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애월읍 애월리 1587번지 애월리사무소 마당
•시대 ; 조선
•유형 ; 비석(선정비)
•문화재 지정되지 않음
애월리사무소에는 조선시대의 선정비들이 많이 남아 있다. 선정비의 주인공은 목사 윤구동(允久東) 2기, 장인식(張寅植), 이의식(李宜植), 이행교(李行敎), 허명(許溟), 양헌수(梁憲洙), 정기원(鄭岐源)이다.
(1) 정기원목사선정비
•규격 ; 높이 78cm, 너비 38cm, 두께 15cm, 비각 있음
•비문 ; 使相鄭公岐源追思碑 煃忱拱北 棠化曁南 蜀袴詠丑 郭河潤九
(煃해바라기규, 忱정성침, 棠팥배나무당, 曁및기, 袴바지고)
정기원은 순조9년(1809) 출생하여 전라좌도水使, 충청도와 평안도의 兵使, 삼도수군統禦使를 지냈고, 제주목사(겸방어사, 무신)로 철종 13년(1862) 정월에 부임하였는데 고종 원년(1864)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재임중 그는 임술민란을 일으킨 주모자 姜悌儉․金興采 등을 체포 처형하고 난을 진압하여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평역미(平役米)를 감면하여 금전으로 대체하는 조치를 내렸다. 행정을 폄에 있어서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위엄이 있었다. 그 후 고종8년(1871) 4월 乙未洋擾 때에는 강화도에 파견되어 鎭撫使로 활약하였으며, 후에 摠戒使․御器大將․訓練大將 등 요직을 지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8쪽, 제주의 문화재 310쪽)
(2) 장인식목사선정비
건립연대 : 1850
규격(cm): 높이 너비 두께 12
비문 앞면 ; 사상정공인식선정비 애월면
앞면 ; 使相鄭公寅植善政碑 涯月面
뒷면: 道光庚戌(1850년) 11월
내용: 이 비는 후면에 「道光庚戌十一月日」이라 하였으므로 철종 원년(1850) 11월에 애월면에서 세운 것이다. 장인식 목사는 헌종 14년(1848) 3월에 부임하고 철종 원년(1850) 6월에 사직하였다. 재임 중 그는 本州 還穀이 너무 많음을 備邊司에 보고하여 이를 절반으로 줄였고, 水稅錢을 혁파하고 場稅米 60석을 補民庫에 매어 붙였다. 外通房을 설치하여 養蒙齋라 편액하고 知印을 가르치게 했으며, 布政門 밖에 金鐘閣을 세웠는가 하면 정의향교를 城 안으로 이건하였다. 三姓祠에 崇報堂, 北射場에 審固堂을 각각 세웠고, 南西右 3學堂을 부활시켰다. 義士廟를 정의서당에 세워 吳興泰를 祠享하였으며, 李禮延을 永惠祠에 從享하였다. 文科初試를 設行하고 군비를 보충하여 갖추었다. 書院의 山仰門을 새로 세웠고, 橘林書院廟庭碑, 三邑의 賑別儲庫 등도 세웠다. 春秋로 海神祭를 設行하고 各庫의 反利木을 혁파하였다. 이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銅碑를 세웠다고 한다.(북제주군 비석총람)
(3) 李宜植牧使善政碑
건립연대 : 1846년
규격(cm): 높이 74 너비 36 두께 17
앞면 ; 使相李公宜植去思碑
뒷면 ; 丙午十月
내용 : 이 비는 후면에 「丙午十月」이라 하였으므로 이의식 목사가 부임하는 해인 1846 년 10월에 세워졌다. 전면에 「床板油饌 一切革能」이라 하여 床板의 기름진 반찬을 一切 革罷하였다고 하였다.
이의식 목사는 현종2년(1846) 2월에 부임하고 동왕14년 3월에 사직하였다. 재임중 그는 삼읍 元田稅를 혁파하였고, 南西右 3학장을 혁파했고, 別牙兵 銃手 설치, 北水口城 退築, 天一亭 건립, 間城 확장, 重仁門으로 改額, 願納錢에 의한 군기 수리, 風雲雷雨壇과 官舍 등 업적을 남겼으나, 탐욕이 많고 포악하며 엄하고 혹독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범과 같이 미워했다고 한다.(북제주군 비석총람)
(4) 이행교목사선정비
건립연대 : 미상
규격(cm): 높이 74 너비 36 두께 17
비문
앞: 牧使李公行敎淸德善政碑
내용 : 이 비의 건립연대는 미상이다. 이행교 목사는 순조27년(1827) 8월에 부임하고 동왕30년 3월에 교체되었다. 그의 업적으로는 濟州鄕校를 西門 밖으로 이건하였으며 弘化閣을 개건하였다.(북제주군 비석총람)
(5) 윤구동목사선정비
건립년대 ; 1844
규격(cm): 높이 114 너비 47 두께 15
비문
앞면 ; 使相尹公久東設津去思碑
뒷면 ; 監高漢哲朴慶禮 道光甲辰十一月日 涯月浦助防將 梁藝煥 追恩
내용 : 이 비는 후면에 「道光甲辰十一月」이라 하였으므로 헌종10년(1844) 11월에 세워진 것이다. 高漢哲・朴慶禮가 감독하고 涯月浦 助防將인 梁藝煥이 追恩하였다.(북제주군 비석총람)
(6) 허명목사선정비
건립년대 ; 1857
규격 : 비신(碑身)의 너비는 34.5㎝이고 두께는 12㎝이며 높이는 65.5㎝이다.
비문
전면:□□□□□ 使相許公溟善政碑 □前□後
후면: 涯月面 咸豊丁巳 改竪
내용 : 이 비는 후면에 「涯月面 咸豊丁已改竪」라 하였으므로 철종8년(1857)에 다시 세운 것이다. 허명 목사는 순조14년(1814) 4월에 부임하고 동왕 15년 5월에 교체되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허명 목사는 무신으로 김수기 목사가 파직되자 후임으로 1814년 4월에 부임하여 1815년 5월에 이임하였다. 부임하던 해 허 목사는 潛女들이 미역을 캐는 데 따른 水稅를 없애고 돈 900냥을 준비하여 공용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행정을 청렴하게 실시하여 백성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비변사등록 순조14년(1814) 기사에는
윤2월 20일 약방의 입진에 시임대신과 원임대신이 안부차 함께 입시하였을 때에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제주목사 허명(許溟)은 일찍이 전라병사(全羅兵使)를 지냈다고 합니다. 절도사를 거쳤다면 본도 수령에 차정(差定)할 수 없는 것이 법례(法例)이긴 하지만 이번에 제주는 이미 특례로 뽑아 차정한 경우이므로 구애받지 말고 내려 보내도록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리하라 하였다.
는 내용이 있어 제주목사로 오기 이전에 더 높은 직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이 쓰는 '허멩이문서'라는 말이 허명 목사로부터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①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 난은 제주에도 영향을 끼쳐 양제해 등에 의해 모변이라는 반봉건운동을 불러일으켰다. 흉년으로 인한 삼정의 문란과 잡역·잡세의 폐단으로 인한 1813년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1814년 4월 후임 제주목사에 허명이 임명됐다.
그는 선정을 베푼 목사로 잠녀들이 미역을 캐고 내는 수세(水稅)를 폐지하고 스스로 900냥의 돈을 마련, 공용에 충당했다. 또 채무로 인한 도민간에 반목이 심해지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법적 보장이 없는 차용 문서를 임시 방편으로 만들어 도민들에게 지급했다고 한다. 나아가 제주목사 허명은 문서를 태우고 문서의 무효를 선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구원을 꾀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효력이 없는 문서를 ‘허멩이 문서’라고 불리게 됐다.(제주일보 2008년 4월 23일 김홍철 기자)
②제주어에서는 허수아비를 허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허멩이 문서는 허수아비 문서 곧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문서라는 뜻이다.
혹자는 조선시대에 제주목사를 지낸 허명(許溟)의 문서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순조14년(1814) 4월 허명이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조선 후기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황해도 수군절도사, 함경북도 절도사, 삼도통어사, 황해도 병마절도사, 좌포도대장 등을 지낸 사람이다. 이 사람이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정사를 펼치면서 어진 마음으로 제주 백성들을 사랑했다. 그러자 제주 백성들은 그 은혜를 기리어 말하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 노래는 제주 곳곳에서 회자되었다고 한다. 그가 목사를 그만두고 떠난 뒤에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고 정사를 펼치는 데 곧고 깨끗한 관리로 일컬어져서 구리(銅)로 비석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허명이 제주목사로 부임한 해인 1814년에 제주 잠녀들이 미역을 채취하면서 내는 수세(水稅=물질을 하는 대가로 내는 돈이나 곡식)를 없애 주었다. 대신 돈 900냥 남짓을 마련해 갖추어 두고서는 공공의 목적으로 쓰도록 도왔다고 한다.
이와 같이 허명이 제주 잠녀들의 수세를 없애 주었으나 나중에 온 목사가 다시 잠녀의 수세를 거두어들이게 되자 허명 목사의 문서를 내보이며 이것은 허수아비 문서냐고 항의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전해진 말이 허멩이 문서라는 말이다.(제주일보 2011년 4월 6일)
『탐라기년(耽羅紀年)』이라는 책에, “이 해(1814년) 목사 허명은 잠녀가 미역을 채취하고 내는 수세(水稅)를 폐지하고 자신의 돈 9백 냥을 공용으로 보충하니 허명의 치정을 백성들은 청백의 덕이라 칭송하여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허명 목사가 어려운 잠녀들을 대신하여 수세를 내주어 세금을 내고 받는 ‘페지(증서)’가 쓸모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후 필요 없는 증서나 쓸모없는 문서 따위를 일컬어 ‘허멩이 문서’라고 한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그러나 제주어 '허멩이문서'는 ‘허명(虛名=실속 없는 헛된 이름)의 문서’는 아닌지?
광양 현감 시절 호남 암행어사 심진현(沈晉賢)의 복명(復命)[명령을 받고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함]에 의하면, “광양 현감 허명은 사람이 원래 사리에 분명하고 정사 또한 부지런합니다. 나이가 젊기 때문에 앞길을 아까워하고, 읍이 잔폐하기 때문에 정성과 힘을 다하였습니다. 공무를 봉행하는 도리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서는 흠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진정(賑政)의 경우는 가을부터 준비하여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가솔을 데려오지 않고 아료(衙料)[관아의 운영비]를 끊었으며, 또 자기 집에서 가져온 1,000민(緡)의 돈을 고마조(雇馬租)와 바꾸어 자비곡(自備穀)의 밑천을 삼았습니다. 분진(分賑)할 때에 곡물을 정실하고 기준에 맞게 하였고, 장(醬)과 죽(粥)을 풍족하게 하였습니다.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이들을 머물게 하는 장소 또한 모두 직접 살펴서 더욱 후하게 하도록 힘썼으니, 하는 일마다 정성을 다한 것이 지극히 가상합니다. 다만 성품이 유약하고 솜씨가 아직 서툴므로 앞으로 점점 익숙해지면 공효를 이룰 수 있을 것이고, 더욱 힘써야 할 것은 너무 가혹한 점을 고치는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대리에 있다.(디지털포천문화대전)
(7) 양헌수목사선정비
使相梁公憲洙恤民善政碑
건립연대 : 미상
규격(cm): 높이 67 너비 37 두께 11
비문 ; 視民如子崇耀輕清 使相梁公憲洙恤民善政碑 焦思設賑族凶為豊 涯月面
내용 : 이 비는 애월면에서 세운 것이나 그 연대는 미상이다. 양헌수 목사는 고종원년(1864) 3월에 부임하고 동왕 3년 8월에 承旨로 임명되어 갔다. 그 업적으로는 우선 부임하는 해에 훈민편을 저술하여 백성을 가르쳤고, 다음해 7월에는 큰 비바람으로 나무가 꺾이고 기와가 날렸으며 모든 곡식이 절종 상태에 이르자 城을 돌아보면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三姓祠의 祭田을 별도로 설치하였는가 하면, 정사가 명백하고 공평하였으며 孝烈을 포상하고 폐막을 없앴으므로 백성들이 추모하여 비를 세웠다.(북제주군 비석총람)
《작성 2006.05.29. 보완 2026.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