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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개역:『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막 1:3)
◇신세계역:「잘 들어라! 누군가 광야에서 외치고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여라 곧게
하여라’」
이 구절은 선지자 이사야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개역성경과 신세계 역의 두 구절을 비교한다면 “주의 길”과 “여호와의 길”이 다를 뿐이다. “주의 길”은 헬라어 성경에 있는 것이고 “여호와의 길”은 헬라어 성경에 없는 것이다.「여호와의 증인」은 70인 역에서 삭제된 “여호와”의 이름을 회복시킨다는 미명하에 신약성경에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여호와”를 다수 삽입 했다. 성경 변개를 서슴치 않는 만용(蠻勇)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미명이 본문에서는 악명(惡名)이 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세례 요한의 뒤를 이어서 세상에 나타내실 분은 누구인가? 여호와인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성경에 예언되고 실현된 사건이므로 명백하다. “오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혹시 다른 분이 오시기라도 했나? 오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오신이도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여호와라니!「여호와의 증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입장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을 뻔히 알면서도 “여호와의 길”이라고 써 놔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온갖 고난과 모욕을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여호와의 길”이라고 고집할 것인가?
◆한글개역:『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신세계역:「그 분은 비록 하느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지만, 장악하려고 곧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는 책 p.42에 빌2:6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형상이시나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를 박탈할 것으로 생각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큰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본문을 왜곡(歪曲) 변조했다는 점이다. 필자는 저명한 헬라어 학자인 A. T. 로버트슨의 설명을 인용하여 「여호와의 증인」의 악의적인 왜곡을 바로 잡으려 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의 헬라어 원문은
ὃς ἐν μορφῇ θεοῦ ύπαρχων... . . . . .이며
who in (the)form of God subsisting...
ύαρχων(후파르콘)은 “존재하다”를 뜻하는 ύπαρχω(후파르코)의 현재 능동 분사로써 “현재 존재하고 있는”이 적절한 번역이다. 문맥을 이어 본다면 “그는 하나님의 본체로 존재하셨지만....”이란 뜻이 된다.
⊙“하나님의 본체”에서 “본체”는 헬라어 μορφῇ(모르페)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본체”는 본질적인 속성을 의미한다.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셨으며 천국에서 그를 본 자들에게도 그렇게 나타나셨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취할 것으로”(ἁρπαγμὸν:하르파그몬)는 “여기다”를 뜻하는 ἡγ-ήσατο(헤게사토)를 취한 서술 대격이다. 본래 단어에 -μος가 붙으면 능동적 행동을 뜻하며,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결과를 의미할 때는-μα가 붙는다. 극히 드문 예이긴 하지만 ἁρπαγμὸς(하르파그모스: 강탈)를 ἁρπαγμα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ἁρπαγμὸν(하르파그몬)을 “강탈하여 획득한”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소유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했다.
“취할 것으로”의 헬라어 ἁρπαγμὸν(하르파그몬)은 “붙잡음, 착취, 약탈, 열심히 노력하여 붙잡은 것, 열심히 요구하거나 두드러지게 연습하여 얻은 것”이라는 사전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신세계역에서 “장악하려고”이라고 번역한 것이나 “빼앗을 것”, “차지하려고”, “박탈할 것”으로 번역한 것은 사전적인 풀이만 놓고 볼 때에는 아주 잘못된 번역은 아니다. 그러나 아주 잘못된 번역이다. G. E. 래드는 그의 저서 ‘신약신학’에서 ἁρπαγμὸν에 대한 밝은 길을 안내해 주고 있다. 래드는 하르파그몬은 능동적인 의미이거나, 아니면 수동적인 의미일 수 있지만 어떤 것을 붙잡는 행위, 즉 약탈 행위를 지칭하는 능동적인 의미는 문맥상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footnote 44번을 붙였는데 그 각주의 내용은 “하나님과 동등한 상태는 약탈 행위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Arndt and Gringrich, Lexicon, in loc.의 설명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과 동등됨”(τὸ εἷναι ἲσα θεῷ :토 에이나이 이사 데오)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를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분이시다. 영광과 권능에서 동등하신 분이시다. 그렇지 않다면 빌2:6,7의 말씀은 아무 의미도 없는 공허한 말씀이 되고 말 것이다.
⊙“자기를 비어(비워)”(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헤아우톤 에케노센)은 “텅빈”을 뜻하는 κενός(케노스)로부터 파생한 고대동사 κενόω(케노오)의 제1부정과거능동태 직설법이다. 그리스도는 신성을 비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그리스도는 영광의 자리를 포기하셨다. 이 땅에서 그는 보통 사람들 보다 능력과 지식이 월등하셨지만 공간, 지식 및 능력의 제약을 스스로 받으신 것이다.
결국 바울은 선재(先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그리스도의 자기겸손(kenosis, 또는 자기겸비)을 말하고 있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대속 제물이 되셨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빌2:6,7의 말씀은 그 앞에 있는 3절과 4절, 특히 5절의 말씀과 연결시켜서 고찰해야 한다. 바울 사도와 디모데(빌1:1)는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일을 돌아보며 남의 일을 돌아보라』고 하며,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여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본 받아야 할 신앙 인격의 최고 수준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이다.
빌2:6,7의 말씀은 신학적인 의미는 심오하지만, 문장만을 놓고 볼 때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문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재(先在)하실 때,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과 능력과 지혜와 위엄을 지니신 분이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동등하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을까? 파워게임(power game)에서 밀렸기 때문인가? 아니다. 인류 구원의 사명을 위해서다.『오히려 자기를 비어(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는 말씀이 이를 명명백백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은 신세계역이 말하는 것처럼 무엇을 장악하고 늑탈해야 할 위치에 존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존재하셨던 것이다.
문제가 남았다. 신세계역의「장악하려고 곧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라는 구절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이어지는 구절에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했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신세계역에서 분명『그분은 비록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지만,』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는데 더 무엇을 장악하려 했다는 말인가? 외형상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을 뿐이지 “근본”은 아니었다는 말인가?
“박탈할 것으로”는 또 무슨 소리인가? “박탈”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폭력이나 위력을 써서 강제로 빼앗음”이다. 같은 성경 구절을 두고 이렇게 난삽(難澁)하게 번역을 해 놓으니 머리가 어지럽다.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를 장악할 것으로” “박탈할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말은 왕위(王位) 찬탈의 의도가 있었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장악이니 박탈이니 하는 말을 할 없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신세계역의 문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계셨지만 실상은 하나님 보다는 하등(下等)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신세계역 빌2:6의 번역문의 행간(行間)의 의미가 그런 뉘앙스를 풍긴다. 짐작하건대 「여호와의 증인」이 신도들을 상대로 빌2:6,7을 가르칠 때 예수님을 비하시키는 근거로 설명할 것이 분명하다.
조선조의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자기 보다는 아우인 충녕대군이(후에 세종대왕이 되었다) 군왕(君王)의 자질이 많다고 생각하여 짐짓 광인(狂人) 행세를 하며 파락호(破落戶) 행태를 보였다. 그의 의도대로 아우인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양녕대군은 세자의 자리에 있었는데 세자의 자리를 장악하려고, 또는 박탈하려는 의도로 광인 행세를 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지금 세자의 자리에 있는데 세자의 자리를 장악하려고, 박탁하려 했다고 주장을 한다면 이해의 부족이거나 양녕대군을 중상 모략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호와의 증인」의 책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p.41에 「이 땅에 내려오기 전에 하나님의 독생자는 자기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기가 권세나 영광에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악마가 밟은 길을 밟지 않았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지존자로 생각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시 밑에 극도로 자기 자신을 낮추사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내었다」고 써 놓았다. 바로 이것이다.「여호와의 증인」이 “장하려고”, “늑탈하려고”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속셈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헬라어 원문의 뜻을 살펴 본대로 빌2:6,7의 말씀의 의미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확히 밝혀졌다.
또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여호와의 증인」의 빌2:6,7절 번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계셨지만, 장악하려는 꿈을 꾸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악하려”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반역하는 반역자가 되고, “박탈하려”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찬탈자가 된다. 하늘나라에서 반역자라고 하면 악한 자 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이미 죄성(罪性)이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온 것은 처음 창조된 인간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이다. 예수님에게 죄성(罪性)이 있었다면 성경을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예수님에게 죄성이 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 신학인가? 히4:15에는 “그는 죄가 없으시니라”라고 기록되었다.
죄성을 지니고 있는 예수가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창조론과,『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라고 감탄하신 말씀은 상충(相衝)된다. 죄성을 지니고 있는 예수가 창조한 천지만물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여호와의 증인」은 난마(亂麻)와 같이 헝클어진 이 난제(難題)를 어떻게 풀 것인지 궁금하다. 세상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하고 이어지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그 엣세이에 “여호와의 증인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라고 써 넣어야 할 것 같다. “장악하려고” “박탈하려”했다는 성경 해석은 우리를 한 없이 슬프게 한다. 그들이 헬라어 원문에 없는 주장을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억지 주장을 한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그런 잘못된 성경 해석을 따라 배우고 그것이 진리인줄 아는「여호와의 증인」신도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여호와의 증인」이여, 잔꾀를 부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장난질 치지 말라.「여호와의 증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격하시키려는 노력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7-9)
◆한글개역:『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2:13)
◇신세계역: 「한편 우리는 행복한 희망을 기다리며, 위대하신 하느님과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립니다.」
한글개역의 딛2:13은『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함으로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구세주 되심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반하여 신세계 역은 “위대하신 하느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 나누어 영광의 주인공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되심을 부정(否定)하려는 속셈이 담겨있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이와 관련하여 A. T. 로버트슨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헬라어 원문에 관하여,
προσδεχόμενοι τὴν μακαρίαν ἐλπίδα καὶ ἐπιφάνειαν
awaiting the blessed hope and appearing
τῆς δόξης τοῦ μεγάλου θεοῦ καὶ σωτῇρο ἡμῶν
glory - great God and Saviour of the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Jesus Christ ,
(프로스데코메노이 텐 마카리안 엘피다 카이 에피파네이안 테스 독세스 투 메갈루 데우 카이 소테로스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에는 θεοῦ 와 σωτῇρος에 하나의 관사(τοῦ)만이 있는데,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벧후1:1,2도 똑같은 경우라고 덧붙이고 있다.
벧후1:1,2의『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τοῦ θεοῦ ἡμῶν καὶ σωτῇρο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 투 데우 헤몬 카이 소테로스 예수 그리스투)』에서 θεοῦ(하나님의)와에 σωτῇρος (구주의)에 하나의 관사(τοῦ)가 사용된 된 것은 1:11에 있는 τοῦ κυριοῦ ἡμῶν καὶ σωτῇρο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인 것과 똑같이 동일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용법은 2:20, 3:2,18에도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벧전11:3에서도 ὁ θεὸς καὶ πατὴρ(그 하나님과 아버지)가 두 분이 아닌 한 분을 말한다. 쉬미델도 “문법에 의하면 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그의 “문법”이란 책 p.158에서 말할 정도로 문법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요한도 그의 복음서1:1에서 같은 용법을 사용했고 딛3:13에도 같은 용례가 쓰였다. 베드로는 이미 도마가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요20:28)을 들었고 또한 베드로 자신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했었다.(마16:16)
「여호와의 증인」은 호머 던컨(Homer Duncan)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정상적인 성경학도들은 진실한 헬라어 학자들의 지식을 의존해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즉 당신이 학계에 의해 인정된 바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헬라어 학자라고 자칭하는 그런 사람들의 주장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학계에 의해 인정되고 유롭과 미국의 고등교육계에서 훈련받은 바 있는 경건한 사람들의 간증을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증(「여호와의 증인」의 줄임 말-필자 주)은 1950년 희랍어 성경을 사용해 영어로 번역한 '신세계 역 신약'(The New World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을 내 놓았다.
이 번역본과 관련한 재미있는 사실은 여증의 정기 간행물인 ‘깨어라’에서는 "희랍어에 보기 드문 능력을 소유한 위원회"가 번역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지금까지 그 위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결코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워치타워 통치기구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이었던 레이먼드 프랜즈는 자신의 저서 '양심의 위기'에서 신세계역의 번역위원은 프래드릭 프랜즈, 나단 노어, 죠지 강가스와 알버트 쉬로더라고 밝혔다. 여호와의 증인이자 역사가였다가 조직을 나온 M.제임스 펜톤(관념의 포로에서도 인용된 교수임)은 "모든 의도와 목적에 있어 신세계 역은 한 사람, 즉 프레드릭 프랜즈의 작품이다"라고 밝혔다. 프레드릭 프랜즈는 워치타워 조직의 제4대 회장이자 (통체체에서 추방되고 제명당한 레이몬드 프랜즈의 삼촌이다-필자 주)그 조직의 주된 신학자였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위원회를 구성했던 자들은 전부 여증의 통치기구인 워치타워 협회의 구성원들이었으며 이중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프레드릭 프랜즈 뿐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대학을 중퇴한 경력밖에 없는 그는 법정에서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읽을 줄 안다고 선서했다가 히브리어과 2학년 학생이면 누구나 번역할 수 있는 히브리 문구를 내밀자 번역하지 못하는 해프닝이 법정에서 벌어졌다.
결국 위원회 위원 중에서 히브리어나 희랍어를 제대로 번역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세계 역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신세계역은 희랍어 번역이 아니라 여증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성경을 뜯어 고친 개작(改作)이었다고 말한다.
로버트 H. 카운테스는 '여호와의 증인의 신약'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들의 번역에 대한 비평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조사가의 의견에는 기독교의 희랍어 경전들에 대한 신세계 역은 급진적으로 편견을 갖는 작품으로 보아야한다. 어떤 점에서는 신세계 역은 정직하지 못하며 또 어떤 점에서는 현대적이지도 학문적이지도 못하다. 신세계역의 서문과 부록에서 발표한 그 자신의 원리가 책 전체에 일관성 없이 적용되고 있다."》
이상의 두 인용문은 신세계 역이 여호와 증인들의 입맛에 맞추어 뜯어 고쳐진 성경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여증이 다른 어떤 번역판보다 신뢰를 하는 신세계 역은 히브리어와 희랍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신학에 맞추어 성경을 뜯어 고친 번역이 아닌 '반역'에 불과하다. 그러니 신세계 역을 번역한 위원회 위원을 밝히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알량한 헬라어 실력을 내세우며 성경의 진리를 날조하고 왜곡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헬라어 학자들이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해박한 헬라어 문법을 적용하여 성경을 해석해도「여호와의 증인」은 마이동풍이요 우이독경 격이다. 요1:1의 해석이 대표적이 경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이 그렇게도 못마땅한가? 이단이라는 비판이 그렇게도 싫은가?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이단의 교리를 포기하고 참 진리로 돌아오라.
신세계 역을 한장 한장 읽어 가면서 오역(誤譯)을 찾아보았는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적절한 번역, 부자연스런 번역, 엉터리 같은 번역이 발견되었다. 그 중의 일부를 여기에 제시하고 잘못된 점을 성경말씀과 헬라어 원문을 사용하여 논증했을 뿐이다.
이렇게 오류투성이 인 신세계역을 신도들에게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라고 강요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신약)에서 발견된 오역 문제는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1964년 판 개역성경과 신세계 역을 일일이 대조해 가면서 오역된 부분을 골라낸 것들이다. 사실은 여기 수록된 것의 배도 넘는 오류문제가 발견되었지만 모두 다 다룰 수 없어서 많은 부분을 생략하였다. 발견된 오류를 다 다루려면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을 것이다. 여기서 다룬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정도 해 두기로 했다. 아쉬운 것은 신세계역 구약편을 구할 수 없어서 검토해 보지 못한 점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4:2; 12:32)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 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려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는 책을 읽다가 흥미 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같은 책 p.27,28에 “흠정역(KJV)은 하나님의 이름을 『주』(Lord) 또는『하나님』이라는 말로 번역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전부 대문자(大文字)로 표시하였다. 즉, 주(LORD) 또는 하나님(GOD)로 표시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주(Lord) 또는 하나님(God)과 구별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구별하는 의도는 차치(且置)하고, 정말로 흠정역에 그렇게 구별하여 놓았는가 하고 흠정역 성경을 살펴보았다. 창1:1에 “God”로 인쇄되어 있다. 출1:7에도 “God”로 되어 있고, 시67:1에도 “God”로 되어있다.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GOD”로 인쇄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와 달리 “LORD”는 모두가 “LORD”로 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LORD”가 아니라 “Lord”로 되어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중차대(重且大)한 문제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인가? GOD 하나님, LORD 주님을 God하나님과 Lord 주님과 구별하고 싶어서 한다. 헛수고 일뿐이다. “GOD”로 하거나, “God”로 하거나, “LORD”로 하거나, “Lord”로 하거나 의미상 문제가 없는데, 중대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유나 목적을 모르겠다.
신앙의 근본이 되고 신학의 근거가 되고 교리의 근거가 되는 성경이 오역으로 만신창이가 된 신세계 역을 지상 최고의 성경으로 받들고 맹신한다면 보나마나 그 신앙은 잘못되고 그 교리 또한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여호와의 증인」은 이단이다.
수학에서 직선을 정의하는 설명으로 “직선이란 두 점을 연결하는 최단(最短)의 선이다”라고 한다. 그 선이 0.1mm만 굽어도 엄밀한 의미의 직선이 아니다. 그러한 수학 공리에 비추어 본다면 「여호와의 증인」은 지구의 반 바퀴 정도 굽었다. 자의적(恣意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신18:20-22),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고(딤전4:1),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며(딤전4:2),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며(잠3:5,6; 신4:2), 다른 복음을 전하고(고후11:4), 진리를 배반하고(딛1:14),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며(빌3:18), 부패한 자이며(딛3:11),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이며(요3:36),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며(고후2:1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며(마15:9), 주님이 이미 재림하였다고 사람들을 미혹하며(살후2:2),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며(갈5:7), 거짓 선지자이며(잠6:19; 렘23:16; 28:15; 29:8,9),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며(행20:30), 거짓 사도요 궤휼(詭譎)의 역군(役軍)이며(고후11:13), 사단의 일군이요(고후11:15), 거짓 의의 일군이다(고후11:15). 이렇게 많이 굽었기 때문에「여호와의 증인」은 이단이다.
※ 위 비판서에서 사용한 신약성경은 1988년 7월 1일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것이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은 1994년 1월 1일 발행인 사단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박 종 일로 표기된 책이다.
이 책을 입수한 경위는 확실한 기억이 없으나 나를 자주 찾아와서 토론하자던
가평군 내 현리 왕국회관의 권 ㅇ ㅇ 장로가 전해 준 것 같다. 유용하게 사용하게 되어 고맙다.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시고 좋은 의견을 주신 분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기원한다.
첫댓글 류비 님, 저는 일본의 신세계역연구회의 자료를 읽어 본 일이 없습니다. 모리야마 사또시, 탁명환 기현빈 공역의 "현대기독
교의 이단"이라는 책을 읽어 본바가 있을 뿐입니다.
제가 저의 글 1회분을 올릴 때 원본에 있는대로 각주를 달고 별도로 각주모음표를 만들어서 덧붙이겠다고 약속했었는데
1회분을 해 보니까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시글에 각주를 달기 위하여 원본을 찾아 보고 각주모음표에 번호대
로 원본의 각 페이지에 있는 각주 해설을 복사하여 붙이려 하니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모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주 번호를 찾아서 게시글에 달다 보니 시간이 많이 초과되어 글이 올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각주 붙이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을 독자 여러분들께 깊이 사과 드립니다.
jw의 양자론을 적용시 발생하는 유치한 점을 잘 밝혀내셨네요. 주로 언급되는 구절이 커리큘럼 내에서 인용되던 구절이기에 익숙한 기분으로 읽고 갑니다. 아무래도 카페는 영지주의 발담그고 온 적 있는 곳이라 지적 자극과 논리 위주로 하는 것이 잘 먹히긴 합니다. 내면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감성인데도.
딛2:13 의 경우는 희랍어에 and가 분명히 들어가 있는데요~! and 때문에 앞과 뒤가 다른 분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가 하늘에 올라가서 여호와와 예수가 한 인격체인지 아니면 두 인격체인지 또 동등된 신분인지 알아오시면 됩니다.
히말라야 정상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아무리 히말라야 설명을 한들 그것이 사실은 아니잖아요. 팩트는 직접 가서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일겁니다.
참고로 여호와의 증인 교리라면
하늘에 갈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가서 보고 느낀 점을 들으면 되고
성경을 필사했던 번역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부활된다니까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될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의 증인 교리가 틀렸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때 증명되겠지요.
전 그때까지 기다려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