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한동희 | 날짜 : 11-02-07 07:55 조회 : 1551 |
| | | 부부지정
한 동 희
모촌 선생님, 어제는 피곤하여 초저녁 잠에 들었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으니, 이미 시각은 새벽 1시입니다. 창 밖은 어제 내린 눈으로 설원을 이룬 듯하고, 눈 위에 내리비치는 달빛은 오욕을 씻겨줍니다.
저는 하릴없이 컴퓨터를 열어 여기 저기 들여보다가 국내 산문으로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오늘은 선생님의 대표작 ‘梧陰室主人’과 김소운 선생의 ‘가난한 날의 행복’을 읽어 봅니다. 이미 이 작품들은 수없이 묵독하여 그 내용이 눈 앞에 영화 필름처럼 돌아가지만, 읽을수록 은근하고 푸근한 부부의 정을 느낄 수 있어 미소가 흐릅니다. 이 두 작품은 가난한 날을 회상하는 부부의 이야기가 공통점이군요. 오늘 유독 이 두 작품에 마음이 가는 것은, 어제 사모님과 전화통화를 한 뒤끝이기도 하거니와 어느덧 제 처지가 이 작품 속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연배에 와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梧陰室主人’을 읽을 때마다 각기 다른 문구에 감흥을 얻곤 하는데, 오늘은 ‘구차한 살림 속에서 오동나무의 현덕만큼이나 드리워진 아내의 그늘을 의식한다’라는 구절과 ‘무료하면 오동나무를 쳐다보게 되고, 그럴 때마다 찌든 내 집에 와 뿌리를 내린 오동나무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는 문구에 마음이 가 닿습니다. 오동나무와 사모님을 비유하여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내비치신 깊고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떠나신 지도 여러 해가 지나고, 사모님 건강도 전과 같지 않습니다. 지난 겨울에는 이웃의 친척집에 오셨다가 제 집에 잠시 들리신 적이 있는데, 추위에 몸을 움츠린 탓도 있지만, 사모님의 음성과 몸놀림이 예전 같지가 않았습니다. 어제 전화 목소리에도 힘이 없으신 듯 했는데, 선생님 떠나시고 난 후에 사모님은 아마도 제 마음이 가 닿은 그 두 문장을 붙들고 사셨을 것이란 짐작이 듭니다. 가정을 꾸린지 3,40년쯤 되면, 아무리 소갈머리 없는 아낙일 지라도 남편이 그동안 내게 와 고생 많았다고, 40년간 새벽밥 해주느라고 수고했다고 하면, 여자는 그 한마디를 붙잡고 남은 생을 차지게 살겠지요. 그 당연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한 여인들은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붙잡아줄 끈이 없을 것 같습니다. 김소운 선생의 ‘가난한 날의 행복’에도 세 부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마지막 등장하는 부부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 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사과 장사를 하려고 춘천에 갔다가 사정이 생겨 삼 일이 지나도록 집에 돌아오지를 않자, 아내는 남편을 찾아 춘천엘 갔지요. 어렵게 만난 남편과 함께 춘천을 떠나 서울을 향하는 차 속에서 남편은 한 번도 아내의 꼭 쥔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세시간 남짓 걸리는 경춘선이었습니다. 아내는 후일 먼저 세상을 뜬 남편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커서 대학엘 다니고 있으니 그이에게 조금은 면목이 선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춘천서 서울까지 제 손을 놓지 않았던 그이의 손길,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은 조용히 웃으면서 그렇게 말을 맺었다고 합니다.
“행복은 반드시 부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진부한 일편의 경구만은 아니라고 작자는 결론 짓고 있습니다. 가난했던 날의 빛나던 행복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작자의 의지가 핵심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힘들 때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의 보석 같은 마음을 잊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겠지요. 이 말은 황금만능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위에 열거한 두 편의 수필에서는 부부간의 은근한 정(情)을 느끼게 됩니다. 저도 나이가 저물어 가니 부부지정의 소중함이 절로 느껴집니다. 몸살 감기로 힘든 요즈음, 남편은 자다가 슬며시 일어나 따뜻한 꿀물을 타다 말없이 제 앞에 내밀곤 합니다. 그 마음이 따뜻한 꿀물 같아 지난 세월 묻어둔 미움이 녹아 내리는 듯합니다. 절실한 그리움도 애절한 아픔도 빠져나간 빈자리에 연민과 이해로 싹트는 눈물의 꽃, 부부지정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눈 위에 내리비치는 달빛이 정겨운 밤입니다. (월간문학 2011. 2월호) |
| 일만성철용 | 11-02-07 11:24 | | 요즈음 며칠 동안 아내와 침묵 전쟁 중입니다. 술을 너무 먹는다고 자식들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보다 며느리 앞에서의 설 다음 날 아내의 거센 꾸지람이 시작이었지요 그래서 '가난날의 행복'이 아니라 '술 마시는 술꾼의 불행'입니다. 부부 간에 행복이야 서로 빗겨 가면 구할 수 있겠지만 어느 한 편이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면 그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모촌이나 소운이 살던 시대는 부럽게도 남성공화국 때요, 지금은 불행하게도 여성공화국 시대거든요. 아내가 말없이 외출한 시간 집을 지키고 있는 처량한 사람이었습니다.. | |
| | 이진화 | 11-02-07 12:52 | | 일만 선생님, 늦은 설날 인사 드립니다. (-_-) (_._) (^_^) 이제 날씨도 풀리고 곧 봄바람도 불 텐데 사모님과 매화라도 보러 가시지요. 올 한 해 강건하시고 건필하시길 빕니다. | |
| | 이진화 | 11-02-07 12:33 | | 한동희 선생님, 설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선생님의 잔잔하고 푸근한 작품을 읽다보니 학 같은 윤모촌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제는 남편과 함께 영화관에 갔었는데 새삼 그런 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회장님께서 꿀물 타서 주시는 장면을 상상하니 마음이 따스해지네요. 두 분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신묘년 보내세요.(^_^* | |
| | 임병식 | 11-02-07 13:47 | | 설명절을 보낸 뒤끝이라선지 '부부지정'의 글이 더 가슴에 와닿은 것 같습니다. 산책하는 코스에 오동나무가 있는데 그나무를 보면서 작품 '오음실주인'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김소운선생님의 '가난한 날의 행복'은 김소운선생님께서 가정적으로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기에 더 큰 울림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말 행복은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소한 느낌과 배려가 빛나지 않나하는 생각을 저 또한 해보게 됩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 |
| | 한동희 | 11-02-07 18:50 | | 일만선생님, 누구보다도 부부의정이 도타워 말년이 행복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죽어서도 다시 부부간으로 만나고 싶다하시니 얼마나 좋으시면 그럴까 하고요. 부인께서 조금 화를 내셔도 허허 웃으시며 받아주시겠지요? 선생님이 약주를 많이하신다고 역정을 내는 것도 모두 선생님의 건강을 위해서 라면, 부인께 고맙다 하셔야 해요. | |
| | 한동희 | 11-02-07 18:57 | | 이진화 선생님, 두 분이 여행도 자주 다니고 시내 데이트도 자주 하시는걸 보니 보기에 좋습니다. 마치 연인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들수록 부부 밖에 없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져요. 모쪼록 행복한 나날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부부모임도 한 번 갖기로해요. | |
| | 한동희 | 11-02-07 19:10 | | 임병식 선생님, 글에서 부인에 대한 애잔한 정을 느끼며, 저도 선생님의 마음이되어 봅니다. 아내의 아픔을 함께 하시는 선생님의 부부지정은 누구보다도 각별하리라 생각됩니다. 신묘년에는 그간의 선생님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부인이 쾌유하시리라 믿어봅니다. 임병식 선생님, 화이팅! | |
| | 최복희 | 11-02-07 20:15 | | 한동희 선생님의 글 월간문학 2월호에서 읽고 잔잔한 감동을 느끼며 우리 부부의 지정도 돌아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새롭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한동희 | 11-02-07 22:04 | | 최복희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올해도 실버넷 뉴스 활약을 기대합니다. 제 글을 읽고 부부지정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니 감사합니다. 그렇잖아도 선생님댁은 잉꼬부부로 알려졌는데 더 말할나위가 있나요. 오래도록 따듯한 부부의 정으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 |
| | 임재문 | 11-02-09 01:29 | | 오늘 최고은 시나리오 작가가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는 뉴스를 접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세상에 그런 일도 있구나 하고말입니다. 질병과 굶주림과 맞서 싸우다가 30대 나이에 저세상으로 간 최고은 작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새봄 더욱 더 알찬 하루 하루 보내시고 건필하시기 기도합니다. | |
| | 한동희 | 11-02-09 11:25 | | 임재문 선생님, 반가워요. 아내와 재미있게 지내시겠지요? 늘 아내에게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마음이 보기 좋았습니다.
최고은 작가 사망소식을 뉴스를 통해 보고 마음 아팠습니다. 서로서로 마음을 열고 외롭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 |
| | 김창식 | 11-02-14 20:28 | | 오래 된 샹송 '라멘씨타(눈물 속에 피는 꽃)'가 불현듯 듣고 싶군요, 한동희 선생님. | |
| | 한동희 | 11-02-15 12:40 | | 눈물속에 피는 꽃은 어떤 느낌일까요? 김창식 선생님과 같이 '라멘씨타'를 듣고 싶군요. | |
| | 김자인 | 11-03-13 18:26 | | 한동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월간문학에서 읽고 다시 읽는데요. 차분한 글이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부부지정을 통해 부부 간의 정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바깥 선생님의 따뜻함이 묻어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댓글이 너무 늦었습니다. | |
| | 한동희 | 11-03-16 10:03 | | 오랜만에 들어와보니 선생님의 댓글이 들어와 있군요. 늦은 댓글이 더 반갑군요. 잊혀져가고 있다는거 잊지않고 있다는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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