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1월18일(수)맑음
매섭던 추위가 조금 누구려졌다. 대신 미세먼지가 희뿌였하다. 해성보살이 견과류를 부쳐왔다. 선덕스님, 도향스님께 나누어주다. 동쪽에서 해 떠서 서산 너머로 저무니, 이렇게 하루가 간다.
2017년1월20일(금)눈 온 뒤 맑음
새벽 정진 끝나고 선방문을 여니 은세계가 펼쳐진다. 雪國설국이 여기구나! 정신이 상쾌해지면서 온 몸이 백설처럼 하예진다. 아침 먹고 대중이 눈 치우는 울력에 나서다. 빗자루로 덮인 눈을 쓸어 길을 낸다. 포행 다니는 길과 공양간 가는 길을 내다. 울력 끝나고 다각실에 모여 차 한 잔 나누다. 역시 겨울 산사에는 눈이 와야 제격이다. 점심 먹고 눈 쌓인 산길을 걸어 포행을 다니다. 눈썹에 흰 눈이 내린 雪眉老松의 시야에 펼쳐진 前人未踏의 길을 간다.
2017년1월21일(토)눈
삭발목욕일. 흰 눈 천지. 은빛 길 밟고 얼어붙은 연못가를 걷는다. 마른 연잎 얼어 있다. 풍성한 눈송이가 하늘 가득히 날린다. 왜가리 한 마리 눈 내리는 하늘 비껴 날아간다.
滿眼琉璃園, 만안유리원
未踏地無痕; 미답지무흔
枯荷凝氷池, 고하응빙지
鶴孤飛上天. 학고비상천
눈 가득 유리의 정원
사람의 흔적 전혀 없는 그대로 일래
마른 연꽃 얼어붙은 못가에
왜가리 한 마리 겨울 하늘 날아가네.
2017년1월23일(월)맑음
濟圓제원 惟匡유광 蓮池연지 樹月수월 荷雲하운
새벽 영하19도. 섣달 그믐달이 앞산에 걸려있다. 새파란 추위에 질려 겨우 미소를 짓는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고 공양간을 오간다.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다. 코끝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가 맵다. 박하를 먹은 듯 정신이 맑아져 성성해진다.
2017년1월24일(화)맑음
밤 정진 마치고 방에 돌아와 앉는다. 산 속에서 고라니가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찌 그리 처량하게 들리는지, 외마디 소리가 마치 ‘추워요, 사는 게 고통이에요. 살려주세요!’라는 것 같다. 이렇게 추운 겨울 산 속에 뭐 먹을 게 있을까. 하루 종일 배고픈 채 헤매고 다녔겠지. 사방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포식자들과 인간들 때문에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채 거의 미친 듯이 돌아다녔겠지. 잠시 동안의 편안이라도 즐길 수 있을까? 축생의 삶이 그런 것이다. 六道가 서로 연결되어 넘나든다. 인간으로 태어났을망정 일생동안 심성을 계발하지 않고 축생의 습을 익힌다면 다음 생에는 축생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 소중한 기회를 헛되이 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이다.
Altamira, Chauvet, Lasco동굴 벽화-구석기 시대의 인간들이 어떻게 자연을 인식하고 교감하는 지를 보여준다. 3,4만 년 전 인간은 분별심이 강하지 않아 자연과 동물과 경계를 넘나들며 교감하였다는 걸 보여준다. 그들은 Homo sapiens라기 보다는 Homo spiritus호모 스피리투스였다. 현대인들은 자신을 자연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고서 자연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자신과 ‘다름’과 ‘같음’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그래서 자연과의 교감능력이 떨어졌다. 현대인은 자신이 만들어낸 VR(가상현실)에 갇혀 산다. 그 결과 공경과 겸손의 덕을 잃고, 감사와 공감의 능력이 떨어졌다. 人工文化에 둘러싸여 산다. 인공문화가 바로 가상현실이다.
2017년1월25일(수)맑음
점심에 국수 먹는 날. 오후 정진 쉰다. 동안거 결제 芳啣錄방함록이 나왔다. 방함록에 등재된 도반들을 찾아본다. 어느 스님이 어떤 산중, 어느 선방에 무슨 소임으로 살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작은 재미이다. 내가 아는 많은 스님은 유나, 선원장, 한주를 맡고 있다. 그만큼 구참이고 중진이란 말이며, 또한 선방이 노령화되어간다는 의미이다. 몇 년 뒤엔 선방스님의 반은 육십을 넘은 노장이 될 것이다. 출가자가 점점 귀해지니, 선방에 오는 젊은 스님들은 줄어들 것이다. 선방의 노령화 경향은 비구니들의 경우엔 더 심각하다.
저녁 예불 끝나고 상판 스님들이 입승스님 방에 모여 여름철 안거에 榜付방부들인 지원자를 羯磨갈마하다. 결원이 생긴 세 자리에 세분 스님을 결정하다. 이로써 하안거 방부가 마무리 되었다.
2017년1월26일(목)맑음
점심 공양 후 설맞이 대청소. 큰 방을 청소한 뒤 각자 자기 방을 청소하다.
2017년1월27일(금)맑음
새벽에 비오다. 기온이 이상스레 변하여 눈이 되어야 할 텐데 비가 내린다. 그러다가 아침 먹으러 내려갈 쯤엔 다시 추워져서 길이 얼었다. 빙판길을 조심스레 걸어가다. 오늘은 까치설날이라 정진을 쉰다. 명고스님 방에서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다.
春風按撫天地新, 춘풍안무천지신 봄바람 천지를 포근히 안아 새롭게 하고
道人再造山河安; 도인재조산하안 도인은 산하를 다시 편안하게 만든다,
變獼化鳳意如何, 변미화봉여하의 병신년이 정유년으로 바뀌는 뜻은 어떠한가?
君舟民水政治善. 군주민수정치선 국민은 물과 같고 정치가는 배와 같으니, 착한 정치를 펼쳐라.
저녁예불 끝나고 명고스님 방으로 찾아가다. 병신년 섣달 그믐날을 함께 보낸다. 명고스님이 비장했던 귀한 차를 내놓아 같이 음미하면서 문자를 희롱하고 천하사를 들먹이다.
捕琴携月渡三山, 포금휴월도삼산
幽人勸茶笑滿盞; 유인권다소만잔
가야금 안아 달빛의 손을 잡고
산을 세 개 넘어 벗을 찾아가니
도반은 차를 권하네,
웃음은 잔에 가득 넘치고
밤늦게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고 자리에 눕다. 한 해가 이렇게 가는구나.
2017년1월28일(토)맑음
새벽에 通謁통알의식을 하다. 사중의 모든 스님들이 큰 절 청풍루에 모여 시방삼세 불보살님
과 역대조사 및 호법신중께 새해를 맞아 예경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스님들 끼리 서로의 淸安청안과 淸福청복을 염원하며 맞절을 올린다. 이로써 설날 첫 만남을 기린다.
日出東方大笑我 일출동방대소아 동쪽에서 뜨는 해가 나를 보고 활짝 웃으니
日日是好日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이라
아침 떡국을 먹고 큰절 어른 스님들께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가다. 저녁에 육화당에서 큰 절 스님들이 윷놀이를 한다.
2017년1월29일(일)눈
눈 오다. 조금 젖은 눈이 추적 추적 내린다. 저녁 무렵 우산 받고 지팡이 짚고 산길을 걷다. 雪白山色은 淸神하다. 雪恩이 산을 덮으니 명암과 흑백의 대조(contrast)가 선명해진다. 흑백으로 찍은 산하가 수정체에 찍힌다. 눈 오는 소리 숲이 숨 쉬듯 들린다. 雪花가 나무위로, 우산위로, 땅 위로 내린다. 쌓인 눈 위로 새 눈이 안긴다. 보드라운 접촉이며, 포근한 안김이다. 길 앞도 雪白, 길 뒤도 雪白. 길 위도 雪白, 길 아래도 雪白. 길 가는 사람도 雪白. 뒤에 남긴 발자국은 곧 눈에 묻힌다. 길을 간 흔적은 이내 지워진다. 뒤에는 흔적 없는 雪白, 앞에는 텅 빈 雪白. 하얗게 빛나는 정신이 되어 돌아와 마루에 걸터앉으니 아직도 눈이 내린다. 절 마당에 길 낸 것이 모두 지워졌다. 스님들은 다시 길을 내야할 것이다. 그래야 절문 밖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