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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영남지역의 기후 환경과 식생
4~6세기의 삼국시대는 읍락국가에서 국가 지배체제로 사회 시스템이 바뀐 시기다.
이러한 지배체제의 변화 배경으로 크게 발달한 농업생산력을 지목한다.
수리관개시설의 축조와 정비, 철제 농기구의 발전과 보급, 우경牛耕의 발달 등이 그런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주곡主穀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콩, 보리에서 벼(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건생乾生 경작물인 콩과 보리, 습생濕生인 벼는 상대적으로 겨울이 온난한 기후 지역에서 적용되는 식량자원
이기 때문에 식생학적으로 냉해 피해가 심하게 발생할 수 있는 아고산대나 냉온대의 북부·고산지대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작물이다.
여기서는 그러한 농업의 발달과 변화는 근본적으로 기후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일반적 사실에 주목하면서,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영남분지 지역에서의 4~6세기 기후와 식생에 대해 살펴 본다.
기본적으로 영남분지 지역은 생물기후학적으로 한반도 속에서도 가장 대륙적인 기후 특성을 가지고 있다.
소백산맥 배후에 위치함으로써 비(降雨)그늘 현상 때문에 한반도 내에서 비가 가장 적게 내리는 과우寡雨 지역이고,
연간 강수량의 편차가 심하면서 연중 일중 기온차도 가장 심한 편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가뭄과 산불의 발생 빈도가 높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현존 식생이 발달한다.
수평적으로 소나무림이 넓게 발달하고, 이차식생에서 출현하는 산뽕나무, 붉나무, 두릅나무, 싸리나무 종류와 같은
임연 식물종과 고사리, 삽주, 취나물 종류 등의 초본 식물종을 비롯한 산나물 다양성이 풍부한 편인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삼국시대 4~6세기는 범지구적으로 따뜻한 온난기면서 습윤한 기후였다고는 하지만, 이 시기를 포함한 200~800년 사이에
한반도의 기후는 이전 시기보다 더욱 냉량한 짧은 한기寒期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가뭄이나 수분스트레스가 심하게 발생하지 않았던 시기라는 사실을 말한다.
이러한 기후 환경에서 영남지역의 식생공간분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소백산맥과 영남알프스 준령의 고해발 산지 능선과 산정부 그리고 계곡 지형에서는 냉해에 노출되면서 냉온대 북부·
고산지대 식생형의 신갈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이 혼생하는 침활혼효림이 발달하고, 장소에 따라서는 가문비나무를
비롯한 아고산대 침엽수종이 출현하였을 것이다.
중산간 지역의 산록에는 냉온대 중부·산지대의 식생형을 대표하는 신갈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낙엽활엽수림(신갈나무
- 생강나무아군단)이 넓게 발달하였을 것이다.
구릉지대 및 저지대는 냉온대 남부· 저산지대 식생형의 졸참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낙엽활엽수림(졸참나무 - 작살나무
아군단, 서어나무 - 개서어나무아군단 등)이 분포하면서도 오늘날보다 약간 더 한랭한 수준의 기후환경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랭 기후와 온난 기후가 일이백년 수준에서 교차한다면, 식생 발달의 지각遲刻 현상으로 한랭한 기후에
대응하는 식생형이 더욱 우세한 분포를 보인다.
상대적으로 더욱 열악한 환경조건에 적응한 생물이 환경 변화를 극복하는 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추운 기후에 분포 중심을 가지는 식물이 따뜻한 기후에 분포 중심을 가지는 식물보다 그런 환경 변화에 더욱 유리하다는
의미다.
삼국시대에는 밤나무의 화분 출현 비율이 크게 증가하는데, 이는 해양성 기후 특성이었음을 보여 주는 식물사회학적
증거이다.
밤나무류는 해양성의 난온대와 냉온대의 이행移行지역에 분포 중심을 가지는 낙엽활엽수종으로, 건습이 뚜렷하고
수분스트레스가 발생할 수 있는 대륙성 기후환경에서는 생육과 생장이 불량하고 소출도 현저히 감소한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밤나무 화분 증가는 밤나무 농경 비중이 증가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해양성의 온난하고
습윤하였다는 범세계적 기후를 반영하는 식생 환경을 말한다.
이 시기의 경주 분지 일대 구릉지에서는 해양성의 냉온대 남부·저산지대 식생형에 속하는 잠재자연식생 분자들(졸참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이 빈도 높게 출현하였을 것이다.
충적지에서는 이전 시기에 비해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더욱 우세한 농촌 경관이었을 것이다.
짧지만 한랭한 기후 시기도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벼농사 위축에 따른 식량 부족분은 도토리와 밤으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기후 환경과 식생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東端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생물 분포의 결정적 지리 장벽이 되는 것은 고원지대인 개마고원이다.
생물분포에 있어서 일차 환경조건으로 작용하는 핵심 생태요소로 높은 해발고도에서의 온도 단열감률 효과 때문이다.
온난한 한반도 남부 지방에 분포중심지를 가지는 냉온대 남부·저산지대, 난온대, 아열대 분자들은 개마고원에 의해
북쪽 만주 지역으로의 분포 확장이 제한된다.
겨울(비생육기) 기간 동안의 추위(최저온도)가 생물 분포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개마고원 이남 한반도 중남부 지방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느티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함박꽃나무, 조릿대
등이 백두산 지역과 만주에서는 전혀 자생自生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나무는 장백송(일명 미인송)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개마고원의 이남 지역은 통일신라시대의 주 영역이다.
여기서는 개마고원 이남 한반도 영역에서의 기후와 식생환경을 살펴 보기로 한다.
기후환경 변천에 관한 사료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800년을 기점으로 냉량한 기후에서 온난한 기후로 바뀌었다.
즉 통일신라시대의 기후는 한기와 난기가 교차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당해 시대의 식생 분포 양상이 그런 기후환경을 반영하며 구별될 만큼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환경 변화에 대한 생물 분포의 지각현상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처럼 문명사적 변천의 동력이 될
만한 극적이고 광폭적인 기후 환경 변화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마고원 이남 한반도 전역의 현존 식생에 대한 공간적 분포와 기후 환경은 큰 틀에서 맨 앞에서 서술한 내용과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개마고원을 기준으로 그 북쪽의 만주지역 및 한반도에서의 식생과 기후환경의 차이를 개략한 후,
식물사회학적으로 해양성 난온대의 지표종인 차나무(Camellia sinensis)를 통해 통일신라시대의 기후 환경을 살펴본다.
*자생自生(naturalized)
생명주기(life cycle)를 저절로 온전하게 완성하는 경우를 두고 적용하는 엄격한 생태학적 개념이다.
인간의 도움으로 삶을 지탱하는 것은 자생이 아니며, 인공人工(artificial, anthropogenic)이다.
따라서 어떤 생물이 그곳에 분포하는 데에는 자연적인 ‘자생’과 인위적인 ‘인공’의 분명히 다른 기원이 있다.
개마고원 이남의 한반도 식생은 세계적으로 그리고 동북아 속에서 이른바 “대륙형의 한반도아형韓半島亞型 온대림”으로
규정한다.
일반적으로 ‘한국형 냉온대 참나무림’으로 부르고, 식물사회학적으로 “신갈나무 - 철쭉나무군목”이라 한다.
본 삼림 식생은 개마고원 이남의 연평균기온 9℃ 이상인 지역에 발달하는데, 한반도 전체 면적의 87.6%를 차지한다.
한국형 냉온대 참나무림에 잣나무와 같은 북방분자를 포함하는 침활혼효림은 만주지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이춘시
(伊春市) 북동부지역에서 부터 남서쪽의 랴오둥반도지역까지 널리 분포한다.
‘대륙형의 만주아형滿洲亞型 온대림’으로 “신갈나무 - 잣나무군목”이라 부른다.
이 식생역植生域은 중국 만리장성의 동쪽 끝단 외곽에서 신석기시대 요하문명(서기전 6,500년~) 이후 한국인의 역사적
영역과 정확히 일치하는 공간이다.
개마고원 이남의 한반도아형 식생은 만주아형보다는 생물학적 진화 역사가 장구한데, 빙하기 영향(시간적 길이와 강도)
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식생은 숲을 구성하고 있는 식물종의 약 40% 이상이 목본木本으로 수목 종류의 다양성이 높고, 진달래종류,
제비꽃종류, 할미꽃종류 등이 풍부하고, 개나리종류는 여전히 자생한다.
한편 한반도 남부 지역과 최남단 도서지역은 난온대의 상록활엽수림(대표식생형 동백나무군강)의 잠재자연식생 영역이다. 지구온난화는 이 식생형들의 확장을 촉진하였다.
실제로 우리나라 중부와 남부 경계 지역에서 다양한 상록수종의 자생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반면에 높은 산지에 분포하는 아고산 및 고산 식생은 쇠퇴하게 된다.
이러한 기후 환경 변화에 따른 식생 다양성과 그 분포의 변화는 늘 동적으로 나타나며, 현재 개마고원 이남의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냉온대 식생은 신생대 제3기와 제4기의 고식생古植生으로부터 유래한다.
우리나라 현존 식생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신생대 제3기의 유존식물종遺存植物種인데, 한반도의 장구한 자연환경 변천사를 반영하는 결과이다.
즉 한반도의 삼림식생은 신생대 제3기의 삼림 상관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설명이 아니다.
최빙기의 한랭한 기후시대로부터 온난한 기후시대로 변화하면서, 즉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시대로들어서면서 저해발
해안지역과 한반도 최남단 지역에서부터 난온대 식생 분자들, 예를 들면 상록활엽수림을 구성하는 상록의 식물종이 유입
되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매우 한랭한 최빙기 동안은 한반도 전역 어디에도 난온대 식생 분자들은 생존할 수 없는 기후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약 4,000년B.P. 시점에는 한반도 동남단 지역에서 난온대 상록활엽수림의 실체가 꽃가루 연구로 확인되고 있다.
사료史料 속에 나타나는 자연 현상(서리, 가을 눈, 늦은 봄 서리, 봄 눈, 식물 동사凍死, 때아닌 여름의 서리와 눈, 겨울에
꽃 피는 일, 무빙無氷, 무설無雪 등)에 관한 기록을 근거로 통일신라시대를 춥고 건조한 기후(寒期와 乾燥期) 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현상은 통일신라국가 전역에 적용되는 기후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는 국지적 기상이변일 수도 있다.
추위에 약한 내동성耐洞性이 낮은 식물, 즉 그 분포 기원이 온난한 아열대 또는 난온대 분자들의 경우는 한 번의 서리
피해로도 완전히 사라져 버릴 수 있는 만큼 해당 지방에서는 큰 피해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난 온대성 상록수종은 그런 생태 과정을 통해 분포의 북방한계선을 가진다. 8
세기 초 김교각金喬覺(696~794)의 금지차金地茶나 흥덕왕(826~836)대에 이르러 성행했다는 기록에서처럼 통일신라시대
차문화의 중심에 있었을 차나무가 대표적 사례이다.
『삼국사기』는 대렴大廉이 828년경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차茶 씨를 지리산에 심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는 지리산이 위치하는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서 난온대 상록수종인 차나무가 자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그 이전부터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러 준다.
즉 지리산에 차나무가 이전부터 자생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대목이다.
조선 차문화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부풍향차보 扶風鄕茶譜』에서나 『동다기東茶記』에서도 우리나라 영호남 곳곳에
차가 나고, 특히 대숲 속에 나는 차가 효험이 있다는 사실도 전한다.
이러한 일련의 기록들은 오늘날 한반도 내에서의 차나무 현존분포 양상과 거의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동북아 최북단의 차나무 분포지인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한랭과 온난이 교차하는 겨울 환경 조건 덕택에
상록의 찻잎이 가지는 최고 수준의 맛과도 일치한다.
마치 고랭지 배추의 구수한 맛처럼, 분포 한계 지역에 사는 상록의 차나무도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그 잎 세포 속에 영양
물질을 풍부하게 저장하기 때문이다.
차나무의 현존 북한계 분포 개체군은 경주 기림사의 경우처럼 대(왕대,Phyllostachys bambusoides)숲 속에서나, 익산
함라산(N36°03′33″, E126°53′34″)의 졸참나무나 밤나무가 우점하는 낙엽활엽수림 속에서 관찰되는데, 겨울 추위를 극복
할 수 있는 미기후 서식 환경 조건을 가지고 있는 입지이다. 통
일신라시대 기후환경은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태 증거들이다.
최근의 지구 기후온난화는 차나무의 분포 확산을 가능하게 하고, 팔공산 해발고도 약 390m의 남서사면南西斜面의 개체
군처럼 그 분포 북상이 목격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하록성夏綠性의 덩굴식물이지만 난온대 식생 분자인 등나무(Wisteria floribunda)도 마찬가지이다.
경주 감포의 산지 남사면南斜面 굴참나무 숲 속에는 등나무 자생 개체군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막바지 200여 년 동안은 지난 1천년 기간 가운데에서 가장 한랭했던 시기라고 한다.
한랭 기후 사건의 빈번한 발생과 한발과 같은 극심한 가뭄 발생은 습윤한 해양성 난온대 식생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이러한 한랭과 한발의 기상적 또는 기후적 이변은 한반도 남부지방에서의 식물 생육기간 단축과 빈번한 냉해 발생을
의미하고, 곧바로 농작물의 소출 감소와 함께 차나무와 같은 난온대 분자들의 고사枯死를 뜻한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지역 그리고 경상북도 남부지역은 모두 온난한 생물기후대인 난온대 또는 냉온대 남부·저산지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러한 난온대 분자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고려국 흥성으로의 역사적 이행기와도 맞물려 있는 통일신라국의 쇠망은 통일신라 후반기에 있었던 그런 기후나 기상
이변 사태와도 잇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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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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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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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산 물
1. 자료
2. 식용 자원
3. 의생활 자원
4. 광물 자원
5. 옥석류와 칠
1. 자료
신라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무엇을 먹고, 입고 살았는지 구체적인 생활 모습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논밭에다 각종 작물을 재배하여 식용으로 하고, 대마를 재배하여 삼베를 만드는 재료를 확보하였다.
또 산야에 자라는 유실수를 관리하여 감, 배, 대추, 모과, 호두, 잣과 같은 과일이나 견과류를 얻고 뽕나무를 길러 누에를
쳤다.
그리고 꿀, 버섯, 약초도 채취하여 식용, 약용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뿐만아니라 강이나 바다에서 잡아 올린 각종 물고기와 조개류는 그들의 중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이러한 산물들은 개인의 식생활, 의생활 뿐 아니라 국가 경영에 필요한 중요 물자들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국가는 세금 수취를 위해 각 고을의 인적, 물적 자원을 자세하게 파악하여 국가 운영에 활용하였다.
『일본서기』 인덕기仁德紀(위첨자)의 인덕천황 41년(353, 조정 기년으로는 473)에는 백제가 처음으로 지방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각 지역의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작성된 촌락문서를 보면 촌락의 인구 수, 논밭 면적, 우마 수,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그루 수와 그변동
사항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수산물, 약재 그리고 광물 자원, 동물 가죽, 칠, 목재와 같은 수공업 제품의 원료 산지나 산출량을 기록한 문서도 분명하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지리지를 통해 각 지역에서 생산되던물자의 현황을 살펴 볼 수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리지로는 『세종실록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여지도서』(1757),
『대동지지』(1866)등이 있다.
이 지리지들의 토산조 기록은 기본적으로 조세 징수와 공물 수취를 위한 자료이다.
공물 수취는 토산물을 근거로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겠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여러 지리지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각 지역 생산물 상황을 가장 잘 반영한 자료를 선택해야 한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작성 연대도 가장 빠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해 자세하고 충실하게 각 지역 산물을 조사
하여 수록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서는 『세종실록지리지』 토의土宜, 토공土貢, 토산土産 항목에 실린 자료를 토대로 의생활, 식생활 관련 산물과
중요 수공업에 쓰이는 광물자원을 뽑아 <표 3>,<표 4>로 만들었다.
『동국여지승람』 이후 작성된 지리지에서 모든 산물을 토산조에 통합하여 기록한 것과 달리 『세종실록지리지』는
이를 세분하여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논밭에서 재배하는 작물은 토의조에 실었다. 벼, 오곡 등 주식용 곡물류와 대마, 모시풀과 같은 의생활용 작물이 그러하다. 그리고 돗자리, 종이, 칠 등 수공품을 만드는 자원도 논밭에서 재배하므로 토의조에 실었다.
뽕나무는 재배처가 논밭은 아니지만 중요 의복 재료이므로 역시 토의조에 실었다. 이들을 토의라고 해서 토공, 토산과
구분한 것은 해당 지역이 그러한 작물을 재배하기 적합한 환경을 가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세분된 구분은 이후의 다른 지리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세종실록지리지』 자료는 식생활과 의생활 자원에 해당하는 각 작물의 재배 환경을 추정하는 자료로서 활용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다.
『세종실록지리지』는 토공조에 곡물 이외의 식용 자원인 유실수(감, 밤, 대추, 호두 등), 버섯, 꿀, 어패류 등을 실었다.
이들은 산과 들, 강과 바다에서 채취하는 자원들이므로 논밭에서 재배하는 작물들과 구분하였다.
이들 역시 지역별 자연환경과 식생의 특성을 반영한다. 토산조에는 특정 지역에만 생산되는 산물로서 주로 금, 은, 구리,
철과 같은 광물자원이 기록되어 있다.
광물자원의 경우 조선시대 이전에 이미 고갈되어 버린 곳도 있을 것이고, 기술적 한계로 말미암아 일부만 채굴하고 땅속
깊이 묻혀있던 광맥이 고려나 조선시대에 다시 개발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산물 분포지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지리지 토산조 자료들을 활용할 때는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자연환경의 기본 틀에는 근본적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추세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2. 식용 자원
농산물
신라의 주산물은 농산물이다.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원시적이나마 작물 재배가 시작되었다.
한반도 각지의 신석기시대 집자리나 야외 노지에서 출토된 각종 곡물 알갱이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2012년에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신석기시대의 밭 유구까지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주민들은 조, 기장, 콩, 팥과 같은 잡곡을 주로 재배 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조와 기장을 가장 선호하였다.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경남 창녕비봉리 신석기시대 전기 유적에서 확인된 조, 기장, 팥이다.
그리고 경남 진주시 대평리, 부산 동삼동 패총 등의 신석기시대 중·후기 집자리에서도 조, 기장, 콩, 팥과 같은 각종 잡곡이 출토되었고, 진주 평거동 집자리유적에서는 밀과 쌀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볍씨나 쌀알이 출토되는 신석기시대 유적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다.
하지만, 신석기시대에는 곡물 자료의 95% 이상이 잡곡이며 벼 생산은 아직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명실상부 농경 중심의 생업 경제가 확립되었다.
그리고 조, 기장, 콩, 팥, 보리, 밀, 쌀, 들깨 등 각종 작물이 재배되었다.
고고학적으로도 신석기시대에 비해 탄화곡물이 출토된 유적의 숫자가 5배 가량 늘어난다.
특히 청동기시대가 되면 중부 이남지역에서는 논농사가 시작되어 벼 재배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기술도 발달하였다.
이를 뒷받침하듯 전체 작물 자료 중에서 벼나 쌀알 출토 유구의 숫자가 30%를 넘어선다.(표1)
그리고 이들의 절대 다수가 충청도와 경상도 지방에 분포한다.
경주 인근에서도 덕천리, 화천리 등지의 청동기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쌀, 조, 기장, 콩, 팥 등이 확인되었다.
10여 년 전만해도 탄화곡물은 주로 집자리유적에서만 발견되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각지에서 논과 밭 유구가 확인되면서 경작유구에서도 쌀과 잡곡 알갱이들을 찾아내고 있다.
이처럼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신라지역에서는 전통적인 밭농사와 더불어 벼농사가 균형있게 발달해 왔다.
이러한 고고학자료들은 문헌기록들과도 합치한다.
3세기 중반경 한반도 중남부지역 주민생활을 전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진한은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기르기에 적합하다.”고 하였다.
『양서』와 『수서』 신라전에도 신라는 토지가 대단히 비옥하여 논농사, 밭농사를 겸하였고 오곡 재배에 적합하다고
하였다.
실제 경산 임당동 저습지, 경주 금장동 밭유구에서는 쌀, 밀, 보리, 콩, 팥 등 탄화곡물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식리총, 황남대총 등 경주 시내 대형 고총 고분과 대구 불로동, 내당동 등지의 고총 고분에서도 장례시 함께 묻은
볍씨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농산물은 농민들의 식량이자 국가재정을 구성하는 핵심 자원이었다.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조세 자원은 벼, 콩, 조였다.
『주서』에 의하면 고구려는 조를, 백제는 쌀을 주요 세금으로 징수하였다.
일본 쇼소인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좌파리가 반문서佐波理加盤文書’에도 쌀과 콩(대두)을 세금으로 거둔 기록이
보인다.
보리나 밀은 저장 기간이 1년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조세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그렇지만 보리나 밀은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하는 봄부터 햇곡을 추수하기까지 일반 농민들의 중요한 양식이었다.
특히 밭이 늘어나면서 보리나 밀 재배 면적도 늘어났다.
고고학자료상으로도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서 밀, 보리 등 맥류 출토 비율이 크게 늘어난다(대부분 중부
이남지역 유적을 대상으로 함).(표1)
그리고 맥류와 더불어 콩, 팥 등 두류 재배 비율이 높아지는 반면 중부 이남지역에서는 기장의 재배 비율이 상대적으로
줄어 드는 것이 눈에 띈다.
표 1. 시대별 작물유체 자료 출토 비율표 (단위 %)
(안승모, 2013, 「한반도 출토 작물유체집성표」 『농업의 고고학』에 실린 자료를 토대로 작성)
신석기 청동기 초기철기 삼한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쌀 9 31 44 26 35 32 18 20
조 36 14 13 13 10 14 16 10
기장 31 13 8 2 12 5
콩, 팥, 두류 21 23 16 32 22 18 24 26
밀, 보리 2 18 26 21 30 36 29 38
논밭을 새로이 개간하고 경작 방식을 개선하는 것은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지름길이었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국가에서 철제 농기구를 만들어 널리 보급하고 관개시설을 축조, 수리하는 등 농업 생산을
늘리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저수지 축조와 같은 대규모 토목 사업을 실시할 경우, 그 크기와 동원된 인력, 담당자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쟁기나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생산력증대뿐만 아니라 논밭의 경관마저 바꾸어 놓았다.
조선시대의 지리지 중에서도 곡물 관련 기사를 가장 자세하게 수록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군현별로 그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는 작물과 유실수들을 기록하였다.
<표 3>은 토의조와 토공조에 나오는 산물들 중에서 식생활,의생활에 기본이 되는 자원들을 뽑아 표로 만든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오곡은 벼, 기장, 콩, 보리, 피를 가리키며 조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특정 작물에 치우치지 않고 벼와 각종 잡곡이 두루 재배될 경우 오곡이 난다고만 기록하였는데 전라도 지방의 거의
대부분이 그러하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벼를 오곡과 구분하여 별도로 기록한 지역이 가장 많은 곳은 경상도이고 그 다음이 충청도이다.
특히 경상도는 벼 이외에 조와 맥류의 재배 비중이 아주 높다.
경상도 다음으로 조를 많이 재배하는 곳은 경기, 충청 지역이다.
그리고 팥과 메밀 비중이 높은 곳은 황해도와 경기·충청지역이다.
곡물에 비할 수는 없지만 밤, 감, 대추, 잣, 호두 등의 과일과 견과류도 나름대로 중요한 식용자원이었다.
고고학자료를 보면 선사시대 이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 까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생활유적에서 가장 흔하게 나오는
것은 복숭아 씨이다.
그리고 복숭아만큼 흔하지는 않지만 밤도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경남 창원 다호리고분에서는 밤과 감이 출토되었는데 감은 제기에 담긴 그대로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의하면 마한에는 큰 밤이 나는데 배만큼 크다고 하였다.
이러한 과일과 견과류 유체는 삼국시대가 되면 고분보다도 우물이나 저습지와 같은 생활 유적에서 주로 발견된다.
통일신라 촌락문서에 보면 국가가 촌락별로 잣나무, 추자나무(토종 호두) 등 유실수를 관리한 기록이 있다.
잣이나 호두는 식용 이외 다른 용도로도 사용되었으므로 소중히 여겨졌을 것이다.
잣은 충남 부여 궁남지에서, 대추는 경남 진주의 통일신라 우물에서 출토된 사례가 알려져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배가 확인된 곳은 없는 것 같다.
『세종실록지리지』 토공조에 의하면 밤 산지는 강원도와 평안도에 집중되어있고, 대추 산지는 70% 이상이 충청도와
전라도에 집중되어 있다.
배 산지는 평안도가 가장 많고, 감 산지는 경상, 충청, 전라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그리고 잣은 강원도와 평안도에서 많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나온다.
수산물
바다나 강에서 채취하는 각종 산물들 역시 중요한 식생활자원이었다.
한반도 주변을 흐르는 해류의 분포는 신석기시대 이래 지금까지 거의 동일하여 각 해류를 타고 오르내리는 해산물의
종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선사시대 이래 한반도 주민들이 채취하였던 각종 수산물의 유체를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패총유적이다.
신석기시대 패총에서 자주 나오는 식용 패류는 굴, 홍합, 전복, 소라, 백합조개, 꼬막, 바지락 등인데 그중에서도 굴
종류가 가장 많다. 생
선의 경우, 대구, 방어, 참돔, 다랑어, 복어 등 종류가 다양하며 지역에 상관없이 상어류가 차지하는 비율이높다.
중서부 해안지대 패총에서는 준치, 민어, 조기 유체가 많이 출토되는데,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서해안 어류의 특징이
나타난다.
원삼국시대가 되면 내만성의 농어, 감성돔이 많고, 철제 낚시도구의 발달로 참돔, 상어와 같은 외양성의 대형 어류
유체가 늘어난다.
경남 삼천포 늑도패총이나 진해 웅천패총 등 남해안 일대의 원삼국시대 패총에서는 작살이 출토되어 고래잡이가 이루어
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남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묘사된 고래잡이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시대 남해안 지방에서 가장 많이 잡힌 생선은 돔 종류이다.
용원유적에서 출토된 어류 유체는 총 15종이며 참돔 48%, 전갱이 14.5%, 감성돔 7.3%, 농어6.5%, 기타 23.3%로 참돔이
가장 많다.
신라 석씨왕 시조인 석탈해 등장 설화를 보면 탈해가 탄 배가 동해안 아진포(감포 근처) 앞바다에 이르자 이를 발견한
노파가 나오는데 그녀를 ‘해척지모海尺之母’라 하였다.
해척지모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어로나 해양활동과 관련된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도 동해안에서 나는 어패류와 소금은 중요한 경제 자원이었다.
실제 경주 시내의 고총 고분에서도 심심찮게 조개나 생선뼈가 그릇에 담긴 채 출토되곤 한다.
황남대총 남분의 봉토 부분에서 제사용 음식물을 넣은 항아리가 출토되었는데 그 속에는 소, 말, 바다사자, 닭, 꿩,
오리와 같은 동물뼈와 참돔, 졸복, 다랑어, 농어, 상어, 조기와 같은 생선뼈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전복, 오분자기, 소라, 다슬기, 논우렁, 홍합, 재첩, 바지락, 백합조개, 가무락조개를 비롯한 각종 조개껍질도
확인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각 시대의 패총에서 출토된 어류 유체와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에 명기된 어류가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표2)
그렇다면『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어패류 역시 활용도가 높은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경상도 동부와 남부 그리고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는 대구, 상어, 문어, 연어, 홍합이 많이 잡히며 충청,
전라 해안지역에서는 민어, 도미, 조기, 숭어, 뱅어, 홍어, 전어가 많이 난다.
그리고 담수어인 은어는 90% 가량이 경상도에서 잡히고 그 다음이 전라도이다.
특히 경상도에서 나는 물고기 중 빈도수가 가장 높은 것이 은어이다.
표 2.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물조 수록 어류(김건수, 1999, 『한국 원시·고대의 어로문화』, 학연문화사. 89쪽을
참고하여 수정)
지역
어류
해수어 담수어
경상도 남해안 참돔, 대구, 청어, 가오리, 숭어, 조기 산천어, 붕어
동해안 참돔, 숭어, 웅어, 뱅어, 농어, 청어, 대구, 방어, 광어, 가오리, 상어 은어, 연어, 붕어
경기도 웅어, 병어, 조기, 간다리, 농어,민어, 뱅어, 숭어, 전어, 문절망둑, 삼치 은어, 붕어, 잉어, 메기
충청도 웅어, 병어, 가오리, 조기, 간다리, 농어, 민어, 뱅어, 숭어, 준어, 전어,
문절망둑
전라도 서해안 조기, 광어, 준어, 웅어
남해안 참돔, 조기, 숭어, 농어, 병어 은어
강원도 삼치, 방어, 광어, 고등어, 대구 은어, 연어, 송어,
산천어, 메기
황해도 숭어, 가오리, 뱅어 붕어, 잉어, 메기
평안도 숭어, 뱅어 메기
제주도 옥돔, 문절망둑, 갈치, 고등어, 전갱이 은어
소금
어패류 이외에 바다에서 나는 식생활 필수품은 소금이다.
소금을 생산하는 자원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바닷물을 이용하는 해염海鹽만 생산하였던 것으로추정하고
있다.
실제 모든 소금 산지가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 일대에 분포한다.
조선
시대 제염장의 위치와 규모 등 소금 생산에 대해 가장 자세한 내용을 전하는 것은『세종실록지리지』이다.
제염장에서 소금을 찌거나 굽는 염부鹽釜를 염분鹽盆이라 부르는데 때때로 염전 기타 제염장에 속하는 설비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리고 염분이 있는 곳을 염소鹽所라 한다.
염분의 숫자나 염소의 숫자를 통해 조선 전기 소금 산지 규모를 살펴 보면 동해안에서는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많은 소금이 생산되었다.
그중에서도 울진(46), 삼척(40)은 염분의 숫자가 40개 이상이고 평해는 61개나 된다.
강릉, 양양도 20 개가 넘는다.
함경도의 경우 안변, 함흥을 비롯하여 해안 지역 거의 대부분에서 많은 양의 소금을 생산하였다.
옥저에서 소금을 만들어 고구려에 바치던 전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서해안에서는 경기도 남양(염소 44)과 충청도 당진(염소 35), 전라도 나주(염소 35)가 중심이다.
전남 남해안 지역과 경남 남해안 지역에서도 곳곳에 소금 산지가 있지만 동해안이나 서해안에 비해 생산 규모가 훨씬 작다.
소금 제조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 석우로昔于老전에 우로가 왜 사신에게“왜왕을 염노鹽奴, 즉 소금 만드는 일꾼으로
만들겠다.”라고 희롱하여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신라시대에도 염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신라말~고려초 사찰인 전남 곡성에 있는 동리산 태안사라는 절의 재산 목록에 논밭, 노비와 함께 두원지荳原地라는 곳에
있는 염분 43결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 872) 또는 염분 1개소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처럼 소금 제조 시설은 논밭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자산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소금을 세금으로 거두어 보관하는 창고를 염창鹽倉 또는 염고鹽庫라 하였다.
애장왕이 시해를 당하던 그 해에 경주 서쪽 서형산성에 있는 소금 창고鹽庫가 울었는데 소 우는 소리와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애장왕 10년조).
일반 물자 창고와 다른 소금 창고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재
신라에서도 질병 치료에 필요한 침술과 약재 등 의학 지식이 발달하였다.
672년(문무왕 12) 당 나라에 보낸 조공품 중에 침 400매, 우황 등이 들어 있고, 효소왕 원년(692)에는 의학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본초경』·『침경』 등의 의학 관련 서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그리고 신라의 약재는 일본에도 수출되었다.
752년(경덕왕 11) 왕자 김태렴이 일본에 가져간 물품 중에 각종 향료와 약재류 이름이 나온다.
그 중에서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약재류로는 인삼, 백부자, 방풍, 복령, 우황, 꿀 그리고 안식향 등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자연에서 채취하는 약재는 재배하는 약재와 구분하여 토공조에 실었고 그 종류도 아주 많다.
<표 3>에 실은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일본에 수출했던 일부 약재와 녹각, 녹용의 산지를 뽑은 것이다.
인삼은 전 지역에서 두루 채취되는 편이며 경기도(1곳), 황해도(3곳)가 상대적으로 적고, 경상도(13곳)는 중간 정도이며
강원도(20곳), 충청도(25곳), 평안도(23곳)가 많다.
방풍防風은 경상도에서 아주 많이 나며 강원, 경기지역은 거의 없다.
반면 백부자白附子 산지는 경상도에서는 성주, 선산, 고령, 용궁 4곳에 불과하며, 2/3 이상이 황해도와 평안도에 있다.
복령茯笭은 큰 소나무 뿌리 옆에서 자라는 약재인데 산지는 강원도에 집중되어 있다(21곳).
복령의 일종으로 백복령白茯笭이 있는데 산지의 절반 이상이 경주를 비롯하여 경상도 각지에 분포한다(18곳).
그리고 안식향 나무는 강원(7곳), 충청(9곳) 등지의 삼림이 우거진 지역에서 주로 자라며 경상도에서는 영산과 안음현
두 곳이 있다.
작설차는 경상남도(8곳), 전라도(11곳)에서만 난다. 전라도는 작설차 이외에 일반 차를 재배하는 곳이 9곳이나 되어 차
생산의 중심지였다.
3. 의생활 자원
경제활동에서 농업 생산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섬유 자원이다.
신라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누에를 길러 명주실을 뽑고 대마를 재배하여 삼베를 짰다.
『삼국지』 동이전 기록에 마한과 진한에서는 이미 누에를 길러 비단을 짰다는 기록이있다.
그리고 『양서』 신라전에도 신라는 뽕나무와 마를 많이 심어 비단과 삼베를 짰다고 한다.
또 『주서』 백제전에는 백제는 명주실(絹絲)과 삼베(麻)를 세금으로 거둔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신라에서도 삼베와 명주는 중요 징세 품목이었다.
통일신라시대 촌락문서에 의하면 촌락마다 논밭과 구분하여 1결 남짓한 넓이의 마전麻田이 별도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삼베를 관리하는 마전麻典이라는 관부가 있었다.
마는 재배뿐만 아니라 베고, 쪄서 실을 꼬고, 풀을 먹이는 등 대부분의 작업을 공동으로 하였다.
신라시대의 8월 한가위 풍속으로 가배嘉俳라는 것이 있는데 공동 길쌈 작업에서 유래한다.
경주 6부의 부녀자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 음력 7월16일부터 8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저녁마다 넓은 마당에 모여 길쌈을
하고 최종 집계하여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며 노고를 푸는 풍습이 그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조선 초기에는 대부분의 군현에서 마가 재배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경상도에서도 마는 곳곳에서 재배되었으나 모시는 한 곳도 없다.
상대적으로 충청도는 마 재배지역이 적은 반면(6곳) 모시 생산 비중이 높다.
이와 달리 전라도는 거의 전 지역에서 마가 재배되고 (49곳), 모시를 재배하는 군현 수도 가장 많다(18곳).
신라에서는 각종 비단을 생산하였고 그 중에는 일본이나 중국에까지 수출되는 것도 있었다.
834년(흥덕왕 9)에 내린 신분별 복식에 관한 규정을 보면 염색이나 짜임새, 문양 등에 따라 비단의 종류가 아주 다양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국가는 촌락마다 몇 백 그루씩 뽕나무를 심어 기르게 하고 이를 관리하였다.
그리고 세금으로 거둔 명주나 생사를 원료로 삼아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영수공업 공방에서 비단을 염색하고 직조하였다.
비단 생산을 주관하던 관부로 염궁染宮(염색을 담당하는 곳), 금전錦典(비단 짜는 곳), 조하방朝霞房(조하문의 비단을
짜는 곳) 등을 두었다.
명주 생산과 관련하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뽕나무, 산뽕나무가 잘 자라는 곳을 기록하였는데 뽕나무 재배처로
기록된 곳은 양잠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표 3>을 보면 황해도를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이 뽕나무 재배에 적합한 지역으로 나온다.
산뽕나무는 누에의 사료와 가구나 조각재 원료로 쓰이는데 충청도에만 집중 재배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4. 광물 자원
금과 은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마한이나 진한 사람들은 금은제 장신구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기록을 뒷받침하듯 삼한 시기 유력자의 무덤에서 금은제 장신구는 찾아 보기 어렵다.
금박 씌운 구슬이 소수 있으나 중국 군현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경기도 김포 운양동유적의 3세기 무덤에서 금제 귀걸이가 나왔으나 이 역시 수입품이다.
반면 목걸이나 귀걸이 또는 의복을 장식했던 유리나 수정제 구슬들이 수십, 수 백알 씩 출토된다.
그러나 4세기 이후 특히 신라 마립간기에 들면 왕족, 귀족, 지방의 유력 수장들의 위세품은 금공제 일색으로 바뀐다.
그들은 위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금, 은, 금동으로 만든 관, 관모, 허리띠, 귀걸이, 반지, 팔찌, 도검류 등 각종 위세품과
장신구들을 착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물품들은 주인공이 죽은 후 무덤에 함께 부장되었다.
경주 시내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된 금, 금동제 관모류만해도 30점 가까이 된다.
경주 황남대총 남분, 북분에서는 순금으로 만든 고배가 7점, 금제 대접이 9점이나 출토될 정도로 신라인들은 금을 아주
좋아하였다.
마립간기, 즉 고총 고분을 축조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불교가 융성하면서 무덤 축조에 투입되던 많은 인적, 물적 자원들이
사찰로 옮겨갔다.
『삼국유사』의 기록에의하면 황룡사장육존상 제작에 황금이 10,198분分, 보살 2구의 제작에 황금 10,136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무왕대 명랑법사가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절을 세우고 탑과 불상을 만들었는데 황금이 1,000량이나 들었으며
광채가 휘황하여 금광사金光寺라 하였다는 설화적 이야기도 전한다.
이처럼 불상, 사찰 장식에 많은 양의 금이 소비되었다.
이런 연고로 신라는 오랫동안 황금의 나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많은 황금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채취하였는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어디에도 금 산지로 기록된 곳은 없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 경북 금산군 토산조에 황금소所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이곳에서 금과 관련된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뿐이다.
어쩌면 금이 생산된 적이 있으나 이미 고갈되어 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이밖에 『세조실록』과 『태종실록』에 소량의 황금을 세공으로 바쳤다고 기록된 지역들이 있다.
<표 4>에 수록된 안동, 봉화, 예안, 합천, 산음 지역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지역들에서는 정부가 금 생산을 독려하는 과정에서 하천 변에서 2~5냥 정도의 금을 채취하여 바쳤다고 했을
뿐 생산량이 아주 적어서 지속적인 생산이 이루어졌는지도 의문이다.
채금에 대한 열기는 조선 후기에도 이어졌고 일제 강점기에는 상주, 성주, 의성, 김천, 칠곡 등지에서 금광산이 개발되
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신라 시대와는 장비나 채광 기술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무튼 통일 이전 시기 신라의 금 산지는 의문에 싸여 있다.
은銀 역시 마립간 시대 이후 관, 관모, 허리띠, 반지, 도검류, 그릇 등의 위세품이나 사치품을 만드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상북도에서는 인동에서, 경상남도에서는 김해에서 은광석이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태종대에 춘양에서 은채광을 했다는 기사가 보이고 신녕현 속현에 이지은소梨旨銀所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신라에서 다량 소비된 은이 어디에서 확보되었는지 금산지와 마찬가지로 의문이다.
고려에서는 국가에서 필요한 수공품을 공급하기 위해 금소, 은소, 동소, 철소 등을 설치하여 광석을 채굴하였으나 그
소재지가 알려진 곳은 일부에 불과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금 산지가 표시된 곳은 많지 않으며 강원도 4곳(회양, 정선, 춘천, 금성), 함경도 3곳(단천, 안변,
영흥)이 전부이다.
그러나 정부가 금광 개발을 주도하면서 곳곳에서 금이 채취되었다는 기록을 남긴 곳이 크게 늘어 났다.
조선 건국 이후 성종대까지 전국에 금산지 33개소가 개발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채광사를 파견하여 금을 채취한 곳으로 기록된 지역의 절반 가량이 경기(2곳), 충청(3곳), 전라(10곳) 지역에
분포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많은 곳은 전라도로 무려 10곳이나 된다.
하지만, 전라도 소재 8개 읍에 부과된 세공액은 4냥에 불과하다.
이처럼 생산량이 아주 적은 지역은 『세종실록지리지』 토산조에는 아예 기재되지 않았다. 우
여곡절 속에서도 금광 개발은 꾸준히 지속되어 18세기 후반에는 평안도, 함경도를 중심으로 사금광 채굴이 널리 이루어
졌고 , 18세기 말~19세기 초에는 개인이 채굴하거나 몰래 채굴하는 사례가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그 열기는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졌다.
은의 경우,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은광석이 나는 곳으로는 충청도 영춘, 보은, 청주(은소), 황해도 곡산, 평안도 가산,
경상도 인동과 김해 등 소수에 불과하다.
금과 마찬가지로 태종, 세종대를 거치면서 정부가 채광을 독려함에 따라 그 숫자가 늘어 났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충청도(5곳)에 은산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16세기 이후에는 민간에 의한 은광 개발이 부분적으로 가능하게 되어 생산이 활발해졌다.
은은 납鉛과 동일 광석에서 생산되었는데 병자호란(1636) 이후에는 무기 제조 원료로 납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은광산도
적극 개발되었다.
그러므로 은산지는 납鉛산지 추정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
한반도산 은광석에는 다량의 납이 함유되어 있어 은 함유량이 가장 높았던 함경도 단천은광조차도 납:은 비율이 80 : 1이
었다고 한다.
고대사회에서는 청동기 제작에 납이 많이 사용되었다.
청동 제품을 주조할 때 구리의 용융 온도를 낮추고 유동성을 좋게 하기 위해 주석을 첨가하는데 주석은 값이 비싸고
산지가 제한되어 대신 납을 많이 사용하였다.
구리
경주, 대구 지역은 한반도 세형동검문화를 마지막으로 크게 꽃피우면서 그 전통을 이어간 곳이다.
대동강, 금강, 영산강 유역이 한반도 세형동검문화의 양대 중심지로 번성하였으나 서기전 2세기 말 이후 그 중심지가
대구, 경주 지역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 때문에 영남 지방에서는 철제 무기가 등장한 이후에도 세형동검 등 청동으로 만든 무기와 거울들은 수장들의 권위의
상징물로 여전히 사랑을 받았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관련 청동기들은 대부분 구리, 주석, 납을 섞은 삼원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구리의 구체적 산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청동기 원산지를 추정하기 위해 청동기에 포함된 납의 동위원소 비율을 분석하는 방법이 있다.
납 동위원소 비율 분석 결과를 보면 한반도 출토 세형동검의 원료는 한반도산, 중국 화북산, 중국 화남산 등으로 다양하다. 마립간기에 들어와서도 청동제 용기류, 금동제 위세품 제작 등 청동의 수요는 적지 않았다.
그리고 6세기 이후 불교가 융성하면서 불상, 범종, 불구 제작에 많은 양의 구리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청동제품의 원산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에 있는 구리 산지는 울산, 언양, 창원 3곳 뿐이다.
반면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전국의 자연동 산지는 모두 11개소인데 충청도가 10곳, 전라도가 1곳으로 충청도에
집중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기도 1곳, 충청도 1곳, 전라도 6곳으로 전국 8개 자연동 산지 중 7곳이 충청, 전라 지역
에 분포한다.
자연동은 구리 광상에서 나는 나뭇가지 모양의 홑원소 물질 상태의 구리인데 조선시대에는 이를 한약재(산골)로 취급
하였다.
이러한 자연동 산지는 구리산지를 추정하는 데 유용한 자료이다.
동광은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도 거의 개발되지 못한 채 있었으나 일본산 구리의 수입량이 감소하고 1740년(조선
영조 14)의 은점銀店 개설을 규제하는 법이 시행되면서 이에 자극을 받아 동광 개발이 활발해졌고 이후 지속적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표 4>에 ‘동광(유)’으로 표시된 곳은 거의가 18~19세기 전반기에 동광이 개발된 곳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새로이 동광이 개발된 대부분 지역이 조선 전기 지리지에서 자연동 산지로 수록된 지역이다.
철
국가 운영이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철은 아주 중요한 금속이었다. 특히 고대사회에 있어서 철 자원과 철을 다루는 기술은
그 사회의 군사력과 생산력을 좌우하고 정치, 사회적 발전 속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서기전 3~2세기 경 한반도 북부지방에 처음으로 철기가 등장하였고, 서기전 1세기 이후가 되면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철
기가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진·변한 지역은 철생산으로 유명하여 이곳에서 생산된 철은 마한, 낙랑, 대방, 예, 일본 열도에까지 수출되었다.
당시 철은 물자를 교역할 때 화폐처럼 사용될 정도로 국제적인 교환가치를 지녔다.
진·변한 소국들 중에서도 특히 철생산과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한 것은 진한 사로국과 변진 구야국이었다.
사로국이 진한소국연맹체의 맹주로 성장하는 배경에는 철자원 확보와 철생산 기술이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사로, 사벌, 서벌, 서라벌 등 신라의 국호나 왕성의 어원이 쇠벌이라는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경주 일원의 대형 목관묘, 목곽묘 유적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은 양의 철기가 출토된다.
예컨대 경주 사라리(130호, 판상철부 70점), 덕천리(120호 목곽묘, 철제 창 16점), 구어리유적(1호 주곽, 철제 창 55점,
주조철부 40점)에서는 하나의 무덤에서 수십 점의 철정이나 철제 창들이 무덤 구덩이 바닥에 관대처럼 깔려 있다.
이러한 추세는 마립간기에 들면서 극대화되어 황남대총 남분에 부장된 철제 창만 해도 500 여점이 넘는다.
이처럼 철은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서 신라 왕권의 권력 집중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많은 철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원료를 어디에서 채취했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제련 철광석, 사철, 토철 등의 원광에서 1차적으로 철을 추출해내는 공정
정련 1차 제련 공정에서 생산된 철괴 등을 정련로에서 재차 가열, 단타하여 불순물을 제거하는 공정,
판상이나 막대기 모양의 철소재를 만들어냄
단야 정선된 철소재를 가열, 단타하여 단조 철기를 제작하는 공정
용해 선철을 완전히 녹여 거푸집에 부어 주조 철기를 만드는 공정
배소 금속을 녹는 점 이하로 가열하여 물리, 화학적 성질을 변화시키는 일. 철광석 조직에 균열을 만들어 환원 및 파쇄를
쉽게 하고 중량을 줄여 운송을 용이하게 함
철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광석을 채굴하고 제련, 정련, 단야 또는 용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제련 과정은 대부분 철광석이 채취되는 인근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반면 정련이나 용해 작업은 제련을 거친 철괴를 소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철광석 산지가 아닌 지역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철광석 산지를 알기 위해서는 제련 유적의 소재지를 파악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굴, 조사된 초기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 제철 관련 유적은 100여 개 소에 이르며 경상도
지방만 해도 28개 소나된다.
하지만, 28개 중에서도 제련 관련 유적의 숫자는 10개 미만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주부에 속한 감은포에서 사철이 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경주 덕천리에서 철광석, 철괴, 제련로 등 제철 관련 유물이 확인 되었는데 5~6세기 단계의 것이고 규모가 크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사로국 단계 이래 신라가 활용한 최대의 철광석 산지는 경주시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약25km
떨어진 울산 달천광산이다.
이곳에서는 1~3세기 단계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채광 유구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의 채광 관련 선로도 함께 확인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울산은 철, 수철(무쇠), 생철 산지로 기록되어 있다.
사로국이 울산 달천의 철광석 산지를 장악한 것은 석탈해 집단의 등장과 관계가 있다.
탈해집단은 자신의 선조가 야장이라고 자처할 만큼 선진적인 철기 제작 기술을 보유하였다.
그리고 탈해니사금대에 거도居道라는 사람이 마숙馬叔놀이를 가장하여 우시산국于尸山國을 정벌하는 등 울산 방면의
철광석 산지를 확보해 나갔다.
달천광산의 철광석은 비소가 함유되어 덕천리유적 출토 철광석과는 성분을 달리한다.
경주 시가지 북쪽 황성동에는 1~4세기 단계의 대규모 제철 관련 유적이 있다.
이곳에서는 제련 공정을 제외한 정련, 단야, 용해, 제강 등 각종 작업이 모두 이루어졌고 생산규모도 아주 컸다.
철광석 산지에서 1차 제련 과정을 거친 철괴를 왕성 지구로 운반해서 각종 철기를 생산한 것이다.
철광석 분석 결과 황성동 제철단지에서 사용한 철 원료는 달천광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밖에도 월성 해자 부근, 성동동, 용강동, 덕천리(경주) 등지에서 단야 작업이나 용해 작업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소규모이다.
울산 이외에 제련 공정과 관련된 유물들이 확인된 대표적 유적으로 김해 하계리유적(4세기), 여래리유적(6세기 전후),
우계리유적(6~7세기), 창원 봉림동유적(4~5세기), 밀양 사촌유적(6~7세기), 울산 중산동유적(3~4세기), 부산 지사동
유적(4세기),양산 물금유적(5~8세기) 등이 있다.
그리고 울진 덕천리에서는 배소로와 배소된 철광석이 확인되어 이곳에서도 제련 공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밀양, 김해와 창원은 사철 산지로, 밀양은 석철 산지로 기록되어 있다.
<표 4>에서 보듯이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을 합하면 경상도에서 철광석이나 사철 등이 나는
곳은 18곳 정도가 된다.
백제 지역에서도 4세기 중엽경에는 철 제련이 이루어졌다.
백제 근초고왕은 왜와 외교적, 군사적으로 밀접한 교류관계를 맺으면서 철정 모양의 철소재를 왜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 당시 『일본서기』 기록에 나오는 백제의 곡나谷那철산이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
만, 백제시대의 대규모 철생산 유적으로 충북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유적이 유명하다.
그리고 충주 일대에도 4세기 백제시대의 제련 유적이 여러 곳(대화리, 두정리, 칠금동, 하구암리 등)에 분포한다.
충주지역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철산지로 이름 난 곳이다.
이곳에 고려시대의 다인철소가 있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부터 조선후기 지리서인 『여지도서』·『대동지지』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철이 생산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표 4>에서 보듯이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시대 철산지는 전국 각지에 분포한다.
조선왕조 정부는 철 생산에 적극적이었다. 1
5세기 중엽의 상황을 보여주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 67개소의 철산지가 실려 있다.
여기에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 기록을 합하면 숫자는 더 늘어 난다.
경상도
18곳, 강원도 23곳, 충청도 16곳, 전라도 10곳, 황해도 11곳, 함길도 12곳, 경기도 1곳, 평안도 3곳 등으로 전체 94개소가
된다.
하지만 고대에는 철광상이 있더라도 채광 기술과 도구의 미비로 접근에 한계가 있다.
그리고 철광산지 중에는 고대에 이미 고갈이 되어 버린 곳도 있었을 것이다.
5. 옥석류와 칠
옥석
삼한 지역의 주민들은 금은 대신 각종 유리구슬이나 수정으로 만든 조각품들을 장신구로 즐겨 착용하였다.
초기의 주산알 모양이나 대추 모양 수정제 장신구들은 대부분 낙랑으로부터 수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토산 수정석을 채취하여 곡옥 모양으로 가공하여 목걸이 장식으로 하였다.
김해 양동리 322호 무덤에서는 수정제 곡옥이 120여 점이나 출토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고총 고분시기에도 이어져 마립간기의 신라 왕족이나 귀족들은 유리구슬 이외에 청옥, 황옥, 마노 등 각종
색깔의 옥석류로 만든 장신구를 착용하였다.
이러한 옥석류 중에는 수입품도 있었을 것이다.
<표 4>에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에 수록된 청옥, 황옥, 백옥, 수정옥 같은 옥석류 산지를
표시하였다.
이는 각종 장신구의 원료 산지를 추정하기 위한 것이다.
수정석 산지는 경상도 순흥과 풍기, 충청도 회인, 아산, 황해도 토산이 전부이다.
마뇌석(마노) 산지는 경상도 울산과 평안도 안주 두 곳이다.
반면 각종 색깔의 옥석 산지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 많이 분포한다.
칠
칠은 공예품의 중요 원료로 옻나무 껍질에서 흘러내리는 액을 채취하여 만든다.
옻칠은 일단 건조되고 나면 내화(열)성·내수성·방부성·방충성·내산성이 강하여 활용 가치가 높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옻칠을 한 나무칼집이나 칠기들이 제작되었다.
경남 창원 다호리유적에서는 칠기뿐 아니라 철제따비의 나무자루나 부채 손잡이와 같은 나무제품에 옻칠을 한 유물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서기전 1세기경에 이미 칠의 효능을 익히 알고 다양하게 활용한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칠전漆典이라는 관부를 두어 칠의 원료나 칠기 제작을 전담하였다.
백제에서도 서울 석촌동고분에서 붉은 색 칠기가 발견되었고, 공주 무령왕릉에 부장된 족좌(발받침)와 두침(머리받침)
에도 채색칠이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칠은 토공조에 실려 있다. 옻나무 숲은 양전의 대상으로 세조 13년에 군현의 크기에 따라 그루
수를 정하여 기르게 하고 연말에는 숫자를 계산하여 조정에 올리게 하였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함경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서 칠을 생산했고 특히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
에서는 거의 모든 군현에서 칠을 공물로 바쳤다.
표 3. 『세종실록지리지』 산물 자료 일람표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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