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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는 아름다운 요정으로, 숲과 언덕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사냥을 즐기거나 숲속 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아르테미스는 이 에코를 좋아해서 사냥 갈 때면 늘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이 에코에겐 못된 버릇이 하나 있었으니, 말이 너무 많아서 잡담할 때건 입씨름할 때건 늘 생떼거리를 쓰거나 남들의 말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지껄인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여신 헤라는 제우스가 혹 요정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지나 않을까 싶어서 지아비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에코는 어쩌다 여느 때처럼 지껄이다 보니 다른 요정들이 다 도망칠 수 있도록 헤라를 제 옆에 잡아 둔 꼴이 되고 말았다. 에코의 수다 때문에 요정들을 모조리 떨구어 버린 것을 안 헤라는 에코에게 벌을 내렸다. 헤라의 선고는 다음과 같다.
「이제 다시는 날 속인 그 혀를 놀리지 못하게 할 것이나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말대답〉할 때만은 예외로 해주마. 이제부터 너는 남의 말이 끝난 뒤에는 지껄일 수 있으나, 네가 먼저 말을 할 수는 없다.」
아, 얼마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 이야기 상대로 삼고 싶었던가! 그러나 에코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에코는 나르키소스가 먼저 입을 열기를 목마르게 기다리며 대답까지 준비해 두었다. 어느 날 같이 온 사냥패를 놓친 나르키소스는 큰 소리로 동료들을 불렀다.
「거기 누구 없나?」
그러자 에코가,
「없나?」
하고 대답했다.
나르키소스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동료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다시 외쳤다.
「있으면 이리 나오게!」
에코가 또,
「나오게!」
하고 대답했다. 역시 아무도 오지 않자 나르키소스가 다시,
「왜 나를 피해?」
하고 소리쳤다. 에코도,
「피해?」
하고 소리쳤다.
「나와서 합류하자!」
나르키소스가 다시 외쳤다. 요정 에코도 사랑으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같은 말을 하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가 나르키소스의 목에 팔을 감으려고 했다. 나르키소스는 기겁을 하고 물러서며,
「손 치워,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 어림도 없어. 너 같은 것이 뭐, 안아 주세요?」
「안아 주세요.」
에코가 대답했다.
그러나 하릴없는 일이었다. 나르키소스는 에코 곁을 떠나 버렸고, 에코는 부끄러워서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느라고 깊은 숲속으로 달아나 숨었다. 이로부터 에코는 동굴이나 절벽에만 살았다.
에코의 몸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나날이 여위어가다 마침내 마지막 남았던 한 덩어리 살점까지 그 몸을 떠났다. 에코의 뼈는 바위로 화했으나, 이제 그 뼈, 그 바위에 남은 것이라고는 목소리뿐이었다.
이 목소리로 에코는 누구든 부르는 이에게 대답할 차비를 갖추고 있다가 전과 다름없이 생떼거리를 쓰면서 상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대꾸했다.
나르키소스가 여성을 잔인하게 대한 예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에코에게 그랬듯이, 다른 요정들의 추파도 끝내 모른 척했다.
어느 날 나르키소스의 관심을 끌려다 하릴없이 소박만 맞은 요정이 신들에게, 나르키소스에게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사랑의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이를 듣고, 그 요정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 산 속에 아주 물이 맑은 샘이 하나 있었다.
물이 어찌나 맑고 고운 빛으로 빛나는지 양치기도 그곳으로는 양떼를 몰지 않았고, 산양들도 그곳에서는 쉬지 않았으며, 숲속 짐승들도 그곳으로는 가지 않았다. 동물뿐만이 아니였다. 낙엽이나 부러진 가지도 그 물만은 더럽히지 않았다. 샘가에는 싱싱한 풀이 돋아 있었고, 바위는 태양을 가려 이 풀을 시들지 않게 해주었다.
어느 날 사냥에 지친 나르키소스가, 더위와 갈증에 쫓겨 그 샘가로 왔다. 그는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구부리다가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그는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샘 안에서 사는 아름다운 요정 곧 수선(水仙)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나르키소스는 넋을 놓고 수면에 비친 이의 빛나는 눈, 디오니소스나 아폴론의 머리카락 같은 고수머리, 동글동글한 뺨, 상아같이 흰 목, 조금 벌어진 입술, 그리고 건강과 활력에 넘치는 온몸을 정신없이 내려다보았다. 나르키소스는 그만 그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그는 그 그림자에 입맞추려고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 사랑스러운 몸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물 속에 담그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나르키소스의 포옹을 피해 달아났다가 잠시 후면 다시 나타나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나르키소스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샘가를 방황하면서 수면에 비친 제 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는 수선에게 하소연했다.
「아름다운 이여, 어째서 나를 피하는 것이지요? 내 얼굴이, 그대를 물러서게 할 만큼 못생긴 것은 아닐 텐데요. 요정이란 요정은 모두 나를 사랑하고, 그대 역시 내게 무관심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손을 내밀거든 그대도 손을 내밀고, 내가 웃으면 그대도 웃으며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았나요.」
나르키소스의 눈물이 수면 위로 떨어져 그림자를 출렁거리게 했다. 이윽고 그 그림자가 수면을 떠나자 그가 부르짖었다.
「그대로 있어 주어요. 부탁이니 그대로 있어 주어요.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면, 그대를 바라보고 있게라도 해주어요.」
이런 식으로 가슴을 불태우다 보니 마침내 그 불길이 그의 건강을 태우기에 이르렀다. 그의 화색이 돌던 낯빛, 그 활기에 차 있던 젊음 그리고 에코가 그토록 사모하여 마지않던 아름다움도 마침내 그를 떠나고 말았다.
에코는 여전히 나르키소스 주위를 맴돌면서, 그가 「아아!」 하고 부르짖으면 저 역시 똑같은 말로 화답했다.
나르키소스는 애를 태우다 마침내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망령은, 저승 앞을 흐르는 스튁스 강을 건널 때도, 강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려고 뱃전에서 몸을 구부렸다고 한다.
요정들, 특히 물의 요정들은 그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수선들이 통곡하느라고 가슴을 치자 에코도 제 가슴을 쳤다.
수선들이 나르키소스를 화장하기 위해 땔나무를 준비하고 시신을 찾았으나 끝내 시신은 그들 눈에 띄지 않았다. 그의 시신 대신, 한 송이 꽃, 가운데는 자줏빛이고 가장자리는 하얀 꽃이 수선들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이 꽃은 오늘날까지 나르키소스1)라는 이름으로 피어 그를 추억하게 한다.
밀턴은 『코무스』에서 〈아가씨의 노래〉(230~242행)를 빌어 이 에코와 나르키소스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아가씨는 숲속에서 동생들을 찾아다니다 이 둘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다정한 에코여, 더없이 다정한 요정이여,
조용히 흐르는 마이안드로스의 푸른 강변의,
그리고 연인에게 버림받은 꾀꼬리가
밤이면 슬픈 노래를 부르는
저 제비꽃 피는 골짜기의,
공기 껍데기 속에 모습을 감추고 사는 이여,
어린 형제를 보지 못하셨나요?
그대의 나르키소스와도 흡사한 그들을?
오오, 만일 그대가 그 둘을
꽃으로 지어진 어느 동굴에다 감추셨거든
그곳이 어딘지 가르쳐 주오.
다정한 말의 여왕이여, 천구(天球)2)의 딸3)이여,
아시거든 그대 하늘 높이 오르시어
하늘의 음악으로 어우러진 신묘한 메아리로 들려주오.
밀턴은 나르키소스 이야기를 흉내내어 이브로 하여금 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한다.
어느 날의 일이 새록새록 기억에 떠오른다. 잠에서
처음 깨어난 나는 그늘 밑 꽃방석 위에서
쉬고 있었다. 쉬면서, 여기는 어디며 나는 무엇일까, 어디에서 이곳으로 어떻게 온 것일까 생각했다.
그랬더니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직한
물소리가 들려왔으니, 그 물은 어느 동굴에서 나와
늪지를 흐르다 이윽고 조용히,
흡사 넓은 하늘처럼 고여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아무도 모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파란 물가에서
몸을 구부리고, 또 하나의 하늘일 것 같은, 그 맑고
매끄러운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몸 매무시를 가다듬고 수면을 들여다보았더니, 그곳
물결 속에서 홀연 한 모습이 나타나 몸을 구부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라서 몸을 젖혔다.
그러자 그 역시 몸을 젖혔다.
그러나 환희가 내게로 돌아왔다.
상대도 환희를 되찾았는지
연민과 사랑의 눈길로 내게 화답했다. 나는 오늘도 그곳에서
물 위에 시선을 모으고, 하릴없는 욕망을 안은 채 사랑하는데,
한 소리가 내 주의를 끌며 가로되,
「그대가 보고 있는 것은
그대가 그곳에서 보고 있는 것은,
여자여, 그대 자신의 모습이니라.」4)
고대의 전설치고 나르키소스 전설만큼 시인들에게 자주 회자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 두 편의 풍자시를 소개한다. 전설을 다루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먼저 골드스미드5)의 풍자시 『벼락에 눈이 먼 어느 미남 청년에 대해서』부터 소개한다.
분명히 하늘의 섭리일 게다.
증오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연민 때문이었을 게다.
그래서 에로스처럼 장님으로 만들어
나르키소스의 운명을 흉내내게 했을 게다.6)
또 한 수는 쿠퍼(Cowper)의 풍자시 『추남에 대하여』다.
벗이여, 조심하게, 맑은 시내와 샘을,
무심코 지나치면 그 무서운 갈고리가 곧 그대의 코가 물에 비칠 것이다.
그러면 그대 운명은 나르키소스 꼴이 되리니,
그가 제 모습이 사랑스러워 괴로워했듯이
그대는 그대 모습이 역겨워 괴로워할 것이므로.
각주
1 영어로는 〈나아시서스(Narcissus)〉, 즉 〈수선화〉.
2 퓌타고라스(Pythagoras)는 천구는 여러 개의 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켜의 회전 운동이 신묘한 음악을 이룬다고 믿었다.
3 무사이(뮤즈) 중의 하나인 〈우라니아〉의 이름도 〈하늘의 딸〉이라는 뜻이다.
4 『실락원』 제4편.
5 Oliver Goldsmith(1728~1774).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시인, 소설가.
6 에로스는 종종 장님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사랑의 맹목성을 의인화한 듯하다.
클뤼티에
클뤼티에는 물 속에 사는 요정이었다.
이 클뤼티에는 아폴론1)을 몹시 사랑했으나 태양신 쪽에서는 이 사랑을 도무지 받아 주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몹시 절망한 클뤼티에는,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풀어헤친 채 하루 종일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러기를 아흐레. 먹을 것, 마실 것 입에 대지 않았으니, 오직 클뤼티에의 입술로 들어간 것은 눈물과 이슬뿐이었다.
클뤼티에는 해2)가 뜨면 그를 올려다보기 시작하여 궤도를 다 돌아 가라앉을 때까지 줄곧 해바라기만 했다. 다른 것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늘 해 있는 쪽으로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클뤼티에의 수족은 대지에 뿌리내렸고 얼굴은 꽃이 되었다. 이 꽃은 태양이 있는 쪽으로 꽃바퀴를 돌린다. 아직도 요정 시절의 그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므로 늘 태양 있는 곳으로만 꽃바퀴를 향하게 하는 것이다.
후드(Hood)는 『꽃』에서 클뤼티에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미치광이 계집 클뤼티에(해바라기)는 그만두련다.
태양 때문에 머리가 돌았으므로.
튤립은 예의바른 아가씨
그래서 이것도 피하련다.
구륜 앵초는 시골 처녀
제비꽃은 수녀
그러나 우아한 장미에게 구혼하리,
꽃의 여왕이므로.
해바라기는 또 변하지 않는 마음의 표징으로 널리 사랑을 받는다. 무어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3)
참사랑을 아는 마음은 결코 잊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끝까지 사랑한다.
저 해바라기가 해뜰 때 보낸 눈길을
해질 때까지 거두지 않는 것처럼.
1 태양신으로서의 아폴론.
2 곧 태양신 아폴론.
3 『아일랜드의 노래』 중 〈나를 믿어요〉 2절.
〈헤로〉1)
레안드로스는 아비도스의 청년이었다. 아비도스는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고 있는 해협2)의 아시아 쪽에 있는 도시였다. 해협 건너편에는 세스토스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그 도시에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인 헤로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레안드로스는 이 헤로에게 반한 나머지, 매일 밤 이 해협을 헤엄쳐 건너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곤 했다. 헤로도 그를 위해 주었다.
폭풍이 일어 바다가 사나워진 어느 날 밤 레안드로스는 기력을 잃고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의 시체가 유럽 쪽 해안으로 밀려왔을 때야 헤로는 그가 죽었음을 알았다. 헤로는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탑에서 바다로 투신하여 애인의 뒤를 따랐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키츠의 『레안드로스 그림에 부침』이다.
엄숙한 마음으로 이곳에 와서
늘 눈을 내리깔고,
그 싱싱한 눈빛을 흰 눈꺼풀 안에다 감추고 있는 아리따운 처녀들이여!
그대들 아름다운 손으로 합장하라.
그 손을 참마음으로 모으지 않고는 이 모습 볼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은 그대들 눈부신 아름다움의 희생자가
제 젊은 영혼의 밤으로 빠져들어가던 모습,
황량한 바다 속으로 황망중에 가라앉던 모습이다.
이거야말로 젊은 레안드로스가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던 모습이다.
그래도 숨넘어가는 입술을 내밀고 헤로의 뺨을 찾았고,
헤로의 미소에는 미소로 답하고 있다.
오, 무서운 꿈! 보라, 그 몸이 죽음처럼 무겁게 파도 사이로 가라앉는다.
어깨와 팔이 일순 번쩍인다.
그러다 사라지고 만다. 그의 숨결은 포말이 되어 떠오른다.
『아비도스의 신부』4)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제2편 3절).
이 사지(四肢)를, 부력 좋은 물결이 날라다 준 일이 있었으니.
해협 이쪽에서 저쪽까지의 거리는, 가장 가까운 곳도 약 1마일이나 된다. 더구나 끊임없이 흐르는 조류가 마르모라 해에서 다도해(에게 해)로 밀려든다. 바이런 이래로 다른 몇몇 사람도 이곳을 헤엄쳐 건넜으나, 그 수영 기술의 탁월함과 세우는 기록의 희소가치로 보아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할 여지는 아직도 넉넉할 것인즉 독자 여러분도 여기에 도전하여 그 명성을 누렸으면 한다.
바이런은 같은 시 2편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바람이 헬레의 바다(헬레스폰토스) 위를 세차게 불고 있다.
저 무서운 폭풍이 밤바다를 휘몰아치던 그 때처럼.
그 때, 에로스는 구하러 나와서도 깜빡 잊고 구하지 못했다.
저 용감한 미남자,
세스토스 처녀의 유일한 희망을.
오, 그 때 오직 한 하늘가에
탑 위의 횃불이 반짝였다.
그리고 불어오는 강풍과 흩날리는 포말과
울부짖는 바닷새들이 돌아오라고 일렀지만,
머리 위의 구름, 눈 아래의 바다가 신호를 보내고 소리를 질러
가지 말라고 일렀지만,
그에게는 공포를 예고하는 소리도, 신호도
들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저 사랑의 빛,
멀리서 빛나는 단 하나의 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귀에는 오직 헤로가 부르는 노래,
「그대 거친 파도여, 사랑하는 이들을 너무 오래 갈라놓지 말아다오.」
이 노래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옛이야기, 그러나 사랑은 늘 새로워서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어 이 또한 진실임을 증명하게 하라.
1 영국 화가 로드 라이튼이 그린 〈헤로〉. 헤로의 직업은, 점잖게 말하자면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다. 매춘부라는 뜻이다.
2 헬레스폰토스. 현재의 다다넬즈 해협.
3 절름발이였던 바이런은 1시간 10분에 이 해협을 헤엄쳐 건넜다고 전해진다.
4 레안드로스는 아비도스 사람이다.
오르페우스는 아폴론과 무사이 여신 가운데 하나인 칼리오페의 아들이었다.1) 오르페우스는 아버지 아폴론으로부터 수금 한 대와 연주하는 기술을 전수받았는데, 그 켜는 솜씨가 어찌나 훌륭했던지 그의 음악에는 매혹당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짐승까지도 오르페우스가 고르는 가락을 들으면 그 거친 성질을 눅이고 다가와 귀를 기울이곤 했고, 나무나 바위도 그 가락의 매력에 감응했으니 나무는 그가 있는 쪽으로 가지를 휘었고 바위는 그 단단한 성질을 잠시 누그러뜨리고 가락을 듣는 동안만은 부드러운 상태로 있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의 결혼식에는 휘메나이오스2)도 하객으로 초대받았다. 그러나 휘메나이오스는 결혼식장에 나타나긴 했지만 신랑과 신부가 행복하게 잘살 것이라는 전조는 하나도 보여 주지 않았다. 아니, 행복의 전조는커녕 그가 든 횃불3)에서 연기만 나는 바람에 신랑 신부는 눈물까지 흘려야 했다.
결혼식장에서 나타났던 이같이 불길한 징조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신부 에우뤼디케는 결혼 직후에 동무들인 요정들과 산보 나갔다가 양치기 아리스타이오스의 눈에 들고 말았다.
양치기는 에우뤼디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말을 붙여 보려 했다. 에우뤼디케는 몹시 놀라 달아나다가 그만 풀섶의 독사를 밟고는 독사에게 발을 물려 죽고 말았다.
오르페우스는 아내 잃은 슬픔을 신들이나 인간들은 물론, 지상에서 공기로 숨쉬는 모든 것을 상대로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 보람이 없었다.
오르페우스는 저승인 명계(冥界)로 내려가 아내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오르페우스는 타이나로스 곶 어느 구석에 있는 동굴을 통해 어찌어찌해서 스튁스 나라에 도달했다.
오르페우스는 망령 무리들을 지나 저승왕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왕비의 왕좌 앞으로 나아가 수금을 반주로 다음과 같은 사연을 노래했다.
「하계의 신들이시여! 산 것들은 어차피 오게 되어 있는 하계의 신들이시여, 진실로 드리는 말씀이오니 저의 사연을 들으소서. 제가 여기에 온 것은 타르타로스의 비밀을 염탐하고자 해서도 아니요, 입구를 지키는 뱀 갈기의 삼두구4)와 힘을 겨루기 위해서도 아닙니다.5) 저는 제 아내를 찾으러 왔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독사의 독니에 빼앗긴 제 아내를 아시지요. 에로스 신이 저를 이곳으로 인도했습니다.
에로스 신은 지상에 사는 저희들에게는 전능한 신입니다. 옛말이 그르지 않다면 이 하계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이 공포로 가득 찬 곳, 아직 창조되지 않은 모든 것의 나라에 바라오니 에우뤼디케의 생명줄을 다시 이어 주십시오. 저희는 조만간 모두 이 나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빨리 오느냐 늦게 오느냐가 문제지, 오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제 아내도 천수를 다하면 당연히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바라오니, 제 아내를 돌려주십시오. 돌려주지 않으면 저도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아내를 돌려주지 않으시려거든 차라리 저희 부부가 나란히 죽은 걸 보시면서 승리를 기뻐하소서.」
오르페우스가 이같이 애달픈 사연을 노래하자 망령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탄탈로스는 목이 몹시 말랐을 터인데도 한동안 물을 마셔야 한다는 걸 잊었고, 익시온의 불바퀴도 잠시 멎었다. 독수리는 거인의 살을 파먹다 말고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6) 다나오스의 딸들은 체로 물 푸던 손길을 멈추었으며,7) 시쉬포스도 저 바위에 걸터앉아 귀를 기울였다.
전해지기로는, 복수의 여신들이 눈물을 흘린 것도 이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페르세포네도 오르페우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윽고 에우뤼디케가 불려나왔다. 에우뤼디케는 갓 저승에 붙잡혀 온 망령들 사이에서 독사에 물린 상처 때문에 절뚝거리며 걸어나왔다.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데리고 돌아오려 했으나 하데스가 조건을 제시했다. 곧 두 사람이 지상에 도달할 때까지 오르페우스가 고개를 돌려 아내 에우뤼디케를 보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르페우스는 이 조건을 수락했다.
오르페우스가 앞서고 에우뤼디케는 뒤를 따르면서 두 사람은 어둡고 물매가 급한 길을 말없이 올라왔다. 지상의 나라로 나오는 출구에 거의 다가왔을 때 오르페우스는 그만 하데스가 내건 조건을 잊고 아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에우뤼디케는 다시 하계로 끌려들어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더듬었으나 손끝에 닿는 것은 싸늘한 바람뿐이었다. 다시 죽음의 여로로 끌려들어가게 되었지만 에우뤼디케는 지아비를 원망할 수 없었다. 하기야 아내를 보고 싶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고개를 돌린 지아비를 어떻게 원망할 수 있었으랴. 에우뤼디케는 소리쳤다.
「안녕! 마지막 이별이로군요!」
그러나 에우뤼디케는 이미 저만치 끌려가 있어서 지아비의 귀에는 이 소리조차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뤼디케를 뒤쫓아 다시 한 번 하계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스튁스 강의 뱃사공에게 탄원했다. 그러나 무정한 뱃사공 카론은 들은 척도 않고 오르페우스를 떠밀었다. 오르페우스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이레 동안이나 그 강둑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암흑계 신들의 잔인함을 통렬하게 원망하면서 바위와 산들에게 노래로 호소했다. 이 노래는 호랑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참나무 둥치를 흔들게 했다.
그로부터 오르페우스는 에우뤼디케와의 슬픈 추억에 잠겨 여자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살았다. 트라케 처녀들이 오르페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갖은 수를 다 썼으나 오르페우스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처녀들은 오르페우스의 도도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때가 무르익기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 때가 도무지 무르익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안 처녀 하나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잔뜩 흥분했던 나머지 「저기 우리를 모욕한 사내가 있다!」 하고 소리치면서 오르페우스를 향해 돌을 던졌다. 하지만 돌은 오르페우스의 수금 소리가 들려오는 거리까지 날아갔다가는 그만 그 소리에 기가 꺾여 그의 발치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른 처녀들이 던진 돌도 마찬가지였다. 처녀들은 소리를 질러 오르페우스의 수금 소리가 들리지 못하게 한 뒤에 창을 던졌다.
창에 맞은 오르페우스의 몸은 금방 피로 물들었다. 발광한 처녀들은 오르페우스의 몸을 갈가리 찢고, 머리와 수금은 헤브로스 강에다 처넣었다.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수금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떠내려가자 강의 양 둑도 노래로 화답했다.
무우사들은 갈가리 찢긴 그의 몸을 수습하여 레이베트라에다 장사지냈다. 그래서 오르페우스의 무덤 위에서 우는 이 지방 꾀꼬리들의 울음소리는 그리스의 다른 지방 꾀꼬리들 울음소리보다 더 아름답다고 전해진다.
오르페우스는 망령이 되어 다시 타르타로스의 나라로 내려가 에우뤼디케를 만나고는 꿈에 그리던 아내를 껴안았다. 둘은 지금도 행복의 들(엘뤼시온)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걷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앞서가면서 더러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더 이상은 슬픈 일이 일어날 리 없으니까.
포프(Pope)는 이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끌어와 『성 세실리아의 날, 음악에 부치는 송가』에서 음악의 힘을 노래하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이 이야기의 끝부분에 해당한다(7절).
그러나 순식간에, 너무 순식간에 지아비는 고개를 돌린다.
아내는 다시 하계로 떨어져 죽고 만다. 영 죽고 만 것이다!
이번에는 무슨 수로 운명의 여신들 마음을 움직일까?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면 그대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어느 때는 머리 위로 걸린 산을 지나고,
산중의 폭포를 지나고,
혹은 헤브로스 강을 따라 먼 길을 돌며,
홀로
탄식하며 방황했다.
아내의 망령을 찾아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
혹 복수의 여신들에게 둘러싸여
절망과 곤혹에 시달리면서
로도페 산 눈 속에서
떨기도 많이 떨었다.
보라, 사막을 지나는 바람처럼 미친 듯이 달려가는 그의 모습을.
들으라!
주신제(酒神祭)에서 발광한 계집들의 소리에 떠는 하이모스 산.9)
보라, 그는 죽어간다.
그러나 죽음 가운데서도 에우뤼디케를 노래하고,
떨리는 혀로 에우뤼디케의 이름을 부르는구나.
에우뤼디케! 그러자 숲의 나무,
에우뤼디케! 그러자 강의 물,
에우뤼디케! 그러자 큰 바위, 텅 빈 산도 그 이름을 메아리치게 했다.
오르페우스 무덤 위의 꾀꼬리는 다른 곳 꾀꼬리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로 운다는 이야기는 사우디10)의 『탈라바』(Thalaba)에 이렇게 그려져 있다.
그 때 그 귀에는 참으로 신묘한 화음이 들렸으리라!
멀리서 들리는 가락과 은은한 노랫소리가
잔치 마당 사방에서,
먼 폭포에서,
나뭇잎 속삭이는 숲에서 들린 것이다.
꾀꼬리 한 마리
장미 숲에 깃들여 노래하기 시작했다. 한 둥우리 나누어 사는 연인도,
사랑의 화신 오르페우스의 무덤가에 선 트라케의 양치기도,
일찍이 들어 본 일이 없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가령 무덤의 주인인 망령이,
온 힘을 다해
사랑을 노래한들
그 소리만 할까 보냐?'
인간은 제 배를 불리기 위해 비교적 하등한 본능을 이용하는 수가 있다. 양봉술(養蜂術)도 이래서 생겨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우연한 기회에 꿀을 발견했을 성싶다. 꿀은 속이 빈 둥치, 바위 틈 혹은 오목하게 패인 이와 비슷한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꿀벌이 거기에다 집을 짓기 때문이었다. 꿀벌이 이런 곳에다 집을 지었으니, 때로 동물의 시체 역시 집을 짓고자 하는 꿀벌들에게 점령당했으리라는 상상도 가능하다. 꿀벌이 동물의 썩은 고기에서 생겨난다는 미신은 아마 이래서 생겨난 것이리라.
지금부터 이야기할 테지만, 시인 베르길리우스도 병이나 천재지변으로 전멸한 벌 무리가 다시 생기는 이유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11)
처음으로 벌 치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친 아리스타이오스는 물의 요정 퀴레네의 아들이었다.
아리스타이오스는 어느 해 자기가 치던 벌 무리가 전멸하자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는 강둑에 서서 이렇게 호소했다.
「어머니, 저는 평생의 자랑거리를 모두 잃었습니다. 그토록 제가 소중하게 여기던 벌이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저의 기술과 정성도 보람이 없었고, 어머니께서도 제 앞에서 이 불행을 막아 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퀴레네가 아들의 이런 푸념을 들은 것은, 강바닥 궁전에서 시중드는 물의 요정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였다. 모두 실을 풀고, 잣고, 옷감을 짜는 등 저마다 여자가 할 일을 하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일하는 요정들의 무료를 달래주고 있었다.
아리스타이오스의 푸념이 들리자 모두 일감을 놓았다. 그중 하나는 물 위로 머리를 내밀어 아리스타이오스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 궁전으로 돌아와 그의 어머니 퀴레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퀴레네는 아들을 자기 앞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퀴레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강은 물을 가르고 그에게 지나갈 길을 내주었다. 물은 그가 지나갈 동안 양쪽으로 산처럼 높이 말려 올라가 몸을 웅크린 채 기다렸다.
아리스타이오스는 큰 강의 원천이 여러 개 고인 강의 나라로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큰 물 곳간을 보았다. 그 물이 대지를 적시려고 각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물 소리 때문에 귀가 다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이윽고 어머니 퀴레네가 거처하는 곳에 이른 아리스타이오스는 어머니와 시중드는 요정들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요정들은 식탁에 갖가지 산해진미를 차렸다. 그들은 해신 포세이돈에게 제주(祭酒)를 드린 뒤 산해진미를 포식했다. 식사가 끝나자 퀴레네는 아리스타이오스에게 말했다.
「프로테우스라고 하는 아주 연로하신 예언자가 있다. 바다에 살고 있는 그는 포세이돈의 환심을 사서 물개 무리를 지키는 일을 맡고 있는 분이다. 우리 물의 요정들은 모두 이 노인을 존경하고 있다. 참으로 슬기로운 분이어서 과거, 현재, 미래를 불문하고 무불통달이다. 아리스타이오스, 이 노인이라면 네 꿀벌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하면 다시 꿀벌을 칠 수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을 게다. 그러나 네가 아무리 애원해도 그냥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격다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잡거든 사슬로 묶어라. 사슬만 단단히 쥐고 있으면 세상없어도 달아나지 못할 것이니, 사슬에서 풀려날 욕심으로 네 질문에 대답해 줄 게다.
이제 너를 그 노인의 동굴로 데려다 주마. 낮이면 그 동굴에서 낮잠을 자고 있으니까 붙잡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이 노인은 누구에게 붙잡혔다는 걸 알면 둔갑술을 써서 몸을 여러 가지로 바꿀 게다. 멧돼지, 무서운 범, 비늘 돋친 용, 갈기가 누런 사자 등 아주 멋대로 둔갑할 수가 있다. 뿐이냐? 불꽃이 튀는 소리, 격류가 흐르는 소리 같은 것으로 둔갑해서라도 네 사슬에서 풀려나려고 요동칠 것이다. 너는 사슬만 꼭 잡고 있으면 된다. 요동치다가 소용없다는 걸 알면 본모습으로 돌아와 네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할 게다!」
퀴레네는 이 말 끝에 신들이 마시는 향긋한 신주(神酒)를 아들 몸에 뿌렸다. 아리스타이오스는 그 순간, 활력이 온몸을 채우고 용기가 가슴에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이와 동시에 향기가 그의 몸 주위를 감돌았다.
퀴레네는 아리스타이오스를 데리고 프로테우스의 동굴로 가서 아들에게는 바위 틈에 숨으라고 하고 자기는 구름 그늘에 숨었다.
이윽고 한낮, 인축(人畜)이 두루 따가운 햇살을 피해 조용히 잠들고 싶어할 때가 오자 프로테우스가 물 속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의 뒤에는 물개떼가 따르고 있었으나, 물개들은 해안에 이르자마자 드러누워 버렸다. 프로테우스는 바위에 앉아 물개 수를 세었다. 그리고는 동굴로 들어와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리스타이오스는 이 노인이 잠들자마자 달려나가 그 발을 사슬로 묶어 버리고는 대갈일성을 질렀다. 프로테우스는 눈을 번쩍 떴다. 자기가 남의 손에 잡혀 있다는 걸 안 그는 바로 둔갑의 재간을 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 다음에는 강 그리고 무서운 짐승 등으로 차례로 둔갑하면서 사슬에서 빠져 나가려 했다. 그러나 사슬을 벗어나기가 여의치 않다는 걸 안 그는 본모습으로 돌아와 노기띤 음성으로 나무랐다.
「겁 없는 것이로구나. 이렇듯 내 집을 침입한 네 놈은 누구이며, 대체 나에게 무슨 용무가 있어서 이러느냐?」
아리스타이오스가 대답했다.
「프로테우스 신이시여, 아시면서 묻습니까? 세상에 누가 당신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도 마세요. 내가 신의 도움을 빌려 이곳에 온 것은 내 불행의 원인과 그 구제 방법을 듣기 위해섭니다. 바라건대 가르쳐 주십시오.」
예언자는 흰 눈으로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네 죗값에 합당한 갚음을 당했는데 무얼 그러느냐? 네놈 때문에 에우뤼디케가 죽지 않았더냐? 그 처녀는 네놈 꼴이 보기 싫어 도망치다가 독사를 밟고는 그 독사에게 발을 물려 죽지 않았느냐? 그 복수를 하려고 요정 친구들이 네 벌 무리를 친 것이야.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 요정들의 원한을 풀어 주어야지. 시키는 대로 하거라. 외양이 참하고 크기가 고만고만한 황소 네 마리, 암소 네 마리를 준비하고 요정들을 위해 제단 네 개를 만들고는 이 소를 산 제물로 바치되, 그 시체는 나무가 밀생해 있는 숲에다 그냥 두고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가 감정을 풀도록 지성으로 공양하여라. 그리고 나서 아흐레가 지나거든 가서 제물의 시체를 살펴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리스타이오스는 프로테우스가 시키는 대로 했다. 소를 산 제물로 잡아 그 시체는 숲속에 그냥 두어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의 망령을 지성으로 공양했다. 그리고 나서 아흐레가 지나자 가서 소의 사체를 조사해 보았다.
세상에! 소 한 마리는 온전히 벌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벌은 상자 속에서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쿠퍼(Cowper)는 『과제』(The Task)라는 시에서 러시아의 황후(皇后) 안(Ann)이 세웠다는 얼음 궁전 이야기를 하면서 이 아리스타이오스 이야기를 끌어다 대고 있다. 이 시인은 얼음이 폭포와 어우러져 조형해 낸 환상적인 형상을 노래하고 있다.
신기하기 때문이요, 탄복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만
상찬(賞讚)의 값은 헐한 것, 그것이 인간의 도리.
모피를 둘러쓴 러시아 땅 황후여,
대자연의 더없이 웅장하고 위대한 장난
이것이야말로 북극의 경이가 아니랴.
자연이 짓고자 할 때는
숲의 나무도 쓰러지지 않고
채석장은 벽 쌓을 돌을 캐지 않아도 좋다.
자연은 강을 잘라 그 유리 같은 물로 대리석을 만들었다.
이러한 궁전으로 저 아리스타이오스는 퀴레네를 찾아왔다.
벌을 잃었다는 슬픈 소식을
어머니 귀에 전하려 했을 때.
밀턴도 『코무스』를 수호하는 요정의 노래 중에서 세번(Severn) 강의 요정 사브리나(Sabrina)를 노래할 때 퀴레네와 그 강바닥을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아름다운 사브리나!
지금 그대가 앉아 있는
그 유리같이 차갑고 투명한 파도 밑에서 들으시라.
호박색 그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백합 띠로 묶으면서
들으시라, 은백색 강의 여신이여,
처녀의 귀한 명예를 위해
들어주시라, 그리고 나를 구해 주시라.
1 오이아그로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2 〈결혼〉이라는 뜻. 즉 결혼의 신.
3 결혼의 신 휘메나이오스는 늘 횃불과 너울을 가지고 다닌다.
4 머리가 셋인 개[三頭狗]. 케르베로스는 저승 입구를 지키는 지킴이다.
5 헤라클레스는 케르베로스와의 힘겨루기에서 이겨, 이 개를 이승으로 끌고 나온 일이 있다.
6 제우스는, 티튀오스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어머니인 레토를 능욕하려던 죗값을 물어 독수리로 하여금 티튀오스의 살을 파먹게 했다.
7 아르고스 왕 다나오스의 딸 마흔아홉 자매는 혼인 첫날밤에 신랑을 모두 죽인 죗값으로 영원히 밑빠진 독에다 체로 물을 퍼담는 형벌을 받고 있다.
8 거문고자리.
9 〈피의 산〉이라는 뜻이다.
10 Robert Southey. 영국의 시인, 비평가.
11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 제4편 315행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