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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 : 말라 1,14ㄴ-2,2ㄴ.8-10
제2독서 : 1테살 2,7ㄴ-9.13
복 음 : 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낮은 자존감과 무력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이동귀 교수는 ‘완벽주의’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남들은 이 기준에 도달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고 또 앞으로도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떨어지고 이에 따라 무력감에 힘든 시간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기가 요구하는 기준이 됩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연예인처럼 멋지고 예쁠 수 있을까요?
학벌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상위 1% 안에 들 수 있을까요?
또 자산은 어떻습니까? 100억 이상을 가져야 괜찮고 그 이하는 실패하는 삶일까요?
자신의 높은 기준 때문에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박하게 평가합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만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될 때, 그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잘못된 기준을 내세워서 판단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날카로운 각을 세웠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중첩되어 보입니다. 따라서 생각 자체를 바꿔야 했습니다.
잘못된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백성의 지도자들과 교사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내세워서 사람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모두 틀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대로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하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기들 삶의 특권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향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섬길 수가 없겠지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면서,
상대방에게서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 자체를 바꾸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보다는 주님의 관점을 찾고, 세상의 것 보다 주님의 것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며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더욱더 사랑하는 것밖에는 사랑의 치료법이 없다(H.D. 도로우).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가을은 신비의 계절입니다.
가을은 우리를 깊은 곳으로 끌고 갑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낙엽은 우리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스승이 됩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낙옆'이란 스승에게서 이렇게 배움을 시로 노래합니다.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 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 더 많이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가?
사실 우리가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스승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스승이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하고,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P.이제민)
그렇습니다.
만약 지금 내게 스승이 없다면, 내가 머리를 굽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길 ‘셋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중에 한 명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우리 중에 어찌 스승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이지 않을까요.
겉으로는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막상은 무지를 깨우쳐 주기를 바라기보다 자신의 유식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까닭은 아닐까요.
그래서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 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스승' 혹은 '참된 제자'에 대해 묻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말라키 예언자는
사제들이 길에서 벗어나 오히려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한 것에 대해 질책합니다.
반대로, 제2독서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바오로 사도의 모습과
그 가르침을 받고 받아들이는 제자로서의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스승으로 불리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고발하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3-4)
이처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에게 짐만 지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마태 23,5 참조)
곧 표리부동할 뿐 아니라 위선으로 속였습니다.
그들은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였습니다.’(마태 23,5 참조).
민수기(15,38-39)와 신명기(22,12)에 따르면, 그것을 착용하는 이들이
하느님께 속했다는 표시로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상기시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의미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거룩함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마태 23,6 참조)
곧 자만과 허영에 차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마태 23,2)
마치 스승의 자리에 앉은 양 처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마태 23,9)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한편, 제자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마태 23,3)
이는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수도에서 물을 마시면서 수도관이 대나무로 만든 관인지 금으로 만든 관인지가 아니라,
그 물이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 물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고개 숙여 배우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나는 참 제자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또 복음을 듣는 이로서만이 아니라 선포하는 이인지를, 그리고 실천하는 이인지를 들여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 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열정적인 춤으로 사랑을 받던 가수 김완선이 부른 노래 중에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수는 춤을 추며 부르지만, 가사는 철학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빨간 모자를 눌러 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모두들 검은 넥타이 아무 말도 못 하는걸
사람들은 모두 춤추며 웃지만
나는 그런 웃음 싫어
술 마시며 사랑 찾는 시간 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난 차라리 슬픔 아는 삐에로가 좋아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가사 중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교우들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본당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교우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교우들이 실망하고, 빨리 임기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고, 그리움이 넘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빠지고, 화가 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32년을 사제로 살면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신자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미사를 정성스럽게 집전하고, 고백성사를 성심껏 들어주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운 교우들과 가까이하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좋은 강론으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주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늘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며, 언제나 기뻐하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재정에 투명하고, 청렴한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신자들이 실망하고, 분노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성사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만 챙기려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준비 없는 강론으로 횡설수설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자주 화를 내고, 남 탓을 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지나친 음주로 자주 실수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처럼 순교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처럼 열정적인 사목은 못 할지라도
신자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첫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월요일에는 약수터에서 물통에 물을 담아왔습니다.
그 물을 아이들이 마시고, 어른들이 마셨습니다.
물통에 물을 가득 담으면서 힘든지 몰랐습니다.
주일에는 수녀님과 함께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바닥에 묻은 흙을 청소하면서 내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설날과 추석에는 봉고를 몰고 어르신들을 모시러 다녔습니다.
사제가 직접 봉고를 몰고 어르신들을 모시러 가니 모두들 좋아하셨습니다.
농사지은 쌀, 마늘, 깨, 오이, 고추도 가져다주셨습니다.
주일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과 함께 마당에 쌓인 쓰레기를 모두 담아 치우면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함께 마시는 막걸리는 꿀맛이었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서울 청계천으로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사 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만화영화도 사고, 종교영화도 사고, 고전영화도 사 왔습니다.
아이들이 교리실에서 영화를 보았고, 교우들은 집으로 빌려 가서 보았습니다.
주일 미사 후에 교우들이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식당’도 만들었습니다.
태권도를 시작해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 아이들이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습니다.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32년 사제생활 중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입니다.
저를 믿어 주는 교우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교우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교우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제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미소를 짓기를 소망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다가,
사람들이 모두 상석에 먼저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 하신다.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8절)
이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창피할까!
이것은 도둑질하다 붙잡혀서 훔친 물건을 도로 내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으므로 가지고 있던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그 자리를 남에게 양보한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그를 헛된 자만에 차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받아 마땅한 명예를 누리게 된다.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 앉게’ 할 것이다.”(10절).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마땅히 빛나는 덕행으로 다른 사람을 앞서야 한다.
덕행의 법칙은 뽐내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다.
겸손한 신앙인이 있고 교만한 신앙인이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를 자신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참된 겸손으로 오를 수 있는 높은 곳에 닿고자 한다면, 선행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야곱이 보았던 사다리이다.
사다리의 양쪽 장대는 우리의 영과 육이며,
가로대는 겸손과 수양으로 만들어져 있어 그것들을 밟고 하느님께로 올라간다.
겸손의 덕을 어떻게 갖출까? 그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여 인정하는 데 있다.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정할 때,
우리는 겸손하게 하느님께 자비를 청했던 세리의 기도 자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들어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참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세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삶의 균형을 이루신 예수님의 마음과 삶 앞에, 복음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서 살펴본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 들고나오는 교만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언제나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진정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
1) 교회가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한 것은 리용 및 피렌제 공의회(1274년 및 1439년),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이었다.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입니다.
사랑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행동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 방문은 많은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어떤 이는
“4박5일 내내 평상복 흰 수단, 20여 년째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와 검정 구두 차림에
낡은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며 소탈한 모습,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큰 의자를 한사코 사양하며
일반인들과 마주 서 있는 겸손한 모습,
‘파파 프란치스코’를 부르는 소리에 언제 어디서든 멈춰서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의 행보는
우리 모두가 세상을 향해 “일어나 비추어”(이사60,1 나가는 새로운 힘을 싣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크고 안전한 방탄 리무진을 타지 않으시고 작은 승용차를 타시며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당신을 내어주는 여정을 이어가셨습니다.
“교회는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하시며 노란 리본을 달으셨던 교황님,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을 닮은 모습을 기억합니다.
우리 역사관에 교황님 의자가 있습니다.
준비된 근엄한 의자와 실제로 앉으셨던 의자가 아주 대비됩니다.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약점은 자신들이 스스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한 것입니다.
남들이 그렇게 대우하기도 했지만, 본인들이 그렇게 자처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참된 어른, 우주 만물을 내신 주 하느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남들이 자기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했는데…… 교만으로 가득 찼습니다.
스스로 선생이 되려는 것이 병입니다.
윗자리, 높은 자리, 인사받기, 스승이라 불리기 등은 명예욕에 불과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청빈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꼭 수도자에게만 해당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면서 약속한 서원이 있습니다. 그에 충실해야 합니다.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이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면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감당하시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실패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며, 인사받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 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그래서 성찰합니다.
“백성이 떼 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것이요,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심든지 정성껏 심어야 하겠습니다. 실행이 해답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이 오랜만에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들 집에 얼마간 머물다 보니 당신이 찬밥 신세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생고생하며 아들 교육하고 장가들여 놓았는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런 서운함을 지니지 말고 빨리 돌아가자 마음먹곤 메모 한 장을 남겨 놓았답니다.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집안에서 누가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가 보니까
첫 번째가 손주 녀석, 두 번째가 며느리였고 세 번째가 아들,
그리고 네 번째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였고요. 다섯 번째가 집 안에 있는, 고양이였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섯 번째인 겁니다. 그래서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모를 비롯하여 어르신을 잘 모셔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데리고 살아야 할 아이들은 모시고 살고, 모시고 살아야 할 어른은 데리고 살아갑니다.
자식을 하늘같이 떠받치고 사니까 기본이 서지 않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자녀들이 모심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고생시키려면 왜 낳았냐고 항의하기도 합니다.
시대가 변하긴 변한 모양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몇 번일까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부정하지 않는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율사와 바리사이들에 대한 비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마태오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가 새로 발족한 교회에 필요한 말씀이라 생각하여
복음서 안에 편집한 것입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은 율사나 바리사이와 같은 처신을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비난은 다음과 같습니다.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무거운 짐만 만들어서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고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복장으로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 차별된다는 사실을 과시합니다.
이마나 팔에 율법 구절이 들어 있는 작은 갑을 매달아서 경건한 사람임을 나타내고,
옷에는 술을 달아서 권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과시합니다.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찾습니다.
길에 나가서는 사람들로부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스승, 아버지, 지도자 등
존경스런 호칭으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오늘 복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이 말씀을 전하면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에서는 아무도 그런 처신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말만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행세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제사의례를 준수하는 데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면서 살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기쁨이고 해방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먼저 사람을 고치고 살리고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웃을 살리고 용서하는 우리의 실천안에 그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도록 행동하라는 지침인 율법이었고,
나눔을 실천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제물 봉헌이었습니다.
그러나 율사와 제관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율법과 제물 봉헌의 의미는 왜곡되었습니다.
율법은 지켜야 하는 것, 제물은 바쳐야 하는 것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율사나 바리사이들의 복장에 대한 말씀들은
복장으로 다른 사람들과 차별을 만들어 존경의 대상이 되도록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교회의 교직자나 수도자가 남과 다른 복장으로
사람들로부터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복음이 비난하는 차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형제자매입니다.
차별을 만드는 행위는 그 사실을 자기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복장으로 차별을 만들고, 그 안에 안주하면, 복장만 남고 사람은 발전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속하는 집단을 위한 자기의 역할을 빌미로
차별을 만들고 우월성을 주장하면, 그 역할은 횡포가 되어버립니다.
인간은 구실만 있으면, 차별을 만들고 다른 사람 앞에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합니다.
남녀의 성차별, 출신 가문으로 말미암은 차별, 학벌로 인한 차별 등입니다.
그런 차별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도, 형제자매라는 사실도 외면합니다.
오늘 복음은 스승이나 아버지 혹은 지도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스승, 아버지, 지도자도 없는 사회를 만들라는 말씀은 물론 아닙니다.
스승, 아버지, 지도자는 모두 어떤 헌신적 봉사가 먼저 있어서 사용되는 호칭들입니다.
스승은 학생을 위해,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지도자는 자기가 담당한 공동체를 위해
헌시하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하나의 존칭으로 사용하면서 봉사는 퇴색되고,
우월감과 지배권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역사입니다.
신앙인의 세계에서도 그런 호칭으로, 강자로 군림하는 자를 만들어 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이웃을 도우면서 생명에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 안에 새로운 질서가 발생해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성들을 다스린다는 사람들은 엄하게 지배하고
그 높은 사람들은 백성들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서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2-43)
인류 역사를 지배한 질서는 다른 생명을 억누르면서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이 지향하시는 질서는 섬김으로써 다른 생명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의식하고 계신 하느님은, 우리의 상식이 상상하는 하느님과 다릅니다.
우리는 순종과 정성을 요구하면서 우리를 지배하는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사람들을 억압하면서 당신 스스로를 긍정하여, 차별을 만드는 하느님입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 안에 보이는 강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은 베풀어서 세상 만물이 존재하게 하셨고,
계속 베풀어서 이 세상에 생명의 역사가 지속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긍정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차별을 만들고 군림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만물이 서로 다르고, 인간 생명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은, 차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양함으로써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사계절의 다양함이 있어서 우리는 계절마다 감탄하고 감동하며 풍요로움을 만끽합니다.
사람들이 다양하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안에 감탄스런 모습을 발견합니다.
인간이 자유를 지닌 것은,
각자 자기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다양하고 풍요로운 세상과 풍요로운 삶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 생명의 다양함과 자유를 말살하지 않을 때,
인간 생명은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자기 주변 모든 것 안에 베푸신 하느님의 손길을 읽어냅니다.
신앙인은 자기도 이웃에게 베풀고 이웃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남과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여 다양함을 차별로 전락시키지 않습니다.
다양함은 하느님이 주신 풍요로움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 신앙은 어떤 이유에서도 사람을 차별하거나
다른 사람 앞에 자기의 우월성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교회가 예수님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자기반성을 뼈아프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제도와 관행은,
신분의 차별이라는 유럽 중세 봉건사회의 기본구조 위에 만들어졌습니다.
차별을 나타내는 복장과 호칭이 있습니다.
그런 복장과 호칭은 독선을 낳습니다. 반성하고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섬김을 기본으로 한 그리스도적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복음은 섬김입니다.
신앙은 섬김을 배워서 은혜롭게 실천하여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길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어리석은 나귀와 충직한 나귀
손희송 베네딕도 주교
우리나라 전래 동화 중에 어리석은 나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상을 싣고 가던 나귀가 사람들이 자꾸 자기 쪽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니까,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우쭐대다가 그만 불상을 떨어뜨려 산산조각을 냅니다.
그래서 당나귀는 마부에게 채찍으로 흠씬 얻어맞았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약성경에는 제 소임을 다한 충직한 나귀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분을 모시고 간 나귀입니다.
주위에 있는 군중이 예수님을 보고 열렬히 환영했는데
나귀는 그 환영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조용히 그분을 모시고 목적지까지 갔습니다.(마태 21,1-9)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들은 주님을 위해 봉사하도록 뽑힌 사람들로서,
예수님을 등에 태워 모시고 가는 나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등에 모신 예수님이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드러내려고 한다면,
주제를 모르고 까불다가 불상을 떨어뜨려 얻어맞은 어리석은 나귀 신세가 될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들 중에는
어리석은 나귀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말라기 예언자의 질책을 받는
이스라엘의 사제들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사제들은 제사의 직무 외에도 하느님의 법을 올바로 가르칠 책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다루면서
주제넘게 인간 차별을 함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고,
이 때문에 동족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였기 때문에 비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백성에게 봉사하기보다는 불필요한 짐을 지우고,
하느님보다는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더 찾는다고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아예 스승이나 지도자라는 소리도 듣지 말라고 엄명하시고,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물론 충직한 나귀와 같이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해
묵묵히 자신을 바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제2독서에서 언급하듯이 그는 어머니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그렇게 극진한 사랑으로 신자들을 대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신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노동을 하며 자신의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헌신적인 자세 때문에 신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스승과 지도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고, 우리 모두는 형제들입니다.
교회 내에서 크고 작은 지도 직무를 맡은 이들,
성직자이든 평신도 지도자이든 상관없이 이런 사실을 명심하면서
주님의 충직한 나귀가 될 수 있도록 기도 중에 특별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이승화 시몬 신부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선택하고 선택한 만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행동하지 않고 말만 하는 사람은, 허상을 쫓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어렵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고
내가 믿는 것이 언제나 참된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나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세,
바로 겸손의 덕을 지닐 때 참된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인내하며 식별합니다.
지금 눈앞에 다가오는 상황을 쉽게 판단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다가와도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고
기쁨과 영광의 순간에도 하느님을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모든 것에 의미가 사라지기에 그는 인내하며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습니다.
만약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인다면
예수님을 말씀하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처럼 될 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한다면서, 실상 하느님으로부터 사람들이 멀어지게 합니다.
불편하다는 말로, 혹은 배려심이 없다는 말로
그저 감성적인 위로와 평가만 하면서 사람들이 지쳐 떠나보낼 뿐입니다.
오히려 겸손한 사람이 되어 믿음을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자리를 더욱 마련하면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라키 예언자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길을 지키지 않고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우리가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잊는다면
하느님의 뜻과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에 머물고 싶어 한다면
이들은 하느님을 향한 길에서 벗어나고
우리가 말하는 규정과 법으로 많은 이들을 넘어지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닮아야 하는 삶은, 바오로 사도가 보여준 모습입니다.
자녀들을 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여, 사랑으로 수고와 고생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찾고 그분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지난 한 주간 강론 말씀들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철심 모두 제거하고 이제 돌아왔습니다.
2박3일 입원하면 된다 하여 목요일엔 복귀할 줄 알았는데...
여의치 못했습니다.
열심히 재활하여 일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철심으로 버텼는데 철심빼면 어쩌나요.
주님만 믿고 살아가야죠.
애쓰셨습니다.
저는 삐지셨는지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