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문화와 <한국지명총람》, 《남원의 마을유래>, <디지털남원문화대전〉 등으로 살펴본 영제봉 주변 문화와 인문지리는 이렇다.
용궁리는 본래 남원군 하원천면 외룡 지역이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 때 주촌면 내룡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궁리라 하고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남원시·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주천면 용궁리가 되었다.
마을 뒷산이 지리산의 줄기로 큰골로 불리는 큰 계곡은 마을에서 뒷산 주봉까지 약 4㎞나 된다. 그 계곡은 산자 수려함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마을 지형은 해발 300m의 산간지대으로 영제봉이 마을 뒤에 우뚝 서 있으며 고사리 · 오미자 등 임산물이 풍부하다. 약간 경사진 구릉지대로 주천면 전 지역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다. 영제봉에서 흘러내린 물을 모아 장안 저수지와 용궁 저수지의 영향으로 기후가 다소 낮은 편이다. 1536년에 서당을 차리고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최초로 유생들을 배출하였다. 1862년 고종 때는 주촌방 내의 제일 부촌이었다고 한다.
용궁마을은 신라 진성여왕 때 (860년) 마을 동쪽 영제봉에 세워진 부흥사라는 사찰에서 비롯됐다. 고승과 선사, 그리고 신도들이 거처하며 휴양한 곳으로 지상낙원으로 알려졌다. 마치 산수유 꽃나무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습이 바다 속의 용궁과 같아 지상의 용궁이라 불렀다. 지금은 부흥사와 파근사라는 절도 없어지고 파근사지(波根寺址)만 남아있다. 그런데 부흥사가 없어지고 파근사로 바뀐 이유가 흥미롭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유래가 이곳 용궁마을 부흥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서 귀찮아지자 빈대를 잡아다 놓았는데, 이제는 빈대가 창궐하자 빈대를 잡으려고 불을 놓았다가 사찰이 다 타버렸다. 이렇게 부흥사 중들의 작폐가 심해서 고승과 선사들의 미움을 받아 파근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자료제공:지리산아님
첫댓글 파근사의 옛이름은 대흥사고
부흥사터는 내용궁마을에서 숙성치 넘어가는 골짜기에 있는데
부흥사를 파근사의 명칭 유래로 연관시켜 기록을 해놨네요.
남원문화원에서 펴낸 "남원의 산하"에서 출처한 자료인데
뭔가 착오인듯 합니다.
동네분들은 파근사를 부흥사로 알고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