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나이 마흔, 쉰을 넘기며 생을 읽어내는 눈이 성숙해진 듯싶다. 이루어 낸 것이 포장이 되어 남겨진 이름보다는 살아낸 세월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을 가려내는 눈이 생겼다. 그리고 내 어머니의 이름을 아름다운 이름들의 맨 위에, 아주 맨 위에 첫 번째로 올려드려도 그 삶의 보배로운 가치를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란 게, 가식 없는 마음이다.
어느 날, 내 나이 마흔 일곱에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을 보았다. 너무 고왔다. 그 고운 얼굴에 내 어머니의 얼굴이 오버랩이 되어 눈을 돌리니 함박꽃처럼 크고 밝은 웃음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엄마의 사진이 들어 왔다. 거울 속의 내 모습보다 더 고왔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내 어머니의 마흔 일곱은 사고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되던 해의 나이였다. 오남매와 사정이 딱해 거둔 입양아이까지 육남매에 홀어머니까지 여덟 식구만이 오롯이 남겨진 가장의 자리가 내 어머니의 마흔 일곱에 맡겨진 자리였다. 실향민인 아버지는 외가댁이 재산 꽤나 있었지만, 통일이 되면 무조건 고향으로 가야 하신다며 땅을 사고자 하는 엄마의 의지와 관계없이 생기는 돈마다 실향민들을 태우고 고향으로 갈 버스를 사기에 열중하셨다. 아버지가 운수 사업에 발을 들여 놓으며 사들인 버스들이 무색케도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통일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로 인해 실패로 남겨진 운수사업의 마무리까지도 엄마에게 넘겨진 몫이었다. 마흔 일곱의 홀로된 여자가 감당해야 했을 그 세월 저편의 일들에 대한 가늠만으로도 그런 함박꽃 같은 웃음은 거두어 질 듯 싶지만 사진 속 그 웃음은 사진관 아저씨의 연출이 아니다.
어찌 꾸려내셨는 지, 생각만으로도 버거운 그 세월 속에 스며있는 엄마의 섬김의 시간들....... 구순을 바라보시는 지금까지도 대한 적십자사 부평지구 협의회 총무로 계시는 엄마는, 부평지구 협의회장을 30년 이상 하시며 이 사회에 봉사의 의미가 인식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던 이미 10여 년 전에 2000시간 자원 봉사 표창을 받으셨다. 곧 3000시간이신데 그것도 받으셔야지요, 하는 회원들의 말에 “다리가 아파 맘껏 돕지를 못해 미안한 게 문제지, 3000시간은 괜찮아요.” 하신다. 육남매를 고루 사회와 가정에서 제 몫을 다하도록 번듯하고 반듯하게 길러내면서도 그런 나눔과 섬김을 실천할 수 있었던,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삶을 살아낸 내 엄마이기에 가능한 고백이라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세월의 고단함을 짐작 못할 내 엄마의 환한 웃음은 적십자사의 각종 봉사 표창과 이곳저곳의 공로 표창 속에 들어 있는 이름처럼 섬김의 삶이 만들어 준 진짜 웃음이다.
“아효, 2층까지 올라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이거 하나 들고 가셔요. 고마워요.” 택배 아저씨 손에 들려지는 박카스, 한 병.
“아우, 아주 시원해. 아줌마 고생 많았어요. 고마워요” 목욕탕 세신 하는 분께 들려지는 바나나 우유, 하나
“아저씨, 운전하실 때 졸리시면 이거 하나 드셔요. 편안하게 태워 줘서 고맙습니다! 택시 기사님께 건네 드리는 사탕이나 껌.
어찌 생각해보면, 다 우리가 비용 지불하고 받는 서비스인데 엄마는 늘 고맙다하신다. 그 감사의 표현은 박카스, 원비디, 바나나 우유, 사탕, 껌.......으로 전달이 된다.
“내가 또 올게요. 집에 고양이가 혼자 있어. 우리 애가 밥이랑 챙겨 주기는 하는데, 걔가 날 좋아한다우. 고양이 걱정돼서 못있갔어요. 고양이도 좀 돌봐주고, 적십자 일도 좀 보구 또 올게요.” “예. 할머니 꼭 오셔요. 기다릴게요.”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들이 모두 깊은 인사로 배웅해 드리는 설정 같은 장면 또한 우리 엄마가 머물던 흔적의 정경이다. 치료 잘해 줘서 고맙다고 가실 때마다 하다못해 사탕 하나라로 갖다 드리며 고마움을 표현하면서도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원칙에 어긋나는 요구를 해서 불편하게 하거나 엄마의 실속을 차리지 않는다. 그저 고마울 뿐, 인 것이 우리 엄마의 마음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침부터 밤까지 장사를 하셨던 엄마였지만, 내 엄마는 늦잠을 자느라 못 일어나셨던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 할머니는 그 시대에도 여든 여덟까지 장수 하셨으며 우리 육남매 중 단 하나도 성인병이나 속병이 없는 것은 온전히 엄마의 정성 때문이었노라 난 고백을 한다. 그 살림을 건사하면서도 엄마는 단 한 번도 우리 육남매의 아침을 거르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둘째 오빠부터 줄줄이 우리 넷의 도시락 두 개 씩, 여덟 개를 안 챙겨 주신 적이 없다. 학령기에 반장을 도맡아 했던 난 늘 어려운 아이들의 김밥을 챙겼어야 했는데 우리 집 형편이나 엄마 눈치를 고려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소풍 때마다 도시락 없는 애들이랑 나눠 먹으라고 기본적으로 두세 개는 싸주셨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어떤 교회 사모님이 엄마와의 사연을 블로그에 올려 주셨는데, 요즘 세상에 팔순이 다 된 할머니가 번번이 주변의 고마운 지인들을 손수 만드신 음식으로 대접하신 다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늘 그 사모님이 감사하다, 했었다. 듣고 보면 그들은 당연한 일을 한 것인데도 엄마의 마음 밭으로 들어가면 보답해야 할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게 내 엄마의 섬김의 이유였다. “불평하고 없는 거 먼저 보자 치면 만족이 없어. 감사하다고 생각하면 있는 게 보인다니까. 있는 것만 보이니까 감사하잖아. 내꺼 다 챙기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 돌본다는 건 안 돌볼 생각인거야. 그냥 옆에 보였을 때, 그때 나누자고 마음먹으면 다 나눠지더라. 그게 인생이야.” 했던 엄마 말씀이 블로그 안에 오른 엄마의 섬김 속에서 들리는 듯 한 내 엄마의 세월 속의 고백이다.
엄친아로 불리며 학업과 재능의 우수성을 드러내던 큰 아이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했었다. 좋은 경험쯤으로 생각을 했던 내 마음과 달리, 아이는 전심을 다해 재능 기부를 해 사회 복지 시설의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던 아이였지만 조금씩 흔들렸고 대입이 걱정이 되어서 마음에 혼란이 왔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고백이 있다. 그때, 아이를 전심으로 응원하며 아이를 존중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내 학창 시절 기억 속의 내 어머니의 얼굴 때문이었다. 고 3 졸업을 앞두고 친구 한 아이가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해 졸업을 못할 지경에 처했다. 그저 딱한 마음에 엄마한테 말했고, 다음 날 내 머리맡에는 89000원이 놓여 있었다. 30년도 훨씬 전의 89000원이란 돈도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돌이켜 보면 엄마가 건사했어야 하는 그 가장의 자리를 견뎌내면서는 내어 줄 수 없는 마음이었다는 생각이 세월이 지날수록 진해진다. 친구 자존심 상하지 않게, 선생님께 살짝 드리라는 말씀대로 그리했고, 엄마의 깊은 마음은 어이없게도 내가 선행상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부끄러우면서도 고마웠던 기억이다. 그 일은 평생 내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겨주었고 내 아이에게도 잘난 엄마, 똑똑한 엄마 보다는 심장을 따뜻하게 하는 기억을 남겨 주고 싶다는 마음을 만들어 준 것이 내가 내 아이를 응원하게 된 뒷이야기다. 아이는 바이올린 천사로 불리던 그 시간들을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엄마의 응원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그 시간들을 회고 한다.
한 날은 외출을 하고 나갔다 오는데, 작은 아이가 전화로 누군가와 목소리를 있는 대로 높여서 통화를 하고 끊으며 얼굴이 상기가 되어 있었다.
“아니, 할머니가 집에서 가끔 치킨을 시켜 드시는데, 한 날은 치킨이 예전과 달라 전화를 했대. 그랬더니 거기 아르바이트 하는 여자 아이가 “그럼 다른 데서 시켜 드세요!” 하고는 딱 끊더라는 거야. 그래서 이제는 그 집에서는 치킨을 안 시켜 드신다네! 엄마, 내가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그 치킨 집에 전화를 했지,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할머니를 아시네. 갈 때 마다 고맙다고 음료수도 주시고, 껌도 주시고 그래서 고마워서 할머니 쓰레기도 내려다 드리고 그랬다면서 어쩐지 할머니가 왜 치킨을 안 시키시나, 했다면서 안 그래도 걔 짤렸대! “ 할머니를 위해 뭔가 큰일을 해드렸다는 듯, 아주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하던 작은 아이는 이어서, “나 때문에 걔 짤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살짝 떨렸는데 이왕 짤렸다고 하니까 다 말했지 뭐!!” 했다. 내 아이지만 그 마음 씀이 대견하기도 하고 이쁘기도 했지만, 손녀딸을 바라다보고 계시던 엄마의 행복한 눈빛이 아직도 내 안에 선연하다. 그 때 엄마의 행복한 눈빛은 손녀딸이 엄마 편을 들어서, 속이 후련해서 만이 아닐 것이다. 어쩜 엄마 귀에는 할머니를 아시네! 할머니가 고마워서 쓰레기도 내려다 드리고......., 했던 엄마의 존재감이 뿌듯하셔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목이 메었다. 세상은 업적만을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그 업적이 만들어 낸 이름만을 기록하려 한다. 정말 꼭 기록해두고 기억해야 할 것은 이름이 아닌, 내 어머니와 같은 분들이 살아낸 세월 속에서 남겨진 보배로운 흔적과 열매, 따스함이 아닐까?
며칠 전 엄마를 모시고 오랜만에 사우나엘 다녀왔다. 누군가가 물 젖은 발로 지나갔는지 바닥에 물기가 흥건했다. 모두들 돌아가는데, 다리도 아픈 엄마가 등 굽은 허리를 말아 쥐듯 엎드려 물기를 닦으며 잔잔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잘못해서 밟으면 미끄러져서 다치잖어.” 어딘가에서 선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유, 요새 저런 분들 찾아보기 힘든데.......”
나이 들어가는 시간이 아려,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는 세월의 흔적이 오히려 시리고 아픈 섬김 천사. 내가 불러드리고픈 내 어머니의 이름이다.
첫댓글 훌륭한 어머니의 희생과 봉사의 철학을 담담하게 그려내셨군요..
외부에 기록되지 않은 업적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고 길이 기억되리라 믿습니다.
이 작가님, 오랜만의 수필 잘 읽었습니다. 역쉬~^^ 감사합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어머니, 그리고 대견한 딸... 참 행복하겠어요.
따님의 재능기부 우리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까요? 12월2일 한마당 행사에서요~
어머니의 남을 배려하는 마음 감동으로 전해집니다~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길러내는 마음밭인가봐요.
그래서 어머니를 보면 딸을 알 수 있고
딸을 보면 어머니를 알 수 있는 거겠죠.
감사와 섬김으로..
에고. 단톡의 즐비한 시화전 소식들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했던 게 죄송스러워 올린 글이었답니다. 올려 놓고는 살짝 민망한 마음에 열어보았는데 이리 훈훈한 격려들이 요.. 너무 감사드립니다~ (꾸벅) 그리고 재능기부를 한 큰 애가 딸이 아니고 아들인데, 4일날 입대를 한답니다. 제대 후에 기회가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작가님, 다음 시화전 때 짧은 수필로 참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