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란 민주주의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평가받습니다만 사실 민주주의가 아니라도 선거는 아얘 없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을 밝히고 다수의 뜻이 반영된다면 그것 자체도 일종의 선거라고 할 수 있어서 군주국에서는 선거로 군주를 뽑는 선거군주제가 공화정에서는 다수 민중이 아닌 소수 귀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귀족공화정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이때의 선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선거에 정해진 원칙이 있어 이 원칙에 어긋나는 선거를 '부정선거'라 하여 인정하지 않고 경멸하지만 당시의 선거는 '당선되면 장땡'이었기에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권 선거가 난무하였고 대체적으로 높으신 분들끼리의 선거다 보니 선거에 치르는 비용도 막대해 선거를 치르는 경우 소모되는 돈이 어마어마했는데 이는 선거군주제든 귀족공화정이든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선거군주제의 경우 가장 유명한 사례를 꼽자면 신성로마제국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처음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의 대관을 받아 즉위한 후 카를 3세에 이르기까지 88년동안은 세습으로 이어졌지만 그 이후 한동안 제후들끼리 다투며 나눠먹다가 오토 대제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제후, 즉 선제후들에 의해 선출되는 것으로 변경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거에 의해 황제가 세워지고 그러다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막시밀리안 1세가 1519년에 죽자 다시 황제 선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시기쯤 되면 선거는 장식이고 사실상의 세습제화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선ㅓ는 해야 했기에 치뤄졌는데 문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워낙 많은 집안과 혼인관계에 있었고 카를 5세 시기에 이르면 오늘날의 스페인, 오스트리아. 베네룩스 등 온갖 꿀땅을 모조리 먹어치운 상태라 유럽 각 국가들은 황제 자리까지 넘어가는걸 원치 않은 상태여서 이 때에 이르러 기가막힌 일이 벌어집니다.
원칙상 선거에 굳이 합스부르크 가문만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외국 군주가 나가는게 안된다는 것은 없었으므로 다른 인물들도 후보로 제안받았는데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작센 선제후국, 영국, 프랑스가 그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국은 카를 5세와 경쟁이 안 된다 여겨 사퇴했고 영국 왕 헨리 8세는 거절(참고로 그의 아버지인 헨리 7세도 예전에 제안받은 적이 있었는데 짠돌이로 유명했던 왕답게 선거에 들어갈 돈에 기겁해서 거절했습니다.) 결국 남은건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뿐으로 그는 카를 5세의 라이벌이기도 했기에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선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다수 선제후의 선택이었고 마음을 사는데엔 돈만한게 없으니 금권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군주가 돈이 마냥 풍족한 자리는 아닌지라 어디선가 지원받아야 했습니다. 카를 5세의 경우 이를 위해 독일의 금융 거부 집안인 푸거 가문과 벨저 가문에게서 85만 두카트를 빌려(프랑수아 1세는 30만 두카트를 동원.) 선제후들에게 뇌물로 뿌려서 당선되었습니다. 1두카트에 대략 10만원 정도 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말대로라면 각각 선거에 850억, 300억을 태운 셈입니다.
귀족공화정 하에서는 로마 공화국과 카틸리나의 사례가 유명합니다. 로마는 주요 공직을 선출로 정했고 선출로 했다는 것은 자기 말고도 다른 후보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밟고 자기가 당선되기 위한 노력이 치열했습니다. 근데 앞서 말했듯 이 시기에는 당선되면 장땡이라서 마찬가지로 금권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보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자기 집안이 정말정말 떵떵거리는 가문이다 싶으면 자기 돈을 써도 그만이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에게서 빌려야 했습니다.
문제는 로마의 선거는 굉장히 잦았다는 것으로 집정관만 해도 1년에 한번씩 교체되므로 집정관 선거만 해도 매년 벌어지는 셈이므로 선거 몇번 치뤘다간 돈이 거덜날 지경이었습니다.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역시도 그 문제를 겪은 사람으로 몰락귀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키케로, 폼페이누스, 술라 등과 활약하다가 기원전 68년에 법무관을 지내고 기원전 64년에 집정관에 도전했으나 낙선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는 채무 전액 탕감이라는 과감한 구호를 내걸기 시작합니다.
그의 채무 탕감 공약은 당시 그와 마찬가지로 선거때문에 막대한 빚을 진 사람들의 호응을 많이 샀습니다. 주로 영세한 자영농과 몰락귀족들이 그러했는데 그러나 채무란 빌린 쪽과 빌려준 이가 있기 마련이므로 빌려준 쪽에 있는 자,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사유재산이 많은 자들은 자신들의 사유재산이 침해된다고 여겨 반발했습니다.
이후로 기원전 63년에 또 낙선했고 카틸리나는 연속 낙선에 늘어난 빚으로 궁지에 몰렸고 카틸리나와 그 일파는 도저히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집권이 불가능하다 여겨 모반을 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소문이 퍼지면서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해 카틸리나와 그 일파를 살해할 것을 명령하였고 카틸리나와 그 일파는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했지만 키케로가 네 차례에 걸쳐 그를 탄핵하며 밀어붙였고 결국 토벌군이 조직돼 카틸리나와 그 일파 3000여명이 몰살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때 죽은 이들 중에는 고위직 출신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로마의 선거문화로 인한 채무가 이런 극단적인 사건을 이끌게 할 정도였다는 것과 동시에 그것은 설령 선거에 당선되어 고위직에 올랐던 이들에게조차도 예외가 아님을 의미하며 실제로 카이사르조차도 엄청난 채무에 시달려 이 때 카틸리나 일파로 몰릴뻔하기도 했고(그래도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 최고 부호인 크라수스가 스폰서로 있어서 카틸리나처럼 절박하진 않았습니다.) 카이사르의 지지자 중 하나인 쿠리오라는 인물은 카이사르보다도 젊은데 빚은 그보다도 많을 지경이었습니다.
현대의 경우 이 문제점을 인지했는지 대한민국의 경우 '선거비 보전'이라 하여 선거에서 받은 득표비율에 따라 국가에서 선거비를 보전해주는데 15%이상 득표시 전액보전 10% 이상 득표시 절반 보전 같은 방식으로 보전합니다. 로마의 경우엔 당선되고도 빚에 허덕였던 것과 비교해본다면 진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곧있으면 선거철이네요
투표합시다!
저는 선거에 단 한번도 빠지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