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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0) 엠마뉴엘 로이체의 ‘중대한 문제’
헨리 8세의 이혼, 영국과 로마 가톨릭의 결별로 이어져
- 엠마뉴엘 로이체, ‘중대한 문제’(1846),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미국 워싱턴 D.C.
1517~1521년, 마르틴 루터와 가톨릭교회 간 결별의 여파는 유럽에 여러 가지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교회가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후유증을 직접, 극적으로 경험한 것은 1527년 ‘로마 약탈’을 통해서였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사망할 때까지 매사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눈치를 살폈다. 그다음은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
로마가 약탈을 당하던 바로 그해,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재위 1509~1547)는 아라곤의 캐서린(1485~1536)과 20년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겠다며 ‘혼인 무효’를 교황청에 요청했다. 교황으로선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서, 형 아서 투더가 일찍 죽는 바람에 형수며 왕비였던 캐서린과 결혼할 때 여간 힘들지 않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승인하기까지, 캐서린은 아서 튜더와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고 맹세했고, 교황을 둘러싼 그리스도교 제후 국가의 국왕들이 한마음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캐서린이 스페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막내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기 때문에, 스페인과 영국, 신성로마제국 간의 명예와 동맹의 성격이 컸다. 1509년 율리오 2세 교황의 관면혼 승인에 따라 18살의 헨리 8세와 여섯 살 많은 캐서린은 결혼에 성공했다. 1509년 6월 11일에 결혼하고, 6월 24일에 영국 국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초기에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했고 금슬도 좋았다. 그러나 1516년 캐서린이 메리 공주를 낳은 뒤, 몇 차례 유산을 거듭하다가 폐경기를 맞자 헨리 8세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얻지 못해 안절부절못했고, 부부 사이도 틀어지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아버지 헨리 7세가 왕위쟁탈전(장미전쟁)에 성공하여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기 때문에, 적자를 통해 왕위를 계승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혼한 지 18년이 지나도록 아들은 보지 못했고, 좌절감은 캐서린의 젊은 시녀 앤 불린(Anne Boleyn, 1501~1536)에게로 눈을 돌리게 했다.
헨리,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 소송 진행했지만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 애정 공세를 펼쳤고, 앤은 정부(情婦)가 되기 싫다며 헨리의 유혹을 매몰차게 거부했다. 그녀가 거부하면 할수록 헨리의 유혹은 집요해졌고, 결국 헨리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과 혼인하기로 했다. 그래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을 상속자로 삼을 수 있기도 했다.
헨리는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몇 가지를 주장했다. 캐서린은 아서와의 결혼에서 이미 순결을 잃었고, 헨리는 형수와 부당하게 결혼했으므로 과거 율리오 2세 교황의 관면혼은 효력이 없다는 것, 그동안 아들이 없었던 것은 그 결혼이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적법하지 못해 벌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혼인이 무효가 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결혼도 허락해 달라고 했다.
헨리의 특사로는 윌리엄 나이트가 파견되었다. 1527년 5월, 로마 약탈로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황을 그렇게 만든 카를 5세까지 나서서 헨리와 캐서린 왕비 간 이혼을 막아 달라고 압박했다. 당시 카를 5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교황까지 갈아치울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었다. 교황은 자신의 코가 석 자인 데다 이혼을 허락하지 말라고 계속 협박과 으름장을 놓는 황제의 뜻을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에도 헨리는 다시 특사를 보내 ‘혼인 무효’를 요청했으나 교황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1528년 9월 29일, 이번에는 로렌초 캄페지오 추기경이 교황의 특사로 런던에 도착했다. 혼인 무효 소송을 위해 설치한 특별 법원의 판사로 온 것이다. 법정에서 최고 쟁점은 헨리와 캐서린의 혼인을 위해 과거 율리오 2세 교황이 내린 관면의 유효성에 관한 것이었다. 캐서린은 캄페지오 추기경에게 율리오 2세의 관면장을 보여주며 결혼의 합법성을 주장했고, 그에 따른 공방이 오갔다. 1529년 7월 23일 캄페지오 추기경은 소송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선언하고 로마로 돌아갔다.
혼인 무효 소송을 계속 진행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헨리 8세의 측근들은 교황의 의견 따위는 그냥 무시해버리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1530년, 잉글랜드 의회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성직자, 법률가들이 나서서 교황의 명령에 복종을 다짐하자 그것을 따르기로 결의했고, 존 피셔 주교도 의회 발언에서 교황의 권위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종교개혁, 영국 국교회 탄생
이런 속에서 헨리는 국왕이라는 신분을 잊은 듯, 독단적으로 앤과 혼인해 버렸다. 그런데 그 시기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교황의 신망을 얻던 윌리엄 워햄 대주교가 사망했고, 갑작스레 그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헨리는 클레멘스 7세 교황에게 볼린 가문과 친분이 있는 토머스 크랜머 신부를 새 대주교로 추천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클레멘스 7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헨리와의 관계 개선을 기대하고 그의 추천을 받아준 교황의 이 결정은 교황의 뜻과는 반대로 헨리와 앤의 결혼을 합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선언했고, 1533년 6월 앤은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서 잉글랜드의 새 왕비로 대관식을 가졌다. 그리고 석 달 후에 엘리자베스 공주를 낳았다. 교황은 헨리와 토머스 크랜머를 함께 파문했다. 그러자 헨리는 1534년 영국 의회에서 자신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가 탄생한 것이다.
역사적인 주제에 몰입한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엠마뉴엘 고틀립 로이체(Emanuel Gottlieb Leutze, 1816~1868)가 1846년에 그린 ‘중대한 문제(The Great Matter)’라는 작품이다.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에 있다. 작가는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185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다.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사망했다.
25세에 재능있는 화가로 명성을 떨쳤고, 초상화를 팔아서 번 돈으로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 다녔다. 역사적인 주제에 몰두하여 독일에 있을 때부터, 특히 미국 역사에 기초한 연작을 많이 그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관련한 연작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정확한 소묘와 섬세한 세부 묘사를 중시하는 뒤셀도르프 학파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며 역사적인 사건에 감정을 더 했다.
로이체는 1859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듬해인 1860년 미국 의회는 그에게 국회의사당의 계단 장식을 의뢰했다. ‘제국은 서쪽으로 나아간다’라는 대작을 그려, 서부 개척의 역사를 묘사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다량 소장하고 있는 뉴욕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워싱턴에서 52세의 나이로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
영국, 여왕의 시대로
캐서린과 앤, 두 차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헨리 8세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앤의 시녀, 제인 시모어에게 눈길을 돌렸다. 앤이 남편 헨리로부터 간음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1536)당한 지 11일 만에 헨리와 제인 시모어는 결혼했다. 제인은 헨리가 고대하던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았고, 출산 후 12일 만에 산욕열로 사망했다. 이후에도 헨리는 3명의 아내를 더 얻어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6명의 아내를 두었던 왕이지만 아들은 제인이 낳은 병약한 에드워드 6세밖에 얻지 못했다. 그마저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인 16살에 병사해 캐서린의 딸 메리 1세와 앤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헨리 8세의 뒤를 계승하며 여왕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은 가톨릭교회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
그림 속으로
작품 속 배경은 1525~1530년대 헨리의 궁정이다. 법정에 나온 헨리와 왕비 캐서린, 시녀 앤이 주변 인물들과 함께 있다. 오른쪽 가운데 검은 베일을 쓰고 서 있는 캐서린에게 기사들과 추기경들, 그 뒤의 많은 사람이 왕비로 예를 올리고 있다. 반면, 그 뒤에서 헨리는 젊은 시녀 앤에게 애정 공세를 하고 있다. 왼쪽 끝, 스페인 대사는 왕의 공개적인 배신과 외도를 목격하며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고, 다른 주변 인물들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쑥덕이고 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두 사람을 향해 있다. 화가 로이체는 독일에서건 미국에서건 혁명을 지지했던 사람으로, 왕족에 대한 그의 시선을 엿볼 수가 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1) 바치초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
중국 선교의 꿈 품은 채 하늘로 간 하비에르
- 바치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1675), 성 베난치오 성당, 아스콜리 피체노, 이탈리아.
유럽 대륙은 마르틴 루터를 시작으로 츠빙글리, 장 칼뱅을 거치며 독일, 스위스에 이어 토마스 크랜머와 헨리 8세에 의한 영국까지, 1500년도 초반은 연이어 일어난 종교개혁의 불길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에 더해 1527년의 로마 약탈은 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로마 약탈의 수모를 겪은 클레멘스 7세 교황에 이어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1534년 10월 13일 바오로 3세 교황으로 선출됐다.
교회 쇄신과 르네상스 진흥
바오로 3세 교황은 크게 두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것은 ‘교회 쇄신’과 ‘르네상스를 진흥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게 주어진 외면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답을 주어야 했고 그것은 교회 쇄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짓다 만 성 베드로 대성전 역시 완성해야 했기에 르네상스 문예 부흥의 선상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식에서 과거와 전혀 달랐다. 과거에는 명령하고 소환하고 단죄하는 형식이었다면, 바오로 3세는 재임 기간 내내 가톨릭교회의 개혁이라는 기치 아래, 테아티노회가 발전하도록 도와주고, 성바오로여자시종회(1535년), 성체형제단(1539년), 예수회(1540년), 소마스키수도회(1540년), 오르솔리네여자수도회(1544년) 등 새로운 수도회와 교회 단체들을 인가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주도했다. 교회 차원에서 트렌토 공의회를 소집하기도 했지만,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을 선두로 많은 성인의 시대를 예고하기도 했다. 그중 예수회와의 관계는 특별했다.
바오로 3세는 예수회 설립을 인가한 것뿐 아니라, 초기에 회원 수를 60명으로 한정했던 것을 폐지하고, 설립자 이냐시오 로욜라(Ignacio de Loyola, 1491~1556)의 「영신 수련(Esercizi spirituali)」을 공식 출판하도록 허가(imprimatur)해 주었다. 예수회원 라이네즈(Diego Lanez)와 살메론(Alfonso Salmern)을 트렌토 공의회 제1차 회기(1546~1547)에서 교황청 신학자로 참석하도록 하기도 했다. 예수회 역시 종교개혁의 폭풍우 속에서 탄생한 수도회였던 만큼, 단지 수도회의 발전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 전체를 향한 비전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며, 교회의 ‘영적 헌병대’이기를 자처했다.
아시아 선교에 나서다
바오로 3세는 앞서 1534년부터 인도를 중심으로 보편 교회의 아시아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1622년 교황청 포교성성(오늘날 인류복음화성)이 설립되기 이전이라, 선교 책임을 선교수도회나 단체에 의탁했기 때문에 아시아 선교에 뛰어들 수도회를 물색해야 했다. 당시 아시아는 뿌리 깊은 고유한 문화가 있어 유럽 선교사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을뿐더러, 항해로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쉽지 않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오로 3세는 1539년 7월 8일 고아교구 설립을 인가했고, 이듬해 예수회 설립 인가와 동시에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재위 1521~1557년)의 요청에 따라 그 일대의 선교 책임을 예수회에 요청했다. 예수회는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 서약에 ‘선교 서약(circa missionaris)’이라고 하는 4번째 서약을 넣어 교황의 이 요청에 응답했다. 교황에 대한 충성서약(1540년)으로 알려진 이 서약의 내용은 이렇다. “교황께서 모든 영혼의 유익과 신앙의 전파에 관련된 어떤 일을 명령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어떤 핑계나 망설임 없이, 즉시 이행해야 하며, 우리를 특정 지역으로 파견할 경우, 터키인들이나 인도라 불리는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어떤 비신자들 혹은 이교인들이나 열교인들에게 보낸다더라도 즉시 떠나야 한다.”(바오로 3세 교황이 승인한 예수회 기본법 제3조)
여기서 터키, 인도, 이교인과 열교인들 사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아시아 지역을 일컫는다. 이냐시오는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와 보바딜라를 지목했다. 그러나 보바딜라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자, 하비에르(Francesco Xavier, 1506~1552)가 대타로 투입됐다. 로드리게스도 결국 리스본에 남는 바람에, 아시아로 가는 산티아고(Santiago)호에 오른 사람은 하비에르 혼자뿐이었다.
이냐시오보다 15살이 어리지만, 친구며 공동 설립자이기도 한 하비에르가 인도 고아(Goa)에 도착한 것은 1542년 5월 6일이었다. 이후 그는 약 13년간 인도양을 내 집처럼 여기며 일본과 중국 선교의 발판을 다졌다. 그가 바다 위에서 보낸 시간만도 3년이 넘었다. 인도에서 진주조개잡이를 하는 불가촉천민들을 대상으로 코모린 곶에서 선교를 시작한 이래, 말루쿠제도를 거쳐 1549년 8월 15일, 일본인 안지로(安次郞)와 함께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선교하던 중 한 불교 선사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선사 왈, “어찌하여 이렇게 먼 데까지 오셨습니까?” 하비에르 답, “진리를 전하러 왔습니다.” 선사 왈, “그대가 전하는 것이 진리라면, 어찌하여 중국이 모르고 있답니까?”
그랬다. 하비에르가 보기에 일본의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온전히 받고 있었다. 중국이 모르는 진리, 복음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하비에르는 죽는 순간까지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으나 당시 중국은 절벽이었다. 외국인을 극도로 혐오하고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절벽이었다. 결국, 그는 1552년 12월 3일, 중국이 보이는 광동성 남쪽 상천도(上川島)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던 중 열병으로 사망했다.
바로크 시대 수작 남겨
소개하는 작품은 제노바 출신의 바치초(Baciccio)로 알려진 가울리(Giovan Battista Gaulli, 1639~1709)가 그린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1675)이다. 300×201cm의 대형 유화 작품으로 이탈리아 아스콜리 피체노에 있는 성 베난치오 성당 제단화다. 이 그림의 초안은 바티칸박물관 피나코테크 예수회 작품 전시실에 있다. 이 초안에서 여러 개의 유사한 작품이 나왔다.
바치초는 고향에서 보르조네 밑에서 루벤스와 반다이크의 예술을 통해 자유로운 붓놀림과 다양한 색채를 배웠다. 1657년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난 뒤, 로마로 와서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옆에서 그의 가장 탁월한 협력자로 활동했다. 그의 최고 수작으로 알려진 로마 예수 성당의 천장화 ‘예수 이름의 승리’도 베르니니의 권유로 완성했다. 베르니니가 조각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주제대를 덮고 있는 천개(天蓋, Baldachino)에 버금가는 회화와 조각과 건축이 한 몸을 이룬 환상적인 베르니니 풍의 회화 작품으로 비유된다.
가울리는 뛰어난 초상화가이기도 했다. 클레멘스 9세, 클레멘스 10세, 베르니니의 초상화 등을 그렸다. 그 외 여러 지역에 제단화를 남겼는데, 이 작품도 그중 하나다. 베르니니와 함께 바로크 시대 최고의 수작들을 도처에 남기고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작품 속에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선교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뒤로하고 케루빔 천사에 둘러싸여 이승을 하직하고 있다. 중국을 눈앞에 두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듯 힘겹게 귀천하고 있다. 왼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성인의 마음을 대변하듯, 손가락으로 멀리 중국을 가리키고 있다. 그가 이후 선교 역사에 남긴 업적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을 소개한다. 고아(인도)에서 중국으로 떠나기 6일 전(1552년 4월 9일)에 이냐시오 로욜라에게 쓴 마지막 편지의 한 대목이다.
“(일본과 중국은) 많은 고생과 박해 속에서도 미사의 위로와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얻는 특별한 힘이 참으로 필요한 곳입니다. 총장 신부님의 자비로 신부들이 일본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하는 많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현지에서 공부한) 학자가 필요합니다. (특정 분야에) 탁월한 기술을 가진 사람도 좋습니다. 대화에서 우리를 반대하는 일본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면 아무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구에 대해서도 더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천체의 움직임, 일식과 달의 움직임과 빗물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눈과 우박, 천둥, 번개에 대해서, 혜성과 유사한 자연 현상들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백성의 뜻을 알기 위해 이런 현상들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비에르는 예수회 ‘적응주의 선교’ 정책을 수립하는 근거를 남기고,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가톨릭교회는 포교성성을 설립하던 1622년에 그를 성인품에 올렸고, 1927년 리지외 아기 예수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2) 파스콸레 카티의 ‘트렌토 공의회’
영혼을 돌보는 ‘어머니 교회’의 근본으로 돌아가다
- 파스콸레 카티, ‘트렌토 공의회’(1588/1589), 트라스테베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로마.
종교개혁과 로마 약탈이라는 충격과 함께 시작된 1500년대의 교회는 1534년 파르네세 가문의 알렉산드로가 바오로 3세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언급했지만(바치초의 ‘성 프란체스코의 죽음’ 편), 바오로 3세는 많은 남녀 수도회 설립을 인가해주고, 영성가들을 교회에서 보호해줌으로써 성인들의 시대를 열기도 했지만, 보편 교회 차원에서 어떤 식으로든 종교개혁가들에게 답변도 해 주어야 했다. 그것이 1545년 12월 13일부터 1563년 12월 4일까지 이탈리아 북부 도시 트렌토 주교좌성당에서 개최한 공의회였다.
‘트렌토 공의회’는 3차례 회기를 가졌다. 바오로 3세가 소집하고, 율리오 3세 교황을 거쳐 비오 4세 교황이 18년간의 회의 일정을 폐막했다. 25명의 주교와 5명의 수도회 장상이 시작한 공의회는 255명이 참석한 가운데 막을 내렸다. 안건 내용은 주로 프로테스탄티즘, 가톨릭교회의 쇄신, 성사, 성경, 심판 등이었고, 최종 16개 교령이 선포되었다. 트렌토 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까지 약 300년간 가톨릭교회의 노선이 되었다.
어렵게 열린 공의회
교회 쇄신에 대한 목소리는 13~14세기, 보니파시오 8세 교황과 프랑스 필립 왕이 대립할 때부터, 교황청의 아비뇽 이전과 로마 귀환, 서구 교회의 분열 등이 터지던 때부터 나왔던 것이었다. 이에 1512~1517년, 율리오 2세 교황이 소집하고, 레오 10세 교황이 마무리한 제5차 라테란 공의회가 있었으나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이유는 당시 율리오 2세의 자세가 오로지 프랑스 왕 루이 12세를 견제하는 데만 힘을 쏟았을 뿐, 실제 교회 안팎의 문제에는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문제는 더욱 커졌고, 결국 종교개혁과 로마 약탈이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 한다. 시기를 놓치면 더 커져서 그만큼 더 큰 희생을 치르고서야 해결된다.
1523년 뉘른베르크 제국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모두 동의하는 공의회를 개최해야 한다며 “독일에서 자유롭게 그리스도교 회의를 여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고, 샤를 5세도 동의했다. 요컨대, 공의회 개최는 기정사실이고, ① ‘자유롭게’, 교황이 아니라 황제의 지휘하에서 ② ‘그리스도인’, 곧 평신도들도 참여한 가운데 ③ 이탈리아보다 안전한 ‘독일 땅’에서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이런 조항들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교회 일보다는 외교적인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뉘른베르크의 제안이 점차 흐려지는 가운데, 합스부르크와 프랑스의 전쟁(1521~1559년)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1520년대 소집하기로 한 공의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클레멘스 7세의 뒤를 이은 바오로 3세도 1536년, 1538년에 공의회 개최를 시도했으나 연기되는 사이에 장소만 트렌토로 결정되었다. 독일의 제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탈리아에서도 가기 쉬운 곳으로 합의를 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은 공의회 개최를 지연시켰고, 드디어 1545년 3월 15일에서 또 한차례 미루어 12월 13일에 개최되었다.
제1차 회기(1545~1547년)에서 주로 다룬 것은 성경과 전통, 구약과 신약의 법규, 불가타 성경의 확실성, 원죄와 심판, 성사 일반 및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등에 관한 교의적인 문제들과 설교, 주교들의 거주 의무 등이었다.
제2차 회기(1551~1552년)는 바오로 3세가 사망하고, 후임인 율리오 3세가 이끌었다. 성체ㆍ참회ㆍ병자성사에 관해 교령이 선포되고, 주교의 감독권, 성직자의 의무 등이 결정되었다. 이 기간에 독일 프로테스탄트 일부 제후들은 연맹을 결성했다. 지금까지 승인된 법령의 폐지,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 철회, 교황에 관한 공의회 우위성 확인을 요구했고 뜻대로 되지 않자 1552년 독일 남부로 군대를 집결하여 트렌토를 위협했다. 공의회 교부들은 즉시 회의를 중단하고 모두 돌아갔고, 샤를 5세도 인스브루크를 버리고 떠났다.
제3차 회기(1562~1563년)는 율리오 3세(1555년†), 마르첼로 2세(1555년†), 바오로 4세(1559년†) 교황의 뒤를 이어 밀라노 출신인 가를로 보로메오 추기경의 조카 비오 4세가 교황이 되어 이끌었다. 성체ㆍ신품ㆍ혼인성사, 연옥, 성인 공경, 전대사와 수도회에 관한 내용이 승인됐다. 전례에서 라틴어 사용과 속어 강론이 의무화되며, 주교들의 거주 의무,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 등도 선포되었다.
루터와 선 긋고 교회 쇄신의 동력 얻어
공의회의 업적은 교의적인 차원과 교도적인 차원으로 구분해서 들여다볼 수 있다. 교의적인 문제에서 공의회는 소집 자체가 루터의 논문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어서 독일의 개혁자들이 논쟁으로 삼지 않은 것은 공의회에서 다루지 않았다. 삼위일체, 그리스도 강생과 부활의 신비 등에 대해 다루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종교개혁에서 들고 나왔던 교회의 성사에 관해서는 개별 성사들을 신학적으로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결론 내렸다.
또 프로테스탄트의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동시에 법적 제도기도 한 교회의 중재 필요성을 재확인했고, 교회는 계시된 말씀의 수호자며 해석자로서, 교도 임무와 성사들을 통해 그것을 유지하고 누가 위임하든지 간에 객관적 가치와 본질적인 효능은 존재한다고 재천명했다. 교도 임무에 관해서, 공의회는 루터의 주장과 달리 하느님의 은총에 더해 믿음과 행동이 동반된 인간 협력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이로써 트렌토의 선언은 루터의 주장과 동떨어진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그와의 결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한편, 교회 내부적으로 트렌토 공의회는 신앙생활을 쇄신하는 참된 동력으로 작용했다. 제3차 회기의 개혁 교령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영혼들을 돌봄(cura animarum)”이었다. 이것은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으로 간주 되었고, 주교와 성직자들은 본성과 행위에서 이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복음을 가르치고, 성사를 통해 “영혼을 돌보는 데 있다”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주교들의 첫 번째 임무로 성직자 양성을 위임했다. 이에 주교들은 신학교 건설에 앞장섰고, 사제 교육이 활발해졌으며, 사제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색감 사용
소개하는 작품은 ‘영혼을 돌보는’ 교회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파스콸레 카티(Pasquale Cati, 1550~1620)가 그린 ‘트렌토 공의회의 비유’(1588-1589)다. 로마 트라스테베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 알템프 소성당(Cappella Altemps)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카티는 다르피노(Cavalier d‘ Arpino)로 알려진 체사리(Giuseppe Cesari)의 제자로 마르케 지방 출신이다. 미켈란젤로 스타일의 매너리즘 작가로도 알려졌다. 로마에서 주로 활동하며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색감으로 로마의 후기 매너리스트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이 작품이 있는 로마 트라스테베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로마 포르모사의 성 로렌조 성당에 굵직한 작품들을 남기고 1620년 로마에서 생을 마감했다.
트렌토 공의회에 대한 평가는 이후 역사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어머니이신 교회’가 가르치고, 기억하고, 묵상하고, 열매 맺도록 한다는 근본 방향을 설정한 것은, 공의회의 최고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 속으로
그림은 중간에 벽이 있어 앞, 뒤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뒷부분, 회의에 임하는 고위 성직자들의 자세는 자유로우면서도 매우 진지하다. 왼편 연단에 앉은 추기경들 맨 앞에 흰옷을 입은 비오 4세 데 메디치 교황이 있고, 반대편에는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이 뭔가 열심히 대화에 임하고 있다. 이 양쪽을 가르는 사이로 왼쪽 위에서 엄숙한 공의회장 안으로 성령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앞부분이다. 교회를 상징하는 듯, 교황의 삼중관을 쓴 여성이 한 손에는 목장(牧杖)을, 한 손으로는 누군가를 저지하는 자세로 종교개혁자를 밟고 있다. 나약하지만 엄격하다. 가슴에 십자가 형태로 두른 영대와 입고 있는 흰옷으로 교회와 교황을 대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여성은 지역 교회와 학문을 상징한다. 그녀의 그늘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여성은 ‘로마’이고, 그 뒤로 손을 모으고 있는 여성, 성합이나 십자가를 든 여성은 ‘지역 교회’를, 그 옆에 바닥에 펼쳐진 책과 지구본은 인문과학을 포함한 각종 ‘학문’을 상징한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3) 피터르 브뤼헬의 ‘일곱 가지 자비의 행위’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사랑을 행하여라
- 피터르 브뤼헬, ‘일곱 가지 자비의 행위’(1616), 개인 소장, 벨기에.
325년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 이후 트렌토 공의회까지 모두 19번의 공의회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 500년간 두 번, 제1ㆍ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다. 트렌토 공의회는 이것만 봐도 얼마나 교회 생활에 중요한 전환점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잠시 당시 공의회의 성격을 알기 위해 첫 번째(가장 먼저 사도들이 소집한 예루살렘 공의회는 일단 빼기로 하자)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제국 내에서 모든 종교를 허용하는 ‘종교 관용령’을 선포했다. 아직 사분 통치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의 리키니우스와 공동명의로 선포했다. 그러나 우리는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으로만 알고 있다. 이것은 이후 리키니우스보다 콘스탄티누스가 훨씬 칙령의 내용을 잘 실천했기 때문이다. 과거 동로마의 디오클레티우스와 콘스탄티우스(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서로마의 막시미아누스와 막센티우스, 이후 갈레리우스와 리키니우스 등과도 전혀 다른, 친(親)그리스도교 정책을 폈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신앙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제국 내에서 이미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모두 죽이는 게 대수가 아니라는, 나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오히려 제국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중요한 동력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공인된 지 얼마 안 된 그리스도교 내에서 이단이 발생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반대했고 그에 동조하는 사제들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긴장했다. 그리스도교로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는데, 제국을 분열시킬 위험 요소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해 아리우스를 파문하고 ‘니케아 신경’에 아리우스가 반대한 내용을 모두 담아 신앙고백 기도로 발표하고 회의를 종료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이후, 가톨릭교회에서 진행한 18번의 공의회에 어떤 식으로든 황제들의 개입이 있었고, 공의회 결정 사항이 그만큼 국가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트렌토 공의회, 사목 전 분야에 걸쳐 개혁 단행
다시 트렌토로 돌아와서, 종교 개혁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한 공의회지만 개혁자들의 공격을 모두 받고, 시대가 무르익은 다음에야 공의회는 소집되었다. 그것도 샤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대립하는 가운데서, 역사상 어떤 공의회보다 광범위한 차원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때까지 각종 의혹으로, 혹은 ‘신비’로 밀쳐두었던 불분명한 교리들까지 명확하고 분명하게 했고, 사목의 전 분야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 그중 오늘 우리 주제와 관련한 한 가지만 들면, “라틴어 성경(불가타)과 사도들과 교부들의 신앙과 행실에 관한 전승을 모두 수용”했다.
당시 유럽은 루터 이전 한 세기 전부터 일부 개혁가들에 의해 불가타의 자국어 번역이 있었다. 루터도 개혁과 동시에 불가타의 독일어 번역과 자의적인 해석으로 논란을 자초했다. 이에 트렌토 공의회는 불가타를 가톨릭교회의 정경으로 선포하고, 미사용 전례 텍스트에 불가타 성경 구절을 체계적으로 배치해 논란을 정리했다. 신앙과 행실에 관한 가르침도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셨고, 성령에 의해 사도들과 교부들이 실천했으며, 가톨릭교회 안에서 항시 보존되어 온 것으로서 이를 존경하고 애정으로 받아들인다고 천명했다. 우리의 주제 ‘자비의 행위들’은 정확하게 여기에 속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트렌토 공의회의 결정 사항이 얼마나 루터의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에서 멀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공의회는 루터를 의식해서 일부러 반대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교회가 걸어야 할 방향을 결정한 것이다. 일각에서 말하는 ‘트렌토 공의회의 결정 사항이 결국 반(反)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표현은 마치 공의회가 ‘반(反) 루터’나 ‘반(反) 종교 개혁’의 차원에서 결론을 끌어낸 것처럼 보여,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본다.
가톨릭교회는 루터가 ‘오직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경 ‘만’이라는 문자주의가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를 ‘행동’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에 대해 루터는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교회는 ‘믿음’에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며, 믿음이 생명력을 얻으려면 ‘선한 행실’,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례는 루터의 나머지 ‘오직 시리즈’와 개혁가들이 없앤 성사들과 관련하여 얼마든지,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톨릭교회의 이런 가르침이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이라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 내용이었고, 교회 전통으로 사도 시대부터 내려오던 것이었다는 점이다. 중세기 교회가 권력층에 있을 때, 그것을 잘못 사용하거나 남용하여 개혁이 요구된 바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폐기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의회는 그것을 확인하고 재천명한 것이다.
14가지 자비의 행위
트렌토 공의회를 기점으로, ‘영성가’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이런 가르침이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소위 ‘공의회 예술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자비의 행위로, 14가지를 언급했다. ‘7가지 육체적인 자비의 행위’와 ‘7가지 영적인 자비의 행위’가 그것이다. 글을 모르는 신자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매우 쉽고 간략하게 가르쳤다.
일곱 가지 육체적 자비의 행위는
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②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
③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
④ 감옥에 갇힌 사람을 방문하는 것
⑤ 순례자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
⑥ 병자를 돌보는 것
⑦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일곱 가지 영적인 자비의 행위는
① (신앙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에게 조언하는 것
② 무지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
③ 죄인을 질책하는 것
④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
⑤ 상처 입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
⑥ 괴롭히는 사람을 인내로 견디는 것
⑦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불과 지옥의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브뤼헬(Pieter Brueghel il Giovane, 1564~1638)이 그린 ‘일곱 가지 자비의 행위’(1616)다. 여기선 ‘육체적인 자비’의 행위들을 표현했다. 벨기에의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피터르 브뤼헬은 아버지 피터르(1525?~1569)와 동생 얀(1568~1625)도 화가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5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이름과 재능만 물려받고, 직접 그림을 배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아 21살 때부터 눈에 띄는 예술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같은 화풍의 그림을 그리며 아버지의 그림들을 베껴 충실한 모방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안트베르펜의 성 루카 길드의 마에스트로가 되었다. 화가들의 조합이나 단체의 이름 또는 주보로 성 루카를 많이 드는데, 이는 루카가 의사라서 인물 묘사를 세심하게, 마치 그림을 보듯이 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루카가 화가였다는 설 때문이다.
브뤼헬은 점차 아버지의 화풍에서 진일보하여 특징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그것이 ‘불과 지옥의 화가’라는 별명이 되기도 한 ‘불과 지옥’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1638년 안트베르펜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작품은 중세기 ‘가난한 이들의 성경(Biblia pauperum)’을 연상시킬 만큼 간결하고, 쉽다. 왼쪽 위에서부터, 2층의 건물 위는 감옥이다. 계단에도 간수가 있고, 기둥 뒤에도 간수가 앉아 있다. 왼쪽 끝에 두 사람이 ‘감옥에 갇힌 다른 두 사람을 방문’한다. 건물 아래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있다. 드럼통에서 물을 받아 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앞에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고’ 있다. 그 옆, 오른쪽 앞에는 ‘헐벗은 사람들에게 옷을 나누어 주고’ 있다. 오른쪽 첫 번째 집에는 ‘병자를 방문하는 사람’이 있고, 방문객의 손에는 성합이 들려 있다. 그 뒷집에는 주인이 나와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전체 그림의 배경 저 멀리에는 두 사람이 ‘죽은 사람을 묻고’ 있다.
같은 주제의 작품으로, 1606/1607년 카라바조가 그린 제단화에서부터 안토니오 카노바의 조각 부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이 있다. 독자들이 찾아서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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