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막바지 휴전협상이 벌어지고 있던 판문점에서 미군 최고 지휘관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오른쪽 첫째가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셋째가 그해 2월 한국에 부임한 맥스웰 테일러 미8군 사령관이다. 테일러는 휴전 뒤의 한국군 증강과 사회·경제적 건설에 관심을 보였다. 사진 전문 잡지 라이프에 실렸다.
앞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맥스웰 테일러(1901~1987) 신임 미8군 사령관 말이다. 테일러는 1953년 2월 한국에 부임했다. 최근 한국에 소개된 ‘밴드 오브 브러더스’란 미국 드라마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활약을 펼치는 공수부대원들의 실제 이야기가 축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 공수부대원들이 속한 부대가 미 101 공수사단이다. 새로 한국에 온 신임 미 8군 사령관 테일러 장군이 그 공수부대를 이끌었던 당시의 사단장이다. 그에 앞서 미 8군 사령관을 지냈고, 이어 도쿄의 유엔군총사령관을 맡았던 매슈 리지웨이(1895~1993)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82 공수사단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 뛰어들었던 미 양대 공수사단의 맹장(猛將)이 번갈아 한국 전선을 찾아온 셈이다.
나는 곧 한국을 떠나는 제임스 밴플리트(1892~1992) 장군과 함께 그 해 2월 어느 날 여의도 비행장으로 가서 한국에 부임하는 테일러 장군을 맞이했다. 그는 비행기에서 내려 반갑게 밴플리트 장군과 인사한 뒤 나와 처음 대면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수사단을 이끈 지휘관답게 강인하다는 인상과 함께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아주 짜임새가 있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미군의 고급 지휘관들은 오랜 훈련을 거쳤고, 다양한 전투 경험을 골고루 소화한 엘리트 군인이었다. 그는 그중에서도 매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일선 지휘 경험도 풍부했지만, 행정(行政)에도 탁월한 면이 있었다.
지휘관으로서의 그는 이런 철학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휘관은 놀라는 일이 없어야 한다(Commander never surprise).” 그는 늘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지휘관으로서 오랫동안 쌓은 전투 경험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곰곰이 뜯어보면 그런 소신을 지닌 테일러 장군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지휘관은 놀라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그 말은 ‘철저한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눈앞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인 셈이다. 준비를 하는 지휘관과 그렇지 않은 지휘관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사이만큼 넓고 크다.
2001년 미국에서 방영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의 포스터.
수많은 부대원의 목숨이 걸려 있는 전투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지휘관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갈 수 있다. 설령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빈틈없는 준비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부대를 재건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닥치더라도 준비성이 뛰어나면 놀라지 않으면서 이에 대처할 수 있다. 테일러는 그 점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미 육군의 토대를 구축한 조지 마셜(1880~1959)을 닮은 지휘관이었다. 마셜은 미 육군을 세계 최강의 군대로 일으켰고, 내로라하는 육군 장성들을 직접 키워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었다. 군인으로서 행정적, 또는 정치적 감각과 지식을 갖춘 군정가(軍政家)라고 해야 옳다. 마셜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언자로 지내면서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의 부흥계획인 이른바 ‘마셜 플랜’의 주창자였다는 점이다. 그를 결코 단순한 군인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셜은 군인 출신으로서 유럽의 경제부흥 정책을 입안해 실행함으로써 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군사(軍事)에서 갈고 닦은 전략적 안목(眼目)을 행정과 정치 일선으로 옮기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테일러는 그런 면에서 마셜을 닮은 인물이다. 그는 미8군 사령관을 지낸 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 미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차례로 맡았다가 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에 임명됐다. 7개 외국어에 능통하고 일본 등의 해외 파견 무관(武官)을 지내면서 닦은 행정가로서의 자질은 곧 한국 땅에서 발휘될 조짐이 있었다.
재능은 탁월했고, 자질 또한 골고루 갖춘 그는 한국을 보는 눈이 달랐다. 그의 전임자였던 밴플리트 장군은 전쟁 중의 한국군 증강에 관심이 많았던 한국의 은인(恩人)이다. 그러나 테일러는 휴전 뒤의 한국을 보고 있었다. 곧 닥칠 휴전이었다. 더구나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이 죽으면서 그 휴전은 코앞에 닥친 분위기였다. “지휘관은 결코 놀라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그 신념을 지닌 테일러는 당시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또한 미국이 한국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에 철저했다. 한국군의 능력을 발 빠르게 증강시켜 한반도의 공산군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미군의 지원으로 한국군 실력을 증강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꾸준하게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군 증강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테일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은 워낙 급하게 돌아가는 한국 전선을 지탱하기 위해 정신 없을 정도로 가쁘게 국군 전투력 증강을 서둘렀다. 그것은 그 당시의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미 8군 신임 사령관 테일러는 휴전 뒤를 내다봐야 했다. 준비성이 많은 그는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나는 그가 전임자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휴전회담은 스탈린의 사망 뒤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중요한 변화였다. 시간을 질질 끄는 듯한 인상만을 주던 공산 측 대표들의 움직임과 태도에 상당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휴전은 곧 현실로 닥칠 기세였다. 준비성이 강한 새 미8군 사령관 테일러 장군의 성격을 잘 아는 것도 중요했다. 그와 호흡을 맞춰 휴전 뒤의 한국군 증강 작업 등 현안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라는 말이 괜히 생기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바뀌면 그 전임자와는 다른 성격 또는 업무 스타일 등 때문에 어느 정도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런 충돌은 아주 일찍 생겨났다.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