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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일
제1독서 : 탈출 22,20-26
제2독서 : 1테살 1,5ㄴ-10
복 음 : 마태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갑곶성지에 있을 때, 손을 자주 다쳤습니다.
성지 바깥일을 하다가 나무에 찔린 적도 있고, 요리하다가 칼에 베인 적도 있습니다.
강화도 시골길을 자전거 타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손을 다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책을 읽다가 책에 베인 적도 있지요.
올 초부터 인천 송도에 위치하고 있는 성 김대건 성당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그렇게 손을 많이 다쳤었는데, 이곳에서는 다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갑곶성지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갑곶성지와 달리 이곳에서는 손 쓸 일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방 일도, 또 바깥일도 하지 않으며, 자전거 도로는 잘 되어 있어서 넘어질 일도 없었습니다.
손을 많이 다치는 이유는 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친다고 손 사용하는 것을 멈춰야 할까요?
아닙니다. 손 사용을 멈출 수 없으니 조심할 뿐입니다.
마음을 다친 분을 종종 만납니다. 어쩌면 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마음을 많이 쓰기 때문에 마음을 다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처받았다고 마음 쓰는 것을 멈추는 것이 옳을까요?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써야 합니다.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써야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랑 실천하는 데 써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상처받는 것이 싫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마음을 써야 합니다.
당연히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크게 보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을 많이 쓸수록 그만큼 다칠 확률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도 더 가깝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에는 365개의 금령과 248개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를 모두 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또 이를 지키기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특히 이를 지켜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알지도 못하고 또 지키기도 힘드니 구원의 길에서 제외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쉬운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담고, 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마음을 써야 합니다.
물론 아픔과 상처가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만큼 가까워집니다.
오늘의 명언:
악마는 삶의 상처와 어떤 경우에는 실수를 이용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성 마더 데레사).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가을이 익어가는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우리 삶을 익어가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우리 인간을 익어가게 하고 변화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약한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이방인, 과부, 고아
그리고 병든 자, 헐벗은 자 등이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가정에서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 병들거나 불구 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먼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혹 누가 불구 된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면, 부모의 가슴이 더 아프고 더 쓰릴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에는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곧 울부짖는 백성들과 꼭 함께하시는 분이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자유와 해방>(1986)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을 신학의 기본 입장과 기본 정신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시키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 딸들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그렇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과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자신과 형제를 사랑한다면, 자신과 형제를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자기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귀함에서 오며,
자신에 대한 존귀함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사실 이러한 ‘참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 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문헌 <새 천년기>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교의 영성을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되고, 한 아버지 안에 한 형제자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형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지니게 되고,
형제의 바람과 요구를 깊이 공유하며 깊고 참된 우정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 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서로 한 생명이 되고, 하느님은 사랑이 됩니다.
이웃이 곧 하느님이 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요,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의 혁명을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곧 사랑의 혁명서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 강론(2014.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어진 사랑의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혁명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 집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지순례 중에 초남이엘 갔습니다.
초남이는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살던 고향의 이름입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그곳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이 소유한 땅은 300만 평이 넘었다고 합니다.
여의도 땅의 3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의 땅에서 나는 소출은 3만 석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제 부유한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부유함 대신에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건강한 몸 대신에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사람은 아픈 사람은 고쳐주고, 마귀는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유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습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제가 없는 조선에 사제를 영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유항검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욥에게 시련이 닥쳤던 것처럼 유항검은 모든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그에게는 ‘파가저택(破家瀦澤)’이라는 벌이 내렸습니다.
그의 집은 모두 부수고, 웅덩이를 만들어 돼지들이나 살게 했습니다.
다시는 그가 살던 집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단순한 재산의 몰수가 아닌 대역 죄인에게 내리는 벌이었습니다.
유항검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 유일석(柳日碩)[6세]은 흑산도로, 셋째 아들 유일문(柳日文)[3세]은 신지도로,
딸 유섬이(柳暹伊)[9세]는 거제도로 각각 유배되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이들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유항검은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도 순교하였습니다.
재산의 몰수,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순교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묻혀버릴 것 같았습니다.
모든 시련을 끝까지 참아낸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은 유항검을 과거의 먼 기억 속으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유항검과 그 가족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유항검과 가족들의 묘는 전주 치명자 산꼭대기에 모셔졌습니다.
치명자 산은 성지가 되었고, 많은 순례자들이 유항검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뜨거운 열정과 신앙을 배우려고 합니다. 순례자들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유항검과 그 가족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거제도에 묻혀있던 딸 유섬이의 묘지도 발견되었습니다.
돼지들이 살던 유항검의 집터는 초남이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교리를 가르치던 곳은 교리당이 되었습니다.
200년 전에 잊혀 질 것 같았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가족들은
교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200년 전에 호남의 사도였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이제 복자가 되어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나 과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어도 무리해서 그들의 처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부나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은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온 마음과 생각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처럼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는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생색을 낼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환난과 박해를 이겨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른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주어지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모든 신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는 조선의 모든 신자들에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전례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강조하며,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증거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두 실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악의를 위장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이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라고 예수님을 떠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신명기 표현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그리고는 봉인하듯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하셨다.
이러한 사랑은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님 자신의 생활,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필립 2,8 참조)으로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된다.
그러나 예수님 대답의 의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우선성에 대한 재확인보다도
그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놓으려는 데 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9절).
예수께서는 레위 19,18을 상기시키며 이는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체계를 확인하면서도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묶으려 하신다.
두 계명 간의 보충적인 것에 대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6) 창조되었으며,
인간 창조가 가장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창세 1,31).
둘째로, 강생의 신비 이후 하느님의 모습이 더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이제 신화(神化: Deificatio)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하느님께 드리는 그 사랑과 닮은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은 바로 형제들과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도 요한은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라고 역설하고 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40절) 는 말씀은
두 계명의 일치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뿐 아니라,
이 두 계명으로 모든 계시가 종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종합의 의무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종합을 생기 있고 활력 있게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웃에 대한 사랑, 특히 더욱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즉 외국인, 고아, 과부 등에 대한 사랑이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웃 사랑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해 주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드러내는 표현 방법이었다.
탈출기에 나오는 규정들은(22,20-26) 박애주의적 정신만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움에 있는 자기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비하시기”(탈출 22,26) 때문이다.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든 간에 그것은 하느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 같다(마태 25장 참조).
하느님은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엄하게 다루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과 만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 중심주의적인 박애주의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이웃 형제들에게 베풀 수 있는 봉사도 더 잘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께 첫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을 소외시킬 수 있으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듯이 이 두 계명의 종합을 이루어가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7.39절).
이제 우리는 모두 가치관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첫 자리에 계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 자리에 다른 것이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물이나, 다른 것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가치관이 올바로 정립될 때 우리는 진정 이 두 계명을 종합해 나갈 수 있다.
이 종합을 위해 조금씩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사랑할 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뵙고자 한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이 시간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하면, 상처를 입고 자기를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성 마더데레사).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행위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어렵고 힘들지만,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얻게 됩니다.
내 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인간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눈높이 사랑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노래 한 곡 불러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말씀을 노래했습니다.
자! 그러면 코린토 전서 13장의 말씀에 견주어서 우리 사랑의 정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오래 참습니다. 나는 친절합니다. 나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례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 나는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어떻습니까? 부족함을 알았으면, 채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22,37).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22,39).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일상생활 안에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약한 사람이건 힘이 센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예수님을 알아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하느님과의 친교가 깊으면 깊을수록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크고 거창하게 사랑하려 하지 말고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일상 안에서 사랑할 소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친절로, 때로는 온유로, 밝은 미소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으로,
청소하는 것으로, 설거지를 도와주고, 환자를 방문해 주고…
… 어떤 의견에 공감해 주는 것으로… 상대를 존중하며 인정해 주고, 칭찬의 말 한마디로…
…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사랑할 기회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고
그 만남의 기쁨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항구하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 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마더 데레사).
그러므로 먼저 기도 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무엇을 이루는 게 아니라 사랑은 그 사랑을 지켜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새로워지길 바랍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되면서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착각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랑의 이 두 차원은 함께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제자를 특징짓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갈라놓으려는 착각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오늘의 복음 외에 「복음서」들 안에 더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서」들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의 「서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사랑을 모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여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1요한 4,8-1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상대는 바리사이파 율법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하기 위해,
인간 삶의 모든 경우를 假想하여 각 상황에서 지켜야 하는 율법의 차림표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지켜야 할 율법 조항은 600개를 넘었습니다.
율법 조항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 놓고, 바리사이파 율사들은
율법을 다 배우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들도 죄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율법 조항이 그렇게 많으니, 사람들은 율법에 정신을 빼앗겨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율법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덫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조항들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율법은 기원전 13세기, 이집트 탈출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10계명을 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구약성서」의 「탈출기」는 하느님이 모세와 계약을 맺으셨다고 말합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시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것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일”(탈출 33,19)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모세는 그 실천을 열 개의 구체적인 지침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기원인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한 율사들이 생기고,
聖殿에서 제물 봉헌을 전담하는 사제들이 생겼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의 중요성만 강조하고, 사제들은 제물 봉헌의 의무만 과장한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율법 지키고 제물 바치는 데만 골몰하게 되었습니다.
本末이 轉倒된 일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想起시키는 율법이었고,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인간이 자기 노동의 대가를 하느님 앞에 가져와,
그것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고,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는 제물 봉헌의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으면서
율법도, 제물 봉헌도, 지키고 바쳐서 인간이 소원성취하는 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교 실세들은 율법지킬 것과 제물 봉헌할 것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선하고 베푸시는 하느님은 사라지고,
사람들 위에 무자비하게 군림하며 지배하는 하느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이 하느님 앞에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열리는 삶의 공간입니다.
現世이든, 來世이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자녀가 아버지 혹은 부모로부터 배워서 인간의 가치 질서를 살 듯이,
신앙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그분의 가치 질서를 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카 6,35-36)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하느님의 가치 질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질문하는 율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질문하는 율사가 그 단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율사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계명’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율법이라는 계명에만 집착하였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집착하는 그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계명을 용의주도하게 준수하기만 하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에 대해 깨달아서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분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율법을 주고 심판하기 위해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强者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 법으로 질서를 세웁니다.
그들이 주는 법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 법을 범하면 벌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삶이 그분으로부터 베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도 그 베풂을 자유롭게 실천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자녀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利己的이고 또 排他的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긍정하고 방어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생명의 基源이신 하느님에게서 또 이웃에서 고립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준수에 정신을 빼앗기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하여,
자기의 구원을 쟁취하겠다고 나서지 말고,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사랑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니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로워야 하고,
하느님이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시니,
우리도 이웃에게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여,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우리의 사랑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를 수 있기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냥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니 사목자로서 살짝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제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내 시간, 내 젊음, 내 에너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목숨, 정신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그랬더니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투자한 그 사랑이 고스란히 내게로 되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제 사랑을 확인한 아이들로부터 오는 사랑을 느끼다 보니, 더 열심히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느꼈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로구나.
사랑은 움직이는 것, 역동적인 것이로구나. 사랑은 오고 가는 것이어야 하는구나.
오늘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 안에 얼마나 진심, 진정성, 정성이 포함되어 있는지
성찰하며,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아니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그분을 대해 온 것을 크게 뉘우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 불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오 복음 22장 36절)
그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또다시 촌철살인의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습니다.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요약과 종합의 명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구약 성경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구약 성경 전체를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게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 37~40)
예수님께서는 못 배우고 가난한 백성들도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신앙의 진리를 아주 간단히 종합해서 설명하십니다.
이 또한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느님 사랑, 인간 사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쉽게 가르치십니다.
한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해야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심 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함을 통해,
두 사랑이 지닌 불가분의 관계를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이 실천하던 이웃 사랑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동족 유다인들에게만 적용시켰고,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개념을 크게 확장시키셨습니다.
사랑은 국경이나 인종을 넘어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더 뜨거워지고, 더 깊이가 더해지고,
더 진정성 있는 사랑이 될 수 있기, 불꽃처럼 활활 타오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승화 시몬 신부
오늘날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종교를 가진 이들의 삶에 대한 반감이 큰 영향을 끼치지만
때로는 종교적 가르침이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행복을 향한 여정인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왜곡되어 패배주의 혹은 지나친 낙관주의로 빠지곤 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믿는 이들에게 요구만 하고
믿는 이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설득하지 못하고 강요하기만 합니다.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라는 말
네가 믿는 신이 그러라고 가르치냐?라는 말
기도하면 다 됩니다! 라는 말
하느님이 알아서 다 해 줄 것이라는 말
이런 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웃픈 현상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개인이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응답입니다.
아무런 체험도 없는 이들에게
또 자신이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강조하며 하나의 규율로만 다가갈 뿐입니다.
이웃 사랑은
내가 받은 사랑이 넘쳐흐르는 삶의 자세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아본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랑을 전해주게 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아직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호의를 가지고 다가갑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이들은
남들을 경계하거나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게 됩니다.
냉소주의적인 시선만 보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강요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 안에 자리잡고 충만해지는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랑의 응답이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전달이며 사랑하는 이를 향한 사랑의 행동이 됩니다.
이런 사랑은 양심이 있는 이들
곧 지독한 현실주의자들이 가능합니다.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함께 하는 이들에게 손길을 내밀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받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아는 이들
또 내 경험을 비추어 상대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이들만이
사랑과 자비를 전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하며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나친 낙관주의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방탕하게 살뿐이고
지나친 냉소주의자는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며 삶의 의미를 놓쳐버립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리에서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율법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현실을 지혜롭게 바라보는 우리가
더욱 큰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길 바라며
오늘 이 시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여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