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延平) 이귀(李貴)의 자는 옥여(玉汝)로서 기위(奇偉)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기절(氣節)이 활달하여 용감히 말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조그만 절조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한음(漢陰) 이상국 덕형(李相國德馨)ㆍ박공 경신(朴公慶新)ㆍ윤군섬(尹君暹)과 한 마을에서 글동무로 공부했다. 어느 날 한 곳에 모여 점장이 이인명(李麟命)에게 운명을 물었다. 인명은 말하기를,
“이공(李公)이 제일이요 한음(漢陰)이 그 다음이며, 그 나머지도 역시 과거에 급제는 하지만 모두 보통 운명들입니다.”
했다. 이공은 애써 과거 공부에 노력하지 않았으므로 재명(才名)이 가장 쳐졌다. 박공 경신이 나이도 가장 젊고 기세도 가장 날카로와서 이 말을 듣더니, 갑자기 놀라 일어나 손뻑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옥여(玉汝)를 제일이라고 하다니! 무슨 놈의 인명(麟命)이란 말이냐? 너는 점치는 것을 그만 두어라.”
했다. 뒤에 한음(漢陰)은 벼슬이 영상에 올랐으나 나이 겨우 53세에 졸했고, 박공은 가선(嘉善)으로 감사(監司)가 되어 나이 60세가 지났고, 윤공(尹公)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서 나이 겨우 40세에 전진(戰陣)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가선(嘉善)에 이르렀고 나라의 큰 운수를 도와서 정사(靖社)의 원훈(元勳)이 되었다. 그리고 양전(兩銓)의 판서를 거쳐 지위가 부원군에 이르는 등 풍운(風雲)을 잘 만나 공명(功名)이 혁연하였고 나이 77세로서 졸했다. 두 아들도 군(君)에 봉했는데 한 아들은 통정(通政)이 되었고, 자손들이 번성하여 높은 벼슬아치가 문중에 가득하였다. 참으로 세상에 드문 큰 운명이었으니, 연평(延平)이 매양 박공의 일을 말하면서 웃었다.
또 박공건(朴公楗)은 기질이 순후하고 풍의(風儀)가 질박하며 마음 쓰는 것이 참되었는데, 지금 한평군(韓平君) 이공 경전(李公慶全)은 젊어서부터 호준(豪俊)하고 문명(文名)이 몹시 자자하여 당시의 재주 있고 이름 있는 선비 유극신(柳克新)ㆍ김시헌(金時獻)ㆍ백진민(白振民)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협기(俠氣)를 부리며 세상을 조롱하고 박공을 조소하여 그로 하여금 못견디게 하였다. 박공은 항상 우울하고 괴로워하였으나 역시 그들과 서로 따지려 하지 않았다. 마침 성균관(成均館)에서 글을 시험하는데 박공이 합격한 일이 있었다. 이때 아계 상국(鵝溪相國)이 태학사(太學士)로 있었는데, 비로소 박공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그 아들 한평군(韓平君)에게 이르기를,
“박건은 반드시 재상이 되고 수와 복도 역시 원대할 것이다.”
했다. 그러나 모든 나이 젊은 동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심하게 그를 모욕하고 업신여겼다.
뒤에 유극신ㆍ백진민 두 사람은 모두 일찍 죽고, 김공(金公)은 참판이 되어 나이 50세에 죽었는데, 박공은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책훈(策勳)되어 군(君)을 봉받았으며, 상의 은혜와 사랑이 날로 두텁고 기세가 몹시 퍼졌으며, 수도 또한 70세까지 누렸다. 대겨 연평(延平)의 많은 공과 높은 의열(義烈)과 충직(忠直)한 기개는 박공이 따라갈 수가 없는 터이지만, 티끌 속에 섞여 있을 적에 남이 알아보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식자(識者)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운명을 타고난 것은 처음에 재주나 모양으로 구별할 수가 없다. 재주 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잘 되기를 기약할 수는 없고 모양이 못난 자로서도 역시 수와 지위를 누리는 것이니, 하늘의 도는 아득하고 멀어서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서는 미리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재주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참판 정협(鄭協)의 자는 화백(和伯)이니 의정(義政) 언신(彦信)의 아들이다. 천성이 어질고 두터우며 국량이 크고 원대해서 평생에 덤벙대는 말이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하는데 있어서 일단의 한덩어리 화한 기운뿐이었다. 어렸을 때에 길거리에 비렁뱅이가 춥고 얼어서 거의 얼어 죽게 된 것을 보고 그는 곧 입었던 도포를 벗어서 주었으며, 그의 친구 정자(正字) 최인범(崔仁範)이 죽었는데 곤궁해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자, 그는 아버지의 초헌(軺軒)에 깔았던 호피를 부의(賻儀)로 주어서 관(棺)을 사게 했으니, 이것은 역시 맥주(麥舟)의 의였다. 임진왜란에 식구들을 데리고 난리를 피하여 한 나루에 이르렀다. 뱃사람은 높은 뱃삯을 달라고 하는데, 배를 댄 저편 언덕에는 떠도는 사족(士族)이 늙은 부모를 모시고 강변에 앉아 종일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이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뱃사람을 불러 즉시 행장 속에 있는 옷을 꺼내서 모두 주고, 그 사족의 뱃삯을 대신 지불하여 먼저 그 사족을 건너보낸 뒤에 비로소 자기 식구들을 건너게 했다. 뱃사람이 이것을 의리 있게 생각하여 그 값을 도로 주려 했으나, 공은 이것을 받지 않았다. 그 사족은 전혀 서로 알지 못하는 처지이고 또 뱃삯을 대신 준 것도 모르다가 뱃사람이 말해서 비로소 놀라고 탄식하여 감읍했다고 한다.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의리와 남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이 타고난 그대로이고, 조금도 지어서 함이 없는 것을 더욱 따를 수 없는 일이었다.
-주) 맥주(麥舟) : 보리를 실은 배인데, 상사(喪事)를 돕는 일, 즉 부의(賻儀)를 뜻함.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아들 요부(堯夫)를 시켜 고소(姑蘇)에서 보리 5백 석을 운반해 오게 했다. 요부가 배에 보리를 싣고 단양(丹陽)에 이르렀을 적에, 범중엄의 친구 석만경(石曼卿)을 보았는데, 석만경은 돈이 없어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어 그 보리를 모두 주고 빈 배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이말이 전하여 부의를 뜻하게 되었음.
또 글에 능하고 더욱이 사부(詞賦)를 잘해서 을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뽑혔고 또 정시(庭試)에 장원하여 직부(直赴)로써 과거에 급제하여 곧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제수받았고, 화려한 벼슬을 거쳐 여러 번 삼사(三司)의 장관에 배수되었다. 나와의 교분은 평소부터 두터워, 병오년(1606, 선조 39) 내가 아버님 상사를 김포(金浦)에서 당했을 때 공은 극력 초상을 처리하여 장례를 마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우리 온 집안이 병에 걸리자, 약을 주선하여 진심껏 구호하여 강을 사이에 둔 40리 길을 두 번이나 와 보는 등, 약관 때부터 맺은 교분이 끝까지 시들지 않았다. 그의 숙덕(宿德)과 중망(重望)이 한 시대에 몹시 자자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공보(公輔)로 기약했는데,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자 갑자기 풍병에 걸려 이를 고치려고 과천(果川)에 있는 농사(農舍)로 물러가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고치지 못하고 나이 겨우 51세에 졸하니, 조야(朝野)가 모두 놀라고 슬퍼했으며, 길가는 사람들까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어진데도 수를 누리지 못하고 지위가 그 덕에 만족하지 못했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공에게 한 아들이 있으니 이름은 세미(世美)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역시 화려한 벼슬을 거쳤는데, 술을 즐겨서 병에 걸렸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내가 주청사(奏請使)로서 바다를 건너 중국 서울에 갈 때, 정군 세미(鄭君世美)는 당시 장연 부사(長淵副使)로서 봉산(鳳山)에 와서 나를 전송해 주었는데, 술병이 이미 고질이 되어 겉모습이 달라졌으므로, 나는 몹시 근심하여 은근하게 술을 삼가라고 경계했다. 떠날 때, 그는 10리 밖까지 따라 나와서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내가 돌아올 때 정주(定州)에 이르러 비로소 그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몇 달 동안을 슬퍼하고 마음 아파했다. 이제 들으니 그의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고 한다. 이것으로서 착한 사람은 반드시 뒤가 있다는 것을 알겠으며, 천도(天道)는 어둡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세미(世美)의 아들은 유(攸)이다.]
-주) 직부(直赴) : 전강(殿講)ㆍ절일제(節日製)ㆍ통독(通讀)ㆍ외방별과(外方別科) 등에 합격한 사람이 곧 문과(文科)의 복시(覆試) 혹은 전시(殿試)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일.
세종 대왕(世宗大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여러 대군(大君)ㆍ왕자(王子)들과 함께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열었다. 이때 마침 과거가 있어서 먼 지방의 선비들이 연이어 강을 건너느라고 강어구가 가득 찼다. 세종은 그중 한 유생을 여러 사람 속에서 바라보고 사람을 시켜 지시하기를,
“저 색깔 있는 옷에 어떤 모양을 한 사람을 네가 가서 불러오너라.”
했다. 그 사람은 과연 부름을 받고 와서 뵈었다. 세종은 그를 빈례(賓禮)로 대접하고 그 성명과 주소를 물었다. 그는 현석규(玄錫圭)라고 하고 집은 영남(嶺南) 아무 고을에 있다고 했다. 세종은 간곡한 말을 해 주고 음식을 잘 차려서 대접했다. 이때 그 사람은 먼길을 발섭(跋涉)해 오느라고 의관이 남루하고 형용이 수척하매, 자리에 가득한 사람들은 모두 괴이히 여기고 의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세종은 좌우를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이 좌중에 혹 처자(處子)가 있는가?”
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성명(聖明)을 믿으므로, 대답하기를,
“손아(孫兒) 서원군(瑞原君)에게 처자가 있어 바야흐로 혼인을 구하는 중입니다.”
했다. 세종은
“만일 아름다운 사위를 얻으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하니, 효령(孝寧)은,
“문호(門戶)가 서로 대등하지 못합니다.”
했다. 그러나 세종은,
“옛날부터 영웅이나 호걸의 선비들이 초야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 선비집 아들과 뜻을 결정하여 정혼하도록 하라.”
했다. 뒤에 서원군(瑞原君)이 살펴 물어보니 그 사람은 바로 영남의 거유(巨儒)로서 재명(才名)이 한창 떨치고 있던 터였다. 드디어 맞아다가 사위를 삼았다.
현공(玄公)은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淸顯)의 요직을 거쳐 당시의 명경(名卿)이 되고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렀다. 세종이 백 보 밖에서 우연히 한 번 바라보고서 통달한 사람과 귀한 손님을 알아 봤으니, 대성인(大聖人)의 식견이란 남보다 훨씬 뛰어난 법이다. 효령(孝寧)은 바로 나의 외선조(外先祖)이고, 찬성(贊成) 이직언(李直彦)은 효령의 직손이기 때문에 매양 이 일을 말하면서 감탄하고 이상해 했었다.
정상국 창연(鄭相國昌衍)은 본래 강직하고 발랐다. 그가 장령(掌令)이 되었을 적에 홍문관 교리 허명(許銘)이 갓 국혼(國婚)을 하고 기세가 한창 등등하였다. 그 아들 철(㬚)은 성질과 행동이 제멋대로여서 날마다 무뢰배와 함께 술을 마시고 기생을 끼고 놀면서 남을 때려 상처를 입히는 등 민간 사람을 해치므로 나라 사람들이 괴롭게 여겼다. 그래서 정상(鄭相)이 아전을 내어 잡아다가 중하게 형벌과 심문을 가하니, 어지럽던 무리들이 흩어져 서울 안에 잠잠해졌으니, 지금까지도 정공(鄭公)의 풍도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래에 세력이 있는 집 자식들이 대낮에 횡행하여 남의 목숨을 해치고 조정의 진신(搢紳)들을 욕보여 광종(狂縱)한 행동이 허철(許㬚)보다도 배나 더한데 대관(臺官)이 된 자가 모두 위축되어 한 사람도 말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법과 기강이 땅에 떨어지고 풍속이 날로 망가지니, 세도(世道)가 어찌 여기에 이르지 않으랴?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