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무섬은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이다. 삼면이 강과 접한 물도리 무섬은 내성천이 주변 산을 휘돌아 태극 모양을 이루어 절경을 이룬다. 이런 형태의 마을은 여기 무섬마을과 안동 하회마을, 예천 회룡포 등에서 볼 수 있다.
무섬마을에서 처음 들린 집은 100년 전에 지었다는 수춘제(壽春齊)라는 편액이 걸린 댁이다. 방에는 주인장이 오수중이다. 그런 줄로 모르고 마당에서 왁자지껄 됐으니 몰상식한 사람으로 여겼을까? 안주인은 일하다말고 객들을 맞는다. 숙박비를 묻고 식대를 묻는다. 내일이라도 올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마을은 수춘제로부터 앞으로 난 길을 중심으로 강둑 쪽은 밭이고 산 쪽은 해우당(海愚堂), 염계고택(剡溪古宅) 일계고택(逸溪古宅)이 한 줄로 이어오다 빈 마당의 안내문을 보니 만죽재(晩竹齋)현판이 걸린 고택이다. 만죽재는 대문채와 잇닿아 있고 대문 위로는 빛과 공기의 드나듦이 쉽게 봉창을 뚫어 특이했다. 안채는 口자형 공간이 협소해 갑갑하다. 하지만 한겨울의 강바람을 막기엔 제격일 것 같다. 사는 사람들이 빚어낸 생활철학의 소산이 아닌가 싶다.
만죽제를 나와 강둑으로 가는 샛길로 들어섰더니 띠집 같은 초가에 사무당(四無堂)‘이란 편액이 걸렸다. ’사무당(四無堂)’이라 네 가지 없다니 얽힌 이야기가 궁금했다.
주인은 막 다듬은 줄기로 다발로 묶고 있어 말을 걸었다. 지립대인지요. 아니란다. 마르면 단단하여 지팡이로 쓰는 명아주란다. 발을 만들면 오래 쓸 수 있단다.
그는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귀향하여 이 집을 지킬 생각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주인의 말인즉 13대조부터 살던 집이라 한다. 어림잡아도 400년에 가깝겠다. ‘四無堂’에 무슨 내력이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사무당’은 주인의 13대조의 호라 한다, 그러면서 사무당에 얽힌 연유를 들려주었다.
첫째는 할아버지가 조실부모하여 효도할 기회가 없었고,
둘째는 집이 가난하여 배움이 없었던 것이며.
셋째는 집을 이룬 후 재물이 없었으니 3무요.
넷째는 인생길 뒤돌아보니 충성을 다하지 못함이란다. 孝, 文, 財, 忠 이 네 가지를 이루지 못했다는 말씀이다. 어느 고택의 현판보다 소박하고 깊은 말씀을 새기면서 나를 돌아다보았다.
강둑 밑 모래사장에는 텐트를 치고, 의자를 놓고 그 흔한 축제가 준비 중이다. 새 새색시가 꽃가마 타고 외나무다리로 들어서면 온 동네 사람들은 강둑으로 나와 신부의 예쁘고 못남을 입에 담는 날일 테고,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다 꽃상여에 태워 망자를 보내는 장례행렬이 절정일 것 같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조명하는 축제라, 다른 축제와는 다르리라. 더욱이 꽃상여를 매고 저 외나무다리에서 어떻게 운구할지 그게 궁금했다. 서정적이고 서경적인 무섬마을은 아직도 옛날로 서걱거리고 있어 지난 일을 회상해본다
손자는 객지에서 공부를 하다 고향집 무섬으로 오는 날, 교통이 불편한 시절, 걸어서 왔으니 해는 떨어지고 강 저편으로 보름달이 올랐다. 달빛이라도 있어 외나무다리 건너기는 다행이지만 흐르는 강물에는 달빛도 떨고 할아버지를 뵈러가는 손자의 그림자도 떨고, 뒤따라오던 순이가 무섭다고 손잡아 달라는데 말에 가슴도 떨리고…, 강 건너 저쪽 사랑채에서는 호롱불을 돋구어놓고 손자를 오기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기침소리, 헛기침소리.
무섬마을은 강의 수기와 산의 정기를 받도록 집들은 대개 서남향이다. 마을의 자랑은 물도리 마을 앞, 강에 놓인 외나무다리다. 아직도 이어가는 박씨네, 김씨네들의 집성촌이지만 수도리 내성천은 오늘도 울음을 토하고 울음을 삼키며 휘어진 외나무다리 밑을 감돌아 흘려들 간다.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에 수도리를 생각해본 하룻길 답사였다.
첫댓글 저도 여러 차례 가 보았습니다만
볼수록 그림 같은 마을입니다.
김쌤 박물관답사때 쓴 글입나다
좋은 글과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