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지,
이제는 시베리아의 탄광 노역, 소련의 사회 경제구조,
드디어 조국땅으로! <10회>
〈1947년 9월에 들어서자 또다시 우리 포로수용소에 전원 이동명령이 내려졌다. 각자 소지품을 가지고 기차에 오르라고 했다. 가는 곳은 시베리아의 우스크미나 고로스크 쿠스바스산 탄광이라고 했다. 도착하여 지정된 수용소에 들어가니 이미 거기에는 독일군 포로들이 1,200명이나 수용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폴란드 사람도 끼어 있었다. 우리는 1,500명인데 그 중 일본인이 거의 전부였고, 우리 조선인은 34명, 모두 2,700명 중 5개국 민족이 한 수용소에 있게 되었다.〉
쿠스바스 탄전의 매장량은 4천 5백억 톤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우리 동포를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다. 약 30세 되는 청년이었는데 소련 광산대학을 이수하고 쿠스바스 탄전내의 다른 광구에서 갱장을 맡고 있었다.
그 청년의 말을 들으니 소련사회는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고 특기와 능력에 따라 지위를 주기 때문에 조선족이면서도 당당하게 갱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각자의 직장을 구하는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국민전체 체력검사를 통하여 1급은 국가의 기간산업 중에도 중요한 부분에 배치되고, 2급은 지상노동으로 일반산업시설에 배치되고, 3급은 경노동으로 보조 사업에 배치되고, 4급은 상점이나 수위나 청소부, 그리고 연락원 등 신체 활동에 무리가 없는 곳에 배치되는 등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살아왔던 조선시대 사회나 일제식민지 사회와 대비해 볼 때, 소련의 사회는 전연 듣지도 보지도 생각지도 못한 모습의 연속이었다.
각종 생활필수품의 유통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생활용품은 모두 상점에서 판매하고 모든 물가는 도시나 농촌이나 산중이나 동일했다.
그래서 바사로(상품 거래하는 자유시장)가 있기는 해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고, 상점은 국가에서 지정하고 관장하고 보수를 지급하기 때문에 이득을 많이 남기려고 손님을 속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상생활까지 정부가 통제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와 같은 중간상의 농간이나 밀수 상들의 엄청난 사회적 폭리가 있을 수 없고, 잔인무도한 사회악 자체가 없는 사회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저래 1945년 9월 15일 승전국 소련 국에 의해 포로로 잡혀 만 3년이 넘는 동안 세 차례나 일터를 옮기며, 춘하추동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뙤약볕 속에서나 강추위 속에서나 눈보라 속에서나 어려움을 참고 중노동을 견디었다.
조국으로의 귀환
드디어 1948년 10월 말 경 포로생활도 다 끝난 모양이었다.
우리 조선 사람뿐만 아니라 일본 병사들까지 모두 귀국 령이 내려졌다. 수용소에 있던 전체가 기차에 실려 하바롭스크를 지나 태평양 해안부두 나흐트가 까지 20여일 걸려 도착하였다.
12월 17일 오전 중에 조선 병사를 선별하니 모두 2,163명이었다.
다음날 18일 우리들은 소련 배에 올랐다. ‘소련 땅아 잘 있거라, 우리포로들은 고향땅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22일 함흥 항에 닿았다. 23일이 되자 북조선 중앙관원들이 나와 소련장교로부터 우리를 인수 하였다. 그러나 만 3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중노동을 하고 돌아왔건만 남북은 분단이 되어 있었다.
우리로서는 언제 38선을 넘어갈 것인지 다급하기만 했다. 바로 이때 북조선의 남녀노소 수 백 명이 모여 군악대의 흥겨운 연주에 맞추어 환영을 해 주었다.
우리들은 선박에서 내려 그 사이를 손을 흔들며 지나가 대기 중인 차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흥남여자중학교였다 우리들은 내리자마자 각 교실로 나누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은 또 자유 없는 수용소였던 것이다.(장군의 후예 2-160-178P 참조)
♨출처/남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