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칭 주인공 시인 시점
황정산
시인에서 근무하고 서울에 사는
그는 밖에서 살 수 없어 들어왔다
나는 살아 있다는 말로 생각하는 그는 말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기도 하다 그는 기생충을 혐오하면서 정의에 기생하고 증오로 사이가 벌어진 다리를 모므려 고병원성 바이러스의 감염을 예방한다 오염된 환경을 정화하러 청송에 가고 어두운 안티 힐리의 사진을 보다 사진 속의 여인 얼굴에 빨간 점을 찍는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상을 심사하고 술상을 차리다 문득 어머니를 놔두고 왔음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그는 그것을 기록한다
빅네이터에는 플롯이 없고
그래서 이야기를 쓸 수 없는 그는
삼인칭 주인공으로 살아남는다
다 안에서의 일이다
전지적 시인 시점
페북facebook을 한다
라고 말하고 본다
보기는 쓰기로 보인다
엘 시인은 또 아름답지 않은 술상 앞에 있다
그리고 미학에 대해 쓴다
그의 영광은 항상 이런 데서 보인다
제이 시인은 오늘도 분주하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빼곡하다
그의 DB의 순도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기쁨과 덕망을 떠올리는 알 시인은
언제나처럼 늠름을 가장하지만
그래서일까 그의 내밀을 농담으로라도 볼 수는 없다
또 다른 알 시인은 오늘도
천 개의 손을 나뭇잎처럼 매달고 있다
가려진 그의 뿌리는 알 수 없다
진지한 에이치 시인은 생태적으로 규율을 거부하나
생래적 관성은 남아 있다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쓰기로 하기가 된다고
라고 말하는 곳에서
뜨거운 기계는 디바이스가 된다
또는 그 반대이기도 하다
이인창 메타적 독자 시점
편지를 보고 있는 나를 그가 되어 바라보는 것은 에이젠시테인 이후의 일이지만 이제는 이미 옛날 일이어서 나를 그라 부르지 않는 그들이 나의 글을 읽지 않고 너라 말하는 일이 많아 나는 문을 닫지 않고 읽기를 계속하는 그가 되고 있어 너가 아닌 나는 "새로운 시선 변화의 부담을 덜고 더 육익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비밀에 딱 맞는 지원과 가이드, 도구를 찾아"* 가는 그가 되는 너로 바뀌는 나를 읽는다
*메타에서 온 홍보문구를 의도적으로 오독한 문장.
―『거푸집의 국적』, 상상인, 2024.
첫댓글 황정산 시인의 [거푸집의 국적]을 읽고 <거푸집의 국적>이나 <긴 여자>같은 시들에 대한 감상문이 페북에 올라와 완전 설득당하면서 읽고 있다. 그 와중에 나는 <삼인칭 주인공 시인 시점>과 <전지적 시인 시점>, <이인칭 메타적 독자 시점>이 문득 흥미로웠다.
SNS상의 글쓰기와 관련이 있는 이 시들은 현실세계라는 밖보다 SNS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다 안에서의 일이다"라고 시인이 말하듯 그 안에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고, 문체적 개성이 있고, 깊거나 가벼운 사유들이 있지만, 그것은 총체적이지 않고 단편적이며, 따라서 "플롯이 없고" 단선적이다. 컨셉과 주제가 있고 등장인물도 많지만, "시인"과 "독자"의 관점은 자주 혼동된다. "시점"의 경계는 명백해도 그것을 넘나드는 "나"를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기록한다".
'기록'만이 중요하다, 라고 황정산 시인이 생각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를 황정산 시인이 읽으며 너는 내가 아니니까 하고 읽다 말아도 괜찮을 SNS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위 댓글은 황정산 시인의 시 3편을 페북에 올리고 덧붙인 나의 짧막한 감상문이다.
daum 댓글에 600자 한정의 글자수가 넘쳐 미처 달지 못한 글은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이틀 후 SNS 밖에서 황정산 시인을 만난다. 그가 특강을 하는 자리에 나는 사회자로 참석한다. 아무래도 나의 오독은 숨을 데가 없을 것 같다."
시의 독특한 관점도 재미있었지만, (비하인드 스토리이지만) 사실은 황정산 시인의 특강을 홍보하려는 '야심'이 더 컸다.
어제, 너무나 바쁜 와중에 저 글을 올리느라 시간을 족히 빼앗긴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카페에도 또 한 번의 간접홍보를 하는 셈이 되었다.
어제로부터 하루가 지났으니, 자, 이제 내일이다.
샘들, 준비하시고!!!
내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