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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재의 상징-호랑이
1, 호랑이- 호랑이는 민족 문화의 기상
⊙ 고구려 벽화의 白虎는 龍처럼 날아다니는 신령스런 존재로 등장
⊙ 조선 후기 민화에서는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존재로 나타나
⊙ 맹호부대·고려대 마크 등 지금의 호랑이 그림은 日帝의 유산
까치호랑이 | 지본채색(紙本彩色·종이에 색칠하여 그림) |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우리 문화의 원형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호랑이다. 그 호랑이가 우리 민족의 심벌로 가장 친근하게 다가왔던 경우가 바로 88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였던 ‘호돌이’이다. 용맹스러우면서도 지혜롭고, 위엄이 넘치면서도 넉넉한 도량이 있는 한국 호랑이를 심벌화한 호돌이는 지구촌 축제인 올림픽 무대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과 한국인의 심성을 알렸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은 단연 호랑이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호랑이를 하나의 평범한 짐승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인격을 부여하거나 때로는 신격화해서 존숭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한편으로는 공포와 외경의 대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삿된 것을 물리쳐 주는 수호신이나 보은의 영물로 받들어 온 것이다.
이런 다양한 시각이 말해 주듯 이름도 여럿이었다. 가장 흔한 호랑이, 범 외에도 산령(山靈), 산군(山君), 산신(山神), 산군자(山君子), 영수(靈獸), 대충(大蟲), 산정(山精), 신수(神獸) 그리고 산중호걸(山中豪傑), 백수지왕(百獸之王) 등 수많은 별칭으로 불렸다.
호랑이의 용맹한 기상은 더러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를 헤쳐 나가는 정신적 에너지로 강조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육당 최남선이 잡지 《소년》(1908. 12) 창간호 표지에 <근역강산 맹호기상도(槿域江山 猛虎氣像圖)>를 그려 조선의 소년들에게 웅혼한 기질을 일깨워 준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한반도의 모습을 네 발톱을 곤두세운 채 대륙을 호령하는 호랑이로 표현했다.
이 그림은 한반도의 모습을 연약한 토끼 형상으로 표현했던 일제의 의도적인 민족 폄하에 대한 반박의 뜻을 지닌 것이기도 했다.
육당은 1926년 《동아일보》에 <조선역사 및 민속사상의 호랑이; 건국 초두 이래 영원조선의 표상>이라는 글을 연재했는데, 여기서 그는 우리나라를 ‘호담국(虎談國)’, 즉 전 세계에서 호랑이 이야기가 제일 많은 나라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호랑이는 깊은 산속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 하나의 정서(情緖)로 깃들어 온 영험한 동물이다.
날아다니는 호랑이
<근역강산맹호기상도>.
조형으로 표현된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호랑이 유적으로는 경상남도 울주군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岩刻畵)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선사예술을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인 이 바위그림은 그 시대 사람들의 주요 식량원이었던 산짐승과 바다 동물을 다소 과장된 양감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호랑이는 사뭇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삼국시대의 호랑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서 만날 수 있다. 우현리(遇賢里) 중묘(中墓)의 현실(玄室) 서쪽 벽에 백호도(白虎圖)가 그려져 있는데, 그 모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호랑이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머리 부분은 갈기를 지닌 청룡(靑龍)의 그것과 같고 목부터 꼬리까지 이어지는 몸통은 지나치게 길어 마치 꿈틀거리는 뱀처럼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머리에 뿔이 없고 목과 등 부분에 뱀의 비늘 대신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호랑이를 상징한 것이 분명하다. 전체적으로 용과 흡사하게 표현한 것에서 용과 함께 영물(靈物)로 신성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호랑이가 마치 뱀처럼 길게 그려지는 양식은 중국 한대(漢代) 화상석(畵像石)에서 처음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크게 성행,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양식은 신격화한 호랑이를 표현한 것으로 사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수렵생활 등으로 호랑이와 접하며 살았을 평민이나 하류 계층에서는 호랑이가 어떻게 표현되고, 어떤 존재로 여겨졌는지는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 자료로는 경주 김유신묘의 호석 역할을 하고 있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부조 가운데 하나인 호랑이신상(寅神像)을 들 수 있다.
여기서 호랑이는 문관복에 검을 들고 몸 전체를 S자형 곡선으로 유연하게 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슴이 앞으로 돌출되어 탄력 있게 보이며 의복이나 신체의 표현을 부조의 강약에 의해 표현한 능숙한 조형 감각을 보여주는 예술품이다. 흥덕왕릉(興德王陵) 십이지신상이나 황복사지(皇福寺址) 출토 십이지신상 등에서도 같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 거치면서 변화
고려시대 호랑이 자료는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 고려시대는 도참사상(圖讖思想)의 발전과 분묘(墳墓) 양식의 변화에 따라 석관(石棺)에 사신도가 음각으로 새겨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석관 호랑이는 긴 몸체가 변화되어 기어 다니는 벌레 형상으로 축소되었지만 얼굴 표정은 용과 호랑이를 합성시켜 놓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또 강화 가릉(嘉陵)에 있는 석호(石虎)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편안함과 웃음, 근엄함이 돋보이는 형상이지만 몸집에 비해 얼굴을 과대하게 표현하여 어딘가 조선시대 호랑이 원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몇몇 자료를 통해 고려시대에는 이전시대의 신격화되었던 호랑이가 형태나 상징적 의미에 있어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랑이가 명실상부하게 한국인의 정신과 생활문화 속에서 예술적으로 승화되어 화려하게 꽃핀 시기는 역시 조선시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새로운 형태로 전개된 민중미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민화 속에서 호랑이는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 이전 시대의 호랑이가 고분벽화나 왕릉 등의 호석에서 주로 죽은 자의 안식처를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다분히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면 18~19세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생활에서 직접 만나고 부딪치고 관계를 맺는 ‘현실적인 동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계승된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호랑이는 신령스러운 이미지를 벗어나 익살스럽고 개성이 돋보이는 형태와 소재로 다양하게 변모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의궤(儀軌)에 등장하는 사신도 중 백호의 형태를 보면 초기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백호처럼 등에 갈기를 그려 신적인 존재로 표현되지만, 중기의 것인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1649)에서는 영험한 분위기가 거의 사라지고 매우 사실적인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도상은 17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민화에까지 영향을 미쳐 호방하고 점잖은 인간의 얼굴이나 익살스러운 모습을 띠게 된다. 특히 조선 후기 민화에 그려진 호랑이는 세계 어느 문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해학과 익살, 재치가 물씬 풍기는 독창적인 캐릭터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다.
해학과 유머, 여유. 호랑이 그림
민화는 서민의 실생활에서 폭넓게 사용되던 ‘생활미술품’에 속하는 그림이다. 서민들의 소박한 염원을 담고 있으므로 소재가 무척 광범위하고 대체로 서민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에 주제와 형식은 일정한 틀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민화에서 호랑이는 특히 사랑받는 소재였다. 호작도(虎鵲圖), 호렵도(虎獵圖), 화조영모도(花鳥翎毛圖), 영수도 등이 호랑이가 들어가는 대표적인 그림들이다. 이 중 호작도, 즉 ‘까치호랑’이 그림은 많은 이가 민화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만큼 대표적인 그림이다.
아닌 게 아니라 까치호랑이 그림은 민간설화, 민속극, 민요 등 서민문화의 주요 레퍼토리가 합해진 종합적 성격을 띤 소재이다. 주로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며 추상적인 형태와 다양한 채색으로 조선후기 민중의 심성을 잘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호작도의 연원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그림으로 중국의 표작도(豹鵲圖)가 있다. 중국어로 ‘표(豹)’자는 소식을 알린다는 ‘보(報)’자와 동음관계에 있고, 까치는 ‘기쁜 소식’을 알리는 길조라고 알려져 있다. 이 두 동물이 함께 어울려 보희(報喜), 즉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뜻을 나타낸다.
여기에 정월을 뜻하는 소나무가 더해져 이 그림은 ‘신년보희(新年報喜)’, 즉 새해를 맞아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원하는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뜻을 지닌 중국 그림 ‘표작도’가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다분히 이질적인 표범이 우리에게 친숙한 호랑이로 바뀌어 ‘호작도’로 변화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민화 속의 호랑이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전혀 무섭지 않고 약간은 바보스럽기까지 한 친숙한 호랑이가 있는가 하면 위풍당당한 용맹과 위엄, 신의와 덕성을 갖추어 신격화한 호랑이도있다.
그렇지만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호랑이를 무서운 대상이 아니라 다정한 친구, 혹은 동네 어르신처럼 인자한 ‘인격체’로 바라보기를 즐겨했다. 가장 힘이 약한 동물인 토끼가 힘센 호랑이에게 굽실거리며 담뱃대를 물려 주고, 호랑이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담배를 피우는 그림에서도 그러한 면모가 느껴진다. 그 그림 속의 호랑이는 체통을 중시하는 조선의 양반이나 선비의 위풍을 연상케 한다. 그야말로 한국적인 유머를 대표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호렵도’는 험준한 산간에서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역시 민화의 인기 있는 화목 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의 오른쪽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본격적인 사냥에 앞서 멧돼지나 여우처럼 비교적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는 장면이 먼저 나오고 이어 성난 호랑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이들을 위협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폭에는 사냥한 동물들을 수장(首長)에게 바치는 장면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호렵도는 단순한 사냥 그림이기에 앞서 우리나라 산천경개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인간은 대자연 속의 일부임을 깨닫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아래 그림은 다양한 동식물과 곤충들을 활달한 필치와 화려한 색상으로 개성 있게 그려낸 화조도이다. 화면에 보이는 수탉은 벼슬에 올라 관(冠)을 쓰게 된다는 뜻의 ‘출세’를 상징하며 암탉은 매일 알을 낳기 때문에 다산(多産)을 의미한다.
또한 다정한 닭과 병아리의 모습은 안주인과 바깥주인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 부모자식 간에 모두 화목하게 지내는 ‘가족평안(家族平安)’을 의미한다. 일반 화조도에서는 보기 힘든 호랑이와 곰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호랑이와 곰’의 설화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화조도 8폭 병풍(花鳥圖八幅屛風) | 지본채색 | 각 88×32㎝ |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민속신앙 속 호랑이, 산신령의 使者
호랑이에 대한 존숭의 관념은 대표적인 우리 전통 민간신앙 중 하나인 산신당 신앙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당신앙(堂神仰)은 온갖 재앙과 질병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먼 옛날부터 민간에서 절대적으로 신봉되어 온 신앙이다.
신을 모신 신당은 보통 산신당(山神堂)으로 불리지만, 형태나 지방에 따라 서낭당, 국사당(國師堂), 부군당(府君堂), 노고당(老姑堂) 또는 할미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산신 신앙은 당굿을 수반하는 신성한 행사인 ‘당제(堂祭)’를 통하여 민간 최대의 행사로 이어져 왔다. 그런데 바로 이 산신당 신앙에 호랑이에 대한 신앙이 곁들여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산신당에는 신앙의 표적으로 산신을 그린 산신도가 모셔지고 있는데, 산신은 대개 깊은 산중을 배경으로 수염이 허연 노인 또는 법복을 입은 승려로 표현된다. 중요한 것은 이 신선과 함께 반드시 호랑이가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산신도의 호랑이는 무섭게 포효하는 모습이 아니라 사뭇 인자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호랑이가 인간을 해치는 악한 짐승이 아니라 인간을 도와주는 착한 짐승이라고 생각한 우리 민족의 호랑이에 대한 인식 내지 관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순수한 민간신앙으로서의 산신당이나 산신도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사찰의 산신각에 모셔진 산신도가 많이 남아 있는데, 사찰 신선도의 신선이 대개 남성인 데 비해 민화 형식을 띤 무속이나 당집의 산신도는 종종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는 모계사회였던 아득한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킴이 호랑이
벽사 호랑이 |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호랑이 민화에서 호랑이의 가장 일반적인 역할은 사악한 귀신을 쫓는 ‘벽사()’의 화신이다. 앞서 이야기한 까치호랑이 그림은 주로 용 그림과 함께 대문에 붙였는데, 용은 오복(五福)을 집안으로 불러들이고 호랑이는 집안에 들어오는 삼재(三災)를 막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호축삼재(虎逐三災)라 해서 도병(刀兵), 질역(疾疫), 기근(饑饉)의 세 가지 재앙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조선시대에는 호랑이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이 중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齋叢話)》, 김매순(金邁淳: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에 보이는 벽사구복(求福)에 관한 기록은 주목해 볼 만하다.
우리의 전통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를 보면, 정월이면 대문에 용이나 호랑이를, 부엌문에는 해태를, 광문에는 개를, 중문에는 닭을 그려 붙인다고 기록이 나온다. 이 그림들은 정월 초하룻날 액막이를 위해 그려 붙이는 세화(歲畵)인데 용과 호랑이를 그린 용호도가 특히 애용되었다고 한다.
용호도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주로 백호(白虎)이다. 백호는 산신도나 사찰의 포벽화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줄무늬 호랑이보다 더욱 신성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호도에는 반드시 날카로운 어금니, 즉 귀치(鬼齒)가 표현되는데 대부분 두 개이고 더러 네 개를 그린 경우도 있다. 이는 아마도 호랑이의 위엄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용호도는 일반 민가와 사대부가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즐겨 사용되었다. 궁중에서 사용한 용호도 중 대표적인 것이 청룡백호도(靑龍白虎圖)이다.
호랑이 부적
좌청룡 우백호 부적 |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백호는 이름 그대로 털이 흰 호랑이를 뜻하지만 한국과 중국 등 동양권에서는 신화나 설화에 나오는 영험한 상상의 동물을 의미한다. 민속 신앙에서는 호랑이에 바탕을 둔 상상의 동물로 청룡(靑龍), 주작(朱雀), 현무(玄武)와 함께 사신(四神)을 이루어 신격화되었다.
앞서도 잠깐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구려 고분벽화 속의 백호는 긴 뱀의 형상을 하고 하늘을 나는 용처럼 그렸다. 백호를 용처럼 생각한 상상력은 용이 하늘과 바다를 거침없이 다니고, 비나 구름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백호를 용처럼 그린 도상은 고려시대에까지 이어진다.
벽사의 기능을 지닌 호랑이 그림으로는 ‘호랑이 부적’도 빼놓을 수 없다. 호랑이는 영험함과 용맹을 지녀 잡귀를 물리친다고 여겨 그림이 아닌 실제 호랑이의 수염이나 발톱, 이빨을 구해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또한 호랑이를 그리거나 판화로 붉게 찍어 부적을 만들기도 하였다. 호랑이 부적 역시 여느 부적과 마찬가지로 문 위에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녔고, 때로는 불에 태워서 그 재를 먹기도 했다. 호랑이 부적은 부적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효험을 지닌 부적으로 인정되었다.
조선 후기 상류층 가정에서 돌쟁이부터 4~5세의 남녀 어린이가 쓰는 모자의 오른쪽 아래에 씩씩하고 용맹하게 자라라는 의미로 백호(白虎)를 수놓았다.
벽사적인 역할과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호랑이 조형으로는 양석(羊石)과 함께 왕의 능원을 지키는 호석(虎石)이 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50여 곳의 능에는 거의 모두 호석이 남아 있어 대략 150~200여 상의 호랑이 석상을 볼 수 있는 셈이다.
이들 호석의 호랑이 얼굴역시 포효하는 무서운 표정이 아니라 대체로 위엄의 한편으로 해학과 익살이 담겨 있는 정겨운 표정으로, 이른바 ‘한국 호랑이’의 정형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다?
호랑이 발톱 노리개(위), 호랑이 이빨(아래)
한국인이라면 삼척동자까지도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 하나 정도는 알고 있을 만큼 우리나라에는 호랑이를 소재로 한 신화와 전설이 많다. 호랑이와 인간, 인간과 호랑이의 구별이 없을 만큼 사대부 계층은 물론, 기층 문화 속에서도 민중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여왔다. 그런데 가끔 전혀 우리나라 호랑이가 아닌 호랑이 그림이 버젓이 한국 호랑이 행세를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시중에 제법 나도는 일본 호랑이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호랑이가 생육하지 못하는 땅이었다. 넓이는 한반도의 세 배 크기인데도 어쩐 일인지 ‘백수의 왕’이라 불리는 호랑이가 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일찍이 고분벽화, 불교회화 등의 예술이 대륙에서 전래되었으나 호랑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대륙과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지면서 용과 같이 위용과 용맹을 갖춘 신령스러운 동물에 점차 호감을 갖게 되었다. 호랑이 그림도 그리게 되었다. 호랑의 모양 자체는 조선과 중국 그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중국 호랑이인지 한국 호랑이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표정이라든가 분위기는 호랑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진짜 살아 있는 호랑이와 마주한 적이 없는 일본 화가들은 호랑이에 대해 매우 피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접근했다. 그들은 호랑이를 바람이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용처럼 신비한 기백이 서린 동물로 여겨 반드시 비바람이 몰아치는 대나무 숲이나 파도를 배경으로 그렸다. 그런 시도는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853년경부터 시작된 메이지 유신은 국가의 상징이자 살아 있는 신, 덴노에 대한 절대 충성을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나타난 일본의 호랑이 그림이 이른바 ‘죽림출호도(竹林出虎圖)’이다. 즉 대나무 숲에서 나오는 호랑이를 그린 그림이다. 이런 그림에 그려진 호랑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상대를 잡아먹을 기세를 보여주는 사납고 도전적인 호랑이이다.
호랑이 문화의 변질
1950년대에 그려진 일본의 호랑이 그림.
1972년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서 3년간 한국문화를 연구하다가 돌아간 칼 스트롬(Carl Strom)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문화 예술 면에서도 일본풍이 강요되고 유행하는 동안 멋들어진 한국 호랑이의 문화는 점차 역사의 뒤로 잦아들고 대신 일본식 호랑이가 판을 치게 돼 그야말로 국적 없는 호랑이 세상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용감한 맹호부대 마크, 국민의 신발이었던 부산의 범표 신발 마크, 네모난 곽성냥갑의 비사표 마크, 1912년에 제작되었다는 고려대학교 마크 등이 모두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하는 모양이다. 이제까지 보았듯 한국에는 그런 무서운 호랑이가 없다. 이것은 전형적인 일본 호랑이다.
조선의 호랑이 그림은 조선인의 심성을 닮아 무섭지 않다. 입을 크게 벌려 남을 해할 듯 위협하는 일도 없다. 그 대신 선하고 친근하며 익살과 해학, 그리고 재치로 가득한 정겨운 모습이다.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호랑이다. 이러한 호랑이관(觀)을 중심으로 유례없이 독특한 ‘한국적인 호랑이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많은 부분 잃어버리고 흐트러진 한국의 호랑이 문화를 우리 심성에 맞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 숙제로 남아 있다. 호랑이 문화를 바로 보는 일이야말로 우리 전통문화의 본질에 다가서는 첫걸음인 셈이다.⊙
[출처] :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 : <윤열수의 문화재 이야기> /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