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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무르익는 시간
창 37: 18-24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는 흑인인권운동을 하다가 44세인 1962년에 5년형을 받고 투옥되었습니다. 복역중 국가전복 사건에 연루되어 1964년도에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복역 중 1990년, 72세의 나이로 28년 간의 감옥 생활을 뒤로하고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350년에 걸친 인종차별 제도를 철폐시켰고 흑인 다수사회인 남아공에서 백인통치를 끝내는데 결정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1994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화해와 관용의 정치」를 폈습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백인들에 대한 일체의 정치보복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28년의 감옥 생활을 견디었으며, 오랜 세월을 달려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증오 한가운데 있는 사랑은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 만약 어떤 사람이 경험한 것이 오직 두려움, 미움, 폭력, 학대였다면, 그 사람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가장 끔찍한 거절을 겪고 가장 잔인한 고문을 당했던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그들은 인간성 회복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사랑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미움과 두려움 한가운데서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세상에 참된 희망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고통은 구원의 준비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다면 구원을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준비 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준비된 만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준비시키는 방법은 고통을 통한 성숙입니다.
요셉의 꿈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 요셉은 자신의 꿈을 형제들 앞에서 말합니다. 모든 형제들이 각각 자신의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다른 열한 단은 요셉의 단에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얼마 후 요셉은 또 다른 꿈을 자랑합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신을 향하여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부모와 열한 형제들이 모두 자기를 섬길 것이라는 암시가 담긴 꿈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건방진 요셉을 향하여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요셉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꿈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철없는 짓입니다.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도 모르고 말하는 경솔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막내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이기적인 성격이 그에게 있습니다. 진짜 막내는 벤냐민이지만, 벤냐민과는 추측하건데 10살 이상이 차이가 나므로 오랜 기간을 막내로 자랐습니다. 그의 교만한 자세와 인정할 수 없는 꿈 이야기로 형제들의 분노와 시기는 치유할 수 없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초월적 현실/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을 향한 갈망
요셉이 꿈을 숨기지 않고 언어로 표현하는 데는 꿈의 내용을 현실로 만들고 싶은 욕망의 표현입니다. 적어도 요셉은 현재를 뛰어 넘는 또 다른 현실을 갈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형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 ‘이런 삶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보는 형들의 모습은 그가 살아가고자 하는 미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삶을 보면서도 답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떻게든지 다른 삶을 살거야. 부모님보다도 형들보다도 더 나은 삶을 살거야.”
그의 꿈은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꿈을 통한 현실 초월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형들이 들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요셉은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 나섭니다. 귀공자의 옷을 입고 형들을 찾아 나선 요셉은 마침내 간신히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형들 중에는 요셉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죽임을 면하고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바로의 신하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요셉은 종으로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주인 보디발 장군은 요셉에게 모든 것을 위임했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모든 소유물을 위임한 이후의 사건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안 일과 그 모든 재산을 맡겨서 관리하게 한 그 때부터, 주께서 요셉을 보시고,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표준새번역 창39:5).
요셉이 이렇게 유능하게 일하자 보디발의 아내는 그를 유혹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자,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모함하여 강간미수죄로 고발을 합니다. 그는 죄없는 죄수가 되어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때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곧 바로의 꿈 사건입니다.
하루는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강가에 아주 건강하고 아름다운 암소 일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아주 흉악하고 마른 일곱 암소가 올라와서 살진 암소들을 다 잡아먹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꿈이라서 바로는 꿈을 깨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잘 익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른 이삭 일곱개가 나타나더니 앞의 좋은 이삭을 삼켜버렸습니다.
그 꿈이 워낙 뚜렷한 꿈이라서 바로는 꿈의 의미를 꼭 알고 싶었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신하들과 지혜자들과 마술사들을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이 두가지 꿈이 같은 내용인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살진 소와 좋은 이삭은 풍년이 들 일곱해이고, 마른 소와 바른 이삭은 일곱해의 흉년이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자 바로와 모든 신하가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바로가 요셉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바로는 요셉을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집트 총리가 되기까지 꿈을 이루기 위하여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 질 때, 현실 속의 법칙과 현실의 모든 과정을 철저히 거쳐야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소원만 해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꿈의 변화/ 사람의 변화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성숙하지 않는 꿈은 전혀 현실화되지 못합니다. 요셉의 꿈에도 성숙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은 자기 중심적이고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꿈이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유치한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는 타인의 삶과 꿈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이기적인 욕망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세상이 자신에 대하여 머리 숙이는 것을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지의 총애 속에서 오만한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가 되는가가 그의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의 삶의 자세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오직 자신의 꿈에서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자랑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세상을 알게 되고, 이웃의 삶을 알게됩니다. 그는 감옥에서 왕을 섬겼던 두 관원의 꿈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들이 꿈을 꾸고 고민을 하자 그들의 고민에 동참합니다. 요셉은 이제 다른 사람의 고통과 희망,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타인의 꿈을 존중하고 그 꿈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타인의 꿈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꿈이 성숙 되었을 때
많은 방해와 시련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꿈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요셉은 꿈 속에서도 세상의 고통을 중심에 놓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의 소망을 일깨우고,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풍요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한 시대가 겪을지도 모르는 고통과 비극을 미리 준비하게 합니다. 고뇌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고 무엇을 할 지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보게 된 요셉은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제 요셉의 꿈은 자신의 끝간데 없는 욕망의 표출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서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계획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랜 가뭄을 잘 넘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전에는 세상이 자기를 향하여 절해야 했는데,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과 세상에게 머리 숙이고 봉사하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세계의 현실 속으로 자신을 열고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겸손하게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꿈을 무르익게 하자.
꿈은 무르익어야 합니다. 과일도 익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아야 과일이 잘 익습니다. 익는 것은 불에 익는 것입니다. 무르도록 푹 익는 것입니다. 무쇠로 된 무거운 가마 솥 안의 뜨거운 물에서 푹 익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주 뜨거운 연단의 과정입니다. 죽을 지경의 극도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1. 꿈이 무르익는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다.
첫째로 꿈이 무르익는 시간은 고통의 시간입니다. 위대한 꿈일수록 그 고통이 큽니다. 사도 바울 고린도후서 11:23-27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인생이 무르익고 인격이 무르익으려면 불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독한 시험일수록 보람과 보상이 큰 것입니다.
2. 꿈이 무르익는 시간은 긴 시간이다.
둘째로 꿈이 무르익는 시간은 긴 시간입니다. 큰 덩어리의 음식일수록 오래 익혀야 하듯이, 위대한 꿈일수록 익는 시간이 깁니다.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기 위해 많은 준비기간을 거쳐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받기 위해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한 훈련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기다림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진정한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 준비된 그릇을 만드는데 하나님께서는 25년을 기다리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하기 위해 13년을, 다윗을 사용하기 위해 15년여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30세가 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모세에게도 40세가 되기까지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시고도, 그를 부르시기까지 무의미하게만 보이는 또 한번의 40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 기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회심한 이후에 예수님의 증인으로 활동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교사와 선교사로 사용되기 까지 하나님은 10여 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을 더 요구하셨습니다.
3. 꿈이 무르익는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다.
세번째로 꿈이 무르익는 시간은 죽음의 시간입니다. 무르익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꿈의 주인이 아니라, 꿈이 나의 주인이 되어야 꿈이 이루어집니다. 나는 죽고 꿈이 사는 것입니다. 내 욕망은 죽고 하나님의 소명이 나를 살려야 합니다.
인생의 꿈을 이루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나 같은 나이 많아서 은퇴까지 한 사람이 무슨 꿈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1. 꿈은 피어나는 것이다. 2. 꿈은 번창하는 것이다. 3. 무엇인가를 이루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자신이 변하지 않아도 달성할 수 있는 목적들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꿈은 더 근본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목적은 더 근본적인 과정을 요구합니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란 사람 자체의 변화를 말합니다. 꿈은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서 과거의 미숙한 모습이 죽고 성숙한 모습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일평생을 통해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동물은 태어나면 동물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났다고 해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최소의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평가는 죽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데는 40주간이 필요하지만, 사람이 되는 과정은 일평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순간 순간의 삶의 과정 속에서 성숙하게 되어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완전한 죽음으로써 인생을 완성하게 됩니다. 인간의 꿈의 완성은 죽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도 꿈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인생의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기를 꿈꾸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땅에 정의가 서게 하시고, 이 땅에 전쟁이 끝나고 진정한 평화가 오는 꿈을 성숙시키기 바랍니다. 포기했던 일생의 꿈과 목표를 다시 찾으시기 바랍니다. 죽기까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포기할 때가 아니라, 무르익어서 완성할 때인 것입니다. 이 사회를 향한 우리의 꿈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룰 때입니다. 교회를 향한 우리의 소망을 위해 더욱 헌신할 때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꿈이 아름답게 무르익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일이 있는 사람
창 37: 18-24
955년 12월 1일 앨라바마주 몽고메리라는 곳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로자 파
아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서있던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
하라는 운전기사의 명령을 거부하게 되어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 여인은 인종차별 법을 범했다는 이유로 체포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흑인 인권 지도자들은 분노하여382일간의 대대적인 승차거부 등,
흑인들의 인권을 되찾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
면서 평화와 비폭력으로 이 운동을 이끌고 갔던 20대의 설교자가 있었는데 그
가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였습니다.
다이너마이트로 자신의 집이 폭파당하고, 습격을 당하는 등 백인들의 집요한
테러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백인들을 사랑하자고 외
치면서 흑인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하여 일을 했고, 그 결과 노벨 평화상까지 받
게 됩니다.
1963년 인종 차별의 철폐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주도하면서 노예해방의 상징
인 링컨 기념관 앞에서 모인 수만의 군중을 향해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습
니다.
"I Have a Dream" 나에게는 한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오늘도 한 꿈이 있습니다.
주의 영광이 드러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는 그 꿈을 나는 꾸고 있
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꿈은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의 후예들과 주
인의 후예들이 서로 형제애의 따뜻한 식탁을 함께 나누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
라는 꿈입니다.
불의와 압제의 뜨거운 열기로 땀을 흘리고 있는 사막과도 같은 미시시피주가
언젠가는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저의 어린 네 명의 자녀가 피부색으로 판단 받지 않고, 인물 됨됨이
로 판단되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
든, 개신교이든, 구교이든 간에 함께 손을 잡고 '마지막에 자유를! 마지막에 자
유를!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우리는 마지막에 자유롭게 된다' 라는 흑인
영가를 함께 부르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오늘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어려움과 절망의 순간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연설이 있은 지 5년 후인 1968년 봄 그는 테네시에서 연설을 하던 중, 백인
우월주의자의 총을 맞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
다.
그러나 그가 설교에서 말하였던 그 꿈의 힘은, 기어코 미국 땅에서 흑백의 차별
을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꿈은 힘이 있는 것입니다.
1. 꿈을 가진 사람에게는 내일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내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일이 있다는 말은 <꿈>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내일이 있는 사람들은 좌절하지 않습니
다.
왜냐하면 나를 택하신 하나님을 믿고 내일을 바라보는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그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 아닐 때는 환난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신앙이란 구원의 확신을 갖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을 당하여 물 없는 구덩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갔습니다.
애굽에서는 다시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 종살이를 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가 좌절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일의 꿈을 가
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 젊은이들도 꿈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오늘의 현실만 보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취직도 어렵고, 돈 벌기도 어렵고, 하나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으니 낙심하는 사
람들이 많습니다.
낙심(落心)은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을 보면 모두 낙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내일을 바라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러했습니다.
에스라, 느혜미야가 그런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엘리아와 엘리사가 악한 왕의 통치하에서 쫓김을 받으면서도 다시 일어났던 것
은 내일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
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내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누릴 영광스러운 내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세상의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는 영원
하기 때문입니다.
2. 내일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헌신(獻身)이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는 헌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신>이란 글자 그대로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의 소득으로 미래를 맡겼지만, 우리의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도 작은 소년이 자기의 도시락을 주님께 드린 데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일의 꿈이 없으면 내일을 염려하면서 살게 되지만, 내일의 꿈을 가진 사람들
은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아무리 좁고 열악한 곳에서 살지만 헌신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습니
다.
하나님은 연단 속에서 꿈을 키워주시기 때문입니다.
1980년 2월 어느 날 월스트리트 저널지에 이런 광고가 실려 있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런 사나이를 생각해 보라"는 광고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중도 퇴학했다.
그는 시골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다 파산했다.
그 빚을 갚는데 15년이나 걸렸다.
그의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한 것이었다.
그는 변호사가 되기 위한 시험에 몇 번이나 낙방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두 번이나 낙선했다.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두 번이나 낙선했다.
그러나 결국 미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늘 A 링컨이라고 서명했다."
오늘 아브라함 링컨만큼 현실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찢어지게 가난하고, 초등학교도 못나왔고, 장사하다 망해서 빚 갚는데 15년이
걸렸다고 하면 요즘 우리들도 매우 참아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국회의원에도 모두 네 번이나 떨어졌다면 얼마나 좌절감이 컸겠습니까?
그러나 매 순간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일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연단 속에서 대통령이 되었기에, 남이 해낼 수 없는 흑인 노예
해방을 실현 시켰습니다.
이 얼마나 용기 있는 업적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은 17세의 나이에 꿈 때문에 애굽에 팔려가서 그곳에서 노예
로 지내다가 억울하게 감옥에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내일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 모든 고난을 잘 참아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30세의 나이로 당시 최강대국인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일의 꿈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의 꿈은 오늘의 현실의 연단을 통하여 이루워 진다는 사실입니다.
3. 내일이 있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을 느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겨나기 때문입
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겨우 아는 단계입니까?
아니면 좋은 스승과 같은 존재입니까?
우리 신앙생활이 알고 있는 신앙의 단계에서 만 맴돌지 말고, 한 걸음 더 들어
가 사랑의 단계로 접어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 라고 묻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
냐?'고 물은 것이 바로 이점을 말합니다.
생소한 사람들끼리 결혼을 할 때는 서로가 알게 되니까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아는 단계에서 사랑의 단계로 들어갈 때 완전한 부부의 관계가 이루
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에 관하여 배웠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성경 지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아는 것으로 끝나면 이 어려운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단계에 들어가야 어떤 시련이 와
도, 어떤 환경이 닥쳐도 주님과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내일이 있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 추구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내일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
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