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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13
3월28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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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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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mm11oHIvME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68815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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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은 스승님께서 만왕의 왕이요 세상의 구원자로서 그에 걸맞은 화려한 입성을 잔뜩 기대했습니다. 멋진 한쌍의 백마가 이끄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입성하시지 않을까 꿈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계획이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꽤나 코믹합니다. 예수님의 왕권에 대한 허황되고 그릇된 기대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셨습니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마르코 복음 11장 2절)
예수님이 선택한 입성 수단은 준수하게 생긴 백마가 아니라 어린 나귀였던 것입니다. 언젠가 해외여행 중에 나귀를 타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 마주하는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이건 말도 아니고 말이 아닌 것도 아니고. 생긴 것도 작고, 볼품없고, 생뚱맞게 생겼더군요.
나귀를 모는 소년과 제가 녀석의 등에 올라 비탈길을 오르는데,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불쌍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계속 헥헥 대는데, 이러다 고꾸라지지 싶어, 내려서 걸어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인 기대와 갈망을 여지없이 뭉개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해방자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어린 나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크고 존귀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가장 작고 볼품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하느님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는 것, 크고 휘황찬란한 것들만 선호하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즈카르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미리 예언된 바 있습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르야서 9장 9절)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지만 제자들과 군중들은 큰 존경과 예의를 표하는 의미로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 위에 깔았습니다.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입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마르코 복음 11장 7~8절)
그리고 마치 예수님을 호위하듯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따라가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코 복음 11장 9~10절)
호산나는 히브리 말로 ‘hoshiah-na’, ‘지금 즉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당시 군중들이 익히 알고 있던 외침, 구원과 도움을 바라는 외침이었습니다. 당시 이 시편은 유다 큰 축제 때마다 불려졌습니다. 과월절 새끼 양이 성전에서 도살될 때, 각 가정에서 파스카 예식을 행할 때 불려졌습니다.
어린 나귀!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타시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물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탄생 때 부터 시작해서 죽음의 순간까지 시종일관 계속된 예수님의 겸손, 아래로의 행보가 돋보이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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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RMI8VQ8B4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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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어린 나귀(겸손) + 어린 양(온유)>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전례에서 메시아요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분명 어린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왕은 말을 타야 정상이겠지만, 예수님은 마치 당신이 받는 영광에 합당하지 않은 듯 어린 나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는 분명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이 실현되기 위해 그리하신 것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제가 요즘 많이 묵상하는 주제는 다 아시다시피 ‘군고구마’입니다. 사랑이 되는 것을 잘 표현해주는 상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어린 나귀’는 바로 ‘고구마’를 나타냅니다. ‘겸손’입니다. 내가 고구마보다 더 잘난 사람으로 느낀다면 사랑은 틀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남을 위해 양식이 되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써 그런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전례에서 예루살렘 입성 예식 후, 본당에서 하는 미사 전례 복음은 마르코 수난기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침묵’이 두드러집니다. 어차피 죽을 거 괜히 반박하거나 변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때 예수님의 모습은 ‘어린 양’으로 상징됩니다. 이런 모습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이십니다. 겸손하심이 ‘어린 나귀’로 상징된다면, ‘온유함’은 어린 양으로 상징됩니다. 이 겸손과 온유가 합쳐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겸손이 자신을 고구마로 느끼는 것이라면, 온유함은 에어프라이어에 들어가 잠자코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야 누군가를 위해 맛있는 군고구마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노신임 작가의 『7년간의 마법 같은 기적』이란 책이 있습니다. 치매 걸린 아버지를 위한 딸의 고통스럽지만, 기분 좋은 사랑을 그렸습니다. 노신임 작가가 직접 아버지께 한 사랑입니다. 그 모습엔 군고구마 맛이 납니다. 어린 나귀와 어린 양, 곧 겸손과 온유가 다 들어있습니다. 한 가지 에피소드만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집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풀풀 나기 시작했다. 거실 화분 옆에 작고 둥근 물체가 떨어져 있었다. 똥이었다. 며칠 후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아빠가 거실을 걷고 있는데 아빠 옷자락에서 작은 물체가 툭 튀어나와서 거실 수납장 쪽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엄마 말대로 똥의 주인은 아빠였다. 마치 농부가 정성스레 씨를 뿌리듯 아빠는 똥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녔다. 어느 날엔 집안 사방팔방 똥으로 보이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아빠는 기저귀 착용을 완강히 거부했다. 오랜 궁리 끝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명 기저귀 패션쇼. 원래 남이 하기 싫은 건 나도 하기 싫은 법이다. 반대로 남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나도 하고 싶어진다. ‘기저귀 차는 일이 즐겁고 행복한 일임을 보여주자. 그러면 아빠도 기꺼이 기저귀를 찰 것이다.’
다음 날부터 츄리닝 위에 기저귀를 덧입었다. 일부러 집안 곳곳을 배회했다. 아빠는 놀라는 반응이었다.
‘신임아, 너 그게 무슨 옷차림이냐?’
‘어 이거 나 기저귀 찬 거야. 아빠, 몰랐구나. 요즘엔 기저귀 차는 게 유행이야. 색상도 대게 다양하게 나와 있어. 핑크색 입으려다가 많이 튈까봐 이거 하얀색 입은 건데. 이 기저귀 입으면 복이 온대. 앉아도 푹신하고 골반을 착 잡아줘서 고관절도 튼튼해진대.’
나의 기저귀 패션쇼는 1주, 2주, 3주가 지나도록 외롭게 진행되었다. 여전히 아빠는 기저귀를 거부했다. 또다시 일주일쯤 지났을 때 아빠가 날 불렀다.
‘신임아, 그거 그렇게 입을 만하냐? 기저귀 말이야.’
순간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그렇게 아빠의 기저귀 착용이 시작되었다.” [출처: ‘7년간의 마법 같은 기적’,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되는 것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되는 방법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온유함과 겸손으로 타인을 위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노신임 작가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하지만 중증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위한 거짓말은 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를 위해 다 큰딸이 기저귀를 차고 1달 동안 집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아버지도 기저귀를 차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이러한 모습을 닮지 못하면 오늘 나귀를 타고 들어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노력이 우리에겐 헛것이 될 것입니다. 자존심 내려놓고, 고구마임을 인정합시다. 사실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지 않으셨다면 고구마보다도 못한 존재일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리고 상대의 구미에 맞게 십자가에서 구워집시다. 사람들이 나를 먹고 자신도 그런 기저귀를 차고 싶어진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그 기쁨은 그동안의 노고를 다 잊게 해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이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그러한 군고구마 사랑도 주님 마음에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구마임을 기억하게 만드는 어린 나귀를 탄 그리스도와 구워져야 한다는 십자가 위의 어린양의 모습을 항상 바라봅시다. 그러면 매일 조금씩 더 맛있게 구워져 더 큰 사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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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3월28일 [성지주일]
오늘의 전례는 분위기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것 같으면서 그 순간은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모든 것이 수난과 죽음을 향한 비탄이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오늘을 '성지주일' 혹은 '수난주일'이라고 하였다. 오늘의 전례는 기쁨과 슬픔으로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야훼의 종은 비록 혹심한 능욕을 당하여 자신의 사명이 실패하는 것 같은 상황으로 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복음: 마르 15,1-47: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39절) 하고 말하였다. 복음에는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38절)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구약의 구원계획에 따른 성전의 기능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분의 신비의 베일을 '찢고서' 그 내부를 열어 보임으로써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의미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서 계시된 나자렛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이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서, 또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축성해주는 사건이다. 이것은 권능의 행위가 아니라 '나약함'의 행위,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 '나약함'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휩싸여'(14,33) 계셨고, 빌라도 앞에서의 침묵(15,5), 고발에 대한 무응답(15,5), 십자가를 질 기력이 없어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으로 십자가를 지심(15,21), 십자가 밑에서의 조롱 즉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15,31-32)로써 그분의 나약성이 극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은 바로 이 극한에 이르는 '나약성'에서 나타난다. 백인대장이 이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15,39)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이 '나약성'은 '권능'으로 바뀔 것이다.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14,61)라고 물었던 대사제에게 당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14,62)라고 대답하시며, 종말론적 심판자로서의 당신의 품위와 권능을 말씀하신다.
이제 자신의 '나약성'을 통하여 '권능'이 드러나는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도전'이 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도전에 합당한 응답을 하도록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십자가의 도전은 복음에서 예수님의 주위가 비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14,71),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난 제자들(14,50), 환호하던 군중이 바랍바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친다.(15,6-15) 이러한 '배반'의 분위기 속에서 용기 있는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여자들의 더 큰 사랑과 충실성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기민한 통찰력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품위를 회복하고 있다.(15,40-41)여하간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 때에 즉 참담한 고통의 때에 홀로 남아 계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14,27) 십자가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곧 신앙 때문에 수치를 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받아들일 용기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 우리의 사회, 즉 뱃속에 든 아이를 살해하거나, 남편이나 아내를 배신하거나, 자기를 거슬러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짓밟아 없애고, 수단과 방법을 다해 자기의 쾌락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풍토에서는 대단히 힘들다. 우리는 십자가의 찬란한 징표를 세상에, 그리고 가치관의 혼돈 속에 헤매고 있는 오늘에 다시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을 통하여 모든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인간 생활의 '맛'을 더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요청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를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육화하셨을 뿐 아니라, 그런 사실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8절) 철저한 '비움'의 보상으로 얻게 되는 '영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2,9-11)
이제 성주간을 지낸다. 오늘 전례의 환호와 비탄이 함께 있는 것같이 이 성주간에도, 또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나약성'과 '십자가의 도전'이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서 갈 때 구원을 전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그래서 구원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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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영화를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남은 가족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겪는 그리움과 갈등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입니다. 제가 비슷한 체험을 하였거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가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나와 직접 관계 없는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함께 눈물지었던 이유는 ‘공감’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나의 아픔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드라마를 보며 공감하거나 감동하여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사랑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한 편의 드라마를 보게 됩니다. 그 드라마는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전례 안에서 그 이야기를 재현합니다. 그때의 사건을, 그때의 시간을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재현하며 우리도 거기에 참여합니다. 함께 분노하고 울고 감동하려면 이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야 합니다. 아니, 자신은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죄 없는 이를 죽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환호하다가 빌라도 앞에서 죽이라고 외치고 있는 군중입니까?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도망치던 제자들입니까? 아니면 은전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죽음 앞에서도 계속 예수님을 따라갔던 예루살렘의 여자들입니까? 주님의 수난기를 함께 읽으며 외쳤던 우리의 목소리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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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루살렘 입성>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7-10)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을 뒤따르거나 앞서 가면서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아니라,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과(요한 12,12), ‘제자들의 무리’였습니다.(루카 19,37) <순례자들 대부분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루카 19,11).> 그 군중은 실제로는 소규모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대규모의 행렬은 아니었고, 당시의 권력자들이나 기득권층 세력이 긴장할 정도로 사람들의 수가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재판 때에, 입성 행렬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호산나’를 외쳤던 그 사람들이 나중에 태도를 바꾸어서 예수님 재판 때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사람들은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9,6) 공관복음에는 ‘바라빠’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사제들의 선동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소리 지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을 따라갔던 사람들은 ‘바라빠’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세력에 눌려서 예수님을 옹호하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실제 상황이 어떠했든지 간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 뒤에 이어지는 수난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일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자들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6)
여기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은, 즈카르야서 9장 9절-10절의 예언을 가리킵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즈카 9,9-10)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언대로 된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바로 그 ‘메시아’ 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이었고, 당신의 부활과 승천을 예고하신 일이었음을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4) ‘예루살렘 입성’이 부활과 승천의 예고편이었다고 해도, 어떻든 ‘입성 행렬’은 ‘십자가의 길’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셨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행렬 - 십자가의 길 - 부활과 승천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길입니다. 어느 한 부분만 보면 안 되고,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당시에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일이 ‘반전’의 연속으로, 또 놀라운 일로만 보였겠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그 모든 일의 진행 과정과 결과를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또 해마다 전례를 통해서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일로 다가오기는커녕 당연한 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것으로 그친다면, 또는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이루어진 일로만 생각한다면, ‘감동’도 없을 것이고, ‘믿음’으로 이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 연결해서 묵상하고 실천하는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5)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고난을 겪으셨으니, 여러분도 같은 각오로 무장하십시오. 육으로 고난을 겪는 이는 이미 죄와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남은 지상 생활 동안,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1베드 4,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2-13)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은, 바로 눈앞만 보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면,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지금 걸어가는 길의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르면, 눈앞의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들었더라도 그것을 믿지 않으면,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십자가의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즉 십자가가 그냥 십자가로 끝나버리는 허무한 일이라면, 인내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앙인은 지금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 끝에서 부활과 영광과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믿고 있고, 믿기 때문에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인내는 믿음과 희망에서 생깁니다. 반대로 말하면, 믿음도 희망도 없다면 인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1베드 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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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메뚜기와 황충’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메뚜기는 우리가 논이나 숲에서 볼 수 있는 곤충입니다. 다리가 길고, 예쁜 곤충입니다. 메뚜기는 몰려다니지 않으며 우아하게 혼자서 다니는 곤충입니다. 누구도 메뚜기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저도 어릴 때 논두렁에서 메뚜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황충은 다리가 짧고, 색이 어두운 곤충입니다. 엄청난 번식력으로 한 번에 수백억 마리씩 때지어 다닙니다. 황충은 왕성한 식성으로 닥치는 대로 곡식을 먹어치웁니다. 황충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가 됩니다.
성서에도 황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발생하는 황충은 지금도 많은 피해를 줍니다.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메뚜기와 황충은 유전적으로 똑같다고 합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메뚜기가 어느 순간 황충이 된다고 합니다. 모든 메뚜기가 황충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모든 황충은 한 때는 메뚜기였다고 합니다. 환경의 변화와 그로인한 밀도의 증가는 온순한 메뚜기를 난폭한 황충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배반한 두 명의 제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명은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신뢰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재정을 담당했습니다. 유다의 배반을 보면서 배반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구청에서 일할 때입니다. 가끔씩 본당에서 본당 신부님에 대한 비난을 담은 투서를 보내곤 합니다. 투서를 보내는 사람은 대부분 한때는 본당 신부님과 친했던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본당 신부님에 대해서 좋은 점, 나쁜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의 절대 권력자였던 줄리어스 시저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가장 총애하였던 브루투스마저 시저를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배반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런 사람이 배반하였다고 해도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배반은 커다란 상처로 남습니다.
요즘은 회사의 기밀을 경쟁 회사에 팔아넘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배반은 ‘욕심과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재물과 성공을 주는 나라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다른 한 명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던 베드로입니다. 죽을 때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겠다고 맹세했던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신뢰하였던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고,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도, 죽은 소녀를 고쳐주실 때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도 베드로는 늘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올해는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순교함으로써 신앙을 지켰습니다. 감옥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였고, 교우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올해 사제서품 30년이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200년 전에 태어나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처럼 한국의 첫 번째 사제가 되었다면, 저도 박해와 시련 앞에 당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순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의지가 그렇게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를 비난할 용기가 없습니다.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고, 발을 씻어드린 마리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한 백인대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고, 장례를 지낸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있습니다. 숨어버린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곁에서 함께 있었던 여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1997년 IMF 때입니다. 본의 아니게 저도 형님을 대신해서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형님의 사업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24년이 지났습니다. 덕분에 부모님과 가까이 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형님이 하였던 일을 나누어서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조카들도 모두 취직하였고, 가족들의 우애는 더 깊어졌습니다.
주변을 보면 타인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교회의 전승은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 드린 베로니카 성녀를 이야기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비가 엄청 오는 날 성당에 오셔서 문들을 점검하고, 하수구의 오물을 치우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형제님이 생각납니다. 본당 신부가 피정을 가면, 늘 성당에 오셔서 성당 문을 열고, 수녀님을 도와주시던 형제님도 생각납니다.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에게 명절이면 떡을 드리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던 자매님도 생각납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처럼 본당의 일에 도움을 주었고, 협조하였으며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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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고백>
「채근담」에서는 사람이 지닌 기본적인 성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굶주리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
언제나 한결같이 신의를 지킬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러기 어려운 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제 욕심에 사정없이 휘둘리고 소문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믿음이라는 깊고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하겠지요.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기념하는 오늘 전례에서는 예수님을 대하는 두 가지 마음이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지요.
먼저 입당 예식에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군중들의 기쁨과 환희를 표현합니다. 그들은 손에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겉옷을 벗어 길에 깔며 자기들에게 오시는 구세주를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러는 마음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구세주께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놀라운 능력으로 자기들에게 ‘다윗 왕조’ 시절에 누렸던 것과 같은 영광과 번영을 가져다주시리라는 기대와 바람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은 주님을 향한 분노와 미움으로 무섭게 타오릅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그들의 입에서는 이제 예수님에 대한 비난과 조롱,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저 무능한 이를 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을 높여 부르던 ‘임금’이라는 호칭은 이제 그분이 저지른 ‘죄명’이 되어 십자가 위에 못 박힙니다.
우리는 이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통해 주님을 환영하며 성지(聖枝)를 흔들던 우리가 욕심과 고집에 사로잡히면 언제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성난 폭도가 될 수 있음을 되새깁니다.
또한 부족하고 약한 우리에게 세상의 유혹 앞에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본성과 권능을 지니셨지만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 않으시고,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과정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온전히 희생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당신의 뜻과 바람을 내세우지 않고 온전히 그분의 뜻에 순명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 투신(投身)하면, 그 숭고한 희생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시게 된 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한 이들은 그분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부여받고, 하늘로 들어 높여져 그분과 함께 참된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고백한 것도 그런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은 ‘실패자’라고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던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이 진실된 것이 되려면,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신앙의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내 성공과 욕심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비우고 낮추어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 배움의 과정에 충실히 임할수록 하느님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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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태원 요셉 신부님]
<거룩한 무능>
이제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주간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수난하신 거룩한 주간입니다.
거룩하신 탄생 때부터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동방박사의 경배를 받으시며 세상에 드러나시고, 한나와 시메온의 예언을 통하여 드러나시고, 카나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나시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실 때 비둘기 모양의 성령의 증언을 통하여 드러나시고,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심으로 드러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심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빵을 많게 하셨을 때는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홀연히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마치 ‘내 세상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씀하시듯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권능에 비하면 이 성주간의 모습은 참으로 무능해 보입니다. 사람들에게 빌린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아는 사람에게 빌린 2층 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고, 예정된 제자의 배신을 당하시고, 체포당하시고, 매맞으시고, 모욕당하시고,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고, 죄수처럼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죄수들과 함께 초라하게 숨을 거두심으로써 철저하게 당신의 권능을 감추신 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탄생부터 공생활 동안은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셨다면,
이 성주간에는 당신의 무능을 보여주십니다. 무능은 무능인데 자발적 무능이십니다. 공생활 동안 보여주신 세상에 대한 “전능하신 그 외아들의 능력”은 이제 전능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무능의 전능”의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가 폭력을 불러오듯이, 사랑이 없는 전능은 자기과시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어려운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 있는 사람을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더 필요함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전능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낼 힘인 사랑이 더 필요함을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위대함과 무능의 신비가 깃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전능하심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능함을 통하여 당신의 전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신비는 지금도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필요한 깊은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이 무능의 전능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에서 “한 사람의 영적인 수준은 사랑으로 정의됩니다.”(92항)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수준은 지식이나 재산이나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수준이 각자의 수준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성주간은 하느님 사랑의 수준이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거룩한 무능’은 이 세상에서 누구도 보여준 적이 없는 탁월한 사랑의 수준이었습니다. ‘거룩한 무능’은 마귀도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이 ‘거룩한 무능’이 우리몸과 영혼에도 깊이 베이게 되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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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충남 실베리오신부님]
<‘십자가의 길’에 대한 생각 하나>
예수님께서 우리 시대에 오신다면 방탄소년단(BTS)처럼, 오스카상을 받은 기생충 영화처럼, 유느님(방송인 유재석)처럼 오실까요?
사람들은 그것을 원할지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벽을 여는 청소부처럼, 오지를 마다하지 않는 집배원처럼, 부모가 떠나고 혼자인 손주를 위해 굽은 몸으로 밥을 짓는 할머니처럼 그렇게 오시지 않을까요?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고단한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뵐 기회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뵙기가 더 쉽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걷는 것이 불편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할수 있는 ‘세상의 길’을 고집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길이 사람이 가야 할 본래의 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세상에 있는 길들은 자신을 조금 가려야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특히 한국 문화에 그런 점이 짙은것 같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길’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도 오히려 그런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사람 곁에 계십니다. 그런 사람을 기다렸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도 ‘세상의 길’처럼 자신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년에도 자신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을 ‘십자가의 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런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세상에서는 철이 들면 타인을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가리는 가면을 쓰는 것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표정을 타인에게 맞춰 주는, 그런 가면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혹시라도 세상에서 썼던 가면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하십니다. 그런 솔직한 모습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우리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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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부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교차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호산나” 하고 환호하는 군중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기쁨에 충만해 있는 반면, 그 환호는 일시에 지나가고 수난과 죽음을 향하고 있는 비탄이 젖어듭니다.
이제 환영과 환호의 행렬은 배척과 조롱의 십자가 행렬이 되고, 축복의 성지가지는 저주의 채찍이 됩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이들이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위에 오르셨던 그분은 십자가 위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왕으로 성 안으로 모셔진 그분은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그래서 <성주간>이 시작되는 오늘은 두 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주님성지주일>이면서, 동시에 <주님수난주일>이라 불립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언자 이사야가 노래하는 “야훼의 종의 셋째노래”의 일부를 들려줍니다. 이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기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 <주님수난주일>의 특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오늘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리스도 찬가”를 들려줍니다. 이는 “예수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주님성지주일>의 특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가 전한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려줍니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1,1)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통해서 당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악령들이 예수님의 신비의 일면을 알아챘을 때마저도(1,34;3,12), 당신의 변모를 체험한 제자들에게마저도(9,9)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곧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신비에 가려졌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들은 예수님의 수난기에서는 메시아 비밀이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고 감독한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대체 백인대장은 이 나약한 십자가의 죽음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바보같이 죽어가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보는 걸까?
사실 마르코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마르 15,37)고 말한 다음,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마르 15,38)고 덧붙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분의 신비의 베일을 “찢고서” 그 내부를 열어 보임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수난의 극적인 사건은 어떤 ‘발견’(깨달음)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에 젖어듭니다. 결국, <마르코복음>의 전체 줄거리는 바로 이 ‘발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곧 침묵으로 가려져 있던 메시아의 비밀이 십자가에서 발견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당신을 메시아로,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신적 비밀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나약함의 행위, 바로 그 ‘죽음’이라는 ‘침묵’ 속에서 드러납니다. 바로 이때가 백인대장에 의해 “하느님의 아들” 이라 고백된 때입니다.
십자가의 이 ‘무력함과 침묵’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요,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이제 이 ‘무력함과 침묵’이 말씀의 ‘권능’으로 바뀌고, 어둠 가운데서 빛과 사랑의 무한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침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비로소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순교당한 안티오키아(35년경~107년경)의 주교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실 되게 지니고 있는 이는 그분의 침묵까지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말한 대로 행할 수 있으며, 침묵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게 됩니다.”(에페소인에게 15,2)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그분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사랑이 완성되어 있는 장소가 됩니다. 십자가는 침묵 속에 있지만, 침묵보다 더 강렬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랑이 구원이라고!!! 이 신비는 우리를 현실 앞에 내세웁니다. 오늘 우리가 다른 이들 앞에서 사랑으로 자신의 훼손을 받아들이라고!!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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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주님!
제가 산산조각 났을 때
저보다 먼저 산산이 부서진 이는 당신이십니다.
저를 풍기박살 낸 이도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래야만 온 몸을 쪼개고 피 흘리신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도 당신처럼, 다른 이들을 “위하여”
먼저, 부서지고 찢어져 피 흘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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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어라."(마르11,9)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축제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는 장소이지만,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으로써, 예수님의 여정에 마지막 종착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던 백성들이 격렬하게 환호합니다. 소중한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깔고, 나뭇가지를 꺽어다가 길에 깔면서 오시는 메시아를 격하게 환호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렇게 환호하던 이들이 갑작스럽게 변합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사 때마다 그리고 기도 때마다 "아멘"(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외치면서도,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는 "아멘"이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변덕스러운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지금 여기에서 너를 위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그러니 우리도 순종합시다!
그러니 우리도 너를 위해 죽읍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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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길>
마르코 11,1-10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마르코 14,1-15,4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하느님 길>
모두가
떠나더라도
홀로라도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모두가
막아서더라도
홀로라도
뚫고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모두가
없애더라도
홀로라도
다시 내야 할
길이 있습니다
마침내
모두가 걷게 될
바로 그 길
지금
홀로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걸으며
나는 길이 됩니다
바로 하느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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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전거를 탈 때 가파른 오르막길을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완만한 곳이야 별 지장을 느낄 수가 없겠지만, 경사가 가파른 곳에서는 짜증까지도 몰려옵니다. 더군다나 한 여름에는 땀이 비 오듯 떨어지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더 힘들어집니다.
강원도의 한 지역에서 자전거 탔을 때가 생각납니다. 산세가 험한 강원도답게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도로의 경사가 장난 아니게 심했습니다. 오르막의 길이가 자그마치 3.2km였습니다. 한여름에 오르는 이 길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자전거를 타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르막이 있다는 것은 내리막이 있다는 겁니다. 화이팅!!” 숨이 턱턱 막히고 힘겨운 순간에 이 말은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오르막의 정상에서 내리막으로 내려가는 길은 너무나 신났습니다. 올라간 시간에 비해 너무 짧은 시간에 아래로 내려왔지만, 그때의 상쾌함은 오르막의 힘듦을 모두 잊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 삶도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오르막이 계속되는 것 같지만, 내리막의 기쁨도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오르막의 시간보다 내리막의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너무 많다며 불평이 많습니다. 그러나 짧은 내리막으로 충분히 고통과 시련의 긴 오르막길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 짧은 시간의 행복이 주는 기쁨을 생각하며 충분히 불평불만 없이 우직하게 오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시작으로 성주간을 지내게 됩니다.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지만, 그런데도 이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성주간의 예수님 수난과 죽음 없이는 부활 역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굳이 고통과 시련을 겪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통과 시련 없이 영광을 얻을 수 없음을 인간에게 당신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알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환호하지만, 그 환호가 며칠 뒤에는 사라지고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는 외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그렇게 손을 내밀었던 손은 예수님의 뺨을 때리려고 휘두르고 있으며, 예수님을 찬양하는 말은 예수님께 치욕을 주기 위해 침을 뱉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충분히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하지 않으십니다. 이 순간을 통해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당신 사랑의 완성을 주시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당신 몸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성주간의 시작인 오늘,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내 안에 간직하고 실천하면서 살고 있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고통과 시련도 사랑으로 온몸으로 받아내는 주님의 큰 사랑을 바라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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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대화}
세계 최고의 남녀 관계 전문가로 불리는 존 가트맨 교수는 대화의 종류를 다음 3가지로 나눴습니다.
1. 원수가 되는 대화: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더 아프게 할까? 상대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박, 비웃으며 듣는 것. 관계 악화, 정서적 냉담을 가져옵니다. 이런 대화이지요. 비난(너는 도대체 뭐니?), 방어(너는 뭘 잘했는데?), 경멸(주제 파악이나 해라), 담쌓기(너 혼자 잘살아) 등등….
2. 멀어지는 대화: 민망, 썰렁, 무시. 이런 식의 대화이지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피곤해….”
3. 다가가는 대화. 이 대화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해야 합니다. 바로 ‘관심, 공감, 배려, 경청’입니다.
우리는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요? 원수가 되는 대화, 멀어지는 대화는 피해야 할 대화이지요. 그보다 다가가는 대화를 통해서만이 최고의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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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언제나 변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항구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징표입니다.
‘굶주리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채근담)이 사람의 약점 중 하나입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으면 좋겠는데 인간의 마음은 흔들비쭉 입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에 올라앉으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습니다.
그리고는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11,1-10) 정말 군중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마르15,1) 빌라도는 군중에게 “여러분이 유다인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그러자 유다인들은 거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르15,13) 빌라도가 다시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하고 묻자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15,14). 하고 외쳤습니다. 환영하던 마음은 어디 가고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는 말만 하고 있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유다인의 명절인 과월절 기간에, 로마 총독이 정치범 한사람을 놓아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절 특별사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선동에 많은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고 외쳤고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습니다.(요한15,15) 소신있게 판결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중의 목소리에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소위 여론정치요, 인기 정치였습니다.
이제 수석사제와 율법학자들도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15,31-32).하며 예수님을 더욱 조롱했습니다.
모욕과 조롱을 일삼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켕기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이는 두려움을 모릅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떳떳하고 당당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림이 없고 그저 침묵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켕기는 것이 있으면 더 큰 소리를 내며 변명을 하게 됩니다.
방귀 꾼 놈이 성을 낸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침묵 속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주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일상 안에서 나를 모함하고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침묵하며 기다릴 수 있을까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라고 엉뚱한 구설에 오르게 될 때, 묵묵히 소문을 낸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도 회개해야 하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지금은 사랑할 때이고 기도할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으련만 도리어 발길로 채이고 맙니다. 사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멀리 안 보이면 괜찮은데 늘 가까이에서 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이 드는 만큼 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힘든 상황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마르15,34).하시며 더 간절히 아버지의 뜻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거기에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이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15,38).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정체를 모두가 안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여인들이 그분의 임종을 지켜 드렸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으신 주님을 알아본 사람은 복됩니다. 그리고 임종을 지킨 여인들도 주님의 임종을 지켰으니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주님을 지킨 이들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끝까지 주님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믿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백인대장처럼 늦게나마 주님의 정체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배신의 삶은,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농담 삼아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배신자’라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도 일상 안에서도 결코,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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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은 성주간입니다. 거룩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성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을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설정해 주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던 세족례를 행하고 성찬례를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낮에는 성유축성 미사를 봉헌합니다. 성금요일에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오후3시경에 십자가 길을 하고 저녁에는 십자가 경배예절을 합니다. 깊은 침묵 속에 주님 부활을 기다립니다.
성토요일 부활을 준비하는 날 입니다.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기에 토요일 밤부터 주일 새벽에 걸쳐 빛의 예식과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한 주간 주님의 부활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 왔습니다. 일상 안에서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기쁨이 커질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희생, 봉헌이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밑거름이 되길 희망합니다. 코로나19의 종식을 간절히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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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과 죽음>
-어떻게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습니까?-
해마다 주님 수난 주일에 긴 수난 복음을 들을 때 마다 생각나는 ‘삶과 죽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목사님의 물음에 대한 제 답에 만족했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잘 죽을 수 있겠는가? 물론 하느님의 은총이지만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최선을 다해 끝까지 깨어 한결같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잘 살다 잘 죽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기도는 잘 살다 잘 죽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입니다.
늘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준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음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마지막 시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음입니다.
날짜를 알 수 없으니 늘 마지막 시험인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여 사부 성 베네딕도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하셨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깨어 오늘 지금 여기를 살 때 욕심이나 환상없이 투명하게, 또 외로움이나 그리움 없이도 주님 현존안에서 편안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죽음이 생각납니다. 어느 자매의 3년간 암투병하다가 선종한 남편에 대한 고백입니다.
“남편은 3년간 성경 필사에 전념했습니다. 이 때에야 고통이 없었다 합니다. 남편은 성경을 필사 하면서 거듭 고백했습니다. ‘아, 행복하다! 내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몰랐다면 자살 했을 것이다.’ 그러던 남편이 선종하니 남편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했는지 깨달아 알게 됐고 모든 앙금이 다 사라져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 자매는 남편의 임종어에 감격했고 남편 사후, 더욱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다음 짧은 세마디 고백의 임종어였다 합니다. 좌우명이나 묘비명으로 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이 셋의 고백뿐일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참 중요한 최고의 선물이 이런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일 것입니다. 하여 저는 자주 좌우명, 묘비명, 임종어, 유언을 미리 써놓고 삶의 좌표로 삼아 살아 볼 것을 권하곤 합니다. 저에겐 이를 위한 두가지가 있습니다.
1.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해보는 것이고, 일년사계로 압축해보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하루로 압축해보니 오후 4시쯤 되는 것 같고,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니 초겨울쯤 되는 듯 하여 정신의 번쩍 듭니다.
2.제 좌우명 기도시중 특히 마지막 연을 자주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어떻게 하면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그 중요한 비결, 셋을 나눕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늘 간절히 절실히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기도 생활 또한 영원한 감동입니다.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사랑과 생명의 소통의 대화가 기도였습니다.
날마다 해가 지면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일치의 친교중에 활력을 회복했으며 사명을 새로이 하셨습니다. 낮의 활동과 밤의 관상이 절대적 균형과 조화를 이뤘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는 그대로 예수님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은 일치의 상태에 있는 주님의 종인지 깨닫게 합니다. 모두가 ‘주어主語’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주님 수난 복음 중 예수님 기도의 절정입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시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예수님의 평생 삶이 요약된 기도입니다. 이어 십자가상에서의 탄원기도는 영원한 충격의 감동입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에 감격한 백인대장의 고백이 예수님의 신원을 분명히 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둘째,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이 또한 기도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보다 연민이 좋겠습니다. 사랑인 ‘러브love’가 호수같다면, 연민인 컴팻션compassion은 바다같다는 마이스터 엑카르트 신비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바다처럼 한량없이 깊고 넓은 하느님의 연민의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 이러했습니다. 세상 모두를 담는 바다같은 깊고 넓은 주님의 아가페 사랑이요, 세상 모두의 진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울같은 주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온갖 군상들이 예수님 안에 다 들어있고 본색이 다 탄로됩니다. 환호하다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 광분하는 군중들, 주님의 장례를 위해 향유의 옥합을 봉헌하는 향기로운 여인, 예수님 기도중 잠들어 있던 세 제자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주님을 남겨두고 도주한 제자들,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고백하던 백인대장, 멀리서 숨죽여 예수님을 지켜보던 여인들, 예수님의 시신을 곱게 싸서 안장한 의리의 사람 요셉, 모두가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 자리에 있겠는 지요.
사랑이 회개를 촉발합니다. 회개해서 용서가 아니라 용서의 사랑이 회개에로 이끕니다. 이런 예수님의 바다같은 사랑에 감동하여 회개한 베드로입니다. 아마 무수한 사람들이 후에 제정신이 들면서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는 영원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참으로 깊고 넓은 사랑이 끊임없는 회개를 일으킵니다. 제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16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지며 끊임없이 샘솟는 회개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평생 이러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우리를 평생 회개에로 이끕니다. 주님 수난과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겐 영원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순종이 답입니다. 이 또한 기도와 사랑의 열매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작고 큰 순종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잘 경청해야 순종입니다. 순종할 때 아름답습니다. 섬김의 순종, 순종의 겸손입니다.
이런 순종이야말로 영성의 잣대요 영적 성장과 성숙의 표지입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도 순종의 길 하나뿐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삶은 순종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법을 배워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오늘 참으로 깊고 아름다운 제2독서 필리비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비움 찬가가 참 감동입니다. 전반부는 순종의 결정적 모범인 예수님의 모습을, 후반부는 이런 순종의 예수님을 높이 들어 올리신 하느님의 응답을 묘사합니다. 전반부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니 잘 살다가 잘 죽을 수 있는 답은,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은 분명해 졌습니다.
1.늘 깨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2.늘 사랑을 배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역시 사랑에도 늘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3.늘 순종을 배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역시 순종에도 늘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말그대로 우리 삶의 여정은 기도의 여정, 사랑의 여정, 순종의 여정임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기도와 사랑, 순종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는 은총을, 하여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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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성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미사의 복음은 꽤 깁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등장하지요. 수난 당하시고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두 독서에서 먼저 드러납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이사 50,5)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인 제1독서의 대목은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무죄하신 분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던 동족에 의해 처절히 모욕과 수모를 당하시지만, 바로 그 "사랑" 때문에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사랑을 포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7-8)
강생도 하느님과 같으신 분에게는 엄청난 비움이고 낮춤일 터인데, 예수님은 거기에서 더 비우고 더 낮추시어 가장 치욕스런 십자가 형벌에 당신을 내어놓으십니다. 완전하고 충만하신 분께서 오직 하나, 사랑 때문에 당신의 생명까지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이는 제사를 받으시는 하느님이시고 또 제사를 집전하는 영원한 대사제이시면서도 스스로 제단 위에서 살라지는 희생 제물이 되신 신비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이 이 순종으로 완성되었지요.
수난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크게 예수님 편에 선 이들과 반대편에 선 이들로 나뉩니다. 우선 복음의 시작과 끝에 나오는 여인들을 관상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장례를 위해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모르면서 사랑이 시키는 일을 감행한 영의 여인들입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마르 14,8)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져와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아직 가까운 장래에 닥칠 일을 상상조차 못하는 이들이 향유의 용도와 값어치에 놀라 그녀를 비난하고 나무라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그녀를 두둔해 주십니다. 지금 이 여인을 이끄는 힘이 하느님이심을,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는 말 없이도 감지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마르 15,47)
수난 복음 마지막 대목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묻힐 때, 이를 유심히 지켜보며 마음으로 계획을 세우는 이들 또한 여성들입니다. 그들 역시 사랑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있지요. 그 죽음이 하도 허무하고 무력해서 실망스러울 법도 한데, 추종자들마저 등돌리고 배반하고 외면한 사형수에게 끝까지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이들입니다.
버림받아 죽어가는 예수님의 벗이 되어준 이들은 더 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고백한 이방인 백인대장이나, 용기를 내어 "당당히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요청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도 긴 수난복음 안에서 저마다 충실한 사랑을 증거하고 있지요.
반면 예수님의 사랑과 정성을 듬뿍 받으면서 그분 곁에서 양성된 제자들의 모습은 참 안타깝지요. 겟세마니에서 번민하는 예수님 뒤에서 졸고 있는 세 제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관계를 부인한 베드로, 달아난 제자들... 적대자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예수님의 벗 범주에 넣어야 할지 퍽 혼란스럽습니다.
그리고 한때 환호하던 입으로 십자가형을 외치는 군중, 고발하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기회주의자 빌라도, 조롱과 모욕을 서슴지 않는 군사들... 예수님을 둘러싸고 양심의 숙고 없이 악역에 몰두하는 이들 또한 복음의 구성원이고 세상의 일원이며 우리의 일면임을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씀은 길고 슬픈 수난 이야기에 이처럼 많은 이들을 등장시키면서, 무엇보다 예수님께 주목하라고 초대합니다. 그분의 침묵과 비움과 낮춤을 사랑의 다른 표현으로 알아듣길 바라시면서요. 그리고 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여인들도 조명하십니다. 제도와 신분에 연연함 없이 사랑 때문에 결단하고 움직이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입니다. 부족한 우리에게까지 열린 가능성이기도 하지요.
비장한 마음으로 성주간에 들어서는 우리에게 말씀은 누구를 바라볼지 결단하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 시선이 머무르는 바로 그 존재처럼,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는지, 사랑 때문에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지, 사랑 때문에 안전지대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지 물으시지요. 이번 한 주간이 그 답을 곰곰이 숙고하고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일어나 가자."(마르 14,42)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함께 가자고 부르시니, 힘내어 일어나 그분과 함께 나아갑시다.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걷고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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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Ol_YJz4-wA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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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마르 14, 30)
하느님은
작아지시고
우리는
커져만 간다.
하느님은
실행하시고
우리는
도망친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성주간의
첫날을
맞이한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
우리가 있다.
하느님의
진짜 얼굴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주님께서는
수난하시고
우리는
격하게
환호한다.
하느님께서
무시당하시고
우리에게서
버림받으신다.
이중성의
마음 사이로
예수님께서
아프게
지나가신다.
예수님의
아픔은
모든 아픔을
대변하는
진짜 아픔이다.
아픈 상처와
절박한
믿음 사이에
우리가 서 있다.
상처가
상처를
치유하고
고통이
고통을
치유한다.
거짓된 삶을
치유하는
십자가이다.
고통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무너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를
만나는
사랑의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걸어가신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
감사이다.
모두
포기하지 않는
십자가의
은총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소중한 우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정녕 우리를
구원할 것임을
믿는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진짜 얼굴을
만나는 은총의
성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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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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