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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8일 토요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제1독서 : 에페 2,19-22
복 음 : 루카 6,12-19
그때에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긴 새 주택을 구하고,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면 처음에는 행복도가 높아지지만
계속해서 그 행복도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전과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하지요.
그래서 돈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심리학과 엘리자베스 던 교수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노튼 교수는 돈으로 행복을 높이는 좋은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돈으로 경험을 구매하라.”
물건은 점차 남루해지고 유행도 바뀌고 지겨워지지만,
가령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콤해진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좋은 사람과 함께한 경험을 많이 만들면 행복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파멸로 이끌 수 있는 경험을 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파멸로 이끌 수 있는 경험은 지속될 수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정을 파괴하는 외도, 자신을 파괴하는 마약류의 섭취,
다른 이의 몰락을 위해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 등은
순간의 만족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속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파멸로 이끌 뿐입니다.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위해 돈을 쓴다면, 분명히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계속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셨고, 마귀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돈이 더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기에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이 전혀 없는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따라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참 행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이 부름은 세상의 것과는 분명 구별되는데,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문제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사느냐면서 불평불만을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는 더 편하고 쉽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반문합니다.
지속될 수 있는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질 수 있는 행복이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때, 행복은 시작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약함과 실패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분 아드님의 모상이 될
실질적 역량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갖춘 자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곧 신분이나 능력이나 지위에 있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없는 무명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뽑힌 후에도 여전히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히었기에 거룩한 이들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분에 의해 뽑히었고, 거룩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유다와 시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시몬이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지 타대오, 곧 “용감한 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건물’이 되고, 거룩한 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십니다.”(에페 2,20)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령스럽게도 이 “건물”(집)은 “자라납니다”.
곧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에페 2,21).
그렇게 자라나면서 신령스런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집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2,22).
참으로 신령스런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이 사실!
지금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다’는 이 사실!
이토록, 우리 안에 당신의 신비가 살아있다니, 헤아릴 수 없이 크나큰 분이
나보다 작아져 내 안에 들와 있는 이 사랑의 신비 앞에
그저 어안이 벙벙하고 경탄할 뿐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에 녹아,
세상에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가정’을 건설합니다.
바로 내가 그 나라의 백성이요, 그 집의 건축자재요, 그 가정의 식구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 성지순례 중에 각 지역마다 ‘사도’로 존경받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에는 제주도 출신의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를
제주도의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김기량 순교자는 1857년 중국 광동 해역까지 표류하다가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때마침 휴양 중이던
조선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워
그해 5월 31일 루세이유(Rousseille)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입교하였습니다.
이듬해 우리나라 국경인 의주부를 거쳐 귀국해
이 바울리노가 전해준 서한과 안내 정보를 가지고
많은 어려움과 고생을 겪으며 교우촌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교우촌에 도달하여 최양업 신부를 만났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성실함과 그의 신앙에 대한 열성을 보고는
그가 제주도의 훌륭한 사도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한창일 무렵, 김기량은 세례받을 준비를 마친 예비 신자들을 데리고
가족들과 함께 육지로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1866년 통영 관아에 이송된 그는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떳떳이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이송된 교우들에게 치명할 것을 의연히 권면하였습니다.
제주 출신의 첫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장렬하게 순교하였습니다.
김기량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와 벗님네야 치명 길로 횡행하세.
어렵다 치명 길이야 평생소원 사주모요 주야 앙망 천당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도 주대전 하옵소서.”
이렇게 교회는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를 제주의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거제도에는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이 있습니다.
거제도는 예로부터 유배지였습니다.
이 고장에 복음이 전해 진 것은 병인박해 때
부산 영도에서 피난하여 온 윤사우 다니슬라우에 의해서입니다.
윤봉문은 바로 윤사우의 둘째 아들입니다.
윤봉문은 1851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부친을 따라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이 거제도로 들어간 것은 1868년경입니다.
그들 가족은 우연한 기회에 옥포에서 동수로 있던
진진부와 인연을 맺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윤봉문은 전진부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복자 윤봉문 요셉은 거제의 사도로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붓 장사를 하면서 전교에 힘썼습니다.
순교자 윤봉문은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1887년 11월 병인박해 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 본당 초대 신부였던 로베르(Robert)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를 방문하자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신자 15명을 영세 입교시켰습니다.
그러나 한 달 후 뜻밖에도 이 지역에는
공식적인 박해가 아닌 사사로운 탄압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순교자는 칡넝쿨로 발목을 얽어 끌고 갔기에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은 1888년 2월 20일 37살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조선의 초대 교회에는 이 밖에도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있고,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습니다.
이런 사도들의 열정과 신앙이 있었기에 모진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교회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 동북부의 한인 천주교회에도
뉴욕에는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과 뉴저지에는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1970년대 초반에 이민자들을 위한 공동체를 설립하였습니다.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의 헌신과 열정으로 뉴욕에는 퀸즈 정하상 성당, 베이사이드 성당,
우드사이드 성당, 브루클린 성당, 롱아일랜드 성당이 생겨났습니다.
사제성소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10여명 이상의 1.5세 사제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의 헌신과 열정으로 뉴저지에는 메이플우드 성당,
데마레스 성당, 103위 성당, 마돈나 성당, 마이클 성당이 생겨났습니다.
사제성소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20여명 이상의 1.5세 사제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과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은
뉴욕과 뉴저지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며
힘들게 공동체를 가꾸었던 교우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민 초기에 한인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교우들
역시 뉴욕과 뉴저지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 성인의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주셨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갔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며 거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입니다. 나누고 살기에도 바쁜 인생입니다.
늘 감사드리고,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기뻐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두 사도는 열두 사도 중의 두 사도로서,
시몬은 사도들의 이름 목록에서 열한 번째에 놓인 사도이고,
가나 출신으로서 유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혁명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성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하며 최후 만찬 때 주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여쭈어본 사도였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할 제자들을 선택하신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마르 3,14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제자의 신분은 그분의 도구나 심부름꾼이나 종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함께 생각하고 염려하고 기쁨을 나누는 친구의 신분과 같다.
그러니 이렇게 죄를 짓고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친구로서 대하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큰 은총이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서로가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모두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한 공동체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각자가 모두 다르지만, 주님 안에,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당신을 각자가 처한 삶의 장에서 증거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이 그렇게 특별한 교육도 받은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보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인간의 힘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모두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게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당신 사업의 중책을 맡기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절)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는 본시 배우는 사람이요, 스승이란 가르치는 분이다.
여기서 제자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우고, 자신도 스승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말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배우고 따르며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부름을 받은 우리의 할 도리이며, 예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에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뵐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열두 사도가 믿음에 있어서 또 실천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은 있다. 아니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선택해 주신 그분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산다면 우리도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주님의 제자의 삶이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생활하고 “그분처럼”(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참된 스승과 제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열혈당원이라 불리는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과 마태오는 서로의 위치가 대립적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뽑힌 것입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신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이것이 스승의 참모습입니다.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의 품을 떠날 뿐입니다.
예수님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이들로 만드셨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함 투성이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 제자로써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늘 투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투쟁과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생각하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은
네 곱절로 크게 갚아주고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리 마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으면 미래가 열리고, 믿지 못하면 그 자체가 영벌입니다.
일상의 삶을 봅니다.
“여자는 결혼 후 남자가 변하길 바라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는 반대로 변한답니다.
또한 “남자는 결혼해도 여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여자는 변한답니다.”
여자도 역시 남자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한답니다.
집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그야말로 아줌마가 된답니다.
서로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데
부족함에 대해 서로 잔소리만 늘어가면 불행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스승 앞에 참된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3,2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태우지 않는 불꽃 처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교회는 시몬과 유다 타대오 사도의 축일을 함께 지낸다.
이들은 예수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 12 사도 중 두 사람이다.
신약성서는 12 사도의 명단 속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전해주고 있을 뿐 다른 내용은 거의 없다.
시몬은 갈릴래아 지방 가나 출신(가나안)으로서(마태 10,4)
그에게 붙여진 “혁명 당원”(마르 3,18; 루카 6,15)이라는 별명처럼
하느님 외에는 어떤 통치자도 인정하지 않고, 무력으로라도 로마제국의 압제에 항거하여
이스라엘을 되찾고자 뭉친 젤롯당에 속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시몬이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활동 속에서
정치적인 메시아의 모델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다 타대오는 신약성서에서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명기되기도 하고(루카 6,16; 사도 1,13),
사도 야고보와 함께 알패오의 아들 타대오(마태 10,3), 또는 그냥 타대오(마르 3,18)라고 명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도를 편의상 “유다 타대오”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는 명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데,
그것은 가리옷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요한 14,22) 하고 묻는 대목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사도 유다 타대오가 혁명당원 시몬처럼
예수께서 정치적인 메시아이기를 바랬던 점을 알 수 있다.
전해오는 자료에 의하면 시몬은 처음에 이방인과 유다인들에게,
나중에는 이집트, 키레네, 마우리타니안, 리비아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마지막으로 페르시아에 이르렀다.고 한다.
유다 타대오도 처음에는 팔레스티나에 머물다가
아라비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선교하다
마지막에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에서 시몬과 유다 타대오는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시몬은 톱으로 몸을 잘리는 순교를,
유다 타대오는 도끼에 목을 잘려 순교했다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장엄한 과정을 거쳐 12제자를 선발하신 사실과
그분의 계속된 치유 행적을 보도하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12제자를 엄선하신 사실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다.
(오늘 복음에 관한 자세한 해설은 연중 제23주간 화요일의 복음사책을 보세요.)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굶주리고, 병고에 허덕이며,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루카는 이렇게 산과 평지를 구분하였다.
산은 기도와 소명의 장소요, 평지는 선포와 활동의 장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루카 복음사가가 소명과 활동을 함께 묶어 둔 이유일 것이다.
“제자”란, 역사적 예수의 공생활 중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을 일컫는 말이요,
“사도”란,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복음 선포의 지상 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산에서는 제자이나 평지에서는 사도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신자란 예수님 앞에서는 제자로 불림을 받아 그분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세상 앞에서는 사도로 파견되어 죽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과분하게도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서를 읽다 보면 베드로나 안드레아, 야고보나 요한처럼
자주 등장하는 사도들이 있는가 하면,
거의 침묵하고 계셔서 그 존재감이 미미해 보이는 사도들도 계십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10번째, 11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사도들인데,
시몬과 유다(타대오) 사도입니다.
시몬 사도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며 전직 열혈당원이었다는 것뿐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유추할 뿐입니다.
‘유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폭력과 살상도 마다하지 않던 독립군 유다가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군사로 변화되었다.’
유다 사도의 이름은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딱 세 차례에 걸쳐 아주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 사도들의 명단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대신 타대오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유다 사도를 예수님의 형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유다 사도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수호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백과사전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모호한 인물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없다.”
두 사도에 대한 관련 자료나 문헌이 적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베드로 사도나 요한 사도처럼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단 내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해서 그 영향력이 미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쪽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묵하면서도 충직했습니다. 고민하고 따지기보다는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스승님의 모든 말씀은 내게 있어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목숨 걸고 준수해야 할 명령입니다!’라고 여기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 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에 충실했습니다.
사도로서 자신의 신원에 걸맞게 살려고 애를 쓰다보니 따로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 추수할 일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 앞에서 말하기보다는,
하루 온종일 죽기 살기로 헌신하고 뛰어다닐 일꾼이 필요했었는데,
그들이 바로 시몬과 유다 사도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도 많은 말보다는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주님을 증거할
또 다른 시몬과 유다 사도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열두 사도를 부르셨던 것처럼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가 잘나거나 특출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측은해서, 이런 우리와 당신 사명을 공유하기 위해,
결국 우리를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과분하게도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이승화 시몬 신부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예수님이 선택한 이들은 열둘이었습니다.
파견된 자,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인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들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들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병을 고치려고 온 것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전하기에
사도들은 누구나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기도하신 후에 사도들을 뽑은 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지금 하느님이 바라시는 이들,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 이들을
선발하셨을 뿐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의 비전을 전해줍니다.
나의 나약함이나 강함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중심이라는 점
지금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응답하기 위해 준비할 뿐
그분께 온전히 의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며
하느님을 중심으로 연결된 한 건물임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가족과 건물을 통해 주님을 전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성장하고 나아갈 뿐입니다.
오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주님의 가족이 더욱 확장되어
모든 이가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