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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성찬 예식 특강
새 언약의 피
말씀/눅22:1-20
요절/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신 마지막 만찬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앉아 만찬을 드는 모습이 상당히 멋있어 보입니다. 만찬 테이블이나 방도 호텔 연회석처럼 잘 꾸며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일 뿐 실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신 마지막 만찬 장소는 지극히 초라한 다락방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마지막 만찬은 예수님이 어디 멀리 여행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과 기분 좋게 먹고 마시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자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는 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 흘려주신 이 일의 영적 의미를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심판하여 죽게 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집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때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갔습니다. pass over. 유월절은 넘을 유(逾), 넘을 월(越), 절기 절(節).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가는 절기라는 의미입니다. 어린 양의 피 때문에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출애굽하여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노예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을 잡습니다. 그런데 이번 유월절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온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깨닫게 하고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일 방책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겨줄 방도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의 간계와 유다의 음모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게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고자 만찬 자리를 준비시켰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만찬석상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여기 ‘고난을 받기 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며 돌아가시기 전을 말합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자신의 가족을 비롯한 신변과 주위를 정리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계획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일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보통 죽음도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한 고통을 치르며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무슨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말씀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더러운 발까지 하나씩 하나씩 일일이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드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예수님이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또 예수님이 앞으로 당하게 될 십자가의 의미를 어찌하든 꼭 가르쳐주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자신들을 애굽의 종 되었던 데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또 자녀들에게 유월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이 땅에서의 유월절은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양을 잡고 피를 뿌렸던 유월절 의식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대속제물이 되셔서 자신의 피를 뿌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신 예수님은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떡도 가져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신이 당하게 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떼어주시는 떡과 부어주시는 포도주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자신의 살을 떼어주어 우리에게 영생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19절을 읽겠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떡을 떼어주셨습니다. 떼었다는 것은 영어로 break, ‘부스러뜨리다’, ‘깨뜨리다’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이 부서지고 깨질 것을 암시하십니다. 자신의 몸이 채찍에 맞아 부서지고 깨질 것을 아셨습니다.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길 것을 아셨습니다. 바로 그 부서진 몸을 우리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몸이 우리를 위한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51절은 말씀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떡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그 가치와 효력이 영원함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때가 되면 반드시 썩고 부패하여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떡은 변하지 않습니다.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콩이 있으면 그 떡을 우리는 콩떡이라고 부릅니다. 빵 안에 팥이 들어 있으면 우리는 팥빵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생명의 떡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 떡을 우리에게 주십니까? 만나처럼 하늘에서 뿌려줍니까? 배민을 통해 배달해줍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떼어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열두 제자들 중 한 명은 이미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하는 그 순간에도 식탁 밑에서 대제사장들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을 배신자입니다. 또 다른 열한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히시면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갈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과 함께 식사할 때 밥이 넘어가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형식적인 사랑,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떼어 생명의 양식으로 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찢기고 상한 그 살을 우리의 생명의 양식으로 내주시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을 떼어주심으로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 찬양합니다.
또 예수님은 이를 행하여 예수님을 기념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를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은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성찬 예식을 할 때마다 나를 위해 살을 떼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성찬 예식 때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은혜로 인하여 감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떼어주신 살을 기억하고 묵상하게 될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을 묵상하고 기억하게 되면 우리 내면은 점점 더 피폐해집니다. 상처가 깊어지고 미움이 생깁니다. 분노가 폭발해서 자기를 스스로 파괴시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슴에 묻어두고 묻어두고, 곱씹어보고 또 곱씹어보고, 기억하고 또 기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폭발합니다. 자기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떼어주신 살을 묵상할 때 참된 평안과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해야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의 기쁨과 감격을 영원토록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부어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20절을 읽겠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은 잔에 포도주를 부어 일일이 돌리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의 피를 뿌려 자신들의 죄를 정결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점 없고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뿌림으로 죄인들의 추한 죄를 대속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찌 짐승의 피만으로 주홍같고 진홍같이 붉은 죄를 다 씻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짐승의 피를 많이 뿌려도 우리의 죄는 다 지워지지 않고 그 얼룩과 자국이 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하도 망나니짓을 하니까 그 아들이 잘못을 할 때마다 나무에다가 못을 하나씩 박았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집 앞에 나무가 온통 못투성이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들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제 더 이상 망나니짓을 하지 않고자 결심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가 앞으로 자신이 선행을 할 때마다 못을 하나씩 뽑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열심히 선한 일을 해서 마침내 그 나무에 박힌 못을 다 뽑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못은 다 뽑았지만 못자국은 그대로 남아있어 구멍 뚫린 나무를 어떻게 할 수는 없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짐승의 피를 뿌리고 선행을 많이 해도 우리의 죄의 자국은 남고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고 똑바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포도주보다 더 진한 자신의 피를 쏟아 부어주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능히 정결하게 하고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배 피에는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재생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단의 송사도, 양심의 고소도 막아줄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순수하고 고결한 삶을 살기 원하면서도 자꾸 넘어지고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그 피가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피가 더러워졌기 때문에 더러운 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면 먼저 피 검사를 합니다. 몸에 병이 들면 피에 이상이 옵니다. 마치 차에 엔진오일이 더러워지면 차를 아무리 도색하고 멋있게 꾸며도 고장 날 수밖에 없듯 우리의 피가 더러워졌기 때문에 우리의 온몸과 마음이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더러워진 피를 바꾸어야 합니다. 차에 엔진오일을 교체하듯 우리의 피를 정화시키고 근본적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아무리 물로 씻어도 씻기지 않고 불로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능히 모든 죄를 지울 수 있습니다. 어떤 더러운 죄도, 어떤 흉악한 죄도 다 사하고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부정한 모든 것 맑히시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268장 3절).”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잔에 포도주를 부어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 하나님은 본래 인류의 조상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부담스럽게 들리지만 실상은 선악과만 따먹지 않으면 영생을 보장해주겠다는 참으로 보배로운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이 약속을 파기하므로 최초의 행위언약은 실패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인간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제 우리 인생들에게는 하나님과 관계성을 회복하는 새로운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그 언약을 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인간으로서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온전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도 충족시키고 인간도 의롭다 하실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를 흘려 인간의 죄값을 치루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26절은 말씀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 예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새 언약입니다.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은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새 언약입니다.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신 완성하셨기 때문에 새 언약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새 언약입니다. 나의 공로와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새 언약입니다.
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정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 언약이 무엇으로 이루어졌습니까?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짐승의 피도 아니요, 사람의 피도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진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누구도 바꾸거나 고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파기할 수 없는 영원하고도 완전한 언약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외쳤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피로서 세운 언약이 우리 몸에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그 몸 구석구석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을 때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살아있게 하고 능력 있게 하고 스피릿이 충만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실 때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정결한 피가 들어와 나의 생각과 의식을 정화시키고 내 심령을 깨끗하게 합니다. 세상에 붙은 나의 인간적인 욕망을 끊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에 불타게 합니다. 우리의 잠자는 영성을 일깨워주고 주님을 위해 우리의 젊음을 불태우고자하는 사명감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때로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져 자학하고 자의식 때문에 괴로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언약의 문서를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히 화평을 누리고 평안과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한 부모로부터 한 피를 받은 육신의 형제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같은 피를 받고 구원받은 한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하나 되어 서로를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서로를 돌아보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 되기에 힘썼습니까? 사도행전 2장 46,47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고 했습니다. 성찬은 수직적으로 주님과 내가 하나 되는 은혜, 수평적으로 성도 간에 하나 되는 은혜를 맛보게 합니다.
죄는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분리되고 형제간에 분리가 되어 원수 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몸이 찢기고 피를 흘리시므로 모든 담을 허무셨습니다. 이제 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한 화평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2장 14-16절 말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는 다들 너무나 개성이 다르고 취향이 달라서 하나 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영접하며 존중하고, 서로를 세워주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성찬을 통해 이처럼 성도 간에 하나 되는 연합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에서 제정하신 성찬 예식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성찬 예식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의 은혜를 기억하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복과 은혜가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거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떼어주신 살과, 쏟아 부어주신 피로 효력이 영원한 새 언약이 세워졌음을 항상 기억하고 이 은혜를 누리고 감사가 충만한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