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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절 사 : 임진왜란 때 순절한 남원양씨 3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소 재 지 :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동 143번지
제 향 일 : 춘계(음력 2월 하정일) 추계(음력 8월 하정일)
문 화 재 : 부산시 문화재 자료 제1호
남원양씨 3위는 양지, 양조한, 양통한으로 모두 양성지의 후손이며 역사에 충신으로 기록되었다. 양조한의 손자인 양부하가 중국의 사신 심유경과 도모하여 풍신수길을 독살하였다는 기록이 염헌집, 연려실기술, 성호사설 등에 실려있는데 이로인해 왜란이 일찍 끝이 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의 훈도(訓導)를 지냈는데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절의(節義)가 있었다. 왜란을 당하여 교수 노개방(盧盖邦)과 함께 향교의 위판(位版)을 받들고 부사 송상현(宋象賢)을 따라 순절하였고 호조정랑에 증직되었으며 양조한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삼절사와 충렬사에 위패를 봉안하였고 송공단(제단)에 추향하였다.
충 렬 사 : 임진왜란 때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소 재 지 : 부산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
제 향 일 : 5월25일
문 화 재 :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7호
송 공 단 :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서 순절하신 순국선열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
소 재 지 :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229-78번지
제 향 일 : 4월15일(음력)
문 화 재 : 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11호
양조한의 동생이며 임진왜란 당시 창녕 화왕성에서 곽재우 장군과 함께 나라를 지켰고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양통한의 형 양조한과 양조한의 아들 양황은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양황의 아들 양부하는 12살의 어린나이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39세때 고국으로 돌아왔다. 양통한은 양부하가 형 양조한의 손자임을 확인하고 재산과 노비를 주고 장가를 보내서 살게 하였다. 양통한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삼절사에 위패를 봉안하였고 문천회맹에 참여하고 경주성을 회복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임란창의공원에 추향하였다.
임란창의공원 : 문천회맹에 참여한 임란의사의 근본정신을 기념
소 재 지 : 경주 황성공원
제 향 일 : 6월 9일
왕의 친위부대인 겸사복을 역임하면서 무과에 급제하고 적성현감을 지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삭녕군수가 되셨다. 삭녕군이 일본에게 포위당하자 결사항쟁 하실 것을 결심하셨고 본인의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기 때문에 차후에 시신을 수습할 때 [증표가 될 만하다]하시며 결의를 다지시고 순절하셨다. 1796년(정조20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양지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표절사와 삼절사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표 절 사 : 양지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는 사당
소 재 지 : 충남 청양군 운곡면 모곡리 365번지
문 화 재 :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54호
해운대구 반송동에 위치한 삼절사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양씨 일문(梁氏 一門) 세 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세 분 중 양지(梁誌, 1553~1592)는 경기도 파주 사람으로 적성현감(積城縣監)을 거쳐 경기도 삭녕군수(朔寧郡守)로 부임하여 임진왜란 때 성을 지키다 순절하여 이조판서에 증직(贈職)되었으며, 1839년 삼절사 건립 후 합사하였다.
양조한(梁潮漢, 1555~1592)은 동래향교 유생으로 동래향교에 모셔진 성현들의 위패를 동래읍성 내 정원루(靖遠樓)에 봉안한 후 순절하여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증직되었고, 양통한(梁通漢, 1559~?)은 양조한의 아우로 경주의 문천회맹(蚊川會盟), 팔공산회맹(八公山會盟)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의병활동 중 순절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들 삼공신(三功臣)의 넋을 위로하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약 300여 년간 남원 양씨 문중 및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모셔왔으며, 향토방위를 통한 호국정신과 당시의 사회윤리관 확립을 위한 정신사적 측면, 그리고 이를 기념하는 현장인 점을 감안하여 경역 전체를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1839년 동래부사 이명적(李明迪)에 의해 약 400평의 경역에 사당 1동, 재실(歲寒堂) 1동, 관리사 1동의 목조건물이 건립된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1990년 현재의 경역으로 정화하였으며, 2010년~2012년에는 효율적인 문화재 보존과 원활한 제향 봉행을 위해 부산시의 지원으로 건물 보수 및 사당공간을 확장․정비하였다.
지금도 매년 음력 2월과 8월 말정일(末丁日)에 양씨 문중과 많은 유림(儒林)들이 참여하여 제향을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때 12살에 왜병의 포로가 되었고 39세에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93세까지 장수한 남원양씨 梁敷河(양부하)의 삶과 도망가는 倭軍(왜군)을 완전히 제압하고자 했던 李舜臣(이순신)將軍(장군)의 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機張 靑光里(기장 청광리)는 현재 부산 노포동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부산 문화재 1호인 삼절사는 임진왜란의 충신 남원양씨 3위(양지, 양조한, 양통한)를 모신 사당이며 양부하는 삼절사 3위중 1위인 梁潮漢(양조한)의 손자이다. 梁敷河(양부하)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병에게 사로잡혔고 할아버지 梁潮漢(양조한)과 아버지 梁鴻(양홍)은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셨다. 그러나 梁敷河(양부하)는 양반 자제이며 총명하다는 이유로 풍신수길의 옆에서 수발을 들게 되었다.
어찌보면 일본에서 안정된 정착생활이 보장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나 열두살의 梁敷河(양부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분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나이 이었다. 원수의 수령을 눈 앞에 두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양부하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선의 사신과 중국의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양부하는 풍신수길에게 청하여 사신을 만났다 이때의 중국 사신이 심유경이다.
이런 우격다짐으로 심유경이 협상을 진행하자 고니시는 심유경에게 대동강을 구분하여 조선을 분할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 속에서 심유경은 협상을 임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벌었고 50일 동안 휴전을 이루어냈다. 물론 이 당시에는 이순신과 조선의 의병이 승전하기 시작하여 후방이 불안한 왜병이 북진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였지만 왜병은 조선의 어가를 눈앞에 두고 50일의 시간을 소모해 버린 것이다.
실제 그 당시 명군의 화력부대는 남방에 배치되어 있어 조선으로 파병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는데 심유경이 입담으로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군이 도착하여 평양성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도 황제가 강화를 허락하였다고 거짓 정보를 보내고 협상하러 나온 왜장을 붙잡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던 것이다. 한편 고니시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계속 강화를 제의하였고 이에 심유경이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협상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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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fact(팩트)이다. 여기서 부터는 양부하의 구전에 의존한 사건이다. 그 구전의 내용이 임상원의 염헌집,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이익의 성호사설, 아오나기의 풍태합조선역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로 양부하는 심유경과 친해지고 풍신수길의 독살을 모의하였다. 사건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1) 심유경에게 곡을 하게 하고
2) 양부하가 풍신수길에게 알렸고
3) 비밀통로를 통해 풍신수길과 심유경을 만나게 하였으며
4) 그 때마다 심유경은 진정제 처럼 환약을 먹고 풍신수길을 궁굼하게 하였다.
풍신수길의 건강상태는 양부하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환약의 효용성으로 풍신수길을 현혹하였다. 심유경은 풍신수길에게 장시간 동안 배를 타고 와서 습기에 병이나서 먹는 약이라고 하였고 풍신수길도 얼마전까지 동경에 있다 배를 타고와서 몸이 좋지 않았으므로 약의 효용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되었다. 풍신수길은 심유경이 먹던 양을 반 쪼개서 심유경이 먼저 먹게 하였고 안전함을 확인한 후 나머지 반쪽을 자신이 먹었다. 환약을 나눠 먹는 일이 잦아지니 풍신수길은 점점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심유경은 돌아가서 해독약을 즉시 복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당시 또 하나의 fact(팩트)가 있다. 심유경은 명나라로 돌아가서 살 수 없는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그 내용이 발각되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풍신수길은 협상에서
명나라 황제의 딸을 자신의 첩으로 줄 것과 조선을 분할하자고 제의 하였다. 대륙 침략의 목적을 알고 있는 명나라가 이러한 협상을 받아들일리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심유경은 이러한 협상 내용을 조작하였다.
심유경은 풍신수길이 일왕에 봉해줄 것과 조공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조작하였다.
심유경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은, 풍신수길의 곁에서 끝까지 눌러 살거나, 풍신수길을 독살하고 자신의 책략을 밝히는 길 뿐이었다.
하지만 심유경은 자신의 팩트를 밝히지 못 하고 명나라 스파이 사세용에게 협상조작 사건이 발각되어 역사무대에서 사라졌고 그가 사라진 2개월 후 풍신수길이 죽었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은 양부하만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경을 재 구성해 보면 상황은 이렇다.
양부하와 심유경은 풍신수길을 독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심유경은 풍신수길을 죽이지 않고서는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다. 또한 심유경은 조선을 분할하는 협상을 진행하였으니 조선에서 보면 만고의 역적인 셈이다.이러한 심유경을 양부하가 변호하고 있다. 풍신수길을 독살한 사건은 엄청난 사건임에도 양부하는 출세와 권욕에 어떠한 목적도 없었고 그 자손들도 입신을 위해 이 사건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양부하는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을 95세가 되어서야 세상 밖으로 전했다. 이러한 상황은 팩트일때 가능한 구도인 것이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양부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양부하는 12세에 일본에 끌려가서 39세에 귀국하여 문자를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양부하는 자신의 목격담을 구전으로 전했고 임상원이 기록하였다. 당대에 강수은이라는 유학자도 일본으로 잡혀갔다 귀국하였는데 강수은은 목격담을 문집으로 남겼다. 강수은의 문집과 양부하의 구전을 대조해 보면 전하고 있는 사건의 시간과 사람들, 지명이 모두 일치하여 양부하의 구전은 신뢰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다만 풍신수길의 독살사건은 양부하만이 진실을 알 수 있으나 밤낮으로 풍신수길의 곁을 양부하가 지켰으니 양부하의 목격담은 믿어진다고 기록하였다.
심유경은 풍신수길을 독살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협상조작 사건을 저질렀고 명나라 스파이 사세용에게 그 내용이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조선의 임금 선조는 사세용이 너무 고맙다. 조선의 분할을 막아준 은인으로 믿는다. 그리고 사세용은 심유경을 대신하여 전후 협상을 주도하였다.
심유경이 처단된 2개월 후 풍신수길이 죽었다. 풍신수길의 최고 경쟁자 도쿠가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막부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조선에 건너온 왜장들은 본국에서 자신의 영지를 보존해줄 풍신수길이 죽은 것을 안 이상 도쿠가와 세력이 움직이기 전에 빨리 귀국해야 한다. 그래서 7년왜란이 종결된 것이다. 그러니 임진왜란의 종결은 양부하로 부터 비롯된 것이다.
일본군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조용히 돌려 보내면 우리의 피해도 줄일 것인데 이순신은 마지막 불씨를 꺼고자 했다. 하지만 사세용은 왜장 사스마와 밀약을 하고 퇴로를 열어준다. 사스마 군이 일본의 퇴로를 열었다. 그 과정에 조선의 영웅 이순신이 죽었다. 그리고 왜장 사스마는 일본의 영웅이 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사스마는 역시 도쿠가와와 대결하였다. 사스마 가문이 패하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가문은 이순신을 죽인 일본의 영웅 사스마 가문을 멸문시키지 않았다. 사스마의 아들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조건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년이 지났다. 사스마 가문은 드디어 도쿠가와 가문에게 복수를 한다. 사스마 가문이 일본의 메이지유신 시대를 연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종결하고 천왕시대를 연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도자 사스마. 가문 이순신이 죽으면서도 끄고자 했던 그 불씨가 결국 다시 살아나
정한론을 태동시켜 조선을 멸국시키고 대동아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심유경을 처단한 사세용. 사세용을 신뢰한 조선의 임금 선조. 그들이 대동아 비극의 불씨를 살렸고, 역사는 또 그렇게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양부하. 대동아 비극의 불씨를 완전히 끄고자 했던 이순신의 행적을 깊은 마음으로 우러러 칭송한다.
일찍이 동래 사람 양조한(梁朝漢)과 통한(通漢)이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죽었는데 조한의 손자 부하(敷河)는 그때 나이 12세였다. 사로잡혀 대마도로 실려 가서 목창(木槍)을 세우고 그 끝에 쓰기를, “조선 양반의 자제로 관백에게 헌신하겠다.”하였다. 도주(島主)가 처음에는 도망병인가 의심하다가 그가 쓴 것을 보고는 부하를 차례로 여러 섬에 전하여서 수길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수길이 부하를 자세히 보고는, “조선 아이도 일본 아이와 같구나.” 하고 통역하는 왜를 돌아보고 부탁하기를, “네가 이 아이의 스승이 되어 일본 말을 가르쳐라.통달하지 못하면 너를 목벨 것이다.” 하니, 통역관이 두려워하여 촛불을 밝히고 밤을 새워 부하를 가르치면서, “네가 만약 힘쓰지 않으면 나와 네가 함께 죽게 된다.” 하였다. 이튿날 수길이 시험조로 부하를 불렀더니 부하가 잘 대답하므로 수길은 크게 기뻐하였다.
석달 동안 배워서 일본 말을 다 알자, 수길은 사랑하여 항상 좌우에 가까이 있게 하였다. 수길은 삼층 병풍을 뒤에 치고 높이가 한 자를 넘는 자리에 머리를 틀어 뭉치고 다리도 뻗고 앉았는데 왼편에는 포(砲)와 검을 두고 오른편에는 활과 화살을 두었으며 위에는 창 따위를 걸어 두었다. 그때 군사를 일으켜 일이 번거로웠는데도 수길은 할 일이 없었다.곁에 근신 다섯 사람이 있어서 한가할 때면 옛 일을 이야기하고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수길에게는 다섯 명의 계집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다가 군사를 일으키던 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이 수뢰(秀賴)였다. 《간양록(看羊錄)》에는, “수길의 근신이 수길의 계집과 간통하여 낳았다.”고 하였다. 병신년 가을에 부하는 우리 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수길에게 청하여 다행히 만나 보았는데, 중국 사신은 심유경이었다.
왜가 사신을 객관에 가두고 군사를 시켜 매우 엄중히 지키고 있었다. 부하가 중국 사람의 곡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수길에게 알렸더니, 수길은 곧 음실(蔭室)을 만들고 객관에서 궁궐로 오게 하여 유경을 맞아들여 보았다.유경은 좌석에 앉아서 환약 한 개를 먹었는데, 수길과 두 번째 만났을 때에도 약을 먹으므로 수길이 괴이히 여겨 물으니 유경은, “만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오느라고 습기에 상해서 병이 났으므로 항상 이 약을 먹었더니 기운이 넘치고 몸이 가뿐하오.” 하였다. 수길이, “거짓이 아니오?” 하니 유경이, “감히 거짓말을 하겠소.” 하였다. 수길이, “나도 앞서 섬에서 돌아왔더니 기운이 줄어든 듯한데 먹을 수 있겠소?” 하자 유경이, “좋지요.” 하고 곧 주머니 속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수길이 부하를 시켜 가져다가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보니 환약에 무슨 글자가 적혀 있었다. 수길은, “글자가 어찌 이렇게 작은가.일본에서 큰 글자를 잘 쓰는 것만 못하다.” 하면서 품속에서 이쑤시개를 꺼내어 그 약을 반으로 갈라 유경에게 주면서, “함께 맛보고 싶소.” 하였다. 유경이 받아서 삼키고, 한참 뒤에 목을 움츠리고 팔을 펴서 몸이 편안해지는 듯한 형상을 보이니 수길이 그제서야 입에 넣고 물을 찾아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도 유경을 만나서 환약 한 개를 얻어 처음처럼 나누어 먹었는데, 그 약은 매우 독해 사람의 몸을 몰래 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유경은 객관에 돌아가서 필시 다른 약을 먹어서 그 독기를 내리게 하였을 것이다. 수길은 이로부터 사지에 윤기가 없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몸이 말라서 의원에게 보였으나 효험이 없고, 침을 놓아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수길이 괴상하게 여기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진액이 없을 수 있는가. 내 뜸을 뜨리라.” 하고, 드디어 내실에 들어가서 첩들에게 쑥을 붙이게 하다가 갑자기 모로 누워 웃으면서, “내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밖에 명령하여 말꼬리 두어 웅큼과 깨끗한 물 한 독을 들여오게 하였다가 죽거든 상을 알리지 말고, 배를 갈라서 창자를 들어내고 오장육부를 씻은 다음 말꼬리로 꿰매어서 시체를 술독에 담그게 하라.” 하였다.
첩들이 그의 말대로 하고, 일이 있으면 함께 의논해서 결정하였다. 몇 달이 되어서는 냄새가 심하여 밖에까지 풍기므로 첩들이, “끝까지 숨기지는 못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상을 발표하였다. 수길이 내실에서 거처하게 된 뒤부터는 부하가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이 일은 문지기에게서 들은 것이다. 수뢰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염헌집(恬軒集)》의.t;양부하전.에는 “부하의 나이 39세 되던 기미년에 돌아왔고 신사년에는 이미 95세였는데 내가 직접 부하에게서 들은 것이다.” 하였다.
양부하(梁敷河)는 동래(東萊)사람인데 임진왜란 때에 사로잡혀 일본에 머무른 지 27년 만에 돌아와 95세에 죽었는데, 당시의 일을 모두 목격하여 소상히 알았다.근세에 판서 임상원(任相元)이 그 말을 기록하여 전기(傳記)를 지었는데 《염헌집(恬軒集)》 가운데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부하(敷河)는 나이 12세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양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관백(關白)에게 바쳐졌다. 이때에 관백 수길(秀吉)은 일도(一島)로 옮겨 성을 쌓고 궁실을 수선하며 군사를 뽑아 조선을 침략하는 중이었다.
수길이 익히 보고, “조선 아이가 일본 사람과 흡사하다.” 하고, 역관에게 일본말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3개월 만에 능숙하였다.수길의 동정을 살펴보니, 수길은 등 뒤에 3층 병풍을 둘렀고 방석의 높이는 1척(尺) 남짓하며 상투를 짜고 걸터앉았는데, 좌편에는 총과 칼, 우편에는 활과 화살을 나열하고 위에는 창 등속을 걸어 놓았다.
이때에 전쟁이 일어나 일이 번잡하였으나 수길은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근신(近臣)을 시켜 옛날 이야기를 하게 하고 손뼉을 치며 즐겼다. 그리고 부하가 천인이 아님을 알고 각별히 사랑하여 항상 좌우에 있게 하였다.부하가 우리 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수길에게 간청해서 한번 만나보았더니, 중국 사신은 심유경(沈惟敬)이었다.
왜인들은 심유경을 객관(客館)에 가두고 엄중히 수직하였는데, 부하가 중국 사신의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 수길에게 보고하니, 수길은 객관에서 궁실에 이르기까지 음실(蔭室)을 만들도록 한 다음 영접하여 만나보았다.중국 사신은 자리에 앉은 후 환약 한 개를 꺼내어 먹었다. 재차 회견할 때에도 또한 환약을 먹으니, 수길은 괴상히 여겨 물었다. 사신은, “바다를 건너올 때에 습기로 인하여 몸이 불편하므로 항상 이 약을 복용하는데 이 약을 먹으면 기운이 솟고 몸이 경쾌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수길은, “거짓말이 아닌가?” 사신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소.” 하니, 수길은, “내가 일전에 경도(京都)에서 돌아와 몸이 매우 피곤한데 나도 복용하면 어떻겠소?” 사신은, “좋습니다.” 하고, 드디어 주머니에서 환약 한 개를 꺼내어 주니, 수길은 반을 쪼개 주면서, “그대와 함께 나누어 먹으려 하오.” 하였다. 사신이 받아서 삼키니 수길이 한동안 눈여겨보다가 그가 팔뚝을 펴며 기운을 내는 모양을 보고 비로소 입안에 넣고 물을 마셨으며, 다음날 아침에도 또 사신을 만나보고 환약 한 개를 구하여 나누어 먹었다.
대개 이 약 가운데에는 독약이 들어 있는데, 사신은 객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해독약을 복용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수길은 사지가 파리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심했는데, 의원을 청하여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고 침으로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으니 괴상히 여겨 말하기를, “어찌 산 사람으로서 혈액이 없을 수가 있느냐?” 하였다. 또 희첩(姬妾)을 시켜 약쑥으로 뜸을 뜨다가 홀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겠다.” 하고, 여러 희첩에게 유언하기를, “말총과 맑은 물을 준비하였다가 내가 죽거던 비밀에 붙여 발상(發喪)하지 말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오장ㆍ육부를 깨끗이 씻은 후에 다시 말총으로 꿰매고 시체를 술 독에 담그라.” 하였다. 여러 희첩들은 이 말을 좇아 문병하는 자가 있으면 다만, “약간 차도가 있다.”고 대답하고, 일이 있으면 여러 희첩들이 상의하여 결정하였는데, 사취(屍臭)가 밖에 풍겨나감에 미쳐 대신들이 비로소 이를 깨닫고 문지기에게 물어서 알게 되었다.
그 아들 수뢰(秀賴)는 이 때에 나이 겨우 7세이었으므로 대신(大臣)인 가강(家康)과 휘원(輝元)이 수뢰를 도와 정사를 보좌하였으며, 일본을 둘로 나누어 각기 33주(州)씩을 차지했으니, 가강은 동쪽을 주관하고 휘원은 서쪽을 주관하였다. 각기 그 성으로 돌아갈 때에, 큰 일이 있으면 관백(關白)의 처소인 대판성(大阪城)으로 모여 결정하기로 약속하였으며, 부하는 휘원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휘원의 막하(幕下)에 모승(謀僧) 안국사(安國寺)가 있었는데 휘원을 달래여 말하기를,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청컨대 군사를 일으켜 자웅(雌雄)을 결정하여 이긴 자가 임금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7일 간을 연달아 역설하니, 휘원이 마침내 이 말을 따랐다.이에 각기 33주의 군사를 이끌고 관원(關原)에 들어서 회전(會戰)하게 되었다. 휘원의 아래에 한 부장(部將)이 있었는데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하여 온 나라가 꺼려했으니, 곧 살마주(薩摩主) 의홍(義弘)이었다.
10월 14일 회전하기로 약속했는데, 가장이 의홍에게 글을 보내어 이(利)로써 달래니, 의홍이 받아들여 내응(內應)하기로 약속하였다.싸움이 바야흐르 어울리자 의홍이 서군(西軍)의 진영 뒤로부터 포를 쏘고 이에 가강이 여러 군사를 독려하여 진격하니, 서군이 대패하였다, 가강이 드디어 휘원과 안국사 및 주모자를 사로잡아 휘원은 석방하고 변란을 주모한 두 사람을 참수(斬首)했으며, 휘원은 3주(州)를 봉해 주었다.이에 부하가 휘원에게 환국할 것을 청하니, 휘원은, “내가 강토를 깎이고 식록이 적어 족히 양사(養士)할 수 없다.” 하고, 허락했으며 또한 노첩(路帖)을 주었다. 부하가 이에 길을 떠났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남녀 80여 인을 데리고 뱃길로 대마도에 다다라 도주(島主)에게 말하여 고국으로 돌아왔으니, 이때에 나이 39세였다.당시의 전쟁과 풍속을 모두 목격했으나 문자를 몰랐기 때문에 그 연ㆍ월ㆍ인명ㆍ지명을 모두 일본어로 써서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강수은(姜睡隱)이 저술한 《간양록(看羊錄)》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은(睡隱)도 또한 포로로서 일본에 머물러 있던 사람인데, 한 사람은 문자로 쓰고 한 사람은 언어를 썼으나 서로 기필한 바 없이 앞뒤가 부합하니, 어찌 믿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오직 독환(毒丸)의 일에 있어서는 달리 본 자가 없으니, 이는 외부에서 살펴서 알 일이 아니요, 밤낮으로 친압했던 부하가 정녕히 마음에 기억하여 잊지 않았으니, 아마도 허황한 말은 아닐 것이다.이로써 생각하건대, 심유격(沈遊擊)이 우리나라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마침내 원통하게 극형을 당했으니 더욱 슬픈 일이다. 당초에 심유격이 평양에서 왜적과 땅을 그어 약속을 정하여 50일 동안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용만(龍灣)에 있는 대가(大駕)는 아마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을 것이요, 왜적이 경성에 웅거했을 때에 심유격이 행장(行長)을 속여, “명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호서(湖西)로부터 너희들의 돌아갈 길을 끊어버리겠다.” 하였으므로 왜적이 이에 남쪽으로 내려갔으니, 이 말이 아니었으면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며, 수길이 죽은 후에 부산에 있던 왜적이 철수해 돌아가고 나라가 비로소 평온했으니, 이 또한 독환이 공적을 이룬 것이다.
다만 수길이 죽기 전에 심유경이 먼저 형벌로 죽었으니, 이렇게 원통할 수가 없다. 이 일이 심유경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군사기밀은 비밀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누설되면 큰 손실이 있기 때문이었다.만약 부하가 일찍이 돌아오고 심유경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를 빙자하여 공훈을 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겠는가? 이제 염헌(恬軒)의 기록한 바로 인하여 남은 뜻을 밝히고 석성(石星)과 심유경의 억울한 혼령에게 애도하는 바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년)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함께 전국 3영걸로 불리우는 무장, 정치가, 다이묘(大名)이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이다. 덕천기에 오사카 성의 그림을 보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 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천민출신 삭발승 탱초가 중국 황제가 된 주원장이 있었다면, 일본에서는 단연코 천민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들 수 있다. 그의 동상은 오사카성 천수각 남문 입구 앞 풍국신사(豊國神社)가 있는데, 이 신사는 이른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기리는 신사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이치 군(愛知郡) 나카무라(中村)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섬겼으며, 오다 가문 안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가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죽자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돌아와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역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하고,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해 그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그 후, 오사카 성(大坂城)을 쌓았으며 관백(関白),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임명되었다. 또,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아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데 이바지 하였다. 태합검지(太閤検地)와 가타나가리(刀狩)라는 정책을 펴 일본 국내를 안정시켰지만, 조선 침략 전쟁인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과오도 범했다. 임진왜란 중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죽여 후계를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주었지만, 얼마 안 있어 죽음을 맞이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사는 농민 출신이라고 알려진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과 어머니 나카(なか)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이 전사한 후, 어머니 나카는 지쿠아미(竹阿弥)와 재혼하였지만, 양아버지와 히데요시의 관계는 험악하여 언제나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히데요시는 집을 뛰쳐나와 무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스루가 국으로 향했다고 한다. 7세 때, 아버지 야에몬과 결별하고 8세에 고메이지(光明寺)에 가 불문에 입적하지만 곧 뛰쳐나왔고, 15세에 망부의 유산 일부를 가지고 집을 나와 방랑했다고 한다.
덴분 23년(1554년) 무렵 오다 노부나가의 고모노(小者) 로서 일한다. 기록에 보면 그는 노부나가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잔일을 도맡으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선조실록에는 그가 노부나가에게 고용되기 전에 그의 행차 앞에 옷을 벗고 드러누워 있었는데 부하들이 죽이려는 것을 노부나가가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으니, "도저히 제가 가난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노부나가가 그에게 변소지기 일을 시켰더니, 그가 청소한 변소에서 냄새는커녕 티 하나도 나지 않았고, 노부나가가 자신의 신발을 만들도록 시켰더니 정성을 다해 신발을 만들어 바쳤다는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이로써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아 출세길이 열렸다고 한다.
이 무렵 히데요시의 용모를 보고 노부나가가〈원숭이〉,〈대머리 쥐〉라고 부른 것 같다. 에이로쿠 4년(1561년) 아사노 나가카쓰(浅野長勝)의 양녀로 스기하라 사다토시(杉原定利)의 딸 네네와 결혼한다. 도요토미 가문의 천수덴쇼 14년(1586년) 음력 9월 9일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음력 12월 25일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올라 정권을 확립했다. 덴쇼 15년(1587년) 히데요시 스스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규슈를 공략한다. 이에 시마즈 군은 압도되어 시마즈 가문은 항복했다. 이렇게 하여 서일본 전역은 히데요시 세력하에 놓이게 된다.
덴쇼 18년(1590년) 히데요시는 고호조 가문을 제압하기 위해 자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다이묘들을 소집한 뒤 육군, 수군을 합친 총 병력 21만의 대군을 이끌고 간토(関東)로 출병, 호조 가문의 거성인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포위했다. 그리고 최후의 적 고호조 가문을 굴복시켜 일본을 통일하여 히데요시는 오랫동안 계속된 전국시대를 마감시겼다. 임진·정유왜란은 분로쿠 원년(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도하에 일본이 명의 정복과 조선의 복속을 목표로 16만의 군으로 한반도 남부에 침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조선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한성, 평양을 점령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명의 원군, 그리고 이순신 의 조선수군으로 인해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분로쿠 2년(1593년) 명과의 강화 교섭이 시작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1) 다이묘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공명심과 영웅 심리에서 기인했다는 설.
2) 뒤늦게 얻은 아들 쓰루마쓰가 죽은 비통함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3) 해외무역 장악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4)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대륙 진출 계획에 영향을 받아, 통일 이후 그것을 실현시켰다는 설.
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야욕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는 설. 그래서 강화조건에 명나라 후비를 일본에 바치라는 것과 조선 8도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했다.
6)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신이 없고 막부를 세워 쇼군의 권위로 통치하는 것도 불가능하자. 도요토미 정권의 불투명한 영속성 개선 즉, 영지하사를 통한 정권안정을 확보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7) 일본 내부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위했다는 설. 일본 내에서 최고의 세력을 장악한다 할지라도 세력가는 결국 천황의 신하에 불과하다. 다만 그 세력가가 막부를 세운다면 천황의 명령을 수행하기 보다는 천황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
이는 12세기 겐페이 전쟁에서 승리한 겐지(源氏)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다시 말해 겐지의 피를 이어 받은 자만이 쇼군의 지위에 올라 막부를 세울 자격이 있다는 게 상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겐지는 커녕 천출인 까닭에 상례적으로 쇼군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쇼군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자신들의 영토를 회복하고 그를 방해하는 오랑캐를 물리쳐 승전군이 되어 천황에게 다시 대장군의 칭호를 받아 막부를 구성하는 것 뿐이었다. 이를 위해 과거 영토라고 주장하는 미나미(임나)에 해당하는 조선 남부를 회복하고 이에 반대하는 명나라 군대를 섬멸하는 것만이 막부를 구성하고 쇼군이 될 명분을 얻는 유일한 길이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영지들을 무사들에게 하사함으로써 천출인 까닭에 늘 불안했던 가신관계를 굳건히 만들고자 했다. 그것을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7년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조선침략을 반대하는 쇼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소 요시토시(宗義智),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의 상당수의 다이묘들이 조선으로 군사를 내는 것에 반대 하였으나, 히데요시는 여러 다이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진을 강행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찍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종교간의 문제(고니시 유키나가는 로마 가톨릭,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 성격적 문제(고니시 유키나가는 온건파, 가토 기요마사는 급진파) 등 여러가지 문제로 인하여 앙숙이라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둘을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삼았다. 그 이유인 즉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로 하여금 서로 경쟁하게 하여 최대한 빨리 조선을 점령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과 조선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들은 장기전에 돌입해야했다. 이순신은 남해의 재해권을 확보하면서 일본에서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에 군수물자 공급을 차단시켰고, 이것은 함경도까지 진출했던 가토 기요마사와 평양성에 주둔해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남쪽으로 서둘러 후퇴하게 만드는 큰 원인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전투 부대의 병종을 기병과 보병 두 가지로 대별하고 사무라이대장(侍大將)의 지휘 하에 기병, 총병, 궁병, 창검병 등의 단위대를 편성한 후에 각조 지휘관으로서 기사와 보사를 두었다. 이렇게 변모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1586년 무렵에 대규모 건조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조선 침공 직전에 전함 천여 척을 이미 확보한 데에 이어서 종전 무렵에는 3천여 척이나 되는 대규모 선단을 보유할 수가 있었고 조선을 침공하기 직전인 1591년에는 사이카이도, 난카이도, 산요도, 산인도, 기나이와 그 동방 일부 지역에 동원령을 내려서 병력 33만을 동원할 준비하였다
. 이 무렵 일본군은 대포, 창, 궁시, 일본도를 충비하고 있었으며, 주종 간 단결력이 막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실전 경험이 풍부하으므로 전쟁에서 탁월한 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
분로쿠 5년(1596년) 계속되어 왔던 명과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어, 게이초 2년(1597년) 14만의 군으로 정유년에 조선을 재침략하였다. 칠천량해전을 시작으로 2개월 동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석권하고, 경기도로 나간 후, 조선 남해안에 왜성을 축조하여 장기 점령을 꾀한다.
이후, 울산성 전투에서 고전한 후, 전선을 축소하려는 무단파와 문치파간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8도 중에 남부의 4개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명나라 황녀를 일본 덴노와 혼례시킬 것 등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만큼 무리한 요구를 한 탓에 강화가 결렬되었다.
문제는 중간에서 외교를 담당하던 심유경(沈惟敬)이 명나라에 거짓으로 보고를 했기 때문에 도요토미의 분노가 극대화되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고다이로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보호역을 맡은 마에다 도시이에에 후사를 부탁하고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향년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인은 위암, 독살 등 여러 설이 있으나 그날 안으로 히데요시는 아미다 산에 매장되었다.
히데요시의 묘는 화려하게 조성되었지만, 병력의 사기 문제 때문에 조선에 출병되어 있는 왜군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 무덤은 폭파되어 소멸되고 만다. 이는 조선과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해 임진왜란의 원인이 된 장본인의 무덤을 처단함으로써 조선에 임진왜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전쟁이였음을 보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 마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1615년 도쿠가와의 공격을 받아 어머니 요도도노와 오사카 성에서 자결하는 바람에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끊어지고 말았다. 이후, 조선의 일본군은 철수하였고,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끌어오던 전쟁은 끝이 난다. 전쟁을 통해 도공을 납치 및 활자를 포함 많은 문화재의 약탈로 도자 문화나 인쇄기술의 발전을 꾀한 반면, 전쟁기간 동안에 일어난 문치파와 무단파간의 갈등 및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두로 도요토미 정권은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정권의 에도 시대가 도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내정보다는 전쟁에 어울리는 리더라는 견해가 있다. 특히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장기적으로 부하들을 응집시키는 데에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국 그 특유의 전투 지휘관 기질을 발휘하는 쪽으로 정치노선을 변경했고, 이를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내정과 관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타나가리나 태합검지를 통해 병농분리와 노동력의 생산력 향상에 힘썼으며, 이 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의 정책으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간양록》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일본을 찾아온 조선의 사신에게 회답 서신을 만들게 하면서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는 말을 분명히 적게 했다고 한다. 휘하 가신들이 "일단 좋은 말로 회답 서신을 만들어 보내고 나서 갑자기 쳐들어가야 합니다."라고 간하자 히데요시는 "그러면 자고 있는 사람의 목을 치는 것과 뭐가 달라? 지금 솔직하게 써서 보내고, 그래서 상대방이 미리 준비하게 해준 다음에 승부를 내야지."라고 대답하며 듣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사람으로 사쓰마를 오가면서 약장사를 하던 허의후(許宜後)가 일본의 사정을 상세하게 적어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려다 이웃에 사는 명나라 사람에게 고발당했다.
잡아들인 허의후를 좌우에서 모두 삶아 죽이자고 했지만, 히데요시는 "저 놈은 명나라 사람이야. 제 조국인 명나라를 위해 적국인 우리의 일을 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게다가 나는 남이 생각지도 않는 틈을 노리는 건 싫어. 명나라가 미리 준비하게 하면 좀 어떤가? 그리고 예로부터 제왕(帝王)은 다 초야(草野)에서 일어났어. 명나라에, 난 원래는 천한 사람이었소 하고 알리는 것도 해로운 일은 아니야." 하고서, 거꾸로 허의후를 밀고한 사람에게 "네놈도 명나라 사람이면서 같은 명나라 사람을 밀고하다니, 너야말로 추악한 놈이야!"라 욕했다.
도요토마 하데요시 체격이 왜소하며 추남인 데다가 손가락이 6개인 다지증이였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는 임진· 정유재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 울지 않는 새는 울도록 해야 한다." 창조적, 공격적, 진취적 사고가 아닐까 한다.
소설가 이양훈이 쓴 장편소설 양부하가 3월 초(3월10일경)에 출간됩니다.
임진왜란 때에 풍신수길을 암살하고 일본 왕이 된 양부하(梁敷河 • 부산 동래 출신 • 1588~1685)의 일대기를 담았습니다. 부산 동래 양반 자제로서 일본에 끌려가 풍신수길의 근시(近侍)가 되었고 그가 어떻게 수길을 암살했으며, 가강(家康) 수뢰(秀賴) 대립 시대에 어떤 활약을 했는지 그 과정을 기술했습니다.
(부산 노포동의 양부하 묘)
특히 염헌집 • 연려실기술 등 조선 기록과 일본인 아오나기(靑柳綱太郞)가 저술한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에 등장하는 수길 암살 독극물인 서(署)의 실체를 밝혀 냈습니다. 양부하의 뜨거운 조국혼과 사랑, 일본에서 활약한 풍운아로서 놀라운 삶을, 담은 본 소설 책은 3월초에 전국 서점에 배포됩니다. 출판사 좋은 땅. 13,000원. 39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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