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무슨.........일 있어요?”
가희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을 끌어안는 호연의 품에서 물었다.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 얼굴 가득 떠오른 근심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하루 종일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할 수만 있다면 호연의 짐을 대신 짊어져 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한 자신은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가.
한참이 지나도 호연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고
가희는 조그만 손으로 호연의 등을 토닥거렸다.
호연은 자신의 등에서 느껴지는 가희의 손길에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아찔하게 코끝을 스치는 사과 향기가 그를 자꾸만 나약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자꾸만 미안해지는 자신이 한없이 혼란스러웠다.
그냥 너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 형이 사랑했던 여자 연 가희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냥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사랑하는 여자 연 가희였다면 좋겠어..........
아니, 그냥..........
그냥 너에 대한 증오를, 원망을 모두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너를 만나기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호연 씨,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요.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해 주세요.
당신 곁에는 늘 내가 있다는 걸요.
나 비록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되겠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당신이 아무 때고 와서 쉴 수 있도록..........”
조용하지만 힘 있게 들리는 음성에 가희의 어깨를 잡아 품에서 떼어낸 호연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 점 거짓도 없는 순수하고 맑은 눈............
호연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김밥..........김밥이 먹고 싶은데..........남았어?”
목이 메어서인지 목소리가 이상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보다 더 호연을 기가 막히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뱉어낸 말의 내용이었다.
그녀의 말에 뭔가 근사한 대답을 해주고 싶었건만
기껏 한다는 소리가 김밥 타령이라니..........
“점심 아직 안 먹은 거예요? 음, 나도 아직 인데........
그럼 우리 점심도 김밥으로 먹을까요?”
비웃을 지도 모른다는 그의 우려와는 달리
가희는 너무도 해맑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공원으로 산책이나 나갈까? 도시락 가지고...........”
“정말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금방 준비할게요.”
주방으로 들어온 가희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벽에 기대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호연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을 했지만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 때문에 너무 많이 힘겨웠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호연을 보면 자꾸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때때로 그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어두운 그늘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을 응시하는 것만 같은 그의 깊은 눈빛이
그녀에게는 비수처럼 아프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람........너무나 아름다운 내 사람.........
제발 힘들어하지 말아요..........
당신이 힘들어하면 내 가슴은 너무 아파요.........
가희는 비집고 나온 눈물 한 방울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정성껏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
“어머, 집 근처에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어요.”
호수를 가로지르는 나무 다리위에서 그녀가 말했다.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햇살을 등지고
다리 위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호연은 또다시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천천히 걸어온다 해도 집에서 불과 삼십 분 거리였다.
저녁 먹고 산책 삼아 걸어 나오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건만
왜 여태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는지.........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의 순수함이 그의 미안함을 자꾸만 부채질 했다.
“우리도 저렇게 예쁘게 보일까요?”
생각에 잠겨 있던 호연은 갑자기 팔짱을 끼어오며 묻는 그녀 때문에
퍼뜩 놀라 정신을 차렸다.
“뭐가?”
“저기 저 사람들 말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가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던
호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냐? 도대체 뭐냐, 연 가희...........
왜 너는 내가 줄 수 없는 것들을 원하는 거냐..........
차라리 형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돈을 요구해.........
아니, 이제 돈은 원하는 만큼 가졌다는 거냐?
그래서 이 따위 시답잖은 것들을 내게 바라는 거냐?
그는 비틀린 표정으로 가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노려보았다.
차라리 원래의 연 가희라는 여자가 그랬듯 돈을 바랐다면
그의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 지도 모르는데..........
가희는 전혀 의외의 것들만을 보고 있었다.
다정한 연인들, 화목해 보이는 가족들.........
사람들에게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질 만큼 정겨운 모습들이겠지만
그에게는 그의 마음을 옭아매는 족쇄에 지나지 않을 장면들 일뿐이었다.
그러나 호연으로서는 절대 그녀에게 줄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 가희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그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호연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배고파.”
호연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잔디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가희는 이내 그를 따라가 돗자리를 폈다.
초록색과 노란색의 체크무늬가 보기 좋게 어우러진 돗자리 위에 앉아
김밥을 먹는 남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살얼음판위에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냉랭한 분위기였다.
또 무엇을 잘못한 건가 싶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호연의 눈치를 살피던 가희의 눈에
잔디 위를 뛰어다니며 비눗방울을 만드는 아이들이 보였다.
“음, 나도 비눗방울 놀이 하고 싶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작은 중얼거림이 가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희는 자신이 소리 내어 말 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화난 사람처럼 묵묵히 김밥 먹는 것에만 열중하던 호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고
가희는 놀란 눈으로 호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호연은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희의 눈에는 천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가지 말아요.........
나만 혼자 두고 가지 말아요..........제발..........
가희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지만
호연은 단 한 번도 뒤 돌아보지 않았고
어느덧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서글펐다.
그의 뒷모습은 두 번 보고 싶지 않을 만큼 그녀를 아프게 만들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번번이 그녀에게 뒷모습을 보였다.
가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앞에 놓인 도시락에는 아직 절반도 먹지 못한 김밥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김밥을 먹을 수 없었다.
대신 그 김밥위로 수정처럼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고개 숙이고 기도 하나?”
귓전을 파고드는 싸늘한 음성에 번쩍 고개를 치켜든 가희는
호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비록 싸늘한 말투였지만 그것조차도 가희에게는
모든 것을 잊을 만큼 반가운 것이었다.
그러나 호연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걸어오면서 보았던 가희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좋지 않았던 호연이었다.
고개 숙인 채 미동도 없이 앉아있던 모습이
안 그래도 작은 체구의 그녀를 더없이 작아보이게 했었는데.......
지금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울게 만든 것인지 깨닫지 못한 호연은
그녀가 울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미치도록 화가 났다.
“뭣 때문에 울고 있었지?”
호연의 물음에 가희는 재빨리 얼굴에 남아있는 흔적을 손으로 훔쳐냈다.
“그냥.........눈에 뭐가 들어갔어요.”
너무나 눈에 빤히 보이는 진부한 변명이었지만 호연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무릎위에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던 가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모양이 마치 스포이트의 확대 형처럼 생긴 그것은
튜브 부분을 누르면 스트로 끝부분에 나 있는 홈에서
비눗방울이 만들어지는 비눗방울 놀이기구였다.
가희는 호연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퉁명스러운 듯 하면서도 늘 가희가 원하는 것을
먼저 알고 들어주는 호연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런 호연에게 일순간이나마 서운한 마음을 품었던 자신이
한없이 바보 같고 또 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호연 씨..........”
감격한 듯한 그녀의 표정에 어색해진 호연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여기는 비눗방울 물총을 안 팔더라고...........”
“이것도 너무 좋은 걸요.
호연 씨, 이리 와서 같이 만들어 봐요.”
가희의 환한 미소에 호연도 덩달아 기분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잡아끄는 그녀의 손길에
아무런 이의도 없이 따라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어째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에
그토록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그였다.
“아............”
마치 어린 아이라도 된 듯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비눗방울을 만들던 그녀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탄성을 내뱉었다.
“왜 그래?”
“모르겠어요.
그냥 왠지 오래 전에도 이래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뭐 오래전에 비눗방울 놀이 한두 번쯤 안 해본 사람이 있겠어?”
어딘지 아련한 느낌이 드는 그녀의 말에 호연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지만
그의 뇌리에도 너무나 조그맣던 한 꼬마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헤헤, 그렇겠죠? 이제 호연 씨가 만들어 봐요.”
가희에게서 비눗방울 도구를 건네받은 호연은 마치 열다섯 살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끼며 비눗방울을 만들었고
가희는 그가 만든 비눗방울을 따라 뛰어 다녔다.
즐거웠다.
늘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만큼
그렇게 즐겁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호연의 시선은 가희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오직 가희만을 따라다녔다.
잔디와 잘 어울리는 연두 빛 원피스를 입은 가희의 모습은 마치 요정 같았다.
아마도 선우가 호연의 이런 생각을 알았다면 팔불출이라고 놀렸으리라.
그럼에도 호연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가희의 순수한 모습은 차가운 그의 마음조차 녹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의 인상이 구겨졌다.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모습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한걸음에 그 자리까지 달려간 호연은
사진을 찍고 있는 남자의 카메라를 빼앗으며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두 분 모습이 너무 예뻐 보여서 그만..........”
카메라를 빼앗긴 남자는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고
사람 좋아 보이는 남자의 대답에
호연은 가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대해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소를 가르쳐 주시면 나중에 사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남자는 명함을 건네며 호연에게 말했다.
그의 명함에는 사진작가 민 한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바라보던 호연은 어느새 다가온 가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가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왜?”
“호연 씨, 이 분께 우리 사진하나 찍어달라고 부탁하면 안 돼요?”
“뭐?”
“그냥, 호연 씨랑 나랑 함께 찍은 사진이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녀의 말에 뭐라고 쏘아붙이려던 호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가희의 눈은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여자들은 왜 이런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깟 사진 한 장으로 가희의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몇 번이라도 찍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가 두 분 사진 멋지게 한 장 찍어 드릴게요.”
이어 들려온 한서의 말에 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요구하는 대로 잔디밭 위에 앉아 포즈를 잡았다.
그가 먼저 앉고 그의 다리 사이에 그녀가 앉아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그녀의 몸을 감싸 안고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처음엔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이 찍힌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호연이었지만
발갛게 상기된 가희를 보며 그 역시도 처음 여자 친구를 사귀는 사춘기 소년처럼
설레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호연과 가희의 모습에 사진을 찍는 민서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만난 것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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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수리해서 속도가 빨라진것 까지는 좋은뎅....
수리 하시는 분이 한글 2002 대신 2005를 깔아주셨네요....
분명 2002 보다는 좋은게 사실이겠지만......
여태 계속 2002만 쓰다가 2005를 쓰려니까
영 적응이 앙대네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적응을 하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뎅...
이걸 다시 2002로 깔아야 하는지...고민되네요....우어엉.....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 장편 ]
비눗방울 1부-[21화]
은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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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02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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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호연이가 무슨 오해가 있는듯 해요 'ㅅ' !
아주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지요...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그러는지...
빨리 가희가 친구을 만났으면 해요....ㅜㅜㅜ
이제 조만간 1부가 마무리 지어지는데요.. 1부에선 친구를 만날 수 없을 듯 하네요...... 아마도 이건...설화의 심술이 아닐런지...^^*
너무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