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활절을 앞둔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새끼 나귀를 타시고 가셨습니다. 그때에 어린이들이 호산나 찬송을 부르고, 어른들은 겉옷을 벗어 길바닥에 펴고, 그 위로 예수가 탄 나귀 새끼가 걸어 들어갔습니다.
이 모양새는 한 나라의 새 임금이 왕의 보좌에 즉위하는 식전에 입장식 같은 풍경처럼 보여집니다.
이 사건을 두고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9)
이 예언의 성취가 바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때에 성경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구체적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 땅 길 가에 흔히 자라는 나무가 종려나무이기에 후에 종려나무가지를 흔든 것으로 생각하고 종려주일, Palm Sunday라 불렀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있어서 쓰임 받고, 예수님께서 흡족하게 받으셨던 장면을 생각해 보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순종과 헌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두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맞은편 마을에 들어가서 매인 매여 있는 나귀를 끌고 오라’고 ….. 그리고 누가 만일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해라고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매여 있던 나귀새끼도 영문도 모르고 끌려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두명의 제자와 나귀 주인 그리고 나귀새끼를 보십시오.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직면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고서 행동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더욱 나귀새끼는 더 하겠지요.
보십시오. 제자들도 이유를 모른 채 어떤 군소리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주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나귀새끼의 주인도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에 아무런 조건 없이 나귀 새끼를 내어줍니다.
나귀 새끼 자신도 이유 없이 주인이 아닌 사람에 의해 끌려갑니다. 그리고 한 번도 자신의 등을 내어준 적이 없지만 주님께 자신의 등을 내어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으로 생각없이 사는 바보 같이 보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내 머리로 계산이 되고, 마음이 동해야 움직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유가 많습니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연출되는 장면 장면은 우스꽝스럽고 이해하기 힘들고 코믹한 장난같이 보여집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 한 마디에 어떤 논리가 동원되지 않습니다. 이익과 손해의 머리 굴림이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내어 놓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그 한 마디에 …..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며, 나귀 새끼를 타시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므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길에’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에 손익의 논리를 떠나 묵묵히 순종하고 헌신함을 예수님께서는 사용하시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묵상했던 본문을 보십시오.
한 여인이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에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떤 논리로, 어떤 계산 하에서, 손익계산을 해서 옥합을 깨뜨렸습니까?
그녀가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내다보고 했습니까?
그녀는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존경하는 마음 하나로 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그 마음을 표했습니다.
그렇지만 계산적인 사람은 “쓸데없이 낭비를 한다고 …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데 ….” 라고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여인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그녀의 헌신이 증거될거라고 …..”인정과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도 보십시오.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그 곤란한 현장에을 때에 문제를 해결해서 잔치집에 질 좋은 포도주가 넘치게 했을 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포도주가 모자라자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 하실 때 그대로 물을 부었더니 질 좋은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현실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도 묵묵히 순종하므로 주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2. 모인 군중들이 외친 ‘호산나’를 생각해 보십시다.
호산나라는 말뜻은 \'구원하소서\' 하는 말입니다. 이 의미를 알고 우리도 외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호산나새순교회 성도들이기에 …..
(1) 찬송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두고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 천사들의 찬양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탄생에천사의찬양이울려퍼집니다. 나아가마지막십자가죽음을향한행렬에도어린이들의찬양이울려퍼집니다. 예수님의출생과삶과죽음은한결같이찬양을받으시기에합당합니다
작곡가 바흐는 교회의 음악을 담당하는 악장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들을 평생 했습니다. 그는 작곡한 화선지 끝에는 언제나 흔적을 남겼습니다. 바로 SDG라고 약자를 써놓았습니다. 이 약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솔리 데오 그로리아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2) 환영입니다.
호산나는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들의 노래입니다. 나귀에 자신의 겉옷을 얹고 자기 겉옷을 길에 깔고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극진한 마음으로 환영하였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특별히 병자들, 배고픈 무리들, 말씀을 들으려는 무리들에게 열렬히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외가 있었지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들과 왕과 로마관원과 같은 정치인들의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도전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호산나’ 외침에 싫증을 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아이처럼 외쳐야 합니다. 환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입성시키고, 나의 구주, 하나님으로 환영하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3) 구원이다.
호산나는 "비노니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비노니 구원하소서’였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경제적인 빈곤에서 벗어나서 배 부르고 등 따시게 살고 싶었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전쟁과 분쟁이 그치고 평화로운 세상 가운데 살기를 바랬습니다.
그렇지만 황금으로 꾸민 용상에 앉아 즉위하는 어떤 임금도 유대를 구원치 못했습니다. 천군만마를 앞세우고 입성하는 천하무적의 장수도 그들에게 편안을 가져다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윗 왕과 같은 강력한 능력의 왕이 도래하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시니 예수님이 얼마나 달라 보였겠습니까?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드디어 왔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제 그 메시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쳐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호산나는 죄로부터 영원한 해방, 호산나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영생의 호산나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외쳐야 합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분단된 우리 조국을 구원하소서.
오염되어가는 우주 환경에서 구원하소서.
도탄 가운데 신음하는 세계와 인류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비옵나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를 외치며 기도할 일이, 우리 삶 속에 실천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월터리드 미 육군 병원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마지막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기 얼마 전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30여분 동안의 문병을 마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더 하실 말씀이 없느냐고 묻자 아이젠하워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확신이 서있지 않은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면서 목사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호주머니에서 성경을 꺼내어 읽으면서 인간의 죄, 십자가, 구원 그리고 영생에 대한 말씀을 전한 다음 하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준비 되었습니다”라고…
성도 여러분, 예수님만이 우리의 호산나가 됩니다. 그분 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호산나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쳐야 하겠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과정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보면서 묵묵히 헌신하고 순종했던 사람들, 어린 나귀, 예루살렘 사람들이 외쳤던 ‘호산나’를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도 ‘호산나’를 외치며 삽시다. 나의 구주 예수님을 내 마음에, 내 삶의 왕으로 모시고, 찬송하며 묵묵히 순종으로 하나님께서 받음 직한 삶이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