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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제1독서 : 로마 11,29-36
복 음 : 루카 14,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부터 제 바로 위의 형님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얼굴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했습니다.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다른 모습도 닮아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형님처럼 공부도 잘하고, 악기도 잘 다루고,
또 각종 능력도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외모 외에는 닮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형님과 저는 네 살 차이가 납니다.
어렸을 때의 네 살 차이는 능력과 재주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 차이로 어렸을 때 열등감이 생겼고, 소심해졌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뒤에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일이 아닌 각자 다른 역할을 주신 것입니다.
서로 다르게 태어났으므로 우리 각자는 고유한 천직과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찾지 못할 때, 그리고 남처럼만 되려고 할 때
자기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함은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은 공동체 일부가 되어
전체를 형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르게 만드신 하느님의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나를 다르게 만드셨을까를 묵상해야 했습니다.
묵상 안에서 ‘나’ 같이 사는 자기 존재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이 세상을 ‘나’답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보답을 바라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에 보답해 주십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참사랑을 베푸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고 하시지요.
거저 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합니다.
주는 사랑이 아닌 받는 사랑에만 더 큰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받을 것만을 생각합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왜 나는 남들처럼 능력과 재주가 부족하고,
남들처럼 가진 것이 없냐고 불평합니다.
그 ‘남’이 ‘나’가 될 수 없음에도 ‘남’이 되려고만 생각하면서
행복의 주인공이 아닌 불행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우리 각자는 다양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양함은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데 써야 했습니다.
‘나’답게 살아갈 때,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얼마나 기쁨속에 살 수 있는 곳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약함과 실패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분 아드님의 모상이 될
실질적 역량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주었다.”(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이다.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그리고 지난 2017년에는 연중 제33주일을
“제1차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로 발표하시고,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는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영화 대사 중에 ‘무엇이 중헌디!’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에서 휴가 중에 우선순위로 정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의 묘소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연도를 바쳤습니다.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만나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모두 모여 함께 미사를 하면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가족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절두산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신부님들은 시간을 내주었고,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82년에 만났으니 40년이 넘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추억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미국에서 함께 지내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신부님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구에서, 울산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았습니다.
팬데믹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일 새벽 기도하고,
복음묵상을 나누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새벽에 주님을 만나는 것이 소중한 시간이고, 기쁨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일 수 있습니다.
가치와 이념이 확고하지 않으면 쉽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공산 전체주의’와의 대결과 싸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서 ‘정전(停戰)’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인에 대한 ‘압수수색과 수사’일 수 있습니다.
부패한 정치인, 부정한 정치인, 불법한 정치인은
우리 정치의 격과 수준을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민생’입니다.
민생을 외면한 이념, 민생을 외면한 대결과 투쟁,
민생을 외면한 압수수색과 수사는
‘빛 좋은 개살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군사력과 월등한 경제력으로
팔레스타인들이 사는 가자지구에 분리 장벽을 쌓았습니다.
삶을 위해 가장 필요한 ‘물과 전기’를 통제하였습니다. 정당한 절차와 조사를 거치지
않고 팔레스타인들을 체포하고, 구금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와 질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리 장벽과 물과 전기의 통제
그리고 체포와 구금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80년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더 중요한 것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없는 통제와 억압
그리고 분리장벽은 ‘빛 좋은 개살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무엇이 중헌디!’에 대한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갑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쫓아내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천년을 나라 없는 서러움 속에 살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스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과 에사오가 화해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콩과 콩깍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듯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같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무엇이 중요한 것’ 인지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선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사랑과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바로 당신이 공생활 중에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하셨듯이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하신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팔을 벌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에 대한 보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모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정에서도 부모가 자녀들을 볼 때,
모든 자녀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모두 한 형제자매인 우리 중
어떤 자녀도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원치 않으신다.
진정한 형제애로 서로 나누며 살아가라 하신다.
나눔을 통하여 그 사람은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되며,
하느님께서는 더욱 풍성히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이 있는가?
거의 없다. 이 지상의 삶에서 쌓아두고 감추어 둔 것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시에 인연을 마감하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라, 그분이 그것을 나에게 맡겨주신 뜻에 따라서
올바로 관리하고 주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잘 사용하게 되면,
그래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눈 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모든 것이 나를 반기며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어떤 커다란 일이나 사건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매 순간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사건이나,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에서조차
우리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을, 나의 시간을 그들과 나눔으로써 더 큰 성숙을, 기쁨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사랑과 봉사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유유상종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베푼 것은 모래 위에 새기고 받은 것은 돌판에 새기라.’했지만,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14,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 급식을 하는 분이셨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150명분의 음식이
모자람이 없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였습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을 생각했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어주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보상 아닌 보상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에는 간단하면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가르침이 담겨있다.
물론 실천하기에 쉽지 않은 가르침이다.
오늘날 진수성찬의 연회를 준비해 놓고 길거리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 등
면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초대할 주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거의 모든 경우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나눌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초대받아 가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끼리는 서로 즐거울지 모르나,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칭찬받을 일이 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가시적인 면과 비가시적인 면을 동시에 가진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그 속내가 더 중요하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정중한 “술과 식사의 초대”는
그 뒤에 감추어져 있는 “허기진 이해득실”을 동반한다.
이 경우 초대는 향응이 된다. 투자한 만큼의 대가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대인관계는 이러한 이해득실의 계산에 기초한다.
사람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아무런 계산도 없이,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도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데 있을 것이다. 사랑이 바로 그렇다.
사랑은 계산할 줄 모르고 그저 베풀 줄만 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가진 것이 없어 갚을 수도 없는
그런 사람들을 당신의 식탁에 초대하신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의 정신이 우리들의 사랑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그만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하늘나라의 보상이 약속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 보상은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실천한 義人에게 주어지는 보상이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이승화 시몬 신부
죽음을 마주하는 사람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에 집중합니다.
나에게 여유로운 부분을,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나눠줄 수 있는 여유도 생깁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선이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자선을 베푼다면,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돌보게 됩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가를 바라거나 이익을 바라는 마음을 절제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눠주어야지,
대가를 바라거나 이익을 바라면 거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되는 자선은,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게 됩니다.
다음 단계는 타인에 대한 시선입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라며 내 생각으로 지레짐작한다면,
이는 상대에 대한 동정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눠줄 수 있고,
상대가 바라는 것을 바라는 만큼 나눠줄 수 있을 때,
자선은 빛을 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깊기 때문에
하느님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것에 대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기에
아쉬움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음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세를 연습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부유한 이웃보다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에게 기꺼이 나눠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답해 주실 것임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마음을 닮아,
자선을 연습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두 눈을 하느님께 향하며
오늘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