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 문화,쌈밥의 등장 -
중국과 일본이 밥을 먹는 방법은 한 손에 그릇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젓가락질을 하여 밥을 밀어 넣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양손을 다 써야 하기에 노는 손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의 식습관은 뜨거운 밥그릇은 밥상 위에 놓고 한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동시에 들고 밥과 국을 먹는 독특한 방식을 썼다.
또 뜨거운 음식과 열을 보존하는 무거운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인해 그릇을 들지 못하는 문화이기에 식사할 때 수저를 든 반대 손은 항상 놀고 있었다.
한민족은 이 노는 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 놀고 있는 한 손으로 인해 식문화의 새로운 혁명인 ‘쌈 문화’가 탄생했다.
한민족은 예부터 식사 중에 놀고 있는 한 손바닥에 잎이 넓은 채소나 해초를 펴고, 그 위에 밥과 고기, 어류를 얹고, 장과 젓갈 등의 소스와 같이 싸서 한입에 집어 먹는 ‘쌈밥’을 즐겼다.
쌈과 형태가 비슷한 세계 요리로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펴서 구워낸 전병에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를 말아 먹는 중국의 춘빙(春餅), 베트남의 라이스 페이퍼로 만든 ‘고이꾸온’, 멕시코의 옥수수 토티아로 만든 ‘타코’, 터키의 얇은 빵 라바시로 만든 ‘케밥’, 루마니아의 양배추에 고기를 말아먹는 ‘사르말레’ 등이 있다.
그러나 쌈을 싸는 주재료가. 쌀, 옥수수, 밀가루를 넓게 펼쳐 굽거나 익힌 형태이고 입으로 베어서 먹는 방식이라서, 우리 쌈밥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채에 밥과 고기, 어류와 소스를 얹어 싸서 한입에 넣는 독특한 쌈밥은 입 넓은 채소나 해초, 그리고 숟가락과 손바닥의 합이 낳은 우리 고유문화였다.
이러한 쌈을 싸는 방식은 숟가락이 있기에 가능했다. 사실 쌈을 싸 먹는데, 젓가락을 사용하여도 된다. 심지어 양반들은 쌈을 크게 싸 먹으면 상스럽습니다고 젓가락으로 쌈을 작게 싸 먹기도 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달랐다. 과거에는 쌀밥이 귀한 음식이어서 백성들은 주로 보리밥을 주식으로 했고, 형편이 나으면 쌀, 조, 보리 등이 각각 조금씩 들어간 상반지를 먹었다.
쌀밥은 끈기와 찰기가 있어 젓가락질이 쉬우나 상반지나 꽁보리밥은 찰기 없어 젓가락질이 안 되고 숟가락질만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쌈은 입과 목이 꽉 차도록 싸 먹어야 제맛이 나기에 가벼운 국물을 먹는 것도 그렇고, 젓갈, 된장, 고추장, 간장 같은 쌈장도 숟가락으로 떠야 했기에 숟가락 위주의 음식이 분명했다.
“무엇으로 싸 먹느냐”와 “무엇을 싸느냐”에 따라 쌈밥 특유의 맛과 향 그리고 씹는 감각이 달라, 취향에 따라 각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어, 거의 일 년 내내 쌈밥이 가능하였다.
‘무엇으로 싸 먹느냐’는 쌈으로 쓰는 재료가 이파리만 넓적하면 거의 모든 것을 쌈밥의 재료로 쓸 만큼 그야말로 다양했다.
밭에서 재배하는 남새는 상추, 콩잎, 깻잎, 방아, 쑥갓, 곰취, 호박잎, 배추, 봄동, 시금치 등이 있으며, 산에서 채취하는 푸새는 방풍, 머위, 피마자잎, 엄나무잎, 당귀잎, 뽕잎 등이 있다.
또 해초로는 다시마, 미역, 김 따위도 쌈의 재료로 쓰였다. 최근에는 외래 채소인 양배추, 케일, 근대, 치커리, 겨자, 로메인, 뉴그린, 청오크, 레드프릴 등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쌈의 재료들은 생채로 섭취하거나, 데치거나. 말려서 불리거나 묵은지는 씻어서 춘하추동 쌈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특히 채소가 귀한 정월 대보름은 절식으로 겨우내 데쳐서 말린 곰취잎이나, 아주까리잎 등을 물에 불려 밥을 싸서 먹었다.
특히 신라인들은 마른 김을 이용하여 김쌈을 만들어 먹었는데, 한 해 동안 복이 들어온다 하여 이것을 ‘복쌈’이라 불렀다.
“무엇을 싸느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경제적 형편에 따라 개성 있는 갖가지 재료가 쌈밥으로 쓰였다.
여러 가지 쌈채를 넓게 펼쳐 그 위에 쌀밥, 보리밥, 조밥 등 무슨 밥이든 올려도 되었고, 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 꿩고기 같은 육류뿐만 아니라, 고등어조림, 청어조림, 전갱이조림 같은 생선조림이나 각종 활어회 등 무엇을 얹어도 되었다.
여기에 쌈장, 된장, 고추장, 젓갈, 된장찌개, 강된장 등 좋아하는 아무 양념을 보태서, 그 위에 다시 마늘, 고추, 실파, 부추 등을 얹어 싸 먹었다.
무엇을 얹어도 상관이 없었고, 어떻게 먹어도 괜찮고, 정해진 법칙도 없었다. 이렇게 스스로 제조한 쌈밥을 입에 넣고 몇 번 씹는 순간, 전혀 새로운 융합의 다른 차원의 맛이 생성되는 것이 쌈밥의 매력이었다.♧
“喫萵苣(상추쌈을 먹다)
麥飯包萵雙頰寬(보리밥을 상추에 싸서 넣으니 양 뺨이 넓어져)
葱羹兼啜野廚寒(파국을 곁들여 마시니 시골 부엌이 시원하다)
苦椒屑醬名纔具(고춧가루 장 이름만 겨우 갖추어)
色不全紅味且酸(색이 온전히 붉지 않고 맛 또한 시큼하네)”
쌈 문화, ”상추쌈” -
쌈채의 원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상추’였다. 씹는 맛이 아삭하고 부드럽고, 청량한 쓴맛이 나다가 단맛이 우러나는 상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받던 채소였다.
상추는 원래 고대 이집트가 원산지로 즙이 풍부한 잎과 씨앗으로 기름을 얻는 식물이었다.
지중해 연안 그리스와 로마로 전파되어 중요한 식재료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상추의 잘린 줄기에서 흰색 즙이 나온다고 ‘우유’를 뜻하는 ‘lactuca(락투카)’라고 불렀다.
이것이 실크로드를 타고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을 거쳐 부여 고구려, 한반도로 전해져 꾸준하게 개량을 거쳐 이 땅의 특산 채소가 되었다.
처음에는 ‘풀’을 뜻하는 ‘푸루, 부루, 브르, 불, 부리, 불기’로 불렀다. 그 후 18세기에 들어 ‘와거(萵苣), 생채(生菜)’라는 한자어가 유행하며 서울, 경기, 영서 등에서 ’생추, 상채‘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상추, 상치, 상초, 생추, 생초’로 파생되었고, ‘부루+ 상추’가 합쳐져 ‘부상추, 푸상추, 불상추’ 등으로도 불렀다.
“아침이슬 상추밭에 불동꺾는 저큰아가
불동이사 꺾네마는 고은손목 다적신다
뿔똥꺾는 저처녀야 묶어내자 묶어내자
뿔똥은 옆에놓고 이모판을 묶어내자”
-경남 김해/ 모심기 소리
상추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이유는 심한 가뭄이나 추위만 없으면 잘 자라 쉽게 재배할 수 있었고, 상춧잎은 따내면 금방 또 자라는 강인하고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초봄에 심으면 거의 초겨울까지 길게 수확을 할 수 있고, 자체적인 방충 내성이 있어 벌레나 병충해에도 강하였다. 심지어는 뱀도 상추와 상극이라 예부터 장독대 옆에 많이 심었다.
“萵苣有毒 百虫不敢近 蛇虺觸之 則目暝不見物(상추는 독이 있다. 온갖 곤충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독사가 닿으면, 즉시 눈이 흐릿해져서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시진(李時珍, 1518∼1593)/ 본초강목(本草綱目)
“辟衣帛蟲蛀法 端午日 取萵苣葉 置於櫥櫃中 則蛀蟲 不生(옷과 비단의 좀벌레를 피하는 법은 단옷날에 상춧잎을 채취하여 궤 속에 넣어두면 좀이 생기지 않는다.)”
治蛇毒 無如雄黃 又萵苣汁 和雄黃 末 貼瘡口 毒水流出 腫痛卽消(뱀독을 치료하는 데는 웅황만 한 것이 없다. 또 상추즙에 웅황 가루를 개어 상처 입구에 붙여주면 독물이 흘러나와 종양 통증이 즉시 사라진다.
-홍만선(洪萬選, 1643∼1715)/ 산림경제(山林經濟)
그래서 조상들은 아침에 이슬을 털고 따낸 상추를 ‘불노(不老)’라고 부르며 보약으로 생각하고 쌈을 싸 먹던 작물이었다.
아침 상추는 이슬을 먹고 자라 시원하게 속을 뚫어주는 맛이 있고, 쓴맛이 있어, 짭짤한 된장이나 고추장, 멸치젓을 얹어 쌈을 싸 먹으면 밥맛을 잃기 쉬운 여름철에 입맛을 살려주었다.
한민족은 햇빛이 잘 드는 손바닥만 한 땅뙈기라도 있으면 집 인이나 집 근처에 반찬으로 쓸 상추, 배추, 부추, 쑥갓, 고추, 가지, 들깨, 호박, 열무 등을 심은 남새밭을 가꾸는 그것에 일심이었다.
작물의 성장을 위해서 거름을 많이 주는데. 상추밭에는 보통 상추씨를 뿌리기 전에 밑거름을 많이 주고 상추가 자라면 삭힌 오줌 거름 정도로 웃거름을 준다. 그것은 상추가 사람 입에 직접 들어가는 쌈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치 없게도 아침에 상추밭에 들어가 볼일을 본 개는 동네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면 “상추밭에 똥 싼 개는 저 개 저 개 한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특히 “가을 상추는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 “가을 상추는 시어머니도 안 드린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가을 상추는 어느 때보다 맛이 좋고 영양이 풍부하였다.
김려(金鑢, 1766~1821)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천주교와 관련하여 31세인 1797년(정조 21년)부터 10여 년을 함경도 부령, 경상도 진해에서 귀양살이하며 농어민과 어울려 자산어보와 견주는 어류도감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저술하였다.
특히 그는 김조순, 이옥 등과 친하게 지내며 당시 문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소설식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의 문장을 좋아했다.
이 덕분에 그가 남긴 '와거(萵苣)'라는 시는 당시 상추에 묻은 물을 터는 모습과 생선 조림을 곁들여 상추쌈을 싸 먹는 풍경 등이 세밀하게 묘사되어있는 걸작이다.
“萵苣(상추)
種苣三十日(상추씨 뿌린지 30일)
天氣苦亢暘(날씨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물어)
幽畦黯蓁蕪(한적한 밭두둑 잎이 검게 우거져)
穉甲競焦黃(처음 난 어린잎이 다투어 말랐구나)
好雨忽霡霂(단비가 홀연히 가랑비 되고)
凱風紛飄揚(따뜻한 바람이 어지럽게 펄럭이니)
乳膏周原圃(젖과 기름이 두루 들판에 차고)
芳蕤爛輝光(꽃이 향기가 나고 빛깔이 찬란하네)
巨葉紫綠皺(큰 잎은 자줏빛 초록빛으로 주름지고)
襃然展錦裳(비단 치마 펼친 듯 멋지구나)
病妻親手摘(병든 아내가 친히 손으로 따)
朝湌爲我嘗(아침 밥상에 나를 위해 올려 맛보네)
芥汁糝鱻軒(겨자즙에 생선 토막 섞어 얹고)
椒醬來糟姜(고추장에 생강 조림을 올리면)
麥飯雖麤糲(보리밥이 비록 거친 음식이지만)
甛滑美無方(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비길 데가 없구나)
搖疊以裹之(흔들고 포개어 쌈 싸)
大嚼吻弦張(크게 활시위처럼 입을 벌려 씹어먹고)
飽頹北牕下(배불러 북쪽 창 아래 누우면)
是民眞羲皇(이것이 진실로 복희씨 때 백성이지)”
-김려(金鑢, 1766~1821)/ 담정유고(藫庭遺藁)
*죽령 ㅡ 연화봉 ㅡ비로봉 ㅡ어의곡
첫댓글
그러니요
지금은 그렇게 다양한 쌈 문화이지 싶어요
사진들의 연출이 참 멋져요
강추 드립니다
@행운
와...
백두대간의 저 층층을
내려올 땐 무릎에 상당한 힘을 가해야 할 것 같아요
이젠 그런 걱정이 앞서니요
조심하셔요
한 십여 년 전만 해도 어지간히 헤집고 다녔는데...
이젠 집순이가 되었으니
세월입니다
머윗잎쌈 그림이 예술입니다
@양떼 네 등산장비인 스틱을 꼭 하고
요즘에는 도움을 받고 천천히
걸어 내려 오고 체중을 감량해서
통증은 아직 없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