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이야기했다. 또 군관들을 시켜 편을 갈라 활을 쏘게 했다.
• 7일(庚申)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진해루에 올라앉아서 공무를 처리한 후 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도망갔던 발포의 수군을 잡아내어 처형하고, 순천의 이방도 입대에 관한 사무를 태만히 한 죄로 처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미조항에 이르자 동풍이 세게 불어 파도가 산처럼 일어서 간신히 도착하여 정박했다.
• 8일(辛酉)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출발하여 사량 바다에 이르니 만호 이여념이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에 있다고 말하고,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보러 와서 수사의 잘못이 많다고 자세히 말했다.
• 9일(壬戌) 흐림. 아침에 떠나 걸망포에 이르니 풍세가 불순하다. 우수사 이억기, 가리포 첨사 구사직과 같이 앉아 작전 계획을 짰다. 저녁에 수사 원균이 배 2척을 거느리고 왔다.
• 10일(癸亥) 흐렸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침에 떠나서 견내량에 이르자 흥양 군사를 점검하고 약속을 어긴 여러 장수들을 처벌했다. 우수사와 가리포가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이윽고 선전관 고세충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와서 전하는데, 보니 부산으로 가서 돌아가는 적을 치라는 내용이었다. 부체찰사의 군관 민종의가 공문을 가지고 왔다. 저녁에 영남 우후 이의득과 이염남이 보러 와서 앉아 이야기하다가 밤이 늦어서 돌아갔다. 윤봉사 제현이 본영에 왔다고 편지를 보내 왔기에 답장을 보내어 아직 본영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 11일(甲子) 맑음. 선전관이 돌아갔다. 늦게 우수사가 진을 친 데로 갔더니, 이 홍명과 가리포 첨사도 와 있다. 바둑을 두는데 순천이 또 오고, 계속해 광양도 왔다. 가리포가 술과 고기를 낸다. 조금 있으니 영등으로 적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가덕 밖 바다에 적선이 무려 2백여 척이 머물러 정박하고 출몰하며, 웅천에도 전일과 같다고 한다. 선전관이 돌아가는데, 임금의 분부를 행하는 일에 대해서 도 원수와 제찰사(提察使)에게 보내는 공문 3건을 한 서류로 만들어 가지고 가는 사람도 함께 떠났다. 이날 남해로 왔다.
• 12일(乙丑) 맑음.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그 편에 순찰사의 공문과 송시랑 응창의 통첩을 가지고 왔다. 사복시의 말 5필을 중국에 보내기 위해서 올려 보내라는 지시도 왔으므로 병방 진무를 띄워 보냈다. 늦게 수사 원균이 왔다. 선전관 성문개가 보러와서 피난 중에 계신 임금의 사정을 자세히 전했다. 통곡할 일이다. 새로 만든 정철총통((正鐵銃筒 : 이순신 휘하 장수인 정사준이 제작)을 비변사로 보냈다. 검은 각궁, 후시를 성문개에게 주어 보내니, 그는 순변사 이일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저녁때 이영남, 윤동구가 보러 왔다. 고성 현령 조응도도 보러 왔다. 새벽에 좌우도 체탐인을 영등 등지로 보냈다.
• 13일(丙寅) 맑음. 조그만 산등성이에 과녁을 치고 여러 장수들이 편을 갈라 활을 쏘아 자웅을 다투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민다. 혼자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닭이 울 때에야 겨우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 14일(丁卯) 맑음. 선전관 박진종과 영산령 복윤이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함께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한다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내가 우수사 이억기의 배에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면서 술을 두어 순배(巡杯) 돌리자 수사 원균(元均)이 나타나서 술주정을 하므로 모든 배 안의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 망측한 꼴은 입으로 말할 수가 없다. 저녁에 두 선전관이 돌아갔다.
• 16일(己巳) 맑음. 아침에 적량 만호 고여우, 감목관 이효가, 이응화, 강응표 등이 보러 왔었다. 각 고을 공문과 소장에 대한 결재를 해 주었다. 해와 회가 돌아갔다. 몸이 몹시 불편해서 베개에 누어 신음했다. 들으니 명나라 장수가 중로에 체류한다고 하니 간사한 계고가 없지 않은 것이다. 나라를 위하여 걱정이 많은 터에 일이 이와 같으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흐른다. 점심때 윤봉사가, 관동 아주머니가 양주천으로 피란 갔다가 거기서 별세했다고 하니 통곡함을 참을 수 없다. 어찌 세상일이 이다지도 가혹한가? 장사는 누가 주장하여 치르는가? 대진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더욱 가슴이 아프다.
• 17일(庚午) 맑음. 새벽바람이 몹시 사납다. 아침에 순천, 광양, 보성, 발포 및 이응화가 와서 보았다. 변존서는 병이 있어 돌아갔다. 영남 우수사가 군관을 보내어 진양의 급한 보고서를 보냈는데, 이 제독은 지금 충주에 있고, 적의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노략질을 하고 있다하니 통분한 일이다.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심사도 역시 어수선하다. 고성 군수가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또 추로(秋露) 와 쇠고기 음식 한 꼬치와 꿀을 보냈는데 복중이어서 받기가 미안하다. 그러나 간곡한 정리로 보낸 것이니 의리상 도로 보낼 수도 없기로 군관들에게 내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 18일(辛未) 맑음. 이른 아침에 몸이 매우 불편하여 온백원(溫白元 : 소음인(少陰人) 체질을 가진 사람의 적(積)과 취(聚)를 치료하는 데 사용하는 처방) 4알을 먹었더니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고 조금 몸이 편안해진다. 종목년이 해포로부터 왔는데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 한다. 곧 답장을 써서 돌려보내면서 미역 5동을 함께 보냈다. 전주 부윤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금 순찰사 권율이 절제사를 겸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도장을 찍지 않으니 까닭을 모르겠다. 대금산과 영등 등지의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왜적들이 나타나기는 하나 그다지 큰 흉모는 없다고 한다. 새로 협선 2척을 만드는데 못이 없다고 한다.
• 19일(壬申) 맑음. 순찰사의 공문에 의하면 명나라 장수 유원외의 통첩에 의하여 명나라 군사가 부산 앞바다 어귀를 벌써 끊어 막았다 한다. 공문은 확인서를 쓰고, 또 공무에 관한 보고문도 써서 보성 사람을 시켜 보냈다. 영등 척후병이 와서 다른 변고는 없다고 보고한다.
• 21일(甲戌) 새벽에 배를 띄워 거제 유자도 앞바다에 이르니 대금산의 정찰대가 보고하기를, 적들의 출입하는 것이 전과 같다고 한다. 우수사와 오래도록 이야기하는데 이홍명이 왔다. 오후 2시부터 비가 내려 농작물이 조금 소생되는 듯하다. 이 영남이 보러 왔었다. 원 수사가 거짓말로 공문을 만들어 돌려서 대군이 동요했다. 군중에서도 이렇게 속이니 그 음흉하고 어지러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밤새도록 거센 바람이 불고 또 비가 내렸다. 새벽녘에 거제 선창으로 갔으니 곧 22일이었다.
• 22일(乙亥) 비. 기다리던 비가 흡족히 내렸다. 늦은 아침에 나대용이 본영에서 돌아왔는데, 송시랑의 통첩과 그의 파견원, 본도 도사, 상호군을 지낸 선전관 한 사람 등이 온다는 기별을 가지고 왔다. 송시랑의 파견원이 전선에 대한 것을 알아보러 오는 것이라고 하므로 곧 우후를 정하여 영접하도록 내보냈다.
• 23일(丙子) 새벽에는 흐리기만 하고 비가 오지 않더니, 늦게는 비가 오락가락한다. 우병사의 군관이 와서 적의 소식을 전하고, 또 본도 병마사의 편지와 서류가 왔다. 그 내용은 창원에 있는 적을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워낙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진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녁때 아들 회가 와서 전하기를, 명나라 관원이 영문에 와서 배를 타고 이리로 들어온다고 했다. 어두워진 뒤에 경상도 수사가 와서 명나라 관원 접대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했다.
• 24일(丁丑) 잠깐 비가 내리다가 잠깐 개곤 했다. 아침에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진을 옮겼다. 나대용이 명나라 관리를 사량 뒷바다에서 발견하고 먼저 와서 보고하기를, 명나라 관리를 통역한 표헌과 선전관목 광흠이 함께 온다고 한다. 오후 2시경 명나라 관리 양보가 진문에 당도하였기에 우별도위 이설을 시켜 나가 맞아 배로 안내하게 했더니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많다. 내 배에 오르도록 청하여 황제의 은혜를 재삼 사례하고 맞아서 마주 앉자고 하니 굳이 사양하고 앉지 않는다. 서서 한참 이야기하는데 우리 배의 위엄이 장하다고 많이 칭찬한다. 예물 단자를 바치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다가 마침내 받고서 재삼 감사를 표한다. 아들 회가 밤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 25일(戊寅) 맑음. 명나라 관리와 선전관은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은 모양이다. 아침에 통역 표헌을 다시 청해다가 명나라 장수가 무엇이라 하던가 물었더니, 명나라 장수의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고, 다만 왜적을 쫓아보내라고만 한다는 것이다. 역관의 말에는 송시랑이 해군의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야불수(夜不收:군중의 정탐을 의미하는 중국의 속어) 양보(楊甫)를 보냈던 것인데, 해군의 위엄이 이렇게 장하니 기쁘기 비길 데 없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는 늦게 본영으로 돌아갔는데, 첩자를 준 것도 있다. 낮에 거제 앞 유자도 바다 어귀로 진을 옮기고 우수사와 한참 동안 군사 일을 상의했다. 광양이 오고, 최천보, 이홍명이 와서 바둑을 두다가 돌아갔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갔다. 초경이 지난 뒤에 영남에서 오는 명나라 사람 두 명과, 우감사 영리 한 명과, 접반사 군관 한 명이 진문에 왔으나 밤이 깊어서 들르지 않았다.
• 26일(己卯) 비. 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니 곧 절강의 포수 왕경득인데, 글자는 조금 알지만 한참이나 서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순천이 노루고기를 냈는데 광양도 오고 우수사 영공도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가리포는 청했어도 오지 않았다. 비가 저녁내 그치지 않고 밤새 퍼부었다. 2경 때부터 사나운 바람이 크게 불어 배들이 가만히 있지 못한다. 처음에는 우수사의 배와 부딪치는 것을 간신히 구했더니, 또 발포가 탄 배와 마주쳐서 거의 부서질 뻔하다가 겨우 면했다. 군관 송 한련이 탄 협선은 발포 배와 부딪쳐 많이 상했다 한다. 늦은 아침에 영남 우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과격한 언사가 많이 있으니 가소롭다.
• 27일(庚辰) 풍우에 부딪치기 때문에 진을 유자도로 옮겼다. 협선 3척이 간 곳이 없더니 늦게야 돌아왔다. 영남 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그로 보아 원 수사는 송경략 응창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꼴이 참으로 우습다. 전라도 병사의 편지도 왔는데, 창원의 적들을 오늘 토벌하러 갔다가 비가 아직 개지 않아서 나가 치지 못했다고 한다.
• 28일(辛巳) 비가 종일 내렸다. 순천과 이홍명이 와서 이야기했다. 광양 사람이 장계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독운 임발영은 위에서도 몹시 옳지 않게 여겨서 조사하여 처벌하라는 분부가 있고, 해군 일족에 다한 일도 그전과 같이 하라는 명령이 있다고 한다. 비변사의 공문이 왔는데, 광양 현감은 그대로 유임시킨다고 했다. 관보를 가지고 왔기에 보니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용호장성 응지에게 배를 바꾸어 탈 수 있게 하기 위한 명령서를 써 주어 본영으로 보냈다.
• 29일(壬午) 비. 방답 첨사와 영등 만호 우치적이 보러 왔다. 접반사, 도원수, 순변사, 순찰사, 병사, 방어사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오후 8시쯤 변유현과 이수가 보러 왔다.
• 30일(癸未) 종일 비가 내렸다. 오후 4시경에 잠시 개더니 다시 내렸다. 아침에 윤봉사, 변유헌에게 적에 대한 일을 물었다. 이홍명이 와서 만났다. 원 수사가 송경략이 보낸 화전을 자기 혼자서만 쓰려고 계획했다는데, 병사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자, 공문도 보내려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하더라고 하니 가소롭다. 명나라 배신이 보낸 화공하는 기구인 화전 1천 5백 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혼자 쓰려고 한 것은 그 계획이 몹시 우스운 것이다. 저녁에 조봉이 와서 이야기했다. 남해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아가씨를 싣고 남이 알까 두려워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이같이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 심지어 예쁜 여자를 싣고 놀다니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대장이라는 원 수사조차 역시 이러하니 어찌하랴? 윤 봉사는 일이 있어 본영으로 돌아갔다. 군량미 14석을 실어 왔다.
6월
• 1일(甲申)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님 편지를 보니 편안하시다니 몹시 다행스럽다. 아들의 편지와 조카 봉의 편지도 한꺼번에 왔는데 명나라 관리 양 보가 왜물(倭物 : 일본에서 수입한 물건을 낮잡아 이르는 말)을 보고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더라고 한다. 순천과 광양이 보러 왔었다. 탐후선이 왜물을 가져왔다. 충청 수사 정영공이 오고, 나대용, 김인문, 방응원 및 조카 봉도 왔다. 그 편에 어머님의 편안하심을 알게 되어 매우 다행이다. 충청 수사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저녁밥을 대접했다. 황정욱과 이영이 강변에 나가서 이야기하더라니 한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날은 맑았다.
• 2일(乙酉) 맑음. 아침에 본영의 공문을 처결해서 보냈다. 온양의 강용수가 진중에 이르러 명함을 들여보내고 먼저 경상도 본영으로 갔다. 군관 송두남, 이경조, 정사립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아침식사 후에 순찰사 군관이 공문을 가지고 와서 적의 정세를 물어보고 가려하므로, 우수사와 상의해서 대답해 보냈다. 강용수가 또 왔기에 양식 5말을 주어 보냈다. 정영공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하는데, 가리포의 구우경도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 3일(丙戌) 새벽에 맑더니 늦게 큰비가 내렸다. 지휘선을 연기로 그슬리기 위해서 좌편 딴 배로 옮겨 탔다. 바야흐로 활을 쏘려는데 비가 몹시 내려, 배 위가 새지 않는 곳이 없고 앉을 자리가 없으니 탄식스러운 일이다. 평산포 만호, 소비포 권관, 방답 첨사가 모두 와서 만났다. 저녁에 순찰사, 순변사, 병사, 방어사들의 답장 공문이 왔는데 어려운 일이 많았다. 각 도의 군마가 많아야 5천을 넘지 못하고 또 양식도 거의 떨어져 간다고 한다. 적의 무리들의 방자함은 날로 더해가고, 일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하잔 말인가? 초저녁에 지휘선으로 돌아가 침실로 들어갔다. 비는 밤새 내린다.
• 4일(丁亥) 비. 하루 종일,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식전에 순천 부사 권준이 왔다. 식후에는 충청 수사 정영공과 이홍명, 광양 현감이 와서 종일토록 군사일을 의논했다.
• 5일(戊子) 비. 종일 비가 내려서 사람들이 배 밖으로 머리도 내밀기 어려웠다. 오후에 우수사가 와서 해진 뒤에 돌아갔다. 저물게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풍세가 몹시 사나와서 배들을 간신히 구해냈다. 경상도 수사가 웅천의 적이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면서 들어가 치자고 공문을 보냈다 한다. 그 흉계가 실로 우습다.
• 6일(己丑) 갰다 비가 오다 했다. 보성 군수가 갈려가고 김의검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저녁에 본영의 척후병이 왔는데 어머님께서 안녕하시다고 한다.
• 7일(庚寅) 흐리기만 하고 비는 오지 않았다. 순천과 광양이 오고, 우수사와 충청 수사도 오고, 이홍명도 와서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본도 우후가 저녁에 보러 와서 서울 안 소식을 전했다. 한탄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 8일(辛卯) 잠깐 맑더니 바람이 또 고르지 못하다. 아침에 영남 수사의 우후가 군관을 시켜 전복을 보냈기에 구슬 30개를 대신 보냈다. 나대용이 병으로 본영에 돌아갔다. 병선 진무 유충서도 병으로 사임하고 육지로 돌아갔다. 광양이 오고, 소비포도 왔다. 광양이 쇠고기를 내와서 함께 먹었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각 고을 아전 11명을 처벌했다. 옥과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보내는 것이 성실치 못해서 도망하는 자의 수가 거의 백여명이나 되건만, 번번이 거짓말로 대답하기 때문에 이날 목을 베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다. 거센 바람이 그치지 않아 마음도 어지럽다.
• 9일(壬辰) 오랜 비가 처음 개니 온 군중 장병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다. 심기가 불편하여 온종일 배 속에 누워 있었다. 서류를 접수했다는 접반관의 확인서가 왔다. 그 편에 이 제독이 충주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 본군 의병 성응지가 돌아올 때 본영의 군량미 50석을 가지고 왔다.
• 10일(癸巳) 맑음. 우수사 이억기와 가리포 첨사가 와서 군사에 대한 계획을 자세히 의논했다. 순천 부사도 왔다. 삿자리 20닢을 짰다. 저녁에 영등포 정찰부대가 와서 보고하기를, 웅천의 적선 4척이 저희의 본토로 돌아갔고, 또 김해 바다 어귀에 있던 적선 150여척이 나와서, 19척은 저들 나라로 돌아가고 그 나머지는 부산으로 향했다고 한다. 새벽 2시쯤에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서 적을 치자는 것이다. 그의 시기와 흉모는 형언할 수가 없다. 이날 밤에는 회답하지 않았다. 네 고을의 군량에 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 11일(甲午) 비가 오락가락함. 아침에 왜적 토벌할 공문을 만들어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해서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회답하지 않는다. 낮 12시쯤 충청수사의 배로 갔으나 수사는 내 배로 와 앉아 있으므로 잠깐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그 길로 우수사의 배로 갔더니, 가리포, 진도, 해남들이 우수사와 함께 술자리를 차려 놓고 있었다. 나도 두어 잔 마시고 곧 돌아왔다. 탐후인이 와서 고목을 바치고 돌아갔다.
• 12일(乙未) 잠깐 비 오다가 잠깐 맑음. 아침에 흰 머리털을 10여개 뽑았다. 흰 머리털이 있으면 어떠리오마는 다만 위에 늙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종일 혼자 앉았는데, 사량이 와서 보고 갔다. 밤 10시경에 변존서와 김양간이 들어왔다. 행궁의 기별을 들으니, 동궁께서 편치 않으시다고 하니 걱정스럽고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유상의 편지와 윤 지사의 편지가 왔다. 종 갓동과 철매가 병으로 죽었다 하니 불쌍하다. 중 해당도 왔다. 밤에 명나라 군사 5명이 들어 왔다고, 원 수사의 군관이 와서 전하고 갔다.
• 13일(丙申) 맑음. 늦게 잠시 비가 내렸다. 명나라 사람 왕경과 이요가 와서 우리 수군의 형세가 어떠한가를 보고 갔다. 그들에게서, 이 제독이 진격 토벌하지 않아서 자기 조정에서 문책을 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감격하는 점이 많았다. 저녁에 진을 거제 세포로 옮기고 거기 머물렀다.
• 14일(丁酉) 비가 오다 말다 했다. 오전에 낙안이 보러 왔다. 가리포를 청해다가 아침밥을 함께 먹었다. 순천, 광양도 왔었다. 전운사 박충간의 공문과 편지가 왔다. 경상 좌수사의 공문도 왔다. 늦게 비바람이 몹시 치다가 잠시 후에 그쳤다.
• 16일(기해) 잠깐 비가 내렸다. 느지막하게 낙안 원편에 진해 고목을 얻어 보니, 함안에 있는 각 도 대장들은 왜적들이 황산동에 나가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물러가서 진양과 의령을 지킨다고 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순천, 광양, 낙안 등이 왔다. 초저녁에 영등 정찰군 광양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김해, 부산에 있던 적선이 무려 5백여 척인데, 안골포, 웅포, 제포 등지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적도들이 합세해서 다른 지방을 침범할는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우수사와 정 수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밤 10시경에 대금산에 있던 정찰군이 와서 보고하는 내용도 역시 이와 같다. 12시쯤 송희립을 경상 우수사에게로 보내서 의논했더니, 내일 새벽에 수군을 거느리고 오겠다고 한다. 왜적의 꾀는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 17일(更子) 비가 오다 말다 했다. 이른 아침에 원 수사와 우수사와 정 수사들이 와서 이야기했다. 함안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진주로 물러가 지킨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조붕이 창원에서 와서 적의 형세가 대단하더라고 전해주었다.
• 18일(辛丑) 비다 오다 말다 했다. 바람까지 몹시 불므로 진을 오양역 앞으로 옮겼다. 그러나 바람에 배가 안정되지 않아서 다시 고성 역포로 옮겼다. 봉과 변유헌 두 조카를 본집으로 보내서 어머님의 안부를 알아오게 했다. 명나라 장수가 선사한 왜물과 기름 등속을 본영으로 실어 보냈다.
• 21일(甲辰) 맑음. 새벽에 진을 한산도의 망하응포(望何應浦)로 옮겼다. 점심때 원연이 왔다. 아침에 아들 회가 와서,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이다.
• 22일(乙巳) 맑음. 전선을 만들기 위해서 자귀질을 시작했다. 목수가 2백 14명이요, 본영에서 온 사람 72명, 방답에서 온 사람 35명, 사도에서 온 사람 25명, 녹도에서 온 사람 15명, 발포에서 온 사람 15명, 여도에서 온 사람 15명, 순천에서 온 사람 10명, 낙안에서 온 사람 5명, 흥양, 보성에서 온 사람 각각 10명이었다. 방답은 처음에 15명만 보냈기에 군관과 아전을 처벌했는데, 그 정상이 몹시 간사하다. 들으니 지휘선의 1호선 손걸을 본영으로 돌려보냈었는데, 못된 짓을 많이 하다가 잡혀 갇혔다고 한다. 이 자를 잡아오라고 했더니 이미 와서 인사를 표하기에, 제 맘대로 출입한 죄를 다스리고 겸해서 우후의 군관 유경남도 처벌했다. 오후에 가리포가 오고, 적량의 고여우와 이효가도 왔다. 저녁 무렵 소비포의 이 영남이 보러 왔었다. 초저녁에 영등 정찰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딴 일은 없고, 다만 적선 2척이 온천으로 들어가기에 탐지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 24일(丁未) 식후부터 큰바람이 불더니 늦게까지 그치지 않았다. 저녁에 영등이 정찰부대가 와서 아뢰기를, 적선 5백여 척이 23일 밤중에 소진포로 들어갔고, 가리포사와 경상 우수사도 와서 함께 의논했다. 듣자니 진주가 포위당했는데 아무도 감히 진격하지 못한다고 한다. 날마다 비가 내려 적들이 물에 막혀서 날뛰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 하늘이 호남을 돕는 것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낙안의 군량 1백 30석 9두를 나누어 주었다. 순천의 군량 9백석은 받아서 찧는 중이라 한다.
• 26일(己酉) 큰비가 몹시 내리고 남풍이 몹시 불었다. 아침에 복병선이 와서 변고를 보고하는데, "적의 중선과 소선 각 1척이 오양역 앞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에 호각을 불어 닻을 들게 하고 모두 적도로 나가서 진을 치게 했다. 순천의 군량 1백 50석을 받아서 의능의 배에 싣게 했다. 저녁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적의 무리가 무수히 진주 동문 밖에 합쳐서 진을 치고 있는데 매일 큰비가 와서 물에 막혔는데도 악착같이 싸우고 있다. 지금 큰물이 적진을 휩쓸려고 하고, 또 적들은 밖으로 양식과 구원병이 올 길이 없으니, 이런 기회에 만일 대군이 힘을 합해서 한번 싸우면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마침 양식이 끊어졌으니, 우리 군사는 평안히 앉아서 피로한 적을 막는 것이 되니, 그 형세가 백번 싸우면 백번 다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또 이렇게 순조롭게 도와주시니 해군의 적이 비록 5, 6백 척을 합쳐서 오더라도 우리 군사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 27일(庚戌) 비가 오다 말다 했다. 오정에 적선 2척이 견내량에 나타났다고 하므로 전군을 거느리고 나가 보니,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이에 불을도 앞바다에 진을 쳤다. 아침에 순천, 광양을 불러다가 군사 문제에 대해서 토의했다. 충청 수사가 자기 군관을 보내서, 흥양의 군량이 떨어졌으니 3석만 꾸어 달라고 하므로 주어 보냈다.
• 28일(辛亥) 잠깐 비가 오고 잠깐 맑았다. 어제 저녁에 강진의 정찰선이 적과 싸운다는 말을 듣고 온 군대를 출발시켜 견내량에 이르니, 적도들은 우리 군사를 보고 두려워하여 달아난다. 물결과 바람이 모두 거슬려서 들어오지 못하고 거기 머물러 밤을 지냈다. 새벽 2시경에 불을도에 돌아왔으니 오늘은 곧 명종의 제삿날이다. 종 봉손과 애수 등이 들어와, 고향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다행스럽다. 원 수사와 우수사가 함께 와서 군사일을 의논했다.
• 29일(壬子) 맑음. 서풍이 잠깐 불더니 개고 빛이 맑다. 순천과 광양이 보러 오고 어란 만호와 소비포 등이 또한 왔다. 종 봉손 등이 아산으로 가는데, 홍, 이 두 선비에게와 윤선각 명문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진주가 함락되어 황명보, 최 경희, 서예원, 김천일, 이종인, 김준민이 전사했다고 한다.
7월
• 1일(癸丑) 맑음. 인종(仁宗)의 제삿날이다. 밤기운이 몹시 차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배에 앉아 있노라니 온갖 회포가 일어난다. 선전관이 와서 임금의 유서를 전했다.
• 2일(甲寅) 맑음. 날이 저물어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함께 선전관을 대접하고 돌아갔다. 저물게 김득룡이 와서 진주가 위태하다고 전한다. 놀랍고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이는 필시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전한 것이리라. 초저녁에 원연이 와서 여러 가지로 군중의 일들을 이야기했는데 우스운 말이 많다.
• 3일(을묘) 맑음. 적선 두어 척이 견내량을 넘어오고, 한편으로는 육지로도 나오고 있으니 통분한 일이다. 우리 배가 바다로 나가서 그 뒤를 쫓자 그만 도망해 버렸다. 그대로 돌아와서 잤다.
• 4일(丙辰) 맑음. 흉악한 적 수만여 명이 죽 벌여서서 기세를 올리니 통분하다. 저녁때 걸망포로 진을 옮기고 잤다.
• 5일(丁巳) 맑음. 새벽에 정찰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견내랑으로 적선 10여 척이 넘어온다."고 한다. 모든 배가 일시에 떠나서 견내량에 이르니, 적선은 어쩔 줄 모르고 달아나다. 거제 땅 적도에는 말만 있고 사람은 없기로 싣고 왔다. 늦게 변존서가 본영으로 떠났다. 또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긴급 보고가 광양에서 왔다. 저녁에 걸망포로 돌아와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 6일(戊午) 맑음. 아침에 방답이 보러 왔고 소비포도 왔고, 한산도에서 새로 만든 배를 끌어올 셈으로 중위장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가서 끌어왔다. 공방과 곽언수가 행조로부터 왔는데, 도승지(都承旨) 심희수 및 윤자신과 좌상 윤두수의 답장이 왔다. 윤기헌도 안부를 보냈고, 또 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기록한 문서도 왔다. 이것을 보니 탄식할 일이 많다. 흥양이 군량을 실어 왔다.
• 7일(己未) 맑음. 아침에 순천, 가리포, 광양이 보러 와서 군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가볍고 날랜 배 15척을 뽑아 견내량 등지로 가서 탐색하기로 하여 위장이 거느리고 갔다. 그러나 적의 종적이 없다고 한다. 거제에 사로잡혀 갔던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적들의 하는 일을 물었더니, "흉악한 적들이 우리 수군의 위엄을 보고 달아나려 한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진주가 이미 함락되었으니 필경 전라도까지 넘어갈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말이다. 우수사가 내 배에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 8일(庚申) 맑음. 남해로 왕래하는 조붕에게서, 적이 광양을 친다는 바람에 광양 사람들이 이미 관청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는 말을 들으니,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다. 순천과 광양을 곧 보내려다가 정확치 못한 소문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이를 중지하고, 사도 군관 김붕만을 보내서 알아 오도록 했다.
• 9일(辛酉) 맑음. 남해에서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 순천이 이미 전멸했다." 하므로, 광양과 순천과 송희립, 김득룡, 정사립 등을 떠나 보냈고, 이설은 어제 먼저 보냈다. 이 소식이야말로 뼈속까지 아픔이 스며들어 말을 못하겠다. 우수사, 경상 수사와 함께 일을 의논했다. 이날 밤 바다에 달은 밝고 티끌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잠깐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민다. 새로 한 시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의 동정을 전하는데, 사실은 왜적이 아니고 영남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거짓 왜적의 모양을 하고 광양으로 들어가서 민가를 쳐부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니 오히려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진주 일도 헛소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주 일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닭이 이미 울었다.
• 10일(壬戌) 맑음. 김붕만이 두치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광양의 일은 사실이나 다만 왜적 백여명이 도탄으로부터 건너와서 광양을 치고 들어갔으나 그들은 총 한 방도 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왜적이라면 어찌 총 한 방도 쏘지 않았을 리가 있으랴. 저녁에 오수가 거제 가참도(加參島: 경남 거제시 사등면 가조도)로 부터 와서 말하기를, 적선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자들의 말이, 무수한 적들이 창원으로 가더라 한다. 그러나 이 말도 믿을 수가 없다. 저녁에 진을 한산도 끝 세포로 옮겼다.
• 11일(癸亥) 맑음. 아침에 이상록이 명령을 어긴 여러 장수들에게 전령할 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적선 10여척이 견내량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이에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5, 6척이 벌써 진 앞으로 다가온다. 그대로 진격했더니 적들은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오후 4시쯤 걸망포로 돌아와 식수를 길어오도록 했다. 사도 첨사가 와서 말하기를, 두치에 적이 나타났다는 것은 헛소문이요, 광양 사람들이 왜병의 복장을 가장하고 저희끼리 장난한 것이라 한다. 순천과 낙안은 이미 결딴이 났다고 한다. 통분함을 금할 길이 없다. 어두운 뒤에 오수성이 광양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광양의 반란은 모두 진주에서 피란 온 사람들과 그 고을 사람들이 꾸민 흉계라고 한다. 고을 창고는 쓸쓸하고 마을은 텅 비어 종일 다녀도 사람 하나 구경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순천이 가장 심하고 낙안은 그 다음은 간다고 했다. 달빛 아래 우수사의 배를 찾아갔더니 원 수사와 직장 원연이 먼저 와 있다. 군사 일에 대해서 의논하다가 헤어졌다.
• 12일(甲子) 맑음. 가리포의 군량 진무가 와서 전하기를, 사량 앞바다에서 자는데 왜적이 우리 옷을 입고 우리 배를 타고 돌입해서 총을 놓으면서 노략질해 가려고 한다고 한다. 이에 곧 경쾌하고 날랜 배 3척씩을 뽑아서 모두 9척을 보내 잡아 오도록 명령했다. 한편 또 배를 각각 3척씩을 뽑아 착량으로 보내서 요새를 방어하고 오도록 했다. 고목이 왔다. 또다시 광양의 일은 헛소문이라고 전해 왔다.
• 13일(乙丑) 맑음. 늦게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광양, 두치 등지에는 적의 행적이 없다고 한다. 흥양 현감이 들어오고 우수사도 또 왔다. 순천의 거북선 수군인 경상도 사람의 종 태수가 도망가다가 잡혀왔기로 형을 집행했다. 늦게 가리포가 보러 오고, 흥양원도 또 와서 두치의 잘못된 소문과 장흥 부사 유희선의 공연히 겁내던 일들을 전했다. 또 말하기를, "그 고을 산성 창고에 있는 양곡을 빠짐없이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 행주성의 승전도 전해 주었다. 초저녁에 우수사가 청하기에 그의 배로 갔더니 가리포가 몇 가지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았다. 4경이나 되어 자리가 파했다.
• 14일(丙寅) 맑았다가 늦게 이슬비 내림. 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김. 비는 먼지를 적실뿐이다. 몸이 몹시 괴로워 종일 신음했다.
• 15일(丁卯) 맑음. 늦게 사량의 수색선과 여도 만호 김인영과 순천의 김대복이 들어왔다. 가을 기운이 바다로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홀로 어지럽다. 홀로 배 위에 앉아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이 뱃전에 비치니 정신이 맑아져서 잠 못 이루는 사이에 닭이 벌써 우는구나!
• 16일(戊辰) 맑음. 저녁에 소나기가 와서 농사에 흡족하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 17일(己巳) 비. 몸이 몹시 불편하다. 광양 현감 어 담이 와서 보았다.
• 18일(庚午) 맑음.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했다. 정사립이 돌아왔다. 우수사 이억기가 와서 보았다. 신경황이 두치로부터 와서 적의 헛소문을 전했다.
• 19일(辛未) 맑음. 이영남이 와서 진주, 하동, 사천, 고성 등지의 왜적이 이미 도망갔다고 전한다. 저녁에 광양 현감 어영담이 진주에서 피살된 장수들의 명부를 보내 왔는데 보니, 참으로 비참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 20일(壬申) 맑음. 탐후선이 본영에서 돌아왔다. 병사의 편지와 공문, 그리고 명나라 장수의 통지가 왔는데, 그 내용이 몹시 괴상스럽다. 두치에 있던 적이 명나라 군사에게 쫓게 도망해 숨었다는 것이다. 그 거짓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상국이 이러하니 딴 것을 말해 무엇하랴. 참으로 탄식스러운 일이다. 충청 수사와 순천, 방답, 광양, 발포와 남해가 와서 보았다. 이해와 윤소인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 21일(癸酉) 맑음. 경상 우수사와 정 수사가 와서 적을 칠 일을 의논했다. 원 수사의 하는 말은 몹시 흉칙하고 거짓스럽다. 사람됨이 이 같은데도 일을 같이 하니 어찌 뒷근심이 없겠는가? 그 아우 연도 뒤따라 와서 군량을 빌어 가지고 갔다. 저녁때 흥양도 왔다가 어두울 무렵에 돌아갔다. 초저녁에 오수 등이 거제로부터 돌아와, "영등의 적선이 아직도 머물러 있어 제 맘대로 방자하다." 고 한다.
• 22일(甲戌) 맑음. 오수가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온 사람을 실어 오려고 나갔다. 울이 와서, 어머님께서 안녕하시고 막내아들 염의 병도 차도가 있다고 자세히 말해주었다.
• 24일(丙子) 맑음. 초저녁에 오수가 돌아와서는 하는 말이, 적이 물러가기는 했으나 장문포의 적들은 여전하다고 했다.
• 27일(己卯) 맑음. 우수사 우후가 본영으로부터 와서 우도의 사정을 전하는데, 놀랄 만한 일이 많다. 체찰사(體察使)에게 가는 공문을 썼다. 경상도 우수영의 영리가 체찰사에게 갈 서류 초안을 가지고 와서 보고했다.
• 28일(庚辰) 맑음. 아침에 체찰사에게 편지를 썼다. 경상 우수사와 충청 수사, 본도 우수사가 함께 와서 약속했다. 그러나 원 수사의 흉칙함은 볼 수가 없다. 정 여흥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에게로 갔다. 순천, 광양이 와서 보고 즉시 돌아갔다. 사도 첨사가 복병했을 때 잡은 포작 10명이 왜적을 옷을 바꿔 입고 하는 일이 몹시 조밀하다기에 추궁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족장 10여대를 때려서 석방했다.
• 29일(辛巳) 맑음. 새벽꿈에 아들을 얻었다. 포로 되었던 군사들을 찾을 징조이다. 본영 탐후인이 왔는데, 염의 병이 낮지 않는다 하니 몹시 걱정이다. 저녁에 보성 김득광, 소비포 이영남, 낙안 신호가 들어와 보았다.
8월
• 1일(壬午) 맑음. 새벽꿈에 커다란 대궐에 들어갔는데, 마치 서울인 것 같고, 거기에서 기이한 일이 많았다.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했다. 임금이 피란 가신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뿌려가면서 탄식하는데, 적의 형세는 이미 끝났다고 말했다. 서로 나라 일을 의논할 즈음, 좌우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놀라 깨었다.
• 2일(癸未)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심사가 답답하여 닻을 들고 포구로 나가니 정 수사도 따라온다. 순천, 광양이 와서 보고, 소비포도 또 왔다. 저녁에 진 친 곳으로 돌아왔다. 이홍명이 와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어둘 무렵에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말하기를, "방답이 근친하러 가겠다고 간절히 청하는 것을 나는 여러 장수들을 하나도 내보낼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한다. 또 말하기를, 원 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여 나에게도 무도한 일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망령된 일이니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염의 병이 어떤지도 모르겠고, 또 적을 치는 일도 쉽게 끝나지 않고, 내 몸도 무거워서 아침부터 밖에 나가 마음을 달랬다.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염의 상처는 종기가 되어 침으로 헤치면 고름이 흐르는 형편이니, 며칠만 더 늦췄다면 구할 길이 없을 뻔했다 한다. 놀라고 탄식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은 조금 살아날 길이 있다 하니 기쁘고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하랴. 의사 정종지의 은혜가 더없이 크다.
• 4일(乙酉) 맑음. 순천과 광양이 다녀갔다. 저녁때 도원수의 군관 이완이 삼도의 왜적의 형세를 보고하는 공문을 보내지 않았다 해서 담당 군관과 아전을 잡으러 우리 진으로 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 6일(丁亥) 맑음. 아침에 이완이 송한련, 여여충과 함께 도원수에게로 돌아갔다. 저녁에 원 수사가 오고, 이억기, 정수사가 와서 일을 의논하는 동안, 원 수사의 말은 걸핏하면 모순이 생겼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저녁때 비가 오기 시작했으나 이내 그쳤다.
• 7일(戊子) 아침엔 맑더니 저물게는 비가 내렸다. 농사에 흡족하겠다. 가리포 첨사가 오고, 소비포와 이효가도 보러 왔다. 당포 만호가 작은 배를 찾아 갈 일로 왔기에, 주어 보내라고 사량에게 지시했다. 저녁에 경상 수사의 군관 박치공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래 헛소리를 잘하는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 8일(己丑)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순천, 광양, 방답, 흥양 등을 불러서 복병을 보낼 일에 대해서 함께 의논했다. 충청 수사의 전선 2척이 들어왔으나 1척은 쓰지 못한다고 한다. 김덕인은 그 도의 군관으로서 왔다. 본도 순찰사의 진중에 있는 군인 2명이 공문을 가지고 적의 형세를 탐비하러 왔다. 우수사가 유포로 가서 원 수사와 만난다니 우스운 일이다.
• 9일(庚寅) 맑음. 아침에 아들 회가 와서 어머님께서 안녕하시다 하고, 또 염의 병도 차츰 나아간다고 한다.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오후에 우수사의 배에 갔더니 충청 영공도 와 있다. 경상 수사는 군사를 일제히 내어 복병시키기로 해놓고 슬며시 혼자서만 먼저 보냈다고 하니 해괴한 일이다.
• 10일(辛卯) 맑음. 아침에 방답 탐후선이 들어왔다. 임금의 분부를 전하는 편지와 비변사의 공문과 감사의 공문이 한꺼번에 왔다. 우수사가 청하기에 그 배로 갔더니 해남이 술상을 차렸다. 그러나 몸이 불편하여 간신히 앉아서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왔다.
• 13일(甲午) 본영에서 온 공문을 결재해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배 위에 앉았노라니 회포가 천 갈래 만 갈래다. 이경복을 시켜 장계를 가지고 가라고 보냈다. 송두남이 군량미 3백석과 콩 3백석을 실어 왔다.
• 15일(丙申) 맑음. 오늘은 추석이다. 우수사, 순천, 광양, 낙안, 방답, 사도, 흥양, 녹도, 이응화, 이홍명, 좌우 도영공들이 모두 모여 이야기했다. 저녁에 회가 본영으로 갔다.
• 17일(戊戌) 맑음. 지휘선을 연기로 그슬리기 위해서 좌별도선으로 옮겨 탔다. 늦게 우수사의 배에 갔더니 충청 수사도 왔다. 제만춘을 불러다가 문초했더니 분한 일이 많이 있었다. 종일 이야기하고 의논하다가 헤어져서 초경도 되기 전에 지휘선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 달빛은 낮과 같고 물결빛은 비단 같아 회포를 스스로 이길 수 없다. 새로 만든 배를 바다에 띄웠다.
• 18일(기해) 맑음. 우수가, 정 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조붕이 와서, 원균의 군관 박치공이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 19일(更子) 맑음. 아침 후에 원 수사에게 가서 내 배로 옮겨 타자고 청했다. 우수사와 정 수사도 왔다. 원연(원균동생)도 같이 있었다. 말 가운데 원 수사의 음흉하고 고약한 것이 많으니, 그 허무맹랑한 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원씨 형제가 자신들이 배로 옮아 간 후에 천천히 노를 저어 진으로 돌아와, 우수사, 정 수사와 함께 자세히 이야기했다.
• 20일(辛丑) 아침 식사 후에 순천, 광양, 흥양이 왔다. 이응화도 또한 왔다. 송 희립이 순찰사에게 문안할 겸 제 만춘을 문초한 공문을 가지고 왔다. 돌산도 근처에 옮겨와서 살면서 무리를 지어 제물을 약탈하는 자들을 좌우 양편으로 군사를 갈라서 잡아오도록 방답과 사도를 보냈다. 저녁에 적량 만호 고여우가 왔다가 밤이 깊은 뒤에 갔다.
• 23일(甲辰) 맑음. 윤간과 조카 뇌와 해가 와서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울이 학질(瘧疾:말라리아)을 앓는다는 소식도 들었다.
• 25일(丙午) 맑음. 꿈에 적의 형적을 보았으므로 새벽에 각 도 대장들에게 알려서 바깥 바다에 나가 진을 치게 했다가 날이 저문 뒤에 한산도 안바다를 돌아 들어왔다.
• 26일(丁未) 혹 맑기도 하고 혹 비도 내렸다. 원 수사가 왔다. 조금 있자니 우수사와 정 수사가 같이 모였다. 순천, 광양, 가리포는 곧 돌아갔다. 흥양이 와서 제사 음식을 대접했다. 원 수사가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기에 조금 주었더니, 몹시 취해서 흉악하고 고약한 말을 함부로 하니 해괴한 일이다. 낙안에게서 일본의 수길이 명나라에 보낸 글의 초고와 명나라 사람이 그 지방에 와서 기록한 것을 보내 왔는데, 보니 통분함을 이길 수가 없다.
• 28일(己酉) 맑음. 원 수사가 와서 음흉하고 간휼한 말을 많이 했다. 몹시 해괴하다.
• 30일(辛亥) 맑음.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하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보내고 다만 7, 8척만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씨와 일하는 것이 모두 이런 따위다.
9월
• 2일(癸丑) 맑음. 장계의 초안을 써서 내렸다. 경상 우후 이의득과 이여념 등이 와서 보았다. 어두울 녘에 이영남이 와서 보았다. 또 선병사가 곤양에 와서 공로를 세웠다는 일과 남해가 도체찰사에게 불공(不恐)하다는 책망을 들었다고 전한다. 가소로운 일이다. 효근이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 것이다.
• 3일(甲寅) 아침에 조카 봉이 와서 어머님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본영의 사정도 들었다. 장계를 올리려고 초안을 만들었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군사 일족들에 대하여 일체 징발하지 말라고 했다. 새로 도임해서 사정을 잘못 알고 하는 말이다.
• 4일(을묘) 맑음. 폐단을 보고하는 장계와 총통을 올려 보내는 일과 제만춘을 문초한 내용을 올려 보내는 것 등 세 가지를 봉해서 올리는데, 이경복이 가지고 갔다. 유 정승과 윤 참판 자신, 윤 지사 우신, 심 도승지 희수, 이 지사 일, 안습지, 윤기헌에게 편지를 썼다. 정표로 전복을 보냈다. 조카 봉과 윤간이 돌아갔다.
• 6일(丁巳) 맑음. 새벽에 배 만들 재목을 운반해 올 일로 여러 배를 내보냈다. 식후에 우수사 배로 가서 종일 이야기했다. 거기서 원 수사의 음흉한 말을 듣고, 또 정담수가 근거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는 말을 들으니 우스웠다. 파선된 배의 재목을 여러 배가 끌어왔다.
• 7일(戊午) 맑음. 아침에 재목을 받아들였다. 순찰사에게 폐단을 진술하는 공문과 또 군대 편성을 개정하는 일에 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종일 혼자 앉았으니 마음이 편안치 않다. 저녁때 탐후선을 기다렸건만 들어오지 않는다.
• 9일(庚申) 맑음. 식후에 산마루에 올라가 여럿이서 활 3순을 쏘았다. 정 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모였는데, 광양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 10일(辛酉) 맑음. 공문을 탐후선 편에 보냈다. 날이 늦게 우수사의 배에 가서 방답과 함께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체찰사의 비밀 공문이 왔다.
• 14일(乙丑) 종일 비가 오고 큰 바람이 불었다.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다. 쇠로 만든 총통은 전쟁에 가장 필요한 것이건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만드는 법을 알지 못했었다. 그러더니 이제 온갖 연구를 거듭하여 조총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왜총보다 더 좋아서,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해 보더니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제 그 묘법을 알았으니, 도내에서 같은 모양으로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좋겠다. 이에 순찰사, 병사에게 그 견본을 보내고, 또 공문도 돌리도록 했다.
* 9월 15일부터 12월 말까지 빠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