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신앙은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것이다 (찬 204)
1. 신명기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가 자신의 생애를 마치기 전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율법을 전달하는 내용을 기록하는 책이다.
이 율법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토대가 되어야 했고,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성패는 바로 이 말씀에 달려있었다. 이후의 구약의 모든 역사는 그것을 보여준다.
2. 신명기는 모세의 회고적 성격의 설교로 시작된다.
모세는 ‘요단 저쪽 숩 맞은 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설교를 시작한다(1). 이곳은 바로 ‘모압 땅’이었다(5). 때는 출애굽 한지 제 40년 11월 초일일이었다(3). 그러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약 2개월 남짓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신명기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3)—을 ‘다’ ‘설명’(5)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한다는 것은 중요하고(행 20:27 참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설교의 기능이다. 신명기를 읽을 때,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부담감을 지닌 사람이(모세) 하는 말을 듣는 회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설교자는 혁신가가 아니라 의사 전달자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런 점에서 모세의 일차적인 역할은 주의 깊게 듣는 것이었다. 이것이 모든 설교자의 의무가 아닌가! 모세는 그 말씀을 수정하거나, 교정하거나, 개정하거나, 개선시키려고 노력해서는 안되었다. 모세가 전한 설교의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3)과 행하신 일(4)이다. 모세의 설교의 목적은 분명했다. 그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한 가지 대조를 발견한다. 사실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이르는 길은 열 하룻길 정도다(2). 그러나 열 하루는 40년이 되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놀라운 대조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헛되이 광야에서 보내게 하였던가! 이제 모세가 전하는 말씀에 대한 백성의 반응도 이런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고 영원한 축복과 저주가 결정할 것이다.
3. 모세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주신 말씀을 회상한다(6~8).
‘자,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 얻어라(8)’. 하나님은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으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다. 모세는 수많은 백성, 특히 불순종하는 백성을 홀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강한 척 하는 대신 자신이 부적절하다고 느끼던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민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차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놀랍다. 모세는 지도자들을 세워서 그들이 자신을 도울 수 있게 하였지만, 최종적인 책임은 홀로 져야 했다. 그는 자기를 돕기 위해 세움 받은 지도자들을 위하여 재판(다스림)의 원리도 세웠었다(16~17). 그것은 공정히 판결하라는 것이며,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재판에 있어서 공정함과 정의는 중요하다. 빈부귀천이 재판의 판결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었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했다. 이것이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태도다.
4. 모세는 또한 그들 앞에 펼쳐진 미래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신명기의 주제는 미래에 맞추어져 있다. 물론 과거의 회상에 대한 모세의 설교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제 곧 들어가 얻게 될 땅인 가나안이라는 미래에 맞추어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두려움의 영역이다. 그러나 신명기는 미래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미래는 단순히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가데스바네아의 반역을 회상한다(19~22). 하나님께서는 올라가 취하라고 하셨으나 백성들은 먼저 정탐을 하자고 모세에게 제안했다. 민수기 13:1은 정탐을 하도록 명하신 것은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본문은 그보다 더 자세한 정황을 설명해준다. 처음에 백성들이 제안한 것을 모세가 하나님께 여쭈어 하나님께서 정탐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었고, 정탐군들은 그 땅이 ‘좋다’고 보고했다(23~25).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는가?
5. 불신앙은 빈곤한 기억력과 관계가 있다(26~33).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이셨는지,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했다면 불순종은 없었을 것이다. 빈곤한 기억력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들에게 예비된 복을 빼앗아 간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을 보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미워하신다고 주장했다(27)! 하나님은 그들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셨다(4:37). 하나님께서는 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시겠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질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사람들의 왜곡된 견해에 귀를 기울였다. 정탐군들은 포도송이를 가지고 돌아왔지만, ‘아낙 자손’의 강성함 때문에 불평하였다(28). 정탐군들은 그 땅이 ‘좋다’고 말했지만 두려움에 가득 차서 그곳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잊어버린 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리였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다(29~30). 그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싸우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돌보시는 아버지를 기억해야 했다(31).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품에 안아 보호하듯이 그들을 안아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신뢰할만한 인도자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다(32~33). 하지만 그들은 그 인도자보다 자신들의 견해를 더 의지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32).
6.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34~46).
하나님은 불신앙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구부 1세대를 다 죽이기로 작정하셨다. 모세도 그들의 불순종과 관련되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순종했었다면 모세가 가데스에 다시 와서 반석을 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민 20).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지적된다(40~46). 하나님은 가라고 하셨지만(21) 그들은 거절했다(26). 하나님께서 그들이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자(35) 그들은 또 가겠다고 고집했다(41). 약속의 땅일 때는 들어가지 않으려 하고 금단의 땅이 되자 다시 들어가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전형적인 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포사이스(P.T.Forsyth)는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길 잃은 어린 아이, 순진한 철부지는 아니라는 것을 잊을 수 없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는 손에 무기를 든 채 붙잡힌 반항적인 반역자들이다.”
7. 신명기가 주는 놀라운 교훈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미래의 문제, 미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신앙의 시금석이다. 성경은 장래의 은혜에 대한 기대를 믿음이라고 말한다. “염려는 내일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오늘의 힘을 빼앗아 갈 뿐이다. 염려는 정서적 에너지의 낭비이자 영적 건망증을 나타내는 슬픈 표현이다.”라고 찰스 스펄전은 말했다. 당신에게 미래는 불확실성과 두려움의 대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베푸실 은혜를 바라보고 기대하게 하는 축복의 영역인가?
8. “하나님 아버지, 저희 삶의 성패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 여하에 달린 것을 알고 믿음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의 모든 말씀과 약속에 따라, 주께서 주실 장래의 은혜를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