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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홍구 교수와 인터뷰 중인 송상환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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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환(1946년생)씨는 전남 고흥 녹동에서 어린 시절부터 선원생활을 했다. 9형제 중 둘째였던 송씨는 그저 '소처럼'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한다.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하고, 배타고 돈을 모아 아버지께 드리면서 집안일을 도왔다. 납북되었던 영조호 승선 이전에도 유자망 배를 타면서 뱃일을 했다. 그러다 영조호를 만나게 되고 그 배에 승선한 뒤 납북이 된 것이다.
"영조호가 납북될 당시에는 경찰도 군도 간섭을 하지 않고, 오로지 어선들끼리 선단을 구성해 알아서 조업하도록 했어요. 특히 우리가 잡혀간 해에는 교육을 시켜서 선장끼리 선단을 조직해 조업하게 했습니다. 어로지도선 '무궁화호'가 있었지만 비무장선이었고, 그런 사정을 북한에서도 알고 있었는지 북한경비정들이 수시로 배를 납치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1968년에만 300여 척이 북에 잡혀간 것으로 알고 있어요."
기관장 역할 맡았다는 이유로
송씨 역시 1968년 5월 27일 연평도 근해에서 어로작업 중 북한 경비정에 납북되어 같은 해 10월 30일 인천항으로 귀환하였다. 귀환 뒤 인천에서 수사관들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하게 된 송씨는 어로저지선 월선조업(수산업법 위반), 군사분계선 월선(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1969. 5. 17)에서 '혐의 없음' 무죄판결을 받았다.
납북되던 해 송씨는 20살이었다. 당시 기관장이 병으로 아프게 되자 송씨가 기관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송씨가 기관장 역할을 맡았다는 이유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고 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선원들도 많고, 경력도 훨씬 많은 선원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나이도 어린 내가 기관장 일을 봤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은 귀환해서 석방되는데 나만 석방이 안 되고 실형을 살았단 말이요. 경찰 다섯 명이 발로 차고 때리면서 월선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버틸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송씨는 1, 2심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으나, 다행히도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구금 6개월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송씨는 석방된 뒤 곧바로 법무부를 찾아가 형사보상금을 신청하였다고 한다. 당시 형사보상금으로 받은 금액은 5만원이었다. 80kg 쌀 한가마니가 4천 원 할 때였으니 형사보상금 5만원은 매우 큰돈이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5~6년간 뱃일을 하며 돈을 꽤 모았다고 했다. 그러나 일상은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송씨의 고향에는 한국전쟁 당시 실종된 김관섭의 동생 김양섭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김양섭이라는 사람이 하는 일마다 번번이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겪자, 김씨 집안사람들은 한국전쟁 당시 사라진 형 김관섭이 귀신이 되어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자주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한다. 사업실패를 귀신 탓으로 여기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송씨의 부친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양섭씨에게 "우리 아들 송성환이가 북한에 납북되었을 때 김관섭을 봤는데 아주 잘 살고 있다고 하더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 후 김씨는 더 이상 굿을 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이 말이 동네에 모두 퍼지면서 정보수사기관에까지 흘러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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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상환씨를 연행한 일자가 기재된 수사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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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선한 거짓말이 불러온 비극
"1974년도 11월경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배 선장이 물고기 값이 마산이 좋다고 하면서 마산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물고기를 한 가득 잡아서 마산 항으로 들어갔죠. 일몰 직전 초저녁이었던 것 같은데요. 어떤 남자들이 오더니 송상환이냐고 해요. 맞다고 하니까 잠깐 물어볼 것이 있으니 가자고 하는 거예요.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가보면 안다면서 저를 검은 색 지프차에 태우더라고요. 지프차 뒷좌석 가운데에 나를 앉게 하더니 양 옆으로 수사관 두 명이 타더라고요. 그리고는 두꺼운 두건을 얼굴에 씌우더니 말도 못하게 하고 연행해 가는 거예요. 그 길로 목포보안대까지 끌려간 것이죠. 가는 동안 겁을 주느라 손을 때리고, 손가락에 볼펜을 끼워 비틀고 하면서 괴롭히더라고요."
송씨는 목포보안대에 도착한 시간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연행될 당시 쓰고 있던 두건을 이틀 동안이나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건을 쓰고 있는 동안 수사관들이 묻는 말에 순순히 자백하지 않으면 매질이 시작되었고, 잠을 재우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포감에 송씨는 그저 '예, 예'라는 말만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틀째 되는 날 두건이 벗겨졌고, 비로소 조사실이 보였다고 한다. 대여섯 평정도 크기의 조사실에는 송씨를 묶었던 큰 의자가 하나 있었고, 물고문, 전기고문에 사용되었던 칠성판이 있었다. 이틀 동안 조사를 하던 보안대 수사관들은 북한에서 지령 받은 사실과 간첩교육 받은 사실을 부인하자 전기고문을 자행했다고 한다.
"보안대에서 처음에는 빳따(각목)로 때리더라고요. 김OO이라는 수사관이 있었는데 유도했다는 그 놈은 저를 무릎꿇려놓고 곡괭이자루를 오금에다 끼우더니 점프를 해서 허벅지를 밟던 잔인한 놈이에요. 그렇게 구타를 당하다가 전기고문을 세 번, 물고문을 두 번 당했어요. 전기고문을 당하면 기절을 해버려요. '아' 소리 한번하고는 그 다음에는 몰라요. 깨춤 추는 것처럼 몸이 떨려요. 그리고는 물고문을 하는데 소주 한말짜리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가득 타서 콧구멍이며 입이며 들이부어요. 아, 정신을 잃어버리죠. 정신이 들면 얼마나 힘들었던지 똥 싸고, 오줌 싸고 아주 돼지 짐승 같은 취급을 받는 처지가 되어버려요. 그렇게 똥오줌을 지리면 수사관이 팬티 한 장 던져줘요. 그럼 팬티만 갈아입는 거예요. 바지는 그대로 입고, 완전히 돼지 잡아다 놓는 격이죠. 한 번은 수사관이 물고문을 하고 나서 자랑하기를 '송상환이 콧구멍으로 한 방울도 안 흘리고 고춧가루 물을 다 넣었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이게 사람에게 할 짓입니까?"
송씨는 짐승 취급을 받으며 18일간 감금된 채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렇게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 되었다. 모두 납북되었을 당시 북한에서 선전한 내용들이었으며, 그 내용은 이미 납북되었다가 귀환 될 당시 수사기관에 모두 자백한 내용들로서 혐의가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은 내용들이었음에도 또다시 수사기관은 범죄사실로 조작한 것이다.
인간 생지옥... "나는 억울하다"
인간 생지옥 같았던 목포보안대를 나와 검찰로 송치되었으나 송씨의 억울함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보안대 수사관들과 함께 찾아간 검사실에서 검사는 보안대 수사관들과 서류를 주고받은 뒤, 송씨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검사조사를 마쳤다. 그저 보안대에서 작성한 서류를 확인하며 '맞지? 맞지?'하는 형식적 수사였고, 재판 과정 역시 검사의 발언에 판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피고인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는 형식적 재판일 뿐이었다. 선임된 변호사는 피고인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검사, 판사의 눈치를 보며 비위나 맞추는 변론을 하기에 급급했다. 1, 2심에서 징역 7년형의 간첩형을 선고받은 송씨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상고이유서를 작성해 대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그 간절한 호소가 통했는지 대법원에서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어 광주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되었다. 그러나 송씨는 북한을 찬양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 3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아야 했다.
"기가 막히죠. 하지도 않은 간첩죄로 고문당하고, 형도 살아야 하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광주교도소에 들어가서 그 억울함을 이야기하면서 박정희 욕을 했더니 아, 그거 가지고 긴급조치 위반했다고 또 3년 6개월을 추가로 줍디다. 대한민국 간첩, 빨갱이는 수사관이 만드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 시절은 검사고 판사고 다 소용없어요. 수사관들이 만들어서 올라가면 일사천리로 다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송씨는 최근 암 투병중인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고흥과 분당, 안성을 오가고 있다. 송씨는 자신의 일로 인해 고생한 아내가 병마와 싸우는 것이 더 안타깝다고 했다.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국가기관의 공권력 남용으로 인해 고통 받는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꼭 납북귀환어부 꼬리와 국가보안법 전과자라는 억울함을 풀고, 자신과 가족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수사관 등 책임자를 처벌해야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