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南人의 정승 蔡濟恭(1720~1799)의 의견을 받아들여 소상공인 보호와 물가안정을 목표로 상거래 질서를 再
조정하는 '辛亥通共' 이 있던 해인 정조 15년(1791) 10월,南人의 '尹持忠과 權尙然' 이 '조상의 神主를 불태우고
祭祀를 폐기한 사건' 이 벌어졌다.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받들던 유교 왕조국가에서 유교의례를 거부하고 서학
인 천주교 의례를 선택한 파격적인 행동을 했다.이런 행동을 한 남인들 모두는 대대로 조정에서 벼슬을 했거나
現任의 토호양반 사대부및 그 후예들 이었다.윤지충은 남인의 맹장 尹善道의 6세손 이며,진사에 합격한 수재로
화가로 명성을 날린 尹斗緖(화가)의 증손자다.따라서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도 된다.권상연은 湖西山林의 한
사람인 權諰(소론 윤중의 장인,송시열과 사돈)의 5세 손이다.즉 이들은 모두 南人을 대표하는 사대부 가문이자
후손들이다.모두 명망가 집안 사람들이다.이들의 행동은 400년을 이어온 유교국가의 綱常(3강과 5상<5륜>
=사람이 지켜야 할도리)을 정면으로 부정한 큰 사건이었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국가적인 문제로 飛火되기에 충분했다.조정과 정치권에서도 이 사건을 두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바로 이러한 천주교도 들의 돌발적 행동 때문에 유교국가인 명나라에서도 천주교는 환영받지
못했다.황제의 윤허가 없어 천주교의 선교와 포교는 어디서나 불법이었다.따라서 모두 암암리 조금씩 전파하고
있었다.그러나 신고가 있거나 들키면 그때는 국법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니 결과는 아작나는 것이다.이때 사용했
던 '五家作統法' 은 역사 조선의 전유물이 아니다.역대의 중국사를 치장하는 정부들도 필요 할때 마다 융통성 있
게 잘 활용 했었다.明나라에 이어 淸의 강희제(1661~1722)는 유교의 전통을 파괴(신주와 제사 폐기)하고 국체를
흔드는 막무가내의 선교사들을 추방했고,옹정제(1723~1735)는 즉위하자 마자 천주교를 전면 금지하고,선교사
들과 신자들을 추방,투옥하는 강수를 두었다.
2, 유교정부는 물론 正祖가 인정한 正學은 '六經學(역경,서경,시경,춘추,예기,樂記)과 주자학' 이었다.반면에 西學
은 동양의 정학을 해치는 가장 대표적인 '邪學' 으로 규정되어 있었다.그러나 정조의 반대와 세상의 질시에도 불구
하고 서학(천주교)은 남인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여기서 남인이란 대륙의 강남 사람들을 의미한다.모
든 남인들이 서학을 신봉한 것은 아니였지만,이미 천주교의 서학은 남인과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되고 있었다.반
면에 노론에게 있어 서학이자 천주교란 '세상을 미혹하게 하고 백성들을 속이는 요망한 학문' 이었다.따라서 천주
교를 신봉하는 일부의 남인들에 대해 '邪學의 무리' 로 규정하고 타도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정조의 왕권이 강화
되고 이에 협조하던 남인 채제공의 권한이 강화되던 정조 12년(1788)이후 에는 천주교이자 서학에 대한 비판 목
소리가 한층 높아지고 있었다.바로 이때 윤지충과 권상연의 이런 행동을 폭로해 '珍山사건' 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
은 '洪樂安' 이었다.그의 규탄서인 '洪樂安長書' 를 통해 천주교를 '異端과 邪學' 으로 규정하고,윤지충과 권상연을
반역의 법으로 엄하게 다스릴 것을 요구했다.유교국가의 심장이요 동맥인 국가의 사대부가 정학의 충효를 정면으
로 거스르는 조상의 神主를 소각하고,제사를 폐기한 이상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3, 그러나 정조는 이들을 治罪 하는데 미온적 이었다.전라감사 정민시에게 이들을 체포해 심문할 것을 명했으나
어디까지나 형식적이었다.즉 사학이자 천주교를 빌미로 당쟁이 비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정조는 천주교를 斥邪(서학)으로 표방하기 보다는 '바른 학문(正學=유학)' 의 장려를 통해 서학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정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이미 천주교의 확산을 막기가 힘들 때였다.정조는 상소를 올린 홍낙안의
정치적 의도를 간파하고 배후가 있다고 생각했다.홍낙안의 본질적인 목적은 유교적 윤리와 강상의 회복이 아니
라,남인과 서학을 결부시켜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있는 채제공과 남인들을 타도 하려는데 있
었다.그를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은 소론의 鄭昌順과 南人의 洪仁浩 였다.규탄의 상소에 대부분의 노론과 소론이
지지하는 가운데 시파와 벽파도 공동보조를 취했다.남인의 홍인호는 자신의 몫을 늘리기 위해서 그랬다.
珍山 사건은 채제공의 獨相(유일한 정승) 체제에 대한 반발이며,'換局'을 위한 과감한 시도였던 것이다.노론들은
윤지충,권상연을 역율과 강상죄로 단죄한 다음,채제공에게 책임을 물을 작정이었다.뿐만 아니라 이승훈(최초의
천주교 신자)과 권일신(楊平 천진암에서 천주교 연구)도 국문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했다.여기서 楊平은 대륙의
楊州와 한성의 별칭으로 표현하는 南平壤의 축약으로 보면된다.양주의 어귀에 해당한다는 뜻의 지명인 '楊口'는
현 양주의 동쪽인 강원도 북부에 옮겨져 있고,대륙의 강원 방면이란 구색을 맞추기 위한 淮水 북쪽 이라는 뜻의
'淮陽' 이란 지명은 은 강원도 북부 해안가에 자리잡게 하는 억지가 있다.양자강과 회수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던
'長淮'나루는 반도의 단양 남한강의 상류의 나루 지명으로 지정되어 있다.또한 현 해안가에 江과 연관된 江陵이란
지명이 강과 연관없이 자리하게 된것도 반도의 강원도로 옮겨진 지명이며 양자강 연변의 지명과 연관이 깊다.
4, 정조는 진산사건의 처리를 축소시키기 위해 남인의 채제공에게 맡겼다.그러나 이사건에 대한 채제공의 입장은
단호했다.치열한 당쟁을 배격하는 차원에서 노론의 주장인 역율과 강상의 죄로 다스리지 않았지만,그러나 그 역
시 참형을 건의해 정조의 허락을 받았다.같은 남인으로 천주교의 친척들이 많아 벼슬에서 물러나 귀양까지 갔던
채제공이 진산사건(신해박해)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한 것은 남인들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사실 정조는 처벌보다 교화를 선호했지만,채제공은 이를 건의하지 않았다.그러나 진산사건이 채제공과 남인들의
정치적 위상을 실추시킨 것은 분명했다.이후 채제공의 독상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해 정조 16년(1792)1월 마침내
노론의 박종약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16개월 동안의 채제공의 독상체제는 종료 되었다.이러한 미온적인 조처
에 대해 노론들은 정조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무렵에 서인(노론과 소론)은 물론 일부의 남인들 까지도 기피하던 윤휴의 후손과 이원정의 방손이 등용되었다.
노론은 이를 '換局' 에 비유하며 위기감을 드러냈지만 정조는 이를 무시했다.오히려 영남(嶺南: 복건.광동.광서지
방을 가르는 남령산맥과 복건과 강서를 나누는 무이산맥 남쪽)의 민심을 수습(진산사건)하기 위해,1792년 3월 남
인들의 본산이자 이황을 상징하는 영남(안동)의 도산서원에서 남인들을 위한 특별 과거까지 실시했다.
5, 서학이자 천주교 신자로서 참형에 처해진 '윤지충과 권상연' 을 역사 조선의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앙관계와 연계될 때만 호응할수 있는 말이다.즉 천주교도의 일이다.珍山사건을 천주
교에 중심을 두고서 '辛亥迫害,辛亥敎難,辛亥邪獄' 이라 부르며 당시 권력으로 부터 부당한 박해와 피해를 받아 억
울한 순교를 했다고 하나,이건 역사를 객관적,수평적으로 보는 견해가 아니다.우선 국가(왕조)가 있고 난 다음에
가해자가 있어 박해와 순교도 말할수 있는 것 아닌가?즉 이들의 행위는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전통의 헌법적 가치
를 훼손하고 상식과 원칙(법)을 위반해 처벌받은 것이니 만큼,권력으로 부터 부당한 압박을 받고 순교했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그리고 이들을(尹과 權) 천주교에서 억지로 순교자로 지정하더니 지난해 어느날은 천주교 전주교
구(2021년 9월)에서 말하길,완주군 이서면(월드컵 경기장 서쪽)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자 유해를 230년 만
에 발굴했다고 요란을 떤 적도 있었다.그러나 두사람이 죽어 참형된 조선의 珍山은 반도의 錦山이나 完州(全州)가
아니란 것을 알아야,정조시대 같은 남인의 채제공에 의해 처형된 윤지충과 권상현의 참형 위치도 찾을수 있을 것
이다.이는 곧 쇼이자 소설의 인격화 인 것이다.
정조시대 정민시가 있었던 전라 감영은 '完伯' 이란 별칭을 썼던 지방기관으로 지금의 안휘성에 있었다.반도의 전주
는 한고조의 豊沛之鄕(왕조의 발상지)이나 조선사의 전라 감영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또 전주가 반도에서 湖南의
첫머리이자 관문 지역이 될려면,최소한 자연적으로 조성된 자연 湖가 있은 연후에 그 남쪽의 호남 전주란 호칭이 만
들어져야 할것이다.이는 마치 반도의 충북 제천에 일제 때 만들어진(1920년대 대정 년간) 의림지란 작은 저수지를
기준으로 그 서쪽이 湖西라고 한것 만큼이나 어리석은 억지다.池와 湖도 구분 못하는 이들이 湖西와 湖南을 정리하
고 있으니 제정신의 역사가 펼쳐질 리가 없는 것이다.조선 8도란 것도 8개의 행정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8 방향
의 도달점이나 맞이하는 방면인 전주와 나주 방면의 뜻이다.김제의 벽골제 타령도 '堤'가 강하천의 방죽을 말하는 것
이니,이를 기준으로 그 남쪽을 '湖南' 이라 한다고 강제하지 말자.만약 김제의 벽골제를 湖로 만든다면 全州는 湖東이
된다.
이들은 모두 대륙의 양자강 이남과 이북에 있던 조선지명을 반도로 이식해 놓은 것이니 정조때 채제공에 의해 참형
된 두사람의 유해는 반도의 완주군 이서면에서 발견 될수가 없는 것이다.역적이 되어 참형된후 관도없이 묻혔고,후
손이나 주인도 없이 230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시신은 당연히 백골을 넘어 진토가 되었을 것이다.수없이 강산이
변했는데 그들의 무덤을 대륙이든 반도든 어떻게 찾을수 있나?그런데 2021년 9월 초에 발굴되었다는 그들의 유해는
뼈는 물론 해골까지 발굴되었다.이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의지한 화합의 창작물일 가능성이 크다.단지 천주교구의
역사를 보다 보강하기 위한 억지의 문화사업 차원이라면 이해는 된다.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와 연계된 상
징및 문화 사업성 때문에 얼마든지 일어날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6, 또한 두사람은 천주교 차원에서는 순교자인지는 몰라도,유교 국가의 정학 차원에서 본다면 중죄로 다스려진 국법
위반자인 만큼 국가의 역사에서 크게 어필되거나 다룰 일은 아니다.당시의 남인으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왕의 裁
可를 받아 국법으로 다스린 형벌이니 억울하다는 말도 할수가 없는 것이다.이들을 순교자라고 하면 역사의 수많은
전쟁에 나가 국가의 보위를 위해 죽은 이름없는 군인들 모두도 '殉國者' 지정해 기념해 줘야 할 것이다.그것도 같은 남
인 정승이 중죄로 처분했다면 두말 할것도 없는 것이다.영조와 정조시대의 서학이자 천주교는 왕이나 조정의 승인없
이 몰래 들어와 사교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당연히 불법이다.따라서 왕이나 정부의 허가없이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그 자체는 이미 국법을 위반하는 행위며,더하여 양반사대부가 조상의 神主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기하는 불충과 불효
의 난동을 부린다는 것은 포교와 개혁 정신의 도달보다 국법을 어긴 대역 죄인이 되는 것이 더 빠르다.천주교이자 서
학이란 것들의 신지식(정보)의 모두는 일반 농민을 비롯한 하급 인생들은 알려줘도 뭔 뜻인지 알수가 없고,쓸 곳도
없었다는 점이다.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봉건왕조 국가에서 왕은 국가의 대지주(주인) 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남인인 이들도 양반사대부 출신이니 성과 이름이 있는 것이지 하류의 보통인들 이라면 성과 이름이 없어 남기지도 못
했다.봉건왕조 시대의 역사와 함께 기록되어 남겨진 사람들은 보통사람들이 아닌 상당한 지식의 사대부 들이다.이들
은 천주교의 교리를 한자로 번역해 주었을때 글자를 읽고 쓸줄 아는 현 지식인이나 낙향 지식인들 중심으로 퍼져 나갔
다는 점이 중요하다.주로 남인을 중심으로 유포되었던 것은 숙종조 장희빈과 남인 추종자들의 퇴출 이후,특히 영남의
남인들이 영조 4년(1728) 영조를 반대하는 이인좌(남인계 소론)의 戊申亂 이후 반역의 고장으로 낙인이 찍혔었다.따라
서 오랫동안 출사길이 막혔던 남인들의 몸부림 이었을 것이다.당시가 노론처럼 안정된 지위나 위상이 보장되는 남인
의 경우 였다면,남인들 역시 서학이자 천주교 입교에 미온적 이었을 것이다,서양인들의 동양침탈이 본격적으로 시동
을 걸때 였기는 하지만,이들은 현실적으로 미래 불투명의 위기를 돌파하는 도구로 서학인 천주교를 선택했고 가뭄의
단비 역할을 했을 것이다.
7, 영조시대 이전부터 아름아름 몰래 들어 왔다는 천주교이자 서학은 마침내 정조 15년(1791)에 이르면 유교와 禮와
관습까지 부정하는 진산사건(신해사옥,박해,교난)으로 발전한 이유는 노론들이 장악하고 있는 권력을 되찾기 위한 몸
부림 이지만,기성의 유교로는 자신들의 입지를 再建 할수 없기에,서학이자 천주교와 실학을 이용해 권력을 회복하려
는 남인들의 욕망도 있었다.문제는 진산사건(1791)이 발생하고 정조가 급사한 후 노론벽파에 의해 정국이 환국되어
辛酉邪獄(1801)에 이르는 시기가 되면,서학이자 천주교가 유교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악한 邪學으로 간주되어 수많
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고 유배되는 수난을 겪는다는 사실이다.그런데 이시기에 남인이면서 양반사대부로 처형되거
나 유배된 천주교도 들의 주체적 인물인,정약용과 그 형제들,이가환,이승훈,이벽,황사영,남종삼,이승훈,김대건' 등의
면면을 보면,이들 모두는 퇴계 이황의 후학들이자 영남학파의 남인들로 역사의 영남지방에서 친,인척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그런데 이들은 이상하게도 그들의 출신지인 영남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반도의 경기도 '양주,인천,광주,용인,
포천' 등지에서 태어나고 고향인 인근지역에서 친인척 관계를 맺으며,천주교 포교 활동을 하다가 잡혀 죽어 楊州 일대
에 묻혔다는 아리송 함이다.이곳은 조선사의 영남,당파의 남인들 거점지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곳이다.
8, 이들이 정치적으로 반도 조선사의 남인이면 현재의 경기도 일대에서 태어나거나 죽어 묻혀 있으면 안된다.현재의
무덤들 모두도 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이조차 모두는 그들이 태어났다는 장소나 추정되는 지역에 가
상으로 조성되는 왜곡이 있는 것이다.이들이 진정 이황과 김성일,류성룡의 남인 후학들로 영남학파의 골수 南人들 이
라면,이들이 태어난 곳과 묻힐 곳은 지금의 경기도와 양주 일대가 아니라 지금의 경상도 안동과 그 이남에서 태어나고
친인척 관계를 맺으며 살다가,불법으로 천주교 포교를 하다 죽어 지금의 경상남북도 어느지역에 묻혔다고 해야만 영
남의 남인이 될수가 있다.그래야 역사의 영남 순서가 맞고 남인의 정체와 근거지를 말할수 있으며 천주교 포교를 했다
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또 그래야 신해사옥(1791)이후 정조가 남인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영남인들을 위한 특별 과
거시험을 정다산과 이승훈등 영남학파의 거점이자 '퇴계 이황을 상징하는 도산서원' 에서 직접 열어 주었다는 기사 와
도 연고성을 맺을수 있다.역사에 등장하는 조선의 남인들이자 천주교도 들의 활동지(근거지)가 영남의 경상도에서 경
기도 양주 일대로 바뀐 연유는 바로 대륙 조선지명의 반도 이전으로 생성된 불협화음이다.즉 대륙의 강남과 楊州에서
는 옳지만,반도의 양주에서는 嶺南학파와 남인들의 천주교 포교의 어울림이 없는 것이다.
9, 조선 역사에 있어 기록상으로 남인들은 영남인으로 퇴계 이황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이들은 같은 東人에서
조식의 북인들이 탄생 할때(인진왜란시) 남인이 되었고,남인의 대부분이 류성룡과 김성일의 후학들이다.이들의 후학
들이 영남학파로 뭉쳐 불만이 있을때 마다 '嶺南萬人疎' 를 올렸다.나중에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별도의 학파인 海南의
'윤휴,윤증,윤두서,윤선도' 가 남인으로 가세하는 것도 반도의 해남과는 거리가 멀다.여기서 海南이란 천하의 남쪽지방
이란 뜻으로 지금의 대륙 강남지역을 별칭하는 말이다.때문에 정다산을 비롯한 수많은 양주의 남인들이 해남의 남인
윤씨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을수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조선의 천주교도들은 대륙 강남의 양주에 있었기에 반도 楊州
나 경기지역에 자리 할수가 없다.단지 역사 이식과 함께 지명이 반도로 옮겨 졌기에 가능했던 것이다.이들이 경기와
충청의 기호학파 였다면 반도의 양주나 경기에 묻힐 자격은 가능하다.그러나 당시의 기호학파의 대부분은 서인이자
노론들 이었다.반도에 이식된 조선사라고 해도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살면서 포교했던 영남의 천주교도 남인들이라
야 옳다.
10, 그런데도 천주교를 포교하다 사옥과 교란으로 죽은 사람들이 '양주,포천,수원,廣州' 란 지명과 함께 반도의 경기도
에 자리를 펼수 있었던 근거는,대륙 강남의 양주(경기)에서 옮겨진 조선의 한성부가 '남경이자 양주,광릉' 이었기 때문
이다.이들은 양자강이 관통하는 남경과 동쪽인 양주 일대와 남방지역에서 불법으로 포교 활동을 하다 잡혀 죽었다.대
륙 강남이자 양주에는 역사적으로 진보적 지식인들의 본산이자 東林黨의 본부인 東林書院이 강소성 無錫市에 있다.
이런 대륙기록들을 車 떼고 砲 떼고 적당히 골라내 엉성하게 반도에 옮겨놓고 조선사를 설명하다 보니,영남과 해남에
서 활동했다는 영남학파의 남인이자 천주교인 들이 모두 반도의 경기도와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몰려있게 된 것이다.더
이상한 것은 당시 넓고 넓은 역사의 조선강역에서 천주교와 서학을 포교했던 세력들이 오직 남인들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지역(황해도,강원도,충청도 등등)과 당파들도 시대적으로 볼때 천주교와 서학에 대해 조용할수가 없는데 아주
조용했다.이는 남인들이 조정의 권력에서 장희빈 퇴출과 이인좌의 무신난 이후 오랫동안 배척당한 것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반도의 경기도 양주지역은 조선사의 영남학파와 남인들의 본산및 거점지가 될수가 없다.
11, 정약용과 그 형제들의 묘는 양주시와 남양주에 있고,김대건의 묘는 용인시 양지면,권철신,이벽,권일신의 묘는 광주
시 퇴촌면 천진암 지역에 있다.윤유일과 지황,최인길의 묘는 이천의 어농성지에 조성되어 있고,비단 백서로 유명한 황
사영은 양주시 부곡리,남종삼의 묘는 양주시 장흥면에,이가환은 여주에,이승훈의 묘는 인천시 남동구에,채제공의 묘는
용인시 처인구에,윤두서와 윤선도는 해남군 현산면에 새롭고 현란하게 조성되어있다.신유사옥을 더 가혹하게 만든
외세의존의 황사영의 백서 같은 것을 보면,조선인으로서 천주교 포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외국(프랑스) 군대를 5~6
만명을 조선으로 출동시켜 조선 정부를 전복시켜 달라고 한 내용을 써보낸 그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수는 없다.아무리
법이 엉성한 봉건왕조 시대라 할지라도 종교의 포교를 위해 서양 군대의 힘을 빌리자고 한것은 반역죄에 해당한다.일
인지하 만인지상의 봉건왕조 국가차원에서 볼때 어이가 없는 역적 행위를 한 사람은 바로 천주교도 황사영이다.그가
순교자가 된다는 것은 종교이자 신앙차원 일뿐,국가적 차원에서는 순교가 아닌 국법을 어기고 왕을 능멸한 반역자 로
당연히 극형감이다.치죄도 없고 산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반드시 그런것은 아니지만 우선 국가가 있고 난후 종교가 있었으니 봉건주의 왕권의 사회에서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다
면 '사옥,교난,박해' 란 표현을 쓸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서양에서 암흑의 기독교 1000년 세월은 그야 말로 사람들의
이성을 가리는 암흑의 기독교 전횡시대가 아니였던가?그때는 교회와 수도원 자체가 국가였으니 교회의 전횡은 이루 말
할수 없었다고 교회사와 사양사는 말한다.그러나 서양의 제도와 문화가 기독교 바탕위에 세워 졌으니 그럴수 있다지만,
이미 유교의 강상으로 400년 이상을 꾸려온 전통의 왕조국가에서 위법과 불법은 현실처럼 법과 원칙에 의해 단호히 처
단되어야 마당하다.또한 황사영이 숨어서 백서를 썼다고 전해지는 '배론' 이란 지명은,19세기 초에는 현재의 제천에 있
지도 않았고 충청도란 말 자체가 없었다.대륙의 제천이 반도로 옮겨지면서 배론이란 지명도 따라왔고,평야의 뜻인 배론
(舟論)이란 지명도 엉겹결에 옮겨진 것이다.
12, 신유박해를 촉진 시켰던 황사영(1775~1801)은 공조판서 황준의 손자이자 丁若鉉(정다산의 맏형)의 사위로 어린 나
이에 진사시에 합격(17세)한 남인의 수재였다.그러나 남인이란 이유로 등용되기 어려웠다.나이 26살에 1만 3천 여자의
대문장을 비단에 썼다는 것도 그가 보통의 문장가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그러다 강소성 양주의 昆山(상해와 인접한
곳) 출신으로 조선의 蘇州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周文謨(1752~1801)에 포섭되어 알렉산드로 라는 영세 명을 현재의 강
소성 양주에서 받았다.蘇州는 고려때 비단과 함게 '朝鮮兒歌' 가 탄생했던 곳이다.때문에 그가 옮겨진 반도의 경기도 양
주시 가마골에 묻힐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주문모가 정조 18년(1794)에 남경(양주,한성부)에 몰래 들어와 6년을 숨어지
낼(강완숙의 집)때 그의 불법 포교 활동을 도왔다고 하나 그곳 역시 반도의 양주이자 한성은 아니였다.당시 주문모나 황
사영은 자신들의 행동이 불법이며 왕명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다 같은 신도인 金始三이 1795년에 밀
고하여 도망을 하기도 했다.이들은 어찌보면 천주교와 서학이란 매체를 통해 유교 강상의 왕조 전복을 꿈꾸고 정권 탈환
을 노리고 있었던 진보의 남인 사대부들로 봐도 된다.
그러나 황사영이나 주문모는 한시도 반도에 있었던 적도 없었고 포교 활동을 한적도 없다.그가 반도 제천의 배론지역의
토굴에서 백서를 썼다고 하나,그건 소설이다.백서를 쓸때 이용한 비단은 아무곳 에서나 구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가
양반사대부의 자제였기에 종이도 아닌 비단에 백서를 쓸수 있었던 것이다.단지 20세기 반도로 옮겨진 제천과 배론이란
지명을 따라 옮겨온 것일 뿐이다.특히 배론(舟論)이란 지명은 배바닥 부분이 평평한 평저선 모양의 분지형 평야 고을을
말하는 것이지 험악한 골짜기의 뜻은 없다.論은 들판을 뜻하는 羅(伐)와 통하는 한자다.지금은 지명이 변했지만 모두 양
자강 유역의 남북 양주에 있었다.주문모와 황사영은 바로 대륙의 남경과 양주와 일대의 강남에서 불법포교 활동을 하다
잡혔고 남경이자 양주에서 죽었다.근거로 주문모는 스스로 천주교 포교를 하기 위해 조선에 간적은 있었지만,반도로 온
적이 없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여기의 충적평야 끝의 따뜻한 토굴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13, 현재의 중국사에서 華東으로 분류되는 지금의 '산동,강소,안휘,강서,절강,상해시.복건성 지역' 이 역사 조선의 핵심
지역이 된다.이중에서 핵심지역은 강소성의 남경 일대와 양주와 그 남방지역이다.주문모는 강소성 장강 남부의 곤산
(상해시 서쪽) 출생의 조선인으로 유학공부를 하다 서학이자 천주교를 접했다.그는 광동의 마카오와 萬堂에서 신학공부
를 하고 인턴 신부를 거친후 서품을 받고 곤산의 서쪽 지방인 소주에서 불법의 포교 활동을 하다 신유박해 때 (1801년)
잡혀 죽었다.국법과 왕명을 어겼으니 잡히면 당연히 사형이다.이어 주문모로 부터 영세를 받아 신자가 된 황사영은 백
서 문장 말미에 서력 기원인 천주 강림후 1801으로 썼다.청나라에 부속시켜 달라면서도 淸 황제의 '嘉慶' 년호를 쓰지
않은 불출이 있다.그는 이미 서양인 행세를 했고,조선을 무시했다.죽을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그가 쓴 백서에 '서양군대
5~6만의 파병 요청을 하고,청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신부를 보낼것,조선을 청에게 부속시키고 황제의 친왕에게 명
하여 조선을 감독케 할것' 등등 당시의 상식으로는 용인될수 없는 극단의 문구까지 사용하면서 죽음을 재촉했고 신유박
해는 살벌하고 가혹하게 이루워 졌다.
14,또한 19세기 초 백서를 쓴 황사영을 비롯해 천주교 선교에 열을 올렸던 남인들(주문모를 비롯한 서양의 신부들 포함)
모두는 무모했다.역사 조선이 상국으로 받들면서 정삭과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쳤던 청의 황제인 옹정제(1723~1735)가
이미 즉위하자 마자 어명으로 천주교를 금지하고 선교사와 신도들을 추방,투옥하는 박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
고 백서를 쓰면서 청황제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무지도 있다.어리석은 행동이 아니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당연히 국법을
위반한 불법 행위를 했으니 결과는 뻔한 것이다.어디서 호응을 받을 것인가? 황사영의 백서는 사전에 발각된 것이 오히
려 잘된 일이다.이들이 대륙의 화동지방의 양주에서 활동하다 죽었다는 보충 설명으로는 순종 1년(1907년)에 이항로의
제자 柳重敎와 金平默이 편찬했다는 '宋元華東史合編綱目' 란 편년체 역사서의 내용에서도 밝히고 있다.이 역사서는 송
나라와 원나라가 동방을 통치하던 시대에 고려(태조 23년에서 공민왕 16년 까지 480년,940~1367)가 華東지방에 있었다
는 화동의 고려를 잘 서술해 놓고 있다.즉 대륙 화동지방 소재의 고려를 강목체로 서술해 놓았다.당대의 유학자 유인석과
유중교와,김평묵은 엉성한 사람이 아니다.20세기 초 이들조차 대륙 華東의 고려를 말하고 있으며,반도의 왕씨 고려나 이
씨조선을 말하지 않고 있다.
15, 조선사에서 최초의 천주교 신자는 李承薰(1756~1801)이고,최초의 순교자는 尹持忠(1759~1791)과 權尙然(1751~
1791),최초의 신부는 金大建(1822~1846)이라고 한다.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영남학파 南人의 수재들이다.서인의 노론
이나 소론및 다른 정파의 출신에는 서학이나 천주교 선교나 신봉으로 죽거나 박해 받은 사람이 없다.이승훈은 정조 초
기(1780년경)에 프랑스의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그는 평소 남인으로 실학의 정다
산 형제들과 친밀하게 지내던 강남의 楊州 사람이었다.그는 정조 9년(1785)에 천주교회를 세우려다 체포되어 '斥邪文'
을 쓰고 천주교를 떠났다가 다시 포교를 하던중 '辛酉邪獄(1801)' 때 붙잡혀 그의 아들,손자,종손등 4대가 수난을 당했
다.당시 천주교가 배척 당했던 이유는 간단했다.자신들의 종교 교리를 앞세워 타인들의 종교와 문화를 멸시,배척하는
유일신에서 왔다.즉 타인이나 타종교를 용인하지 않는 독선이 작용하여 크게 대립했다.유일신교인 천주교 교리가 동방
의 '儀禮文化인 조상숭배 문화를 배척' 했기 때문에 반작용은 컸다.이는 국체와 기성의 권력을 흔드는 일이기에 용서 될
수가 없었다.선조 13년(1580)에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서 천주교 교회를 세웠다는 해설도 거짓말이다.만약 그때 마테오
리치가 천주교회를 세웠다면 그는 그때 죽었다.
16, 이탈리아의 마테오 리치는 예수회의 수련수사(제수이트,파리에 본부,소속교구 없이 교황 직속으로 활동)로 1578년
3월 24일 포루투칼의 리스본을 떠나 동방으로 오던중 인도의 코친에 머물며 사제 서품을 받았다.따라서 그는 선조13년
(만력 6년) 경에는 현재의 중국 땅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런데 어떻게 지금의 북경에 천주교회를 세울수 있단 말인가?
마테오 리치는 선조 34년(1601:만력 29년)에 가서야 북경의 거주와 전도소의 설립을 허락 받았을 뿐이지 공개적인 천주
교 포교의 허락은 없었다.오히려 현 중국의 강남지방에 활거하던 東林黨에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
으며,화북지역과 화중지역엔 천주교 신자들이 거의 없거나 적었다.19세기 중반 영남지방(광동과 광서)에서 발생한 홍수
전의 태평천국 봉기는 홍수전 스스로가 예수의 동생임을 자처할 정도로 천주교(기독교)의 중국화와 연계가 깊은 봉기였
다.그러나 20세기초 산동과 화북등 북방에서 발생한 의화단의 봉기는 서양과 천주교를 철저히 배척하는 봉기로 천주교
에 대한 대륙 북방과 남방의 온도차는 크다.특히 남방에 있던 동림당(강소성의 강남 무석시의 동림서원이 중심)의 실학
적 진보지식인 중에는 조선의 남인들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강소성 무석시 동림당 본부인 東林書院 인근이 바로 역사 조
선의 핵심인 양주였고,이곳에 조선인 신부 주문모의 고향 곤산이 있으며,포교 지역인 蘇州가 있다.
17, 아주 가혹했던 신유사옥(1801)은 그동안 숨죽여 있던 노론들의 잔치였다.건강했던 정조가 무엇 때문인지 급사를
하자 노론의 벽파와 손을 잡은 수렴청정의 대비 정순왕후(영조의 둘째 부인)는 대대적으로 천주교도와 남인들의 탄압
에 나섰다.마침내 노론의 천주교 탄압의 칼은 춤을 추었다.권력은 이래서 무서운 거다.그동안 조정에서 천주교를 묵인
하자는 노론의 信西派와 탄압을 주장하던 攻西派 들의 대립조차 무색할 정도였다.천주교의 금지령을 내려졌고 五家作
統法을 시행하여 남인과 시파(진보)세력 들을 잡아 들이고 몰아내기 시작했다.청의 옹정제도 어명으로 천주교 금지
교서를 내리면서 오가작통법을 가동해 철저히 감시한바 있다.노론의 벽파들은 조선에서 천주교도를 완전히 뿌리 뽑
으려 했다.이어 천주교도의 색출작전이 벌어졌고 이사건으로 이가환,권철신,이승훈,정약종,주문모을 비롯해 수백명
의 천주교도 들이 죽거나 유배 되었다고 역사는 쓴다.즉 보수의 노론 벽파들에 의한 진보의 남인들 몰살 작전이 벌어
진 것이다.또 그해 10월에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교도들의 탄압은 더욱 가혹해 졌다.
18, 조선의 천주교 최초의 신부였다는 한성부 양주의 김대건은 1841년 경 최양업등 두사람과 함께 광동성 포루투칼
인 주거지에 있던 마카오의 동방신학교(조선신학교=外邦傳敎會)로 가서 신학을 수학하고,1843년(헌종 9년) 12월 31
일 인턴 신부(補敎)로 취임을 한다.그는 2년의 보교를 거친후 1845년 초에 상해로 진출해 양주및 한성부에서 선교활
동을 펼치다 1845년 8월 17일에 광동성 '韶關市 始興縣에 있는 萬堂신학교에서 神品聖事(서품)' 를 받고 조선인 최초
천주교 신부가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김대건 신부 역시 조선에서 신부 활동은 했으나 반도에서 포교와 사제 활동을
한적은 없었다.그는 대륙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했고,자신에게 서품을 주었던 페레올 신부와 함께 다시 양주이자 한
성부로 몰래 들어와 불법 포교활동을 하다 잡혀 헌종12년(1847) 9월에 처형 당했다.따라서 그는 신부가 된지 2년 만
에 죽은 것이니 어디의 김대건이든 포교를 할 충분한 시간은 없었다.그러나 김대건 신부도 조선의 최초 신부는 맞으
나 반도에 온적은 없었다고 그 스스로 말한다.김대건을 비롯한 서양 신부들은 불법선교 이외는 큰 잘못이 없었으나
죽게 된것은 서양인 신부들과 서양인,그리고 서학이자 천주교도 들이 1차 아편전쟁(1840)에서 서양세력들의 동방
침탈시 향도역할을 성실히 잘했기 때문 이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