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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회화는
지역과 종교적 특징에 따라 귀족적이며
가톨릭적인 경향과 시민 계급적이며
프로테스탄트적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로마 교황청은
반종교개혁 이후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성당장식과 종교미술의 발전을 이룩한다.
로마에서 출발한 바로크는
프랑스로 이어졌으나
프랑스 화가들은 비종교적 주제들을 주로 다루었다.
그리고 이때 플랑드르와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교미술이 전성기를 맞았고,
네덜란드나 영국과 같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는
종교적인 그림은 금지되었다.
따라서 회화는 주로 시민과 미술시장을 위해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 풍속화 등
일상생활을 다룬 소재로 확대되었다.
바로크의 시발점은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와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1.3.~1609.7.15.)로 로마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1590년대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은 로마에서 각각 혁신적인 양식을 선보이면서 매너리즘 양식의 회화가 사라지게 되었다.
카라치는 먼저 볼로냐에서 자연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그의 로마 체류시절에는 고전주의와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반면에 카라바조는 카라치와는 대조적으로 고전주의의 고상함을 따르기보다는 자연에 충실하였다. 그는 비록 그것이 추하더라도 눈으로 본 것을 있는 그대로 현실을 그리고자 한 리얼리즘, 다시 말해 ‘자연주의’ 회화 작가였다. 또한 카라바조의 명암법은 배경을 어둡게 한 극명한 빛의 대조를 통해 감정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것을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 부른다.
17세기 로마에서 시작된 카라바조의 회화는 인접한 가톨릭 지역이었던 스페인 바로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플랑드르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y Velázquez, 1599.6.6.~1660.8.6.)의 초기 작품에서 카라바조의 명암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나폴리에서 활동했던 스페인 화가 리베라(José de Ribera, 1591.1.12.~1652.9.2.)는 직접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다.
플랑드르는 16세기 이래 로마 가톨릭 국인 스페인의 지배 아래에서 독립하면서 지금의 벨기에와 남부 네덜란드는 가톨릭으로 남고, 북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로 두 지역이 매우 다른 성향의 미술로 발전했다.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 중의 거장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6.28.~1640.5.30.)였다. 낙천적이고 긍정적 사고관을 가진 루벤스는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에너지로 2,0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회화의 기본적 요소는 색채와 형태이다. 형태가 논리적이고 합리적 사고로서 이성에 직접 작용하는 요소라고 한다면, 색채는 감각적 요소로서 우리의 감각과 감성에 직접 작용하는 요소이다. 루벤스는 색채를 회화의 생명으로 여겼다. 비록 그의 작품 속에서 부정확한 인체묘사나 과장, 기괴함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우리가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화려한 색채와 빛의 효과 때문이다.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는 그의 감각적인 화풍을 담아 바로크 양식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곡선적인 리듬으로 죽은 예수의 시신에 과장된 광선의 강도로 빛을 강하게 비추어 극적인 요소로 강렬한 감정을 유발하고 있다. 루벤스는 빛과 색채의 현란한 혼합을 통해 감각세계를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작품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깔린 예수와 시몬, 오만한 눈빛의 병정, 죄인을 끌고 가는 병정들, 예수의 머리를 닦아 주는 성녀 베로니카와 뒤의 성모 마리아와 요한, 좌우에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우는 아이와 더불어 죽어야 할 예수에 대한 슬픔을 참지 못하는 형상이 뒤섞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단지 루벤스는 형태의 중요성보다는 예수의 고통을 암시하고 이를 바라보는 인간들의 슬픔을 표현했던 것이다. 루벤스는 빛과 이미지를 사용한 순간의 감각에 호소하는 화풍으로 표현함으로써 감동의 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플랑드르에서 루벤스가 색채와 빛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면, 네덜란드에서는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가 광선을 사용하여 인간의 내면적 심리를 작품에 담았다. 그는 인간이 어느 상황에서 겪게 되는 번민과 갈등 그리고 신앙심 등의 내면적 깊이와 본질을 표현했다.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종교화는 주문이 거의 없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렘브란트의 종교화는 네덜란드에서 특별한 가치를 가진다.
렘브란트의 아버지를 모델로 삼은 예언자 예레미아는 화염에 휩싸여 파괴되고 있는 예루살렘의 모습에 비애에 잠겨 있다. 〈예루살렘의 파괴로 슬퍼하는 예레미아〉에서 백발의 머리, 얼굴의 깊은 주름, 움푹 파인 눈, 얽힌 수염과 함께 예언자 예레미아가 커다란 성경에 힘없이 팔꿈치로 머리를 기대고 있는 자세 역시 슬픔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멸망을 그린 그림 〈벨사차르의 향연〉에서 향락에 취한 왕과 주변 사람들이 순간적인 상황에 대한 겪는 내면적인 심리 상태를 표현했다.
렘브란트는 놀라운 광경 앞에서 인간의 무기력한 두려움과 공포의 이미지, 사치와 향락에 젖었던 사람들이 종말이 다가옴을 알고 심적으로 느끼는 공포를 재현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욕실에서의 밧 세바(다윗왕의 편지를 든 밧 세바)〉에서도 등장인물의 내적 상태를 잘 표현했다. 이 작품은 구약 성경 이야기, 사무엘하 11장을 주제로 다룬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가 다윗왕의 편지를 받고 순간적으로 심리적 고뇌와 갈등을 겪는 내면 상태를 표현하였다.
또한 렘브란트는 그림의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설정해서 주제를 부각하는 테네브리즘 명암법을 사용했다. 빛의 효과를 사용하여 그림의 주 부분은 부각하고, 부차적인 면은 어둠 속에 가리고 있다. 렘브란트가 오롯이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번민, 정서적인 부분만을 표현하려 했던 것은 각선미와 성적인 매력을 더욱 강조할 수 있는, 서 있는 자세나 누워 있는 자세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앉아 있는 자세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렘브란트는 육체적 측면보다는 정서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표현했다.
16세기에 스페인은 이탈리아나 플랑드르보다 덜 알려지고, 걸출한 미술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유럽에서 가장 영성적인 측면을 강하게 드러낸 미술은 스페인 화가들로부터 제작되었다.
스페인 바로크 미술에서 가장 잘 알려진 화가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이다. 당시 가톨릭 영성이 강했던 스페인에서 벨라스케스는 초상화가로 초상화를 통해 사실성과 장엄함, 친근함과 고적감을 표현했고, 궁정의 풍속도를 주제로 삼아 작품 활동을 했다. 반면에 가톨릭 영성을 대표하는 화가는 리베라,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1598.11.~1664.8.27.),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8~1682.4.3.)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성인 성녀의 영적 삶과 성모의 무염시태를 주제로 삼았다.
리베라는 작품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에서 카라바조의 〈성 베드로의 순교〉를 모태로 삼아 새로운 경지의 리얼리즘을 제시했다. 이 작품 속에서 성인과 형리의 얼굴은 매우 자연주의적으로 치밀하게 세부까지 묘사되었다. 그리고 성인의 반쯤 벌어진 입과 촉촉한 두 눈은 성인이 곧 신과 만나게 될 환시상태의 모습으로 성인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미 죽음의 두려움을 잊어버린 상태이다. 리베라는 이탈리아의 카라바조의 리얼리즘을 한층 더 진보시켜 엑스터시의 미술을 연출했다.
이러한 종교적 신념의 강도는 프란시스코 수르바란의 작품에서도 강하게 드러났다. 그의 작품 〈성 피터 놀라스코의 환시〉는 성 놀라스코가 무릎을 꿇고 묵상을 하던 중 그의 앞에 거꾸로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의 영명 성인인 성 베드로가 나타난 것을 그린 것이다. 수르바란은 영적인 체험을 눈을 통해 보는 행위로 묘사했다. 사실상 그림 자체는 물질적인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긴 하지만 영혼의 눈으로 영적인 환시로 보는 것으로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리베라나 수르바란은 무리요와 더불어 성모의 무염시태를 주제로 즐겨 그렸다. 성모 마리아가 애당초 원죄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성모의 무염시태 이론은 가톨릭 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1661년에 교황 알렉산더 7세(Alexander Ⅶ, 1655~1667)는 공서(Constitutio sollcitudo omnium ecclesiarum)에서 성모가 원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음을 선언하였고, 더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금했다.
성모의 무염시태를 주제로 다룬 작품 속에서 성모 마리아는 순결을 의미하는 흰색과 충실한 믿음을 의미하는 푸른색 옷을 입고 있으며, 초승달 위에 서 있는 모습은 요한묵시록 12장 1절에 나오는 여인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프란시스코 수르바란의 〈무염시태〉는 교황의 성모의 무염시태를 공인하기 이전의 작품이기 때문에 성모의 순결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여러 가지 모티프들이 표현되었다. 그림의 배경에는 닫혀 있는 정원, 생명의 샘, 천국의 문, 야콥의 사다리, 더럽혀지지 않은 거울 등 성모의 순결함과 지혜로움 그리고 신성함을 상징하는 주제들을 담고 있다. 반면 무리요의 성모의 〈무염시태〉를 살펴보면, 배경적 모티프들은 없고 청순하고 아름다운 성모가 떠오르는 모습 자체로만 무염시태를 표현했다. 단순한 도상으로 가톨릭의 도그마를 자신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17세기 프랑스는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했으며, 파리는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17세기에 로마나 스페인에서 새로운 힘을 가진 교황이나 추기경 등이 화려하고 세속적인 영화를 드러내고 있을 때 프랑스 미술은 전제 군주의 힘과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비록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남아 있었지만 교회의 힘은 왕실의 무한 권력에 앞서지 못했다. 이러한 프랑스 왕실의 권위를 힘껏 표출시킨 것이 다름 아닌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이 궁전은 바로크 미술의 호화스러움의 극치와 절대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의 영광을 과시하고 있다.
17세기 프랑스 회화에서는 단연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6.15.~1665.11.19.)으로, 그는 실질적으로 프랑스에서보다는 로마에서 주로 활동했다. 푸생은 데생과 엄격한 형태의 완결성을 중심으로 합리적인 고전주의 화풍을 따랐다. 그는 고대 로마의 신화나 역사, 그리스 조각을 모델로 삼아 작품을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