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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인시대』2021. 봄호 기획원고
‘그때 그 時절’
금지된 시간의 연인, 떨면서 그리워하던...
신 진
통금시간의 애인
1
그대는 오늘도 무사히 머리를 빗고/해 뜨기 전에 버스를 탔다./어둠 속에서 빛나는/빛 안에서 더욱 빛나는, 마지막/나의 애인이다.//
법적으로 통행이 정지된 시간/그대는 내 심장 깊숙이 손을 넣고/저혈압의 혈관 속에/부드러운 자외선을 쪼여 준다./안경을 벗으면/미루었던 눈물이 흘러내린다./일시에 정결한 꽃들이 핀다./그러한 잠시/그대는 이제 만나지 말자고/법적으로 만날 수 없다고 속삭인다.//
시민 없는 도시의 하늘/시퍼런 해가 일없이 뜨고/일정한 거리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시들어 가는 이웃들/하늘이 무너져도 소리하지 않는/불안한 종교//그리운 그대는 어느 전장에서/피 흘리고 오려는가?/아무래도 그대는 피를 보아야 하는가?//
맨 처음 만나 본/또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애인이여.//내 그대 뒤를 버스로 떠나려 하나/이미 통금은 법적으로 해제되고/두려운 해가/일없이 떴다.
2
겨울 새벽/내 아직 잠자던 시간/그대는 내 빈방, 빈 옷에 숨어/몸을 녹이고 있었다./그 떨림에 나의 몸이 떨리고/잠이 떨고/그 떨림에/먼 탯줄이 구리줄처럼 당겼다.//
그대의 자람은/그대의 자람이 아니었다./그대는 무성한 잡초를 내려
출렁이는 바다를 보여 주었고/바다의 이랑마다 새들이 놀게 했다./나는 손이 작지만/한시도 그대를 놓지 않았다./그대는 이따금 나를 떠남으로/내 마음속에서 스러지지 않음을 보여주었다/사랑은 마주보는 탁자를 떠나/잊음으로 해서 진실로 깊어짐과 마찬가지로.//
지금 그대의 떠남은/정녕 그대의 떠남이 아니다./언젠가 내 빈 방, 빈 옷 속에/다시 묻어 올 것을 나는 믿는다./하여/불덩이처럼 활활 타오르는 뜻밖의 그대가/내 잠 속에/남은 노래, 마저 부어 주리라 믿는다.
3
조퇴를 하고 홀로 걸을 때/비가 내렸다.//
자유중국의 연약한/자유의 꼬리/무심한 거리를 때리고 있었다.//
저만치/비속을 머리 근질이며 가는/모습/
한걸음 다가서면/한걸음 물러서는/뒷모습//
부산역 광장/분수는 혼자서 비를 맞고/그 하늘 열 두 정보/몸살 하는 하늘 위에 상점 차리는/구매자 없이 가게를 보는/그대/비 맞는 모습//
자유중국의 연약한/자유의 꼬리/무심한 거리를 때리고 있었다.
4
보라/흥남부두 선창가에 피던 해당화/지난 밤 통금 시간을 타고/서귀포 앞바다 그 중 한적한 자리를 골라/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인처럼/단정히 머리 빗고 앉았으니/보라/그대의 저음은 작은 기침에도 무너지지만/알천(閼天)으로부터 오는/작은 바람에도 근끈히 묻어/보라, 잊어도 좋은 그 억울한 음성은/강한 자의 가슴에도 약한 자의 가슴에도/쇠붙이보다 힘차게/메아리 치고 있느니//
잠자는 원수를 찾아 칼을 나누어 오리/잠자는 원수를 찾아 꿈을 나누어 오리/잠자는 원수를 찾아/저주를 나누어 오리//
오,/그리운 이여/밤 깊도록 창을 닫지 못한 채로/집집마다/손을 내어 놓고 잠든다.
* 알천(閼天) : 일명(一名) 북천(北川)으로 신라건국 전(前) 6촌(村)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천거하는 등 서로 의견을 나누던 곳이 이 냇강 언저리
- 시집 『목저(木苖) 있는 풍경』(아성출판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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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시간의 연인, 떨면서 그리워하던...
신진(辛進)
1970년대 초, 군사정권이 국민들의 입을 막고 머리를 조종하던 시절, 유신헌법이 치밀하게 계획되고 실행되던 때, 모든 언어행위가 불온시 되고 사람 사이에 소통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증폭 되었다. 동료 간 사제지간의 대화도 구석구석 허공의 눈치를 보며 가려해야 하였고 스스로의 중간 중간 대화를 끊고 사방을 살피던 시절이었다. 이 무렵 나는 대학의 학보사 기자 일을 하다 1974년 복학 후, 우연히 월간 『시문학』에 등단을 위한 투고를 한다.
은사들은 물론, 기성 문학인들과 국민들 다수는 시대의 적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맞서 싸우기는커녕 회피하기 바빴다. 아니 권력에 빌붙기를 앞 다투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나 역시 목숨 바쳐 신념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내 시는 기껏 절대 자유와 절대 평등이 공존하는 신화의 세계 같은 지경을 염원하는 추상을 맴돌았다. 모두가 화해하고 포용하는 거대한 아량을 그리며 자위했다. 적들 역시 자본 사회가 낳은 가여운 피해자에 불과하며, 함께 안고 가야할 이웃들이라는 비현실적 타협점을 겨냥하였던 것이다. 당대 문단의 중심, 우파 문인들과 철학자들의 서정주의 또는 전통주의와 환상, 휴머니즘 등의 관념에 계몽 당한 까닭이기도 했다. 집안 장손(長孫)으로서의 윤리감이 찾아낸 타협점이기도 하였으리라.
1970년 야당 기관지와 『사상계』 5월호에 발표된 김지하의 저항 담시 「오적」은 이른바 시적 자율성이나 외래 사조 위주 문학교육의 관례들을 일거에 전복시키는 충격이었다. 나뿐 아니라 온 국민들에게, 강압과 모순에 타협하는 자기 함정의 논리에 대한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는 채찍이 되었으리라. 김지하에 이어 고은, 신경림, 문병란, 양성우 등 시인들의 수난도 움츠렸던 젊은 피에 자괴감과 분노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1966년 고교 시절 선배들의 권유를 받아 부산에서 처음 일어난 한일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의 맨 앞 전위대를 맡은 바 있었다. 그로 인해 부산지역 모든 대학, 고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1971년 학보사 편집국장시절엔 학원 공원화 반대를 내세우며 집결, 교련 반대, 유신 음모분쇄 등을 외치는 데모대를 이끌다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연기 중이었던 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확정되었고 언론은 해체에 가까운 탄압 상태에 놓였다. 모두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등에 맞추어 살아야 했다. 1974년 모든 언론사의 손발이 꼼짝 없이 묶여있던 시절, 나는 복학을 했고 다시 편집국장 일을 맡았다. 졸시 「통금시간의 애인」은 70년대 중반, 군사정권의 폭압에 직접적인 대응을 보인 첫 시가 아니었든가 한다. 시적 자율성, 시적 관습이란 미명에 눌려 시에서만은 정치 사회적인 비판의지 노출을 가능한 금해왔던 내 시가 주제면 형식면에서 민중의 입장에서 풍자와 비판의 언어를 휘두르게 된 것이다.
심야 통행이 법으로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시적 체험 속의 통금시간은 정권이 요구하던 법과 언어에서 이탈한 자유와 정의의 시간이었고 ‘애인’은 그 시공의 실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충성 교육이 한층 강화된 중고교 국어시간에는 만해의 「님의 침묵」과 소월의 「진달래꽃」의 님은 다 ‘조국’또는 ‘조국해방’으로 정답 채점되었다. 심지어 미당의 「국화 옆에서」의 ‘돌아온 내 누님’도 ‘조국의 광복’이 답이라고 교육 받았다. 그런 교육의 탓이기도 했으리라. 「통금시간의 애인」의 ‘그대’도 나름 시대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설정된 ‘님’이요, 잃고자 해도 잃을 수 없고 잊고자 해도 잊을 수 없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 주체와 공동체가 함께 연대하는 본연적 삶의 이름이었다 할 수 있다. 법적인 시간이 되면 만나지 못하는 불륜의 애인이다. 비슷한 시기 「얼굴」, 「건방진 거지 이야기」, 「건방진 가수 이야기」, 「장미원」 등에서도 이 불법의 대상은 불러졌다.
모진 겨울일수록 그리움은 깊은 법. 곁에 있지 않아도 늘 그대가 함께 있음을 믿고 기다린다. 언젠가 이기적 탐욕을 다 내다버린 우리들의 빈 방 안에는 마치 자연과도 같은, 참삶의 모습의 그대가 활활 가득하게 찾아오리라. 당대의 법으로 통제되는 현실에서 벗어난 자리, 많은 이들이 오가는 광장에서도 그대는 ‘자유’를 나누고 있듯이.
1970년대 초, 유엔총회에서는 중국을 유엔에 끌어들이고 자유중국-타이완을 밀어내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어서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 이른바 '핑퐁외교'가 전개되었다. 자유중국의 자유는 한없이 초라했다. 속이 곪은 ‘한국적 민주주의’ 또한 그에 못지않게 처참한 몰골이었다. 국내에서나 국제적 관계에서나 약육강식의 구조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으리라. 현실에서는 안쓰러운 몰골을 하고 있다 해도 그대는 지고의 가치, 민주와 정의의 여물기와 끈질김으로 스러지지 않을 것이다. 민중의 힘은 권력자의 무기보다 더 강하여서, 통금시간인 심야에도 결연한 갈망의 손을 함께 내어놓고 연대를 예비하리라.
「통금시간의 애인」 이후 내 시는 공동체적 주체로서, 그 적과의 싸움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같은 시기 「4월제」, 「엿장수」, 「불온서적」, 「장난감 마을의 연가」 외, 1980년대의 「대학 별곡」 「매스컴 별곡」, 「달동 별곡」, 「시인 별곡」, 「바퀴벌레」, 「총놀이」, 「등화관제 훈련기」, 「우리 아들 대장이 되어」 등등. 무크지 『토박이』 창간호와 제2호, 내가 참여하였던 『목마』 동인지 14집 등이 내 발표작을 주요이유로 배포중지, 회수 처리되었고 나는 경위서를 써내기도 했다.
70년대 젊은 한때의, 용렬함과 용기 사이를 오가던 줄타기의 추억은 7순을 넘긴 오늘에까지 버릇처럼 이어지고 있다. 내 시는 당대적 외상(外傷)과 갈증에 현실적 생활언어로 대응하는 축과, 현실에서 비켜선 시적 관습―상상과 서정가 언어의 축, 양 극단에서 길항해온 셈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산적한 현실적 과제를 짊어진 시인에게 시적 자율성이란 부질없는 탐욕의 가면이거나 반지르르한 무지(無知)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신은 더욱 날을 세운다.
내려놓고 비우고 사는 것이 미덕이라는 노년의 삶, 그만 법을 믿고 오늘의 법 안에서 맞장구치고 말잔치 벌려가며 살고 싶은 욕심이 지워진 건 아니지만, 그 한편에 법적인 강자들의 불법과 불의들이 더욱 뚜렷이 보이고 욱욱 거슬리는 게 문제다. 바라건대, 별로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나이이니만큼 좀 더 강단 있게 적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 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