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와 함께
(갈라디아서 2:20)
명승인 선교사
* 총회에서 태국의 선교를 위해 파송 받아 만 3년이 되었습니다. 태국에 파송된 해 Covid 19 펜데믹 상황이 시작되어 그동안 언어훈련과 태국 및 동남아시아 선교상황을 리서치하며 지내다가, 2022년 7월 수도 방콕에 ‘영피플비전오브아시아‘ 비전센터 및 교회를 설립하고, 주로 현지 다음세대 청소년 및 청년들을 위한 교육 및 후원 사역, 커피미션, 현지 교단과 협력사역 등 조금씩 사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1. 바울의 고난, 죽음을 무릅쓴 선교 여정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나름의 가치를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고, 일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대개는 생애 주기마다 자신의 삶의 가치를 투영하는 대상을 찾곤 합니다.
즉 어릴 때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부모의 말과 습관을 보고 따르며, 어느 정도 성장하면 특히 청소년 시기에는 가까운 친구가 그 대상이 됩니다. 이제 청년의 시기가 되어 자신의 버킷리스트가 확실히 생기면 그 일들을 이루는데 필요한 대상도 바뀝니다. 장년이 되어 가정을 꾸리면 그후로 자녀에게 올인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생애주기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추구하고 생각하는 가치는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무궁무진하여 특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어떤 대상이나 물건에는 고유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환경이나 시간이 지나면 변하거나 사라지기도 합니다.
제가 한국에 귀국하면 대개 서울에 홀로 사시는 어머님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어머니는 오랫만에 만난 저에게 가끔씩 옛날 전라남도 신안의 섬에서 사셨을 때 이야기를 하시곤 합니다. 어머니께서 어렸을 때 집에서 염전을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에 소금은 값이 제법 나가고 잘 팔려서 그 염전 때문에 어머니는 결혼하시기 전까지 그 어려운 시절에도 쌀밥만 드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소금이 그렇게 비싸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현대인들에게 소금은 성인병에 좋지 않은 것으로 덜먹고 거부당하는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소금의 가치가 예전보다 떨어진 것이지요.
우리는 살아가며 상황에 따라 시기에 따라서 그 어떤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고 따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면 ‘가치를 추구’ 하는 일은 ‘비전’을 세우는 일이라고 달리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특히 신앙적으로 어떤 비전을 세우고,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 어떤 변화들이 찾아왔나요?
성경을 보면 자신의 삶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많은 인물 중에서 오늘 저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사도 ‘바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오늘 주신 성서 갈라디아 2장 20절 말씀은, 제 개인적으로 청년시기부터 지금까지 저의 삶에 신앙적 도전을 제시해준 귀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2:20>
오늘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신앙적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성서 빌립보 3장 8절에 보면, “그 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라는 말 속에서 바울의 생의 태도를 잘 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고...’,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이 성서를 통해 독자인 우리는 바울의 비장함과 강렬한 결단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왜? 무슨 이유로?
이런 비장한 고백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결시키고 있을까요?
결정적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단지 만남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만남 후에 예수라는 최고의 가치를 깨닫고, 인정하고 결국 자기 삶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지요.
2. 최고의 가치 발견 (예수 만남, 생각과 생활 변화)
태국에 관한 몇 가지 오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국은 불교국가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듯 보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인구의 약 93%가 불교도이지만, 태국의 국왕은 법적으로 불교도가 되어야 하는 규정은 있지만, 1990년대 이후로 모든 종교를 용인하고 정부 부서에 종교청까지 두며 태국 법은 공식적으로 자국민은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기독교(천주교) 5개 종교를 선택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태국 선교의 현실...
저의 선교의 목표는 태국인들이 최고의 가치인 예수를 만나고, 비전을 품고 그래서 그들의 삶의 태도가 변화되는 일에 여러모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저도 태국에 처음가서 알게되었지만,놀랍게도 태국은 우리나라보다 60년이나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분들 또한 많습니다.
1828년 공식적인 태국 선교가 시작된 이후, 지난 195년 동안 태국은 많은 선교적 활동이 있었고 지금도 수 천명의 선교사들이 선교하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기독교는 아직 인구의 0.6%(약 40만명)의 소수 종교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나라에서 특히 미국의 PCUSA 교단은 태국 전국에 수 십년동안 막대한 인력과 재정을 투입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태국 곳곳에는 선교사들의 피땀 흘린 선교적 흔적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교단과 MOU 관계에 있는 태국CCT교단은 태국내 가장 교세가 큰 개신교 연합 교단입니다. CCT교단은 태국 수도 방콕의 중심부에 본부를 두고 있고 24개 노회가 전국에 걸쳐 있습니다. 그리고 CCT는 대학교, 병원, 국제학교, 초,중고등학교 등 100여개 이상의 기관과 막대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교단에 속한 로컬 교회들은 아주 열악합니다. 교회의 30%이상이 목회자가 없는 미자립교회이며 목회자의 월생활비는 평균 9천바트(약 35만원) 수준입니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이 생활고로 인하여 제2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있지만 점점 지원하는 사람도 적을뿐더러 신학교육 수준도 아주 미약한 상태입니다.
그동안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유무형의 선교적 유산들이 투입된 나라, 지금도 우리나라 선교사가 약 900가정이 일하고 있는 태국 그런데 기독교인수는 많이 늘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물론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그동안 태국을 향한 선교가 ‘건물 세우는’ 사역에 집중했습니다. 어느 때나 교회를 개척해서 세우는 일은 무척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이렇게 생명사랑공동체도 안정된 자가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요!
우리나라가 태국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55년동안 수많은 교회들이 개척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지속적인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건물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쪽 나라의 교회가 열악한 나라의 땅에 단지 이벤트적인 기념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국가의 상황, 지역의 환경을 고려해서 먼저 그 지역의 필요가 무엇이고, 그리고 그 필요를 위해 다음으로 교회나 센터를 지어야합니다. 그래야 그 교회, 센터는 지속적인 양쪽 교회의 교류와 협력으로 건강하게 서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답습하는 선교, 이벤트성의 선교가 아니라, 지속적이며 서로 협력의 틀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태국은 먼저 ‘사람을 세우는’ 사역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태국의 북부 지역(치앙마이, 치앙라이, 매홍손 등) 지역에는 높은 산에 사는 산족 소수 부족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기독교는 주로 이 소수 부족을 향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고산지역이나 북부지역에는 개척된 교회도 많지요. 그런데 도시로 내려가면 교회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간혹 있다고 해도 교인은 10여명도 안되는 실정입니다. 수 십년간 한국교회가 태국에 선교하고 그 결과로 정성껏 모은 선교 헌금을 해서 교회당을 지었지만, 그 이후 지속적인 돌봄과 협력이 중단되어서 건물만 남은 교회당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나라도 선교 초창기 외국 선교사를 통해 학교, 병원 등이 지어지고 조선말 어려운 시절에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당시 놀라운 사실은 예배당 건물을 지을 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진취적인 토착교회 형성‘이라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바탕으로 교회당만은 우리 스스로 짓는다는 정신으로 교회를 건축을 했습니다.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태국 사람들이 그들의 정신에 뿌리내린 윤회적 보상 심리를 깨고, 현실의 숙명론에서 벗어나려면 예수 정신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즉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살아가면, 막연한 숙명론에 붙잡혀 살아가는 태국인의 삶의 태도는 분명 변화할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약 3년 동안 그는 기도와 묵상으로 개인적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지요. 이후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일에 열심이었고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사울’에서, 예수를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알리는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임을 안 ‘바울’로의 새로운 삶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3. 교회는 무엇?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가 무엇일까요?
옛날에는 ‘연애당’이라고도 했지요. 교회 다니면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말하기 힘든 ‘사랑‘이라는 말을 교회 다니는 사람끼리 자주하니까 그러기도 했을 겁니다. 교회를 폄하한 말이지만 맞는 말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항상 연애하는 심정으로 설레고 만나고 싶고 보고 싶고 하니까요.
그럼, 요즘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할까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이런 우리들만의 표현 말고요, 세상이 교회를 뭐라고 부르는지 우리는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그들만의 리그, 고립된 공동체로 끝이 납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향해 오셨고, 세상이 하나님나라를 알도록 힘쓰시고 이 세상의 중심에서 핍박을 받으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지금 세상은 교회를 뭐라고 하는가요? 자기들끼리 밥 먹고 자기들끼리 놀고 자기들끼리 서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초대교회때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단순히 칭찬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는 그 시대의 희망이고 믿고 따를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세상으로부터 붙여진 별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를 태국 말로는 크리삿짝이라고 합니다. 크리삿짝~~ 크리삿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짝이 되어야 교회이지요(?) 세상을 닮아버리고 세상과 짝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왜 세우셨을까요?
우리는 시간이 날때마다, 이곳에 모여 예배드릴 때마다 자문하고 자답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나의 신앙과 결단, 의지로 교회를 나온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이룬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신앙은 단순히 교회에서 나올 수 없고 교회도 단순히 신앙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교회는 개인의 신앙 결단과는 상관없는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며 신앙인들이 모인다 해서 곧바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과 교회는 서로 의존하며 서로 도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신앙과 교회의 근거는 서로에게서 찾을 수 없으며 독자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둘의 공통의 근원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입니다. 신앙이 먼저냐, 교회가 먼저냐 하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는 질문입니다.
신앙도 교회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화된 신앙은 교회를 붕괴시킵니다. 절대화된 교회는 신앙을 파산시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신앙에, 교회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한스큉의 ‘교회’ 축소판 / 내용중>
이 말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나 의지, 교회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활동, 미시오 데이(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나 우리의 신앙보다 먼저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부름 받아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 따라가는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 기간의 대부분을 인간이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알게 되는 일에 힘을 쓰셨습니다.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신 여러분, 그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그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동호회, 취미 모임, 정치 집단, 개인 만족을 위한, 이력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순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입니다. 조금 듣기에 불편하지만, 어떤 젊은 목사님이 교계 신문에 현대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지금의 교회를 가리켜 ‘잡기에 능한 교회’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요즘 현대 교회가 본질적인 일 외에 너무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모이면 예배하고 흩어지면 선교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무리이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 정신으로 무장하고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심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정신과 반하는 모든 것들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오물’(배설물)로 여길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에, 구원 활동에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교회에 모여 누구를 험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일로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4. 지금 우리의 교회는,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삶의 가치를 소유
사랑하는 생명사랑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 나는, 우리 교회는, 무엇을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여기며, 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이 한 주간, 다시 내 삶을 기초부터 점검하고…
예수와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최고의 생애를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파송사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이 한 주간도 우리에게 맡겨 주실 시간과 환경속에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라고 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십시오.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 축 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대속의 은혜와 하느님의 한결 같으신 그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성도의 교제를 이루시는 역사가 주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고자 다짐하는 주의 백성들 위에, 특별히 생명사랑 공동체 위에 그리고 평화의 길을 열망하는 한반도와 이 주간 우리의 삶의 현장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