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인조왕릉 장릉(長陵)
조선왕조 제16대 인조왕릉의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이다
이곳에는 인열왕후(仁烈王后)와 같이 묻혀 있다.
인열왕후(仁烈王后) 청주(淸州) 한(韓)씨는 인조(仁祖)가 능양군(陵陽君: 인조)때 17세의 나이에 혼인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해졌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왕이 되자 왕비가 되었다.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바꾸어 청(淸)나라를 멀리하고 명(明)나라를 가까이 하는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썼다.
이결과 1627년 후금(後金)의 침입을 받게 되어 형제의 의(義)를 맺게 된 것이 정묘호란이다.
그 후 1636년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고친 태종이 1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과 삼전도에서 치욕의 항복을 하고 청(淸)나라와 군신(君臣)의 의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다. 이것을 병자호란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외국에 대한 최초의 항복이다.
1644년 명(明)이 망하고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점령하자 1645년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인조는 소현세자의 청나라에서의 정치적 행적을 문제 삼아 소현세자를 학대하였고 소현세자가 병을 얻어 급사(急死)하자 인조가 아들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청(淸)을 가까이 하는 소현세자와 청(淸)을 배척하는 인조(仁祖)를 염두에 두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실제 인조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사망 경위를 암살로 추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가 죽은 뒤 인조는 왕권강화 차원에서 세손(世孫:소현세자의 장자)을 폐위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러한 전후과정에서 소현세자 부인인 강빈(姜嬪)이 죽음을 당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이로서 소현세자의 대(代)는 끊겼다.
장릉(長陵)은 처음 경기도 파주시 운천리에 인열왕후릉을 먼저 조성하고 인조 승하(昇遐)후. 옆에 인조릉을 조성했다가 1731년 영조(英祖7년)때에 지금의 갈현리 산에 옮겨와 합장릉(合葬陵)으로 조성하였다.
인조는 왕위에 즉위한 후 부모 묘를 김포로 옮기면서 장릉(章陵)이라 했다.
인조의 부모묘 장릉(章陵)과 인조의 장릉(長陵)인 두 장릉은 조산(朝山)을 인천의 계양산(桂陽山)으로 한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수십 km 떨어졌으나 하나의 조산(朝山)을 바라본 것이다.
조산(朝山)이란 풍수지리학의 용어로 집터나 묏자리 혈처(穴處)에 있는 맞은편에 있는 산을 안산(案山)이라하는데 그 안산(案山) 넘어 멀리 보이는 산을 조산(朝山)이라 한다.
예를 들어 경복궁의 안산(案山)은 목멱산(木覓山-남산) 이며 조산(朝山)은 관악산(冠岳山)이다. 장릉(章陵)과 장릉(長陵)이 수십 km 떨어져 있는 인천 계양산(桂陽山)을 왜 조산(朝山)으로 하였는지 궁금하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