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일당이 이렇게 계속 쫓기고, 아내까지 잃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정부의 적극적인 체포작전으로 황해도 군현마다 수사본부가 생기고,
수령들이 전과 다르게 그의 체포에 열정적으로 나서게 된 것과
아마도 주민들의 신고였을 것이다.
면천과 면역, 관직수여를 약속하는 정부의 포상책은 이렇게 큰 위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 쫒기고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동조자들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예전에 임꺽정이 그들을 고발한 자를 찾아가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그들에게 대들고 덤비는 자들은 이렇게 당한다는 위협이었다.
백성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군사나 경호원도 없었던 수령들도 그를 두려워 했다.
그러나 그들이 쫒기고 일당이 체포되면서 이 안전장치의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다.
이 안전장치를 되살리려면 한번 본 때를 보여서 다시 그들을 움추리게 만들 수밖에 없다.
백성들에게만 겁을 주는 것은 소용이 없고,
수사본부를 가동하고 있는 군현 수령들이 겁을 먹고 움추러들게 만들어야 한다.
임꺽정은 보복이라는 안전장치를 다시 가동하기로 했다.
그 대상은 바로 신계에서 그들을 찾아내고
개성부에 연락하여 소탕전을 벌이게 했던 신계 군수 이흠례였다.
이때 이흠례는 봉산 군수로 영전해 있었다.
같은 군수지만 산골인 신계와 달리 봉산은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교통의 길목이었다.
임꺽정도 봉산에 일당이 많거나 자신이 봉산에서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흠례가 봉산으로 영전한 이유가 임꺽정 수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임꺽정이 이흠례를 노린 이유는
신계에서의 복수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 적극적으로 그들을 추적하는 수령을 제거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만인에 대한 가장 확실한 경고였다.
예전에 이태리에서도 마피아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수사로 수세에 몰리자 그들을 수사하는 판사와 특별검사들을 살해한 적이 있었다.
당시 임꺽정과 소두령들은 은신을 위해서인지 서로 흩어져 있었다.
11월 26일 그들은 평산 남면 마산리에 있는 대장장이 이춘동의 집에 모이기로 했다.
평산에서 봉산까지는 그저 하루길이다.
27일 혹은 28일, 기회를 노린다면 며칠 정도 유예를 둔 후에
이흠례는 이들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26일의 회동을 위해 소두령들이 이춘동의 집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이 모임에서 제외된 소두령 한 명이 있었다.
보통 임꺽정의 모사로 알려진 서림이다.
당시 그는 임꺽정 패와 떨어져 엄가란 이름으로
서울 남대문 밖에 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
남대문 밖 지금의 남대문 시장이 있는 자리는 칠패라고
조선시대에 유명한 장이 서던 자리이다.
전에 그들이 은신했던 청계천이나 장통방과 마찬가지로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 은신하기 좋고, 장물 처리하기도 좋은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 지는 모른다.
드라마처럼 가게를 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가게가 없어도 최소한 그는 상인행세를 했을 것이다.
그가 맡은 임무는 역시 장물처리였을 것이다.
이때 포도청이 냄새를 맡았다.
도둑을 잡을 때 중요한 단서가 장물이다.
옛날의 수사관들도 이 점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들의 수사 때문인지 첩보가 들어갔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서림은 포도청 수사대에 포착되었다.
그를 감시하던 수사관들은
임꺽정 일당이 틀림없다는 확신 내지는 증거를 포착하고 마침내 그를 체포했다.
서림이 체포된 날자는 정확치 않으나 11월 23일, 24일 경이었던 것 같다.
강도에다 군관을 살해하고 군인에게 저항한 전력이 있으니 서림은 당연히 사형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공을 세워야 했다.
서림은 26일의 음모에 대해 불었다.
강도가 감히 수령을 살해한다는 음모는 건국 이래 없던 일이라
포도청에서도 서림이 살기 위해 혹은 당장 고문을 면하기 위해
엉터리로 한 자백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보고는 하고 최소한 조치는 해야 했다.
24일 포도대장 김순고는 재빨리 보고를 올렸다.
정부는 선전관 정수익과 부장 연천령, 군관 1명에게 급마를 주어
봉산으로 가서 이흠례에게 알리고,
봉산의 병력과 금교역의 찰방 강여의 병력을 동원해 평산으로 출동하게 했다.
군관은 하루 만에 금교역에 도달했다.
정부가 금교역을 택한 이유는 금교가 평산과 봉산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보고를 받은 강여는 휘하 병력이 없었으므로
군관은 봉산으로 보내고 자신은 평산부로 달려가
평산부사 장효범에게 보고하여 평산부 병력을 출동시켰다.
28일에 평산과 봉산의 병력이 500명이 평산 어수리에서 합세하여
이춘동의 집이 있다는 마산리로 진군했다.
어수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평산-금교-봉산을 지나는 개성-평양간의 도로는
평산군의 동쪽 경계선 쪽으로 치우쳐 지나가는데,
마산리는 이 도로와는 떨어진 평산 남서쪽 평산과 백천군 경계부근에 있다.
두 번이나 임꺽정에게 당했던 터라
관군은 전처럼 체포대를 비밀리에 보내 체포하는 방법을 쓰지 않고
공개적으로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그들의 은신처를 포위하여 체포한다는 작전이었다.
이때 임꺽정 일당은 7명이었다고 한다.
서림이 빠지고 둘이 죽었으니 10명에서 7명이 된 것이다.
다른 졸개들도 있었을 지 모르나
그들은 숨어 있어서 눈에 띄지 않았거나,
정부측 보고서에서 주전급만 보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군대가 출동하자 이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산 위로 달아나는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관군은 산을 포위하고 추적했고, 임꺽정 패는 산골짝 아래로 도주했다. 관군이 그들을 추적하자 부장 연천령이 봉산 군사 한명을 이끌고
그들의 예상 도주로로 달려갔다.
관군이 몰이꾼이라면 무예가 가장 뛰어났을 부장이 사냥꾼이 된 것이다.
장통방 전투에서 포도청의 부장 한명이 그들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그들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
그 부장이 연천령이었는지, 그의 동료였는 지는 모르나
연천령으로서는 그날 땅에 떨어진 포도청의 명예를 회복해야 했다.
작전계획을 마친 관군은 몰이를 시작했다.
관군의 주력은 하루종일 산을 뒤져 임꺽정 일당을 수색하고
그들을 연천령이 매복한 지점으로 몰았다.
산을 다 뒤지고, 연천령이 매복한 산 아래 지점까지 도달하니
이미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그러나 임꺽정 일당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땅에 쓰러져 있는 연천령과 군사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임꺽정 패는 연천령과 부하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난 것이다.
선전관은 연천령이 데려간 군사가 1명이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연천령이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부하 하나만 데리고 이들을 막으려고 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관군이 도주로를 예상하고 매복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꺽정 일당은 그들을 모두 전멸시키고 달아난 것이다.
임꺽정이 처음에 산에서 모습을 드러낸 부터가 작전이었던 것 같다.
산을 포위해서 그들을 추적하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관군은 대부분을 수색작전에 투입하고,
예상 도주로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장수에 정예소수 병력을 주어 매복할 것이다.
경험이 많은 임꺽정은 매복지점까지도 예측하고는 일부러 도주하는 방향을 보인 후
거꾸로 매복했던 연천령 일행을 기습하여 살해하고 달아난 것이다.
작전도 좋았고, 소설처럼 천하장사였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이 무예에 관한 고수들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포도청의 부장과 병사들이 이들 7명에게 전멸해 버렸으니 말이다.
혹은 7명만 보인 것도 속임수이고
실제 병력은 더 많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관군을 양분시킨 후 수가 적을 쪽을 기습하고 달아난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명종은 분노하거나 걱정에 휩싸였던 것 같다.
후세 사람들로부터 마마보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친 문정왕후와 외가인 파평 윤씨가에게 정치를 맡기고 살았고,
늘 나약하고 수동적으로만 지내던 명종이
다음 날 삼정승, 병조, 형조의 당상관 전부, 좌우 포도대장에게
비밀리에 소집장을 보냈다.
장소도 일부러 이전의 병조 건물로 불렀다.
비밀회의를 개최한 것은
임꺽정 일당에게 비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해서가 아니라
대간이나 신료들이 자신의 계획을 반대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신하들이 모이자 명종은 자신이 구상한 임꺽정 토벌안을 내놓았다.
경기·황해도·평안도·함경도·강원도 등 5도에 파견되어 있는 무장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를 도별로 한 명씩 뽑고,
각자에게 역시 우수한 군관 7,8명씩을 붙여주어
황해도 전역에서 수색 및 토벌작전을 벌리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적이 강해 일반 경찰병력으로는 진압할 수 없으니
정예 장수와 군관이 이끄는 군부대로 토벌하자는 안이었다.
명종은 전에 없이 단호한 어조로 이 안을 밀어붙였다.
토론이 일고 반론이 일었지만 명종의 안이 통과되었다.
다만 각도에서 대장을 차출하는 방안이
정부에서 유능한 장수 2명을 순경사로 임명하여
군사작전을 펴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이 계획이 세어나가자 대간에서 반대하고,
영의정 상진이 계속 이전 방식으로 하자고 반대안을 제시했다.
군이 출동하면 민간이 소요하고 경비부담도 커서
민폐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종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임꺽정일당의 소횅을 일반 도적떼가 아닌
난에 가까운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2월 4일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과 강원도 순경사 김세한이 왕을 알현하고 하직인사를 했다.
이들은 각각 직할 군사 50명을 거느렸는데,
수는 적지만 정예병이었던 것 같다.
단 이 병력만으로 수색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감사의 협조를 얻어 각지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듯 하다.
순경사가 내려가자마자 민폐가 심하다는 상소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꽤 세게 임꺽정 일당을 추적했던 것 같다.
이때의 수사방법이라는게 혐의가 있는 사람,
정보를 알 것 같은 사람을 잡아다가
두드려 패서 자백을 얻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명종은 밀어붙였다.
거친 방법이었지만 군사작전은 또 거칠 게 해야 성과가 나기도 한다.
한달이 되지 않은 12월 28일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으로 부터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명종은 신이 났지만 벌써 몇 번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지라
즉시 포도청에 연락해서 정예군관과 병사를 호송원으로 파견하고,
황해도 수령 중 무반 출신 수령 2명을 호송책임자로 정해
임꺽정을 병조로 압송하게 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