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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8
천맥을 이어주는 부모 / 김학중 목사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1956년 5월8일에 처음으로 시행된 ‘어머니날’이
‘왜 아버지날은 없느냐?’는 반론에 부딪히자, 1973년에 이르러 ‘어버이날’로 개명되었습니다. 어머니들뿐만 아니라 아버지들의 노고도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자녀들에게 부모는 어떤 존재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부모님은 우리를 낳아주신 분’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원칙적으로는 맞는 대답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예외가 점점 더 늘어갑니다. 왜냐하면 소위 ‘가슴으로 자식을 낳는 부모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입양이나 재혼을 통해 새로운 자녀를 얻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배가 아파 낳은 자식’이든,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든 간에,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매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모든 (정상적인) 부모는 자녀에게 이 세상의 최고를 선물하고 싶어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재물을 물려주고,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고위 직책을 마련해주고,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각종 인맥을 만들어주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일까요?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천맥(天脈)’, 즉 ‘하늘의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재물, 직책과 신분, 인맥 등은 여러분의 자녀를 순식간에 떠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녀를 끝까지, 변함없이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자녀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는 부모가 최고의 부모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천맥의 다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이어주는 사명을 감당했던 여호수아를 통하여 그 비결을 배워보겠습니다.
1. 순종과 예의를 가르치라. (3:1-6, 9-14)
여리고 성의 라합을 통하여 여호수아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요단강의 기적’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부모세대가 40년 전에 경험한 ‘홍해의 기적’, 즉 갈라진 홍해 물 사이의 마른 땅을 밟으며 이집트를 탈출했던 기적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습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건너야 할 장벽이 40년 전에는 거대한 홍해였지만, 이번에는 다소 규모가 적은 ‘요단강’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 주의사항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언약궤’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는 십계명, 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열 가지 명령’이 새겨진 돌판을 보관했던 특별한 상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궤의 뒤를 따르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라는 뜻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약 1km의 거리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심’는 것을 보여주는 ‘성물’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가장 거룩한 물건’으로 지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궤에서 멀찍이 떨어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존중의 거리’를 유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몸을 깨끗이 할 것도 요구하셨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최근 많은 젊은이들은 순종과 예의라는 덕목을 억압적인 권위주의와 혼동합니다. 그래서 순종, 즉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자신의 자존심을 내버리는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의를 다른 사람 앞에서 할 말도 못하고 굽실거리는 굴욕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창조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
순종과 예의는 창조성을 가로막는 구태의연한 폐단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어떠한 분야에서든 스승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발전과 성공을 위한 기초 자체를 닦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성공에 필수적인 인내와 끈기도 익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분야에서든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스승으로부터 제대로 기초를 배우고 올바른 태도를 익힌 후에야,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 즉 진정한 창조성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신변잡기를 소재로 한 ‘수다쇼’에서 감동과 재미는 물론이고 유익한 정보와 생생한 지식까지 전달하는 ‘강의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능 프로그램들이 다루는 내용도 일반상식부터 고도의 전문지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해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기 위하여, 최근 SBS는 예능국과 교양국을 아예 통합시켰습니다.
결국 이제는 교실의 학생들만 배우는 시대가 아니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평생 공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정보와 지식이 부족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시대가 아니라,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와 지식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순종, 즉 훌륭한 스승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의는 사람들을 속박하고 불편하게 만들기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누리게 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상대방에 대하여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자유와 권리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최근 연이어 터지는 ‘갑들의 수모’를 살펴보십시오. ‘항공기 승무원 폭행’, ‘호텔 주차직원 폭행’, ‘유업회사 영업직원 폭언’ 등, 소위 ‘갑’들이 ‘을’들에 대하여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았을 때,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도 잃게 되지 않습니까? 갑이든, 을이든, 자신이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를 지키지 않을 때, 자신이 기존에 누렸던 자유와 권리까지도 박탈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원하는 사람은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합당한 예의를 지키면, 그 누구보다 자신이 먼저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의 ‘포르니’ 교수는 『예의의 기술』(2011)에서,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 핵심이 바로 예의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복된 인생의 길을 가기 원하십니까?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에 대한 예의부터 가르치십시오.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을 처음 경험하게 되던 밤에,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가르친 것도 ‘순종과 예의’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사무엘상 3:10).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배운 자녀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2. 결단과 실행을 가르치라. (3:8, 15-17)
그런데 40년 전에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요단강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또 다른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의 기적을 일으키시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의 단호한 결단과 과감한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40년 전의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가 먼저 갈라진 후에 홍해를 건넜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맨 앞에서 언약궤를 메고 행진하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들어선 후에야 강물이 멈추었습니다. 다시 말해, 먼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의 결단을 하고 행동을 한 후에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에서 변화시키기 가장 힘든 사람은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바로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지 못하는, 그래서 늘 우물쭈물하며 좋은 기회들을 다 놓치는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차라리 호되게 야단을 치면 변화될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우유부단한 사람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를 입버릇처럼 연발하면서도
결과를 놓고 보면 아무런 실적이나 열매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행하기에 앞서 늘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고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여러분이 기독교계열 방송만 틀면, 언제든지 내로라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주옥 같은 말씀들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즉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성경이나 신학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과감하게 결단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고민만 하지 말고, 과감하게 결단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치십시오. 특히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붙들도록 권면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의 눈 앞에 요단강 같은 불가능한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과감하게 결단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3. 존경 받는 법을 가르치라. (3:7; 4:1-5: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단강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위대하게 높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여호수아 3:7).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높여주셨던 방법은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수아가 말한 모든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말대로 순종하였더니, 무사히 요단강을 건널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한 사람도 여호수아의 권위에 감히 도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 (여호수아 4:14).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여호수아가 지휘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주변의 민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요단 서쪽의 … 모든 왕들이 …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여호수아 5:1).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 요단강 한가운데서 열두 돌을 캐내어 ‘길갈’에 쌓았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존경 받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한 말을 책임지고 이루어내야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한 공기업(전기안전공사)이 ‘주식시장형 인사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일반 기업들은 인사부서에서 직원들의 부서와 직책을 조정하는데, 이 공기업은 각 부서장들에게 함께 일하기 원하는 직원들을 추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인기가 높은 직원에게는 승진을 시켜주며 포상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직원은 따로 분류해 자기계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이 공기업이 이런 제도를 도입한 이유에 대하여, 해당 기업의 사장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부서장에게 부하직원을 직접 고르게 하면 실적은 물론이고
인성과 업무태도가 좋은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이 공기업의 부서장이라면 어떤 직원을 추천하겠습니까? 물론 인간성, 업무능력, 업무태도 등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책임질 줄 아는 성실한 사람을 고를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지도층이 국민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된 주된 이유는 바로 자신들이 했던 말에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심적이고 진실한 사람이라고 해서, 자신의 모든 말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1분, 1초 앞에 벌어질 일도 다 알지 못하는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24일 방글라데시에서, 의류공장들과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선 8층짜리 건물이 무너지면서 약 100명의 사람들이 숨지고 말았습니다.
건물붕괴 사고현장을 수습하던 구조대원들은 이 건물에 깔린 여러 시체들 중에서 한 쌍의 남녀를 발견하였습니다. 자신의 여인을 꼭 껴안은 채 깔려 죽은 남성과 그의 여인을 보며,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숙연해졌습니다. 아마도 이 남성은 이전에 그 여인에게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며, ‘내가 끝까지 너를 지켜줄게’라고 약속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건물붕괴의 순간에도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그의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을 지켜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한낱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말이 실현되도록 보장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후견인과 보증인이 되어주셔야만 우리의 말에 권위와 가치가 생깁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존경 받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들의 후견인과 보증인이 되시도록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들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이곳에 모인 모든 부모님들이 하나님과 자녀들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