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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7) 본당 공동체에 관한 신학적 단상
본당 쇄신, 구성원 마음 모아 하느님 뜻 살아내는 것이 최선
본당 경험과 사목의 문제
본당 사제로 8년을 살았다. 짧은(?) 본당 경험이었지만, 신학교 선생 시절 동료 교수 신부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긴 본당 사목 경험을 가진 신부였다. 신학교는 신학과 영성과 인성을 종합적으로 교육하는 공간이다. 단순히 현장 사목을 위한 실습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신학교 양성 과정 안에, 사제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본당 사목에 대한 정밀한 이해와 교육이 조금 부족하다는 인상이다.
경험은 체화(體化)를 통해서 산 경험이 된다. 경험은 사유와 성찰과 공부를 통해서 구체화 되고 교훈이 된다. 경험은 머리와 마음과 몸을 통하지 않으면 죽은 경험이 된다. 경험이 많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찰되지 않은 경험은 오히려 우리를 고집스럽게 할 위험이 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자기 경험의 울타리에 빠져 다른 것을 잘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자주 목격한다. 성찰과 공부 없이 그저 반복되는 경험은 습관화, 관습화의 폐해만 낳을 뿐이다. 오랜 본당 사목 경험이 역설적으로 사목적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는 위험으로 작동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코로나 시대의 본당
신앙생활의 대부분은 본당에서 이루어진다. 가정교회도 있지만, 우리가 가시적으로 경험하는 교회는 본당이다. 본당은 가톨릭 신앙의 중심이다. 그런데 그 본당 공동체가 위기를 겪고 있다. 오늘날 겪고 있는 본당의 위기가 코로나 사태 때문만은 아니다. 오래 누적되어왔던 본당 공동체의 위기가 코로나 사태로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본당은 조금씩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전례와 성사 생활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다. 미사 참례자 숫자가 줄었다.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어 일상이 정상화 된다고 해도, 코로나 시절의 신앙생활에 익숙해진 신자들이 예전의 신앙생활로 모두 복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통계와 여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본당 생활에 조금 미지근했던 신자들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본당 생활에서 이탈할 위험이 많다는 전망이다.
실제 본당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것들은, 미사, 다양한 신심 활동과 봉사 활동, 친교와 친목 모임, 구역과 반 모임, 성경 공부, 예비신자 교육 등이다. 오늘날 본당의 위기란, 결국 본당 중심의 전례와 모임과 행사에 참여자가 줄어든다는 것이며, 본당 안에 활기와 역동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여자의 감소와 활기와 역동성의 축소는 긴밀한 관계를 갖지만,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참여자가 증가한다고 해서 활기와 역동성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숫자의 증가에 따른 활기와 역동성은 물질주의적 자본주의 성장 논리에 불과할 수 있다. 어쩌면 오늘날 본당의 위기는 본당에서 수행되는 모든 것들이 그 진정한 목적과 지향을 놓치고 있는 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본당의 본질과 목적과 지향
코로나 사태는 다시 한번 본당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본당의 목적과 지향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본당은 그 지역에서 사는 교회의 현존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 생활이 성장하는 장소이며, 대화와 선포, 아낌없는 사랑 실천, 그리고 예배와 기념이 이루어지는 장소다.”(「복음의 기쁨」 28항) 본당은 친교와 참여의 장소이며 복음화(선교)를 지향해야 한다.(「복음의 기쁨」 28항) 즉, 본당은 시노달리타스의 핵심 주제인 친교, 참여, 사명이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다.
제도는 언제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본당은 친교와 참여와 복음화 사명을 위해 존재한다. 본당의 유지와 관리와 운영은 부차적 문제다. 제도의 본질은 그 제도가 지향하는 목적과 사명 수행에 달려있다. 교회 공동체가 본당이라는 제도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놓쳐버리고, 그 외형적 유지만을 집착할 때 위기가 온다. 본당의 본질과 사명을 수행하려는 목적은 사라지고 본당의 전통적 형식만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 본당의 활기와 역동성은 축소된다. 본당이라는 시스템의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당이 갖는 원래의 목적과 지향을 다시 상기하면서 그 목적과 지향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내자는 뜻이다. 본당이 ‘자기 보존’에 매몰되지 말고 ‘복음화의 역동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의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것을 ‘본당 공동체의 사목적 회심’이라 부른다.
본당 공동체의 회심
교황청 성직자성 훈령인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봉사하는 본당 공동체의 사목적 회심」은 오늘날 본당이 처해 있는 현실을 진단하고 다양한 제안을 하고 있다. “본당 사목구는 지난날과 같이 모임과 사교의 으뜸가는 곳이 아니기에 동행과 친교의 새로운 형태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14항) “본당 사목구가 복음화의 영적 역동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자기중심적이고 화석화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17항) 본당 구조가 행사중심으로 함몰되는 것을 피해야 하고(34항), 관료적이고 위압적인 방식을 버려야 하고, 사목 활동이 성직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37-38항)
본당 구조의 쇄신과 더불어 구성원들의 회심이 요청된다. 무엇보다 성직자의 사목적 회심이 가장 필요하다. 오늘날 본당 신부들은 미사, 신자 관리와 재정 문제, 본당 행사에 매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지친다. 속된 표현을 사용하면, 미사 드리는 기계와 인사와 재정 관리자로서 살아간다. 복음화, 신앙 교육, 참된 친교와 봉사라는 목적과 지향을 자주 놓치고 산다. 본당의 현실은 사제들을 복음 선포자로 살게 하기보다 관리자와 운영자의 모습으로 살게 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제도와 구조의 문제일까? 아니면 지속적 양성의 부재와 공부와 성찰의 부재에서 발생하는 성직자들의 신원 의식의 약화에서 빚어지는 것일까? 관리자가 아니라 현장 사목자로 살아가기 위한 발상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할까?
본당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질문과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 본당은 진정한 친교와 참여와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지?” 그저 정직하게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노력하기만 해도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또한, 본당 공동체 안의 수도자와 신자들의 역할과 태도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요청된다. 문제 해결과 대안 제시는 어느 특정인의 몫이 아니다. 주교, 사제, 신학자, 수도자, 평신도가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대화하는 수밖에 없다.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이 해결책이다.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하는 만능 프로그램은 없다. 법과 제도의 변화는 언제나 나중이다. 공부와 성찰과 교육을 통한 회심과, 본당의 삶을 살아내는 방식과 스타일의 변화가 먼저다. 회심과 스타일의 변화는 언젠가 법과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다. 예수님 역시 새로운 제도와 프로그램의 창시자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살아내는 방식의 혁명적 변주자였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0) 사람과 책의 경계가 옅어지는 순간 - 읽기의 미학
읽기란 글 쓴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거룩한 의식
시 읽기에서 꼬리를 무는 생각들
습관적으로 시집을 산다. 시골에 살다 보니 서점에서 읽어보고 살 수 없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새로 나온 시집들에 대한 소개문과 간략한 내용을 보고 구입한다. 신문 문화면의 책 소개도 시집 구입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새 시집이 나오면 어김없이 산다.
책을 샀다고 해서 그 즉시 바로 다 읽는 것은 아니다. 책상에 쌓아두게 된다. 정독하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책들은 목차와 머리말과 일부 내용을 발췌해서 읽고 바로 책장으로 보내진다. 논문이나 글을 쓸 때 참조용 책들이다. 문학책들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물론 설렁설렁 읽지만 말이다. 젊은 날에는 평론과 소설을 많이 읽었다. 우리 젊은 시절에는 문학 평론가들이 당대의 지식인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 시절에 우리는 문학평론을 통해 지적 갈증을 채웠다. 하지만 이제 다양한 영역의 지식인들이 활동하는 시대다. 신형철처럼 탁월한 지적 역량을 보여주는 문학 평론가들이 있지만, 어느 시점부터 문학평론을 거의 읽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이젠 소설도 잘 읽지 않는다. 이성우, 김연수, 은희경, 황정은의 소설들만 듬성듬성 읽는다. 그래도 여전히 시집은 읽는다. 시집은 짧기에 그리 많은 시간의 품을 팔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집을 소설처럼 읽는다. 책상에 쌓아둔 시집들을 자주 숙제하듯이 읽는다. 시를 좋아하지만 불량하고 불경한 독자인 셈이다. 시를 낭독하는 즐거움, 암송하는 기쁨을 잘 모른다. 그저 시에서 사람들의 무의식과 미세한 감정의 숨결과 삶의 비의를 엿보려는 이기적인 애독자다. 가끔은 자신에게 변명한다. 내가 늙어서 감정과 정서가 건조해져서 그렇다고, 너무 많이 읽어서 오히려 긴장감을 잃어버려서라고, 요즘 젊은 시인들의 감성과 인식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확 다가오는 시들을 발견할 때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최근에 읽은 두 개의 시가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이동욱 시인의 시,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내가 쓴 한 문장을 네가 읽으면 두 문장이 된다.” “내가 읽은 문장이 네가 들으면 한 문장이 되지 않아도/ 우리를 주어로 삼으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말이다.” 이종민 시인의 시, ‘우리가 문장이라면’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이 두 시의 화두와 구절들이 오래 머리를 맴돌았다.
읽기, 이해, 인정
사람을 읽는다. 글을 읽는다. 사람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것과 책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묘하게 겹쳐 보인다.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사람과 삶을 읽는 것과,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과 몸짓과 표정을 통해 그와 그의 삶을 읽는 일은 적어도 나에게는 시작점과 지향점이 같다. 둘 다 사람과 삶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사람과 삶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목적을 지향한다. 사람이라는 책에서 말과 행동은 글의 이야기 같고, 몸짓과 표정은 문장처럼 여겨진다.
사람과 책의 경계가 옅어지고 흐릿해지는 순간을 자주 경험한다. 나에게, 책 제목과 표지는 자신을 발견해달라는 요청의 신호이며, 문장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암호이자 기표다. 시인 진은영과 상담가 김경희는 「문학, 내 마음의 무늬 읽기」에서 “문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활동”과 “문학과 만나서 스스로 변화하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시도다. 책을 통해 자신을 읽고, 타인을 읽고, 마음을 읽고, 삶을 읽는다. 어쩌면 읽기란 존재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포괄적인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이해하는 일만큼 아름다운 행위가 또 어디 있을까. 책을 펼쳐 본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고, 그 책을 쓴 사람의 운명을 긍정하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읽어주지 않은 삶은 서럽고 서글프다. 말을 듣고 글을 읽는 일은 말한 사람과 글 쓴 사람의 정체성과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거룩한 의식(儀式)이다.
읽기, 만남, 돌봄
도서관과 서점과 책장의 책들은 사람과 삶이라는 우주의 신비를 발견해달라고 보내오는 미지의 신호다. 책을 꺼내어 읽는 일은 ‘미지와의 조우’다. 읽기는 만남이며 대화다. 읽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 세계에서 미동도 않은 채 타인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다.” 읽기는 공감이며 “타인의 관점으로 옮겨가기”다. 읽기를 통해 “우리는 타자를 내면의 손님으로 맞는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타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더욱 확장되고 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감정적으로도 바뀌어 있다.”(매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읽기는 교감이며 연대다. 읽기는 타인과 공감하는 일이며 나아가 타인을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 읽기와 돌봄을 연결하는 것은 너무 많이 나간 주장인가? 현대는 주체성의 시대라기보다는 타자성의 시대다. 개체성과 자율성보다 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을 더 강조하는 시대다. 인간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상호의존적이고 관계적 존재다. 이기적이고 개별적인 주체들은 계약을 통해 협력하고 살아간다. 계약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계약이 올바르게 수행되는가에 있다. 즉, ‘공정’과 ‘정의’가 중요한 미덕이 된다. 하지만 공정만으로 유지되는 계약사회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쉽게 목격한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을 통해서만 우리는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공존한다. 관계성의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 덕목은 ‘연대’와 ‘돌봄’이다.
사목(pastoral care), 사회 복지(social care), 보편적 돌봄(universal care). 모두 돌봄을 매개로 사용되는 개념들이다. 신자들을 돌보는 일,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향한 마음으로 돌봄을 실천하는 일”(김정희원 교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목의 지평은 세상을 향해, 자연과 우주를 향해 확장되어야 한다. 통합 생태론과 생태적 “신념, 태도, 생활 양식”을 강조하는 오늘의 가톨릭교회는 이 돌봄의 확장성을 먼저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읽는 일은 그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일이며, 그와 교감하고 그를 돌보는 일이다.
(시 두 편을 읽고 생각이 뜬금없이 너무 멀리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읽기의 매력 아닐까?)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1) 사회적 자아와 일상의 자아 사이에서
시민의 사회·정치적 의견 표출의 장… 선거가 끝났다
선거철 마음의 풍경
선거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다. 정치적 사건은 사회적 파장을 낳는다. 선거는 선택과 결정의 장이지만, 그 결과는 어쩔 수 없이 후유증과 상처를 남긴다. 결과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민주주의 핵심이다. 하지만 사회적이고 외적인 수용과 승복과는 별개로 결과에 따라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힘듦과 아픔은 남는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사람들은 기쁠 것이고, 자신의 선택이 수용되지 않은 사람들은 좌절과 실의에 빠질 것이다. 냉정하게 살펴보면, 자신이 당선되거나 낙선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투표 하나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투표 하나에 얹혀놓은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의지의 무게만큼 기쁨과 좌절의 무게도 큰 것 같다.
왜 우리는 그 투표 하나에 그 많은 마음과 감정을 싣는 것일까.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무심히 지나가는 하나의 선거일 수 있다. 선거의 후유증은 정치적 관심, 사회적 관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만 발생하는 것일까.
선거는 한 실존적 개인이 사회적, 정치적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이다. 민주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얼마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 사회적 주장과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가와 사회의 방향 설정에 구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은 선거다. 대의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 시민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장은 그리 많지 않다. 시민은 선거 때만 주인의 역할을 한다. 오래 억눌려 있었던 주인의식을 선거라는 매개에 모두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서 선거철은 늘 정치적 과잉의 시기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 세대는 젊은 세대보다 분명 정치에 민감한 세대다. 물론 그 정치적 예민성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아무튼, 선거기간 동안 내 마음은 늘 롤러코스터를 탔다. 대선이라는 사회 사건과 현상 속에서 내 마음과 감정의 결이 어떤 진폭으로 움직이는지, 그 궤적을 기록하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생은 늘 기대와 희망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일부러 비관적 상황을 그려보기도 하고, 가능한 한 낙관적 생각을 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한다. 생은 꼭 예상 밖으로 그 궤도를 더 많이 그린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재의 수요일에 잠시 반성했다. 우리 삶과 운명은 먼지와 재일 뿐인데, 뭐 그리 정치에 온 마음을 투사하며 살고 있는지. 선거의 장만이 정치의 현장은 아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일상 삶 속에서 더 나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참다운 정치 참여라는 말이다.
그저 마음으로 기도했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당선되기를, 혐오와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펴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타자와 약자의 고통과 아픔에 연대할 줄 아는 사람이 당선되기를, 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와 통합을 추구하는 사람이 당선되기를, 생명과 환경의 문제를 깊이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 당선되기를.
선거의 영향과 정치적 동일시 현상
솔직히 고백하면, 꽤 오래전부터 정치와 권력의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사회적 흐름과 현상들, 문화 영역의 움직임만을 눈여겨볼 뿐이다. 직업적 정치의 세계는 늘 소수의 권력자들과 정당 세력에 의해 좌우된다. 정치적 세력의 교체가 사람들의 개별적 일상 영역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에게 정치세력의 교체는 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가정방문과 봉성체를 다녀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시기에 약자들을 향한 복지혜택이 확연히 줄어드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선거에서 선택된 정치적 권력이 사회의 흐름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지,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돌보는지에 대한 관심과 감시의 눈길을 놓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떤 교체이든, 정치적 권력의 교체는 늘 정치적 힘과 경제적 부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막대한 이익과 혜택을 낳을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사람들은 물질적 이익과 혜택의 여부에 따라 정치적 선택을 한다. 이기적 개인주의와 부족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동선과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며 투표하지 않는다. 선거가 사회 공동체의 방향과 흐름을 올바르게 선택하는 축제의 장이라기보다는 이익을 추구하는 욕망들이 충돌하는 장이 되고 있다. 선거철에 우리는 권력과 이익에 따라 변해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정치학자들이 분석했듯이, 선거라는 현장에는 정치적이고 경제적 동질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이념적이고 심리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어떤 정치적 세력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선거의 결과에 따르는 심리적 대리 만족과 위안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 기쁨과 만족은 허상일 때가 많다. 왜 가난한 이들이 계급적 동질성보다 심리적 동질성을 더 추구하는 것일까. 이념과 정서와 지역이라는 매개를 통해 심리적 동질성을 확보하려는 것은 인정 욕망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확장되고 연장된 자아를 통해 인정 획득의 영역이 확대되기를 원한다. 기득권 선망(羨望)이 ‘강자동일시’ 현상을 낳는다. 일상에서 인정 욕망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의 장에 욕망을 투사하는 것일까. 강자인 타자가 얻는 인정을 왜 자신이 받는 인정으로 착각하는 것일까.
일상, 실존, 운명을 생각한다
선거는 끝났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사회적 삶과 일상적 삶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또 어떤 관점에서 보면, 분명 다른 현장이다. 몸을 지닌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거시 정치의 영역에서 일상의 미시 정치 영역으로 돌아와야 한다. 사회적 자아와 일상의 자아 사이에는 비판적, 심리적 거리가 필요하다. 정치적 현상과 사건에서 일종의 동일시 행위를 통해 희비가 교차하는 것과 실제 삶에서 우리가 직접 겪어야 할 운명들의 무게를 어떻게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 마주해야 할 실존적 삶의 무게들을 생각하면, 정치적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은 부질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생계의 힘듦, 늙음, 질병의 고통,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한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에게 던져졌다. 정치적 사건의 결과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언젠가 죽음도 그렇게 다가올 것이라는 뜬금없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아득하고 답답해졌다. 일상의 시간들을 더 소중히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자고 결심한다. ‘신학서원’ 운동을 통해 사람들의 신앙적 성찰과 사회문화적 성찰의 힘과 우애와 연대의 감성을 키우는 데 노력을 기울이자고 다짐한다. 세상의 변화는 정치적 사건과 행위들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일상의 사회문화적 토대 안에서만 가능하다. 한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토양의 구축과 변화에는 교육과 언론과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던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2) 시노달리타스와 세상 읽기 – 질문하는 신앙
끊임없이 정직한 질문 던지며 ‘경청’하고, 함께 답 찾아가야
신학적 의제 설정과 교회 현실에 관한 정직한 질문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향한,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교구마다 위원회가 설치되고, 각 교구 차원의 시노드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주변에서 듣고 있다. 교회 안에 새로운 화두가 던져졌고, 그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이 내심 반갑다. 또 하나의 세계주교시노드 행사로 끝날지, 아니면 새로운 교회를 향한 작은 전환점이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교회 구성원 전체의 참여를 유발하는 시노드 과정과 교회의 존재 양식과 행동방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요청하는 ‘시노달리타스’라는 화두는 묘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시대적 요청을 담고 있는 정확한 의제를 설정하고 그 의제를 지켜나가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노력이 고맙다. 급변하는 세상과 모든 것들에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욕망의 흐름 속에서, 참다운 의제를 설정하고 그 의제를 공적 담론화해서 새로운 변화를 지향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얼마 전 ‘저널리즘 주간 행사’에서 언론인 손석희는, 언론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사회에 필요한 의제를 설정하고(어젠다 세팅) 그 의제를 지키는 일이라고(어젠다 키핑) 말했다. 교회의 지도자 역할과 좋은 언론의 역할은 서로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노달리타스’는 경청하는 교회로의 전환을 뜻한다. 경청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 식별하고자 서로에게, 우리 신앙 전통에, 그리고 시대의 징표에 귀 기울”(「편람」)이는 것이다. 성령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신앙인에게 당연히 요청되는 일이다. ‘시노달리타스’라는 의제가 설정된 이유는 교회 구성원들 간의, 교회와 세상 간의 경청과 대화에 대한 강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성직자와 신자들 간의 경청과 대화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신학적 이해와 서술,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기 위해 요청되는 윤리적 태도와 자세에 관한 담론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오늘의 현실 교회에서 교회 구성원들 간의 경청과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오늘의 교회는 세상과의 경청과 대화, 즉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고 식별하고 있는지? 본당과 교구라는 현실 교회의 장(場)에서 성직자와 신자들 간의 경청과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와 같은, 교회의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질문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정직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교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성령께서 그 여정에 함께하면서 답을 주시지 않을까. 신학적인 설명과 윤리적 당위의 요청만큼 교회 현실에 관한 정직한 질문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교회를 지향하는가 – 친교, 참여, 사명
교회론적 관점에서 보면, ‘시노달리타스’는 친교와 참여와 사명이라는 차원을 포함한다. 물론 이 세 차원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친교는 참여와 사명 수행의 여정에서 이루어진다. ‘삼위일체적 친교’는 신학적으로 풍요롭고 깊은 의미가 있다. 세속의 친밀성 차원으로 축소 환원될 수 없는 개념이다. ‘교회적 참여’라는 신학적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세속의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작동되는 단순한 참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앙적 참여’는 세례를 통해 부여받은 신앙 감각과 성령께서 신앙인 저마다에게 주신 은총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는 복음화를 위해 존재한다. 복음화라는 교회의 사명 수행을 위해서 시노달리타스는 더욱 필요하다.
조금 단순화시켜 말해보자. 시노드 정신으로 살아가는 교회란 첫째, 진정한 ‘친교’가 이루어지는 교회다. 둘째, 교회 모든 구성원의 ‘참여’가 활발하고 상호존중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교회다. 셋째, 관리와 유지와 지속과 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복음화의 ‘사명’ 수행에 온 힘을 쏟는 교회다. 본당, 교구, 가정(교회), 수도 공동체, 다양한 교회 단체들이 시노드 정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구현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
시노드 과정은 경청과 식별과 참여의 양상을 포함한다. “경청이 공동합의적 과정의 방법이라고 하면, 식별은 과정의 목표이고, 참여는 그 여정이다.”(「편람」) 시노드 과정에 충실한 교회란, 결국 경청과 식별과 참여가 이루어지는 교회라는 뜻이다. 본당, 교구, 가정, 수도 공동체, 교회 단체들 안에서 경청과 식별과 참여의 모습이 구현되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정직한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가야 한다. 또한, 자기 삶의 모든 자리에서, 자신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정직하게 질문을 던지고 겸손하게 답을 찾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성직주의
시노드적인 교회는 성직자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교회다. 솔직히 고백하면, 현실 교회 안에서 신자와 신자 사이에도 경청과 대화의 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경청과 대화의 문화를 형성하는 일이다. 과연 무엇이 성직자와 신자 사이의 경청과 대화를 어렵게 하는가? 교계적 질서와 순명의 논리를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수직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서일까? 복음화 사명을 위한 교회적 직무를 위계적 서열과 신분적 차이로 오해하는 문화 때문일까? “식별과 자문과 협력의 공동 작업을 통하여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decision-making)과 사목적 차원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decision-taking)을 구별해야 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직무적 구별이지 서열적이고 신분적인 차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직주의의 폐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학적 차원, 교회적 차원, 성직자 양성과 교육의 차원, 교회 문화의 차원 등 다양한 차원에서 노력이 필요하다. 성직주의라는 이름붙이기(naming) 하나로 모든 문제가 축소환원되는 듯한 느낌이다. 현실 교회의 장에서 성직주의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정직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모든 이가 용기와 담대함(파레시아)으로 발언하도록 초대되며, 이를 통하여 자유, 진리, 사랑이 어우러진다.”(「예비 문서」)
식별과 세상 읽기
경청은 대화이며 동시에 읽기이다. 경청은 상호간의 인격적 대화이며 세상을 신앙의 눈으로 읽는 일이다. 오늘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화적 도전과 시대적 흐름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교회 안에는 감정적 경건주의만 활발하고 지성적 식별의 능력이 부재하다고 교회 역사가 마시모 파지올리는 지적한다. 식별을 위한 신앙적 지성뿐만 아니라 세상과 문화를 읽어낼 수 있는 인문사회적 지성이 오늘의 교회 안에 절실히 요청된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2) 공부, 성찰, 일상의 수행
변화와 쇄신 위한 노력들이 세상과 교회를 바꾼다
개인의 변화와 성숙
늙어가면서 뼈저리게 절감한다. 삶의 연륜이 깊어간다고 자동으로 인격이 성숙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의 기간이 길다고 신앙이 저절로 깊어지지 않는다. 잘 늙는 일이 힘든 만큼, 신앙의 깊이와 성숙을 위해서도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삶의 영역이나 신앙의 영역이나 일종의 지불비용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으랴.
사제로서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았다. 거의 매일 미사를 한다. 성체성사의 은총을 매일 충만히 받는다. 하지만 내 신앙과 인격이 성품성사를 받고 초보 신부로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나아지고 깊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빛나던 그 시절의 순수한 열정과 신앙이 이젠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성사의 은총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우리의 인격적 변화는 가져오지 못하는 것일까. 신학적으로 보면, 구원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성취와 인격적 성숙은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 구원은 은총과 신앙 안에서 선물로서 주어진다. 구원과 은총이라는 차원에서 성사의 사효성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우리의 인격적 변화와 성숙은 성사의 인효성 영역에 더 많이 좌우되는 것 같다. 정성과 마음의 집중 없이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성사 거행은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의미다.
지난 선거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껴지던 감상이 있다. 국가의 수준과 품격은 시민의 수준과 품격과 같이 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민의 모습과 수준이 국가의 모습이며 수준이다. 탁월한 정치 지도자가, 어떤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국가의 모습과 수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다. 시민의 전체적 역량이 강화되지 않는 한, 국가의 진정한 변화와 품격의 향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한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신앙인들의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다. 신앙인들 스스로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진정한 변화와 쇄신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흔히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누군가가 선도적으로 변화와 쇄신을 주도해주기를 갈망한다. 물론 때때로 전위적 선구자들에 의해 동기가 유발되고 변화의 계기가 마련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의 전반적인 모습과 수준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변화와 쇄신의 움직임은 금방 동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세상과 교회의 역사 안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공동체의 변화와 쇄신은 그 구성원들의 변화와 쇄신과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과연 개인의 변화와 쇄신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흐르는 세월은 그저 타성과 관성만을 낳는다. 무엇이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있을까? 사람의 변화를 위해 개별적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공부와 사람의 성숙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만이 머물지 않고 늘 변화하고 쇄신된다. 물론 지적 권력을 쌓아 인정 욕망을 채우고 지위를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공부도 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늘 열린 자세와 겸손한 태도로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만이 그래도 조금 변화되고 성숙해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공부하고 탐구하지 않는 사람은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을 대상에 투사만 할 뿐이다. 대상과 관점의 상호작용에 따른 역동성을 놓친다. 언제나 같은 입장과 견해만 반복할 뿐이다.
공부란 타인의 생각과 경험을 듣고 배우는 일이다. 좋은 공부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는 것이 공부다. 세상의 삶과 신앙의 삶에 대해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는 것이 참 공부다. 좋은 공부는 새로운 상상을 하는 일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기존의 방식에 대해 균열을 일으키고 다른 방식으로 상상해보는 것이 공부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서만 우리는 조금씩 변해가고 성숙해질 수 있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변화의 기미는 공부에서 시작된다.
자기성찰과 쇄신
공부와 성찰은 경계가 애매하다. 생각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측면에서 공부와 성찰은 닮아있다. 성찰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자기 자신에게 던진다는 데 그 방점이 있다. 성찰은 곧 자기성찰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찰의 진정한 의미는 타자 성찰, 즉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때때로 타자의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사회의 구조적 악을 식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성찰이라는 말보다는 비판의식과 비판적 사유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성찰은 먼저 자기를 돌아보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 그래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타자와의 공감과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자기성찰만이 변화와 쇄신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일상의 수행
일상 삶의 모든 자리가 수행의 장소다. 수행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선 자리,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가 수련과 수행의 장소다. 우선, 일상의 수행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드러난다. 운명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내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응대하는 방식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신앙의 방식으로 응대하는 것이 수행이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신앙의 시선과 자세로 응대하는 일이 수련이며 수행이다. 둘째, 일상의 수행은 자신이 하는 일에 마음을 싣고 지향을 두는 일이다. 그저 반복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의 목적을 상기하고 기억하면서, 그 일에 건강한 신앙적 지향을 두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음을 집중하고 정성을 들이면서 그 일을 수행한다면 그것이 곧 수련이다. 셋째, 일상의 수행은 연극적 수행의 형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연극적 수행이란 하느님이 감독이며 제작자이고 우리는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모든 것을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삶의 무대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온 힘을 다해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연극적 수행이다.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응대 방식, 하는 일들에 대한 목적과 지향과 정성을 싣는 일, 연극적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되고 쇄신될 것이다. 공부와 성찰과 일상적 수행만이 우리를 성숙하게 할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변화와 쇄신이 공부와 성찰과 일상의 수행에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축소 환원일까. 변화와 쇄신을 위한 효과적이고 기발한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삶의 진실은 언제나 단순한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변해야 교회와 세상이 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